송도의 달밤 (2)
영산(靈山) 봉두(峰頭)에 던져진 황금쟁반
노란얼굴 하얀웃음 말없이 굽어보니
황금빛 물든바다 조각조각 춤 춘다.
포근한 달빛에 안기고 싶은 밤이다. 오월의 청량한 기온, 새싹들의 싱그러운 향기, 창문 박에서 넘보는 달이 읽던 책 덮어두고 어서 나오라고 손짓을 한다.
바닷가로 트인 길 따라 걸으면 가로등 밝은 빛에 보름달은 간 곳 없다. 달을 잃어버린 채 가로등의 안내로 송도 해변에 이르렀다. 텅 비었어야 할 오월의 사장은 뜻밖의 야시장이다. 탁자와 의자를 가지런히 정렬해 놓고 탁자마다 맥주와 안주에 홍등을 밝히고 호객을 한다. 도로변에는 포장마차가 줄을 이었다. 바다 저 멀리에는 국내외의 수많은 선박들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바다는 외항선들이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존재를 과시하니 바다와 육지가 하나로 이어졌다.
송도 해변의 사장은 동,서로 나누어져있다. 동편 사장의 한 쪽 구석에는 여름 한 철 파도를 가르던 보트가 모래에 배를 깔고 엎드려 명령을 기다리는 복병처럼 말이 없다. 그 옆에는 화덕 같은 장작불을 피운 낚시꾼들이 주낙을 던져놓고 세월을 낚으며, 이글거리는 불에 오징어를 구워 소주에 취한다. 바다와 육지가 대낮 같이 밝으니 하늘 높이 뜬 달은 할 일이 없다. 서편 사장은 동편과는 달리 시끌벅적하다. 술 에 취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주정꾼들, 웃옷을 벗어들고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며 밤에도 시커먼 안경을 쓰고 설치는 왈패들, 먹고 살기 위한 행상들 그들에게는 거절도, 사절도 막무가내다. 이런 분위기에 자신 없는 사람들은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생생한 삶의 현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위태위태하다. 이성보다 감성이,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완력이 판을 치는 곳이다. 이런 풍광 또한 송도의 달밤에만 볼 수 있는 하나의 풍속도이기도 하다.
금방 주먹이 날라 올 듯, 아슬아슬한 해변을 벗어나 혈청소로 가는 둔덕길에 오르면 이곳은 음악회의 객석과도 같이 조용하다. 부드러운 달빛에 포근히 안길 수도 있고, 창파에 실려 온 티 없는 바람에 몸과 마음을 씻을 수도 있다. 씻은 그 마음조차도 다 버릴 수만 있다면, 천국인들 이보다 더 상쾌할까?
벤치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본다. 보름달이 노송의 가지 끝에 매달렸고, 출렁이는 바다와 끝없는 하늘이 여백으로 남았다. 그 여백에 <五月半夜松島月景>이라고 화제를 써 넣으면 이는 훌륭한 한 폭의 풍경화가 아닐 수 없다. 소쿠리 테같이 둥그런 내만을 둘러싼 상가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불빛들이 바다로 뛰어 든다. 물 속에 비친 불기둥들은 긴 색실 타래를 드리운 듯 현란한 빛으로 물결에 춤추며 바다 건너 저편으로 무지개다리를 놓는다. 그 무지개를 타고 가면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만 같다.
맑고 밝은 달빛 아래 한 가족 세 식구가 지나간다. 낚싯대는 아내가 메고 술에 취한 아비는 어린 자식의 손에 이끌려 콧노래 부르며 비틀거린다. 남 보기가 창피하다면서도 행복에 겨운 아내의 불평, 아비를 조심하라고 타이르는 어린 자식의 훈계도 한 폭의 그림이다. 송림 그늘에 오붓이 앉아 속삭이는 연인들, 어깨를 서로 감싸 안은 정겨운 사랑도 또한 한 폭의 소품이다. 달빛을 등에 업고 하얗게 비치는 파도가 한일자로 밀려온다. 겹겹이 밀려오던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하얀 물거품으로 변하는 포말도 아름답다.
둔덕 길 낭떠러지에 걸터앉은「언덕 위의 집」은 집 전체의 윤곽선을 핑크 빛 네온사인으로 밝히고 길손을 유혹한다. 달과 바다, 도심의 전경이 멀리 보이는 곳, 야경을 즐기려는 산책객에게는 좋은 쉼터가 되고, 아베크족에게는 훌륭한 분위기의 사교장이 되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달 밝은 밤이면 삶의 옹이를 만난 사람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 주점의 창가에 앉아 청실홍실’이나‘무릅과 무릅사이’를 한잔 시켜놓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면 달이 뿌려 놓은 금가루에 바다는 황금빛으로 출렁이고 봉래산 봉두(峰頭)에 올라앉은 황금 쟁반이 손에 다을 듯하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도심의 찬란한 불빛들도 찬란하기만 하다.
달 따라 산허리를 굽어 돌면, 무성한 가로수를 스쳐온 밤바람이 시정에 젖게 한다. 이 시원한 바람 두고 어딜 가는가? 김민부의「기다리는 마음」의 시비가 지나는 이의 발목을 잡는다.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않고
바위를 깎아, 만년 비바람도 감내할 시비가 달빛에 저렸다. 시비 뒤편에 기대면, 아카시아 나무에 걸린 달, 가시만 없다면 올라가 만져보고 싶은 달. 오월의 무성한 가로수 잎새들도 달빛에 물들어 황금빛이다. 하늘 높이 외롭게 뜬 달이 이태백의 시구를 불러 준다.「今人不見古時月, 今月曾經照古人」영원과 찰나, 사람은 나고 죽음을 거듭하지만, 억겁의 세월을 지켜온 저 달은 예와 지금, 충신과 역적, 선과 악을 샅샅이 살펴온 달. 억만 년의 명상 속에 말없는 달을 쳐다보며 오늘의 공간 위에 내일의 시간을 비춰 본다.
무극의 공간에 뜬 달이 세상을 내려다본다. 유한을 안고 사는 인간이 백 년을 못살면서 천 년 계획을 세우고, 허욕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옥을 만들며 살아가는 자태를 지켜본다. 진시황의 권력도, 오나시스의 재화도 다 순간을 스치고 지나 간 것을 부귀도 영화도 찰나 이니 거짓 없이 참되게 살라고 타이르는 듯 조용히 내려다본다.
다가오는 한점의 구름을 피하려는 듯 빨리 달리던 달은 구름이 사라지자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늘 중심에 뜬 달은 유, 무식을 차별 않고, 빈, 부는 물론, 귀, 천에도 상관없이 세상을 고르게 비친다. 달빛은 풀잎에는 이슬을 머금게 하고, 길 잃은 나그네에겐 이정표를 비춰주지만 통일로 가는 길에는 안내판이 없으니 비춰줄 수가 없구나.....
자정을 지나고 달은 점점 더 밝아진다.
1997.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