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일 월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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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마르코12,1-12)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말씀의 초대
토빗은 아시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살았다. 유배지에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축제를 지키려면 큰 용기가 필요한데도 그는 이를 충실히 실천한다. 더 나아가 살해된 동족의 시신을 수습하는 용기마저 보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전하신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이 맡겨 놓은 포도밭을 차지할 욕심에 눈이 멀어 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끝내는 주인의 아들마저도 살해해 버린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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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환경 운동가로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엘 고어가 지구 온난화의 대처 방안을 모색하고자 펴낸 책의 제목이기도 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요즈음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왜 이 말이 유행될까요? 진실이라는 것이 거짓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게 삶의 이치가 아닐는지요.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불편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포도밭 소출의 일부를 받아 오라고 종을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주인의 포도밭을 차지할 속셈이 있었던 소작인들에게 그 종들이 편하게 다가올 리 없었습니다. 눈엣가시와 같은 불편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종들을 매질하거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불편한 존재들을 아예 없애 버린 것입니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야말로 소작인들에게 가장 불편한 존재입니다. 이제 아들만 없으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마저 죽여 버립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우리의 삶에서 제외시키지 맙시다. 그 일들을 치워 버리려고 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들과 그 일들을 통하여 우리를 바르게 이끌고자 하십니다. 불편한 사람들과 불편한 일들은 ‘그릇된 나’를 고쳐 나가게 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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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이사 5,7).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서 보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말씀은,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고,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낸 종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의 예언자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소작인들에게 매 맞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불의와 부당한 억압을 단죄한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카, 예레미야 등과 같은 예언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와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아니 전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마음입니다. 마치 자식에게 속는 줄 알면서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는 부모 마음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매 맞고 박해받고 죽임을 당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종을 보내십니다. 이런 바보 같은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그 절정에 이릅니다. 한 개인의 역사 안에서도 하느님 사랑은 이렇게 다가옵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포도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얼마나 많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사는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소리를 무시하면서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지요. 바보 같은 하느님 사랑은 이렇게 우리 삶 안에서 상처 입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먼 옛날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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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은 겁이 없습니다. 소작료를 내기는커녕 받으러 온 주인 쪽 사람들을 해칩니다. 나중에는 주인의 아들이 왔건만 그마저 살해하고는 시신을 아무렇게나 버립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인은 인내합니다. 소작인들의 무분별을 참아 줍니다. 주님의 모습입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을 구별한 것은 이스라엘이었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구별도 교회의 법 개념이지, 하느님께는 그러한 구분이 소용없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사랑받는 자녀일 뿐입니다. 사랑에 관한 한 하느님께서는 일면성을 지니셨습니다. 베풀기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중적입니다. 두 얼굴로 사랑을 대합니다. 좋으면 달려가고 싫으면 돌아섭니다. 그러기에 사랑과 미움, 배신과 뉘우침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한결같이 믿고 사랑하려는 자세야말로 하느님을 닮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은혜를 저버리는 소작인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선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주실 것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죽기까지 순명
-김석영 수사-
세상에 과연 이렇게도 되먹지 않고 사악한 소작인들이 있을까? 그리고 또 이렇게 순하고 어리숙하고 착하기만 한 지주가 있을까! 어찌 보면 주님은 좀 지나치게 과장된 비유법을 쓰시는 것 같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불충실을 한없이 참기만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 자신보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실제로 희생시킨다. 이로써 아버지도 아들과 함께 희생되신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두 분 사이의 사랑이 한 몸(삼위일체)이시니까. 그렇게 아버지께 순명하여 불의한 자들의 욕심으로 아무런 죄도 없이 희생되는 아들은,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그들을 용서해 주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초대교회 때나, 중세 시대의 이교도에 의해서, 또 포악한 군주나 통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권력이나 금력에 의해 사주된 무지몽매한 군중에 의해 박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고 갇히고 고문을 당하거나 갖가지 방법으로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예나 지금이나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거름이 되는 것이다.
어제 아침 이른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겨울 내내 춥다고, 땅이 미끄럽다고 자전거를 타지 못했거든요. 아직 쌀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타고 있는 자전거 도로에 단 한 대의 다른 자전거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 혼자서만 잘 꾸며진 자전거 도로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아마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또 추워서인지 자전거 타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날 늦게까지 술자리가 있었기에 아침 운동 하러 나가는데 얼마나 갈등을 했는지 모릅니다. 어둡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또 전날의 숙취로 머리도 아프고……. 하지만 힘들어하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억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 자전거 도로를 다 쓰는 등 너무나도 좋은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지요.
