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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정수남
1.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에서 욕쟁이의 딸로 통했다.
그만큼 어머니는 인근에서 욕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날도 귀순에게 놀림을 받고 나는 도망을 치듯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일러바쳐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끔 치도곤을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민숭민숭한 얼굴이었다. 편을 들어주기커녕 오히려 나를 핀잔했다.
“그렇게 약해 빠져서 너 앞으로 이 험한 시상을 어떻게 살텨?”
내심 기대를 가지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혀끝을 차고 나오면 징징거려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늘 강해야 한다고 했다. 강해야 살아남는다고, 가르쳤다. 나는 어머니가 식칼로 쓰윽, 베어 내미는 삶은 돼지 간을 한입 물고는 맥없이 뒤돌아 나왔다. 그리고는 출입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비릿하고 팍팍한, 마치 신문지를 씹는 것 같은 그것을 목구멍으로 억지로 넘겼다. 그것을 먹어야 몸이 튼튼해지고, 그래야 강해지고, 나를 놀리던 귀순이를 이길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을 굳게 믿었던 까닭이었다.
사실 어머니가 욕설을 자주 퍼붓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은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치듯 이따금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항시 해대는 ‘썩을 놈’이라거나 ‘육시랄 놈’, 또는 ‘염병하고 자빠졌네’와 같은 소리는 기분이 좋을 때도 입버릇처럼 해대는, 일테면 동요를 부를 때 후렴 같은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정작 혀를 내두르는 것은 그게 아니라 한번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누구도 걷잡을 수 없는, 속사포처럼 퍼부어대는 그 순간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유달리 각별해서 어쩌다가 누가 건드려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말을 더듬는 둘째 오빠가 놀림을 받았다 하면 사생결단을 할 듯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드는 통에 모두 줄행랑을 놓기 바빴다. 그때는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았고, ‘육시랄 놈’ 정도로 그치지도 않았다. ‘똥물에 튀길 눔’이라거나 ‘간을 꺼내 질겅질겅 씹어 먹어도 션찮을 놈’, ‘달구지에 깔려 배창시가 터져 죽을 눔’ 등, 된욕이 정말 따발총처럼 쏟아져 나오기 일쑤였다.
“어느 눔이든 내 새끼를 건드리기만 해봐. 내가 이 식칼로 그 눔 배창세를 팍, 쑤셔버릴텡게.”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가리켜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라고 쑤군거렸다. 그 말엔 나도 동감이었다. 사실 그와 같이 막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이라면 대개 생김새가 우락부락하고, 몸매도 절구통처럼 우람하고, 키도 다른 사람보다 목 하나쯤은 더 커야 제격인 법인데, 어머니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몸통은 좀 통통한 편이었지만, 키도 자그마했으며, 얼굴 생김새도 사람들이 국밥집을 하기에는 아깝다고 할 정도로 곱상했다. 물론 성격은 좀 괄괄해서 누가 봐도 과격하다고 느낄 만큼 다혈질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노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나긋나긋할 때가 더 많았다. 자식들을 보듬고 “오, 내새끼” 할 때는 천생 여자였다. 하긴, 또 그렇게 생겼다고 다 식은 밥에 물 말아 먹듯 욕을 잘 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아무튼 눈에 불을 켜고 이를 빠드득, 갈 때 어머니 곁으로 다가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질겁했다. 오직 그 곁은 자식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나는 그때마다 바위처럼 완강한 어머니가 믿음직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머니가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본 아프리카의 암사자 같다고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터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미친개보다 더 사납다고 넌더리를 쳐댔지만, 우리 아홉 남매에게는 어머니만큼 믿음직한 피난처가 없었다.
어머니의 품은 늘 양털처럼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2.
귀순이는 내 짝꿍이었다. 왜 그 아이가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내리 3년 동안 내 짝꿍이 되어야 했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말처럼 어쩌면 그게 운명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암튼 나는 귀순이와 여러 면에서 부딪쳤다. 그 아이는 생김새부터 하는 짓거리까지, 모든 게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센 성미도 싫었으며, 언제 빗었는지 모를 정도로 늘 까치집을 짓고 다니는 머리모양도 싫었다. 더구나 쉰 목소리로 오리새끼마냥 꽥꽥거리며 허구한 날 고무줄놀이보다 사내아이들이나 노는 자치기를 하자고 조르는 데에는 딱 질색이었다. 내가 싫다고 도리질을 하면 그 아이는 단박에 표정이 바뀌었다. 욕쟁이 딸이라고 놀려대는 것은 물론이며, 그 꽥꽥거리는 거센 목소리로 내가 재영이를 좋아한다고 떠들어대기 일쑤였다.