만약 어둡다고, 춥다고, 머리 아프다고 운동하는 것을 포기했다면 그렇게 좋은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요? 분명 운동을 나서기 전에는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큰 고통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어섰을 때, 오히려 잘 했다는 생각을 그래서 더 큰 행복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러한 체험은 누구나 할 것 같습니다. 내게 닥치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님께 불평과 불만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눈에만 고통과 시련이라는 모양으로 보였을 뿐이지, 결국 주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끄셨음을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주인이 종을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오도록 시켰지만, 소작인들은 소출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낸 종을 매질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주인은 ‘무슨 오해가 있어서 그랬겠지.’라는 생각을 하고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땅에 우리들을 보내어 열심히 살라고 하신 주님이지만, 우리들은 항상 주님께 불평불만만 던질 뿐입니다. 잘된 일은 내가 잘했기 때문이고, 안 된 일은 주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앞선 못된 소작인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또한 주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죄 많음 역시 앞선 소작인들과 너무나 많이 닮았습니다.
철저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큰 행복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들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큰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았던 성인 성녀들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상처받아도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장영희).
우리는 포도밭 소작인
-신대원 신부-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라는 말씀은 시편 118편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시편 작가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온갖 은혜를 노래합니다. 우리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주님을 저버려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되돌리시어 당신 백성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그 유명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들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고사는 주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가 더 적절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포도밭에서일하는 소작인들입니다. 소작인은 밭을 일구어 곡식을 가꾸고 거둘 때, 주인과 맺은 계약의 조건대로 주인에게 조건에 맞는 도조를 내야 하지만, 도조 낼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밭을 통째로 차지하려든다면, 그 주인은 소작인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밭을 빼앗고 소작인을 내쫓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소작인이 뉘우치면서 주인의 마음에 들도록 일을 해낸다면, 주인은 더 많은 땅을 덤으로 내어 줄지 모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라는 시편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 이은명 수사-
함께 울었습니다. 눈이 빨개지도록 …, 창피함을 뒤로하고. 어느 날 장애인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오전에 복지관에 오셨다가 집에 가셨는데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자녀는 남매뿐인데 둘 다 저희 복지관에 다니고 있으며 언어소통이 매우 어렵습니다.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웃음 띤 얼굴로 누구한테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가장의 죽음에 남매의 어머니는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에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장애인 자녀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걱정하는 자매님 앞에서 저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자하신 사랑에 저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지적장애인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라고도 표현합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하느냐고요 ? 저희 복지관에 오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님들입니다. 비록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하느님 모상대로 지음을 받았을 때는 이에 대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우리한테 사랑의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도 하느님은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한테 퍼주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랑, 숨은 성인들
-김찬선신부-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아시리아인들의 땅 니네베로 유배 온 친척들과 내 민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토빗은 자선을 많이 행한 사람입니다. 제가 수도자이지만 이런 토빗이 부럽습니다. 이웃들이 바보스럽다고 아무리 비웃어도 자선을 행하는 토빗이 부럽습니다.
이는 마치 요즘 “바보 추기경”하며 일생을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했던 김 수환 추기경님의 삶과 업적을 기리지만 막상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부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 수환 추기경님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토빗은 어떻게 그리 사랑과 선이 많았는지?!
오늘의 토빗서를 보면 자기를 위한 잔치가 벌어졌을 때 토빗은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습니다. 잔치 때에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는 것도 대단한데 잔치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때에 시신을 수습하는 그런 선행을 실천하다니 더더욱 놀랍습니다.
저는 참 그러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도 힘들게 하루 일정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하며 일행과 같이 술 한 잔을 하려고 하는데 병자성사를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밤늦게 가기는 갔지만 마음 안에 가기 싫은 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살아가다보면 참으로 많은데 저는 이런 것을 불평없이 잘 하는 사람이 크게 한 번 자선을 행한 사람보다도 더 정말 자신을 버리고 내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수도원에 몇 형제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훌륭합니다. 한 형제는 어떤 부탁이 들어와도 다 들어줍니다. 옆에서 그런 부탁 자꾸 들어주면 버릇 나빠지니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는 그런 것 상관하지 않고 부탁을 들어줍니다. 실상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돕지 않을 구실을 찾고, 도와주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하는지 모릅니다. 부탁을 들어줬을 때 그가 버릇이 나빠지건 그렇지 않건 그것은 그와 하느님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니고 나는 그저 선행을 행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또 한 형제는 누가 언제 만나자고 해도 기꺼이 응합니다. 잠자는데 술 취해서 만나자고 해도 그는 투덜거리지 않고 만나줍니다. 그에게는 수도원 시간표도 거의 고려사항이 아니고 자기의 컨디션이나 기분도 고려사항이 아닙니다. 오직 상대방이 지금 필요로 하니 그렇게 합니다.
사실 이런 형제들이 커다란 선행으로 이름 날리는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랑, 그래서 아무런 칭찬이나 칭송이 없는 선행, 이것이 정말 가난한 사람의 진실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북한 사업이다 무슨 사업이다 하며 참으로 떠벌리며 선행을 하는데, 그리고 우리 인간은 조그만 선행을 하고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속물근성이 어느 정도는 다 있기 마련인데, 우리 그 형제들은 정말 그런 티를 내지 않고 그런 가난한 사랑을 합니다. 그것도 한 순간, 또는 한 번이 아니고 일생을 그렇게 사랑을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숨은 성인인 우리 형제들!
손에 손잡고 함께 걸어간다면 -이봉하수사-
혹시 양은 아니더라도 소나 염소를 키워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서 학교를 갔다 오면 소와 염소를 풀밭으로 몰고 다니며 논 적이 많았습니다. 즐거움보다는 귀찮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때로는 아무 데나 묶어놓고 친구들과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집으로 몰고 오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귀찮은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소나 염소뿐 아니라 여타 동물들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잘 따릅니다. 그러나 동물들을 다루는 데 문제가 있다면 사람들이 동물들을 억지로 따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을 다루는 사람은 동물과 같이 호흡을 해야 합니다. 가끔은 이야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고삐가 없어도 동물들이 주인이 어딜 가든 잘 따라다닙니다. 또한 주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주인이 위급할 경우 주인을 구하고자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을 사랑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둔다면 동물들이 오히려 주인을 들이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꼭 성직자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가정, 사회,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하는 목자들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어린 행동 하나가 큰 힘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의 좋은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공동선을 위하는 데 기꺼이 동참하게 할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박경수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과격파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과정이 마치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들의 모습을 재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유재산에 대해 ‘인간과 짐승을 구분 짓는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가르칩니다(교황 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 4항). 노동자는 가정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받아야 하고, 더 받기를 원하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노동의 근본 동기는 사유재산입니다. 만일 노동자가 임금을 절약하여 저축하고 투자하였다면 이 투자된 자본은 결국 형태가 변형된 똑같은 임금이며, 재산은 그런 식으로 형성됩니다. 19세기 초까지 고전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산업화 과정에서 생산과 상업을 독점, 장악한 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에 의해 많은 근로자들이 부당하게도 노예처럼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모든 이를 위한 공동재산을 만들어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에 사회악이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이들을 현혹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생겨났습니다. 과격한 공산주의로 타락한 이들은 무자비한 계급투쟁과 사유재산의 완전 철폐라는 두 가지를 목표로 정당한 소유주들에게서 폭력으로 재산을 빼앗아 또 다른 권력 아래 노동자들을 귀속시켰고, 결국은 임금에 관한 개인의 의사표현과 재산증식을 위해 노력할 권리를 박탈하였습니다. “아무도 진정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진정한 사회주의자일 수는 없습니다”(교황 비오 11세 회칙 ‘사십 주년’ 49항). 내일은 현충일입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위협에서 나라와 국민을 지키다 목숨을 바친 모든 이의 영혼이 천상에 머물게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저 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양승국신부-
<여러분 자신에게 감사하십시오>
한 ‘소박한’ 강좌를 마무리 짓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다시금 그 어려운 ‘사랑’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분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통덩어리’ 하나씩 지고 가게 될 ‘착해빠진’ 분들이었기에 제가 격려차 그랬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다들 어여쁜 한 송이 꽃들이십니다. 한분 한 분 얼굴이 제겐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지난 세월이 어찌되었던 간에 이제 가슴을 활짝 펴십시오. 자신감으로 충만하십시오. 여러분들은 가능성으로만 똘똘 뭉쳐진 ‘희망덩어리’들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입니다. 별 들 중에서도 크게 빛나는 왕별들이십니다. 부디 여러분 자신에게 감사하십시오. 오랜만에 여러분 자신에게 깊은 고마움의 인사를 하십시오.
제가 여러분들 보기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분께 여러분 한분 한분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입니다.”