“경희가 재영이를 좋아한단다아!”
알레리 꼴레리…….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대든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으므로 쭈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거리거나 빨리 도망쳐 어머니한테 일러바치는 게 고작이었다. 주변에 언니나 오빠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때에는 모두 어디에 숨었는지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사실 귀순이의 말은 맞았다. 내가 재영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읍내로 전근 오는 바람에 졸지에 전학을 오게 된 그 아이는 보기에도 우리 같은 시골뜨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가 검은 오리새끼라고 한다면 그 아이는 품격 높은 백조였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쌍꺼풀진 눈을 가진 그 아이는 어느 별나라에서 떨어진 왕자처럼 피부도 하앴으며, 입고 다니는 입성도 색감부터가 고급스러웠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공부까지 잘했다. 그런 아이를 싫어할 계집아이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실,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영실이도, 길자도, 명자도, 시치미는 떼고 있지만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그 아이가 지나갈 적마다 눈을 새치름하게 뜨고 흘끗거리는 본새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귀순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드러내놓고 공표한 적은 없지만 하는 짓거리가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전교생이 모두 재영이의 팬인 셈이었다. 그런데도 검측스런 귀순이는 유독 나만을 지목하여 심심하면 놀려대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다음날이 되면 우리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어울렸다. 어머니와 그녀의 엄마가 늘 그런 것처럼.
본래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은 ‘청풍순대국’이라는 간판이 출입문 이마에 버젓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드나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청풍집’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머니의 이름을 붙여 ‘영자네’라고 불렀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환기가 되지 않아 늘 큼큼하고 비릿한 돼지냄새가 비위를 건드렸으나 그것을 탓하는 손님은 없었다. 식탁은 모두 10개였다. 홀에 4인용 6개, 그리고 방안에 양반다리를 하고 먹을 수 있는 앉은뱅이 식탁 4개. 그게 전부였으나 어머니는 늘 바빴다. 식사 때만 바쁜 게 아니었다. 안주 한 접시를 놓고 막걸리를 마시는 손님으로부터 양념이나 깍두기를 더 달라고 주문하는 손님까지, 시중은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귀순이 엄마가 주방에서 쉴 새 없이 만들어내고 있지만 성이 차지 않은 어머니는 잠시라도 음식이 늦는다 싶으면 지체 없이 뛰어 들어가 불호령을 내렸다. 또 손님이 상을 물리면 곧바로 걸레를 들고 치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외에도 어머니가 하는 일은 많았다. 돼지 부속물도 신선한 것으로 구매해야 했고, 식사대도 받아야 했으며, 단골들의 외상값도 독촉해야 했고, 또 간혹 술 취한 뜨내기손님이 뭣도 모르고 객소리를 지껄이거나 허튼짓을 하면 한바탕 혼찌검도 내줘야 했다. 어머니가 한번 목청을 돋우면 왁자하던 식당은 금방 무덤 속처럼 조용해지곤 하였다. 그처럼, 어머니는 1인 5역을 몸뻬 바람을 일으키며 매일 반복했다.
배가 남산만큼 불러도 일손을 놓지 않는 어머니를 향해 사람들이 지청구를 던지면, 어머니는 한마디로 쏘아붙였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애 밴 여편네는 밥도 먹지 않는다냐?”
어느 날은 제대하고 집구석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던 큰오빠가 도와준답시고 나섰다가 치도곤을 당한 적도 있었다.
장날이 되면 식당은 더욱 바빴다. 식사 때가 되면 보부꾼들과 장터에 나온 손님들이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와 귀순 엄마의 음식 솜씨가 특별히 맛있어서 딱히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자리가 워낙 명당이라는 것이었다. 하긴, 5일마다 열리는 장터 입구 삼거리에, 그것도 버스정류장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그냥 간과할 수는 없을 터이었다. 더구나 주변엔 이렇다 할만한 식당조차 없었다. 그런 탓에 어머니의 손은 언제나 마를 날이 없었다. 사철 기름으로 번들거렸고, 몸에서는 돼지냄새와 파와 마늘, 새우젓 같은 양념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만약 그 냄새가 싫다고 해서 저녁 늦게 귀가한 어머니가 보듬는 것을 외면한다거나 찡그렸다가는 그것은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기 십상이었다. 어머니는 단박에 알아차리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 자석들아, 이것으루다가 시방 우리가 먹고 사는디, 고맙다고 인사는 못할망정 얼굴을 찡그려?”