제 덕담 응수라도 하듯이 어떤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이제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좀 더 잘 보살피며 살겠습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도록 힘쓰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스쳐지나가는 정겨운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나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사랑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데,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데, 과연 누가 나를 챙겨줄 것인가? 너무도 오랜 세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왔었구나. 나를 너무도 차가운 시선으로 대해왔구나, 지나치게 학대했었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다시금 꿈꿉니다. 과장되게 겉꾸미지 않고, 잔뜩 포장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거추장스럽게 걸치고 있던 가식의 겉옷을 이제 그만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거듭 보내시는 사랑의 신호를 끝까지 거부하는 완고한 유다인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계속 온몸으로 보내시는 사랑의 표현을 끝끝내 거절하고 냉랭하게 돌아서는 유다인들의 모습에 예수님의 마음은 그야말로 찢어질 듯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 가운데 큰 실수 하나는 하느님을 너무 무서운 존재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분은 그들에게 하느님으로서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끝끝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하느님을 거부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유다인들을 바라보며 그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해봅니다.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탓도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위치, 처지,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탓이 클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며,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다보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계 설정에도 문제가 발생했겠지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과대포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야 하느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오랜 세월, 갖은 역경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걸어와 준 나 자신에게 감사하는 하루이길 바랍니다. 때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고, 때로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픈 삶이라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그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는 너무나 존귀합니다. 소중합니다.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포도밭>(마르 12,1-12)
-유광수 신부-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에서 얼마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
이 비유는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 "(이사 5, 1- 2)
이것은 사랑하는 임을 사모하며 부른 사랑의 노래이다. 임이 포도밭에 쏟은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지극하였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임이 손수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 나무를 심었고,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 마련해 놓은 최상의 포도밭이었다. 얼마든지 많은 수확을 낼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 놓은 포도밭이다. 임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하고 수확 철이 되어 가 보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들 포도가 달려 있으니 임의 실망이 오죽하였겠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즉 포도밭 주인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맺을 수 있도록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잘 가꾼 다음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주인은 그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포도 철이 될 때까지 잘 관리하도록 맡긴 것이지 넘겨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주인이 믿고 맡긴 그 포도밭을 정성껏 관리하여 많은 결실을 맺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이 정성스레 가꾼 포도밭이다. 또한 나의 가정이 주님의 포도밭이고 나의 직장이, 나의 본당이, 나의 사도직 장이 주님께서 나에게 관리하도록 맡긴 주님의 포도밭이다. 나는 주님이 맡기신 주님의 포도밭이 많은 결실을 맺도록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가? 나의 몸을 함부로 또는 무리하여 병이 들게 하거나 또는 나의 가정과 직장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나에게 맡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는가? 자연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자연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의 자연은 온갖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의 관리 소홀로 자연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주인이 정성껏 만들어 놓은 포도밭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떠나 갈 때에는 가장 신임하는 소작인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쌍방간에 일정한 계약을 맺고 떠났을 것이다. "포도밭의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주인은 포도 철이 되자 당연히 종을 보내어 도조를 받아오라고 보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소작인들이 그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소작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는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종합해보면 "첫 번째는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고, 두 번째는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며 모욕을 주었다. 세 번째는 이번에는 아예 죽어 버렸다. 마지막으로는 주인의 아들마저 잡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내어던졌다." 소작인들이 저지른 행동은 점 점 더 포악해져갔고 마침내는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행동들이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반복해서 저질러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들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오늘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직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악한 행동들이다. 순박하기만 했던 소작인들 (농부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끔찍한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저지를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악한 행동들이 이렇게까지 발전될 수 있었는가? 이 소작인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7절에서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기들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들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소유욕이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하고 동물로 타락하게 만들었다.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타락한 모습이다. 인간이 어떤 욕심에 너무 집착할 때 눈이 멀어진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이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욕심에 집착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인간 관계를 망쳐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다른 것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님, 귀머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서운 짐승으로 돌변하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된다.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는 소유욕이야 말로 인간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 소유욕 때문에 일어난다. 부모와 자식간에, 친척간에, 친구간에 이웃 간에 등 모든 관계가 악화되는 원인은 "내가 차지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였듯이 내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소유욕이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을 굳어버리게 만든다.
이번에는 주인의 입장을 묵상하자. 한번 당한 것도 분하고 괴심한 일인데 주인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길래 한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주인은 그렇게 당하하면서도 왜 그토록 보내시기만 하는가? 우리는 오늘 주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이런 주인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벌써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악한 행동과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인의 한 없는 이해와 용서와 인내의 덕분이리라.
주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는 말이다. 주인의 행동을 잘 나타내는 동사는 "보내다"이다.
"보내다"는 동사가 5번 사용되었다. 보낼 때마다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주인의 행동은 계속해서 보냈다. 나중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에는 "알아 주겠지"하는 소작인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심이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끝까지 신뢰했고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인내하며 또 많은 희생을 치루어 가면서까지 기다려 주었다.
"알아 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보내고 또 보내는 주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에서나 비슷하게 찾아 볼 수 있고 느껴 볼 수 있는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한테서도 나 올 수 없는 오직 부모만이 자식에게 보낼 수 있는 마음이다. 속는 것을 알면서도 또 돈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 수 있을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알아 주겠지" 하는 주인의 마음은 그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설명 할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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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