식당이 길거리에 나앉아 있다는 것은 좋은 점도 있었지만 나쁜 점도 많았다.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해야 하는 여름철에는 버스가 지날 적마다 신작로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으며, 겨울철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춥다고 승낙도 없이 기신기신 들어와 연탄난로를 차지하는 통에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어떤 때는 그런 연유로 손님과 승객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경우 큰소리가 나고, 멱살잡이를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잘잘못을 가리려 들지 않았다. 또 설혹 거기까지 진척이 되었다고 해도 눈썹 하나 끔쩍하지 않았다. “썩을 눔들, 뱃가죽이 빵빵해지니께 기운이 뻗쳐, 시방?” 어머니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떨어지면 싸움은 그것으로 이미 끝장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청풍순대국’ 집에 들어설 때마다 카운터 뒷벽을 쳐다보는 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온통 거무칙칙한 빛깔로 찌들어 있는 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하나 길게 걸려있었다. 초록빛 들판을 배경으로 양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그 앞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그러나 정작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 상단에 내리닫이로 쓰여 있는 시 구절이었다. 푸쉬킨이 지었다는 그 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 그림이 언제부터 거기에 걸려있었는지, 그리고 그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큰오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그 그림에 어머니의 꿈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도 꿈이 있다니…….
셋째 언니의 생일날이었다. 그동안 언니도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미역국이 오른 저녁 밥상을 물리자마자 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니, 그 그림말인데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게 거기 걸려있었던 거예요?”
“그건 알아 뭣에 쓰게?”
어머니는 볼멘소리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얼굴에서 나는 어머니가 쉽게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곧 빗나가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미에 굵게 패인 주름살을 풀고 한 차례 눈을 스르르 감았다가 뜨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썩을 것들……. 꿈은 니들만 꾸는 줄 알어?”
내친김에 어머니는 시 구절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삶이 우릴 속일지라두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것은, 그러니께 우쨌든 참으라는 것 아니것냐? 하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꿈을 이룰 수 있것냐, 우리가.”
어머니는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이 박꽃 같았다. 그 얼굴에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왜 어머니가 사철 몸뻬를 입고 소처럼 날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울 줄 모르는 여자였다.
3.
우리 남매는 모두 합쳐서 아홉이었다. 아버지는 다르지만 모두 어머니가 배 아파 하면서 낳은, 한 배 자식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어머니의 엉덩이 탓이라고 쑤군거렸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기는 했지만, 남들보다 한 뼘 정도 위로 착 올라붙고, 팡팡한 게 원인이라는 것으로, 대개 그런 엉덩이를 가진 여자는 사내 콧김만 스쳐도 애기가 잘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 아홉 남매는 한집에 살고 있지만, 성은 각각이었다. 항렬도, 돌림자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우리집을 가리켜 고아원 같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그것이 또 귀순이에게는 더 없는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사실이었다. 나도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들 적이 있었다. 특히 식사를 하기 위해 다섯 개의 방에서 한꺼번에 와글와글 쏟아져 나올 때는 그러하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럴 때의 어머니는 꼭 따뜻한 봄날 병아리떼를 몰고 다니는 암탉 같았다.
어머니가 처음 결혼한 것은 일제 말이었다고 했다. 홀아비였는데,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 시절엔 ‘사내새끼들을 구경하기 힘든 세상’으로 그나마도 행운으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은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가난을 면하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 시절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찬마루에서 옹기그릇을 꺼내 국밥을 말다가도 귀순 엄마에게 뱉어내는 이야기는 대개 첫 번째 남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농사꾼으로 굶지 않을 만큼 농지도 제법 지니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결국은 ‘청풍순대국’ 집의 종잣돈이 된 것을 보면…….
“나이 먹은 사내의 정이 지극하다는 말은 하낙두 틀린 게 아니여.”
어머니는 귀순 엄마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무엇이 생각났는지 혼자 웃기도 하였다.
“첫 정이라서 그런 것 아니여?”
귀순 엄마가 시퉁스럽게 말참견을 했으나 어머니의 입에서는 다른 때처럼 큰 소리가 터져 나오지도 않았으며, 설거지하는 동안 이야기를 중단하지도 않았다.
치열했던 남과 북의 전쟁이 막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다. 어느 날 비행기에서 떨어트린 유탄에 맞아 그가 갑자기 횡사했으나 어머니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그보다는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하나와 계집아이 셋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게 더 급박했다. 가산을 정리하여 장터로 나와 물컹거리는 돼지 내장에 속을 채우고, 기름 국물에 손을 담그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연유였다. 밥장수를 하면 어쨌든 아이들의 배는 굶기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어머니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내들은 어머니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목청을 돋우어 된욕을 퍼붓고, 때로는 멱살잡이도 불사하고, 몸에서는 돼지냄새가 늘 가시지 않는데도 부나비처럼 몰려들었다. 휴전이 되어갈 무렵 두 번째 인연을 맺은 사내는 군인이었다. 당시는 군인이 판치던 시대였으므로 어머니는 계급이 상사였지만, 아이들의 앞날쯤은 너끈히 봐줄 것으로 판단하고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오산이었다. 그와의 사이에서 하나 낳은 계집아이가 막 돌이 지날 즈음, 어머니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순댓국집으로 찾아온 여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본처라고 밝힌 그 여자는 병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 손가락으로 상대해도 될 것처럼 여려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녀와 싸우지 않았으며, 모지락스럽게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다. 도리어 사내를 보내겠다고 약속하고는 그 여자를 곱다시 돌려세웠다. 싸가지 없는 눔! 지 눔이 날 어찌 헤피 보구………. 정작 어머니의 분노가 터진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사내를 대면하였을 때였다. 어머니는 긴 사설을 늘어놓지 않았다. 불벼락 같은 어머니의 악다구니에 사내는 겨우 겉옷만 걸친 채 도망치듯 황망히 떠나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그의 등 뒤에 대고 계속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 사건은 장터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파장이 컸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뒤질려구 환장을 한 눔이지, 지 눔이 날 어찌 보구………. 물론 그가 남긴 만만치 않은 재물은 모두 어머니의 차지가 되었다. 식당의 뒤편에 있는 안채는 그때 그 사내가 장만한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 그 사내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았으나 그때에도 어머니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씩이나 되게 데었으면 다시는 사내가 곁에 오지 못하도록 단속할 만도 한데, 아니었다. 세 번째 사내는 지방을 뛰는 버스기사였는데, 그는 제법 호탕하고 솔직한 데가 있는 사내였다. 술을 좋아하는 게 흠이긴 하였지만, 어머니는 또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 사내와 정말 백년해로를 원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술 좋아하는 사내눔치고 악한 눔은 없느니……. 어디에서 주워들은 개똥철학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소원은 결국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위로 계집아이와 사내아이, 그리고 나를 줄줄이 연년생으로 낳고 애면글면 살던 어느 날, 사내가 교통사고로 졸지에 객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산길을 달리던 버스가 내리막길에서 낭떠러지로 추락해 몇몇 승객과 함께 즉사하고 말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어머니는 잠시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나 곧 정신을 수습한 어머니는 냉정을 되찾았다. 망할 눔의 인간이 또 술을 처먹고 운전대를 잡았나보구먼. 그러나 사고의 원인은 술과 관계가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브레이크 고장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정비를 소홀히 한 회사가 책임질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합동장례식장이 마련되어 있는 버스 회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다른 사망자 가족을 선동하여 보상금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버티었다. 결국 장례는 요구한 보상금을 받고나서야 치를 수 있었다. 합동장례식장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귀순 엄마를 비롯하여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방귀깨나 뀐다는 관계부처의 높은 사람들도 줄줄이 찾아와 조문했다. 그러나 문상객은 다를지라도 어머니가 그 사람들에게 내뱉은 말은 똑같았다.
“그 양반 명줄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을 워쪄…….”
그때부터 장터 사람들의 입에서는 어머니를 두고 ‘사내 잡아먹는 여시’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였다. 육례를 갖추고 초례를 치른 첫 번째 사내로부터 시작하여 오다가다 만나 뜨게부부로 살을 섞고 살던 두 사내까지 몽땅 황천으로 갔으니……. 그러나 아니었다. 그것이 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네 번째 사내가 증명해주었다.
네 번째로 만난 사내는 장터를 옮겨 다니며 건어물을 파는 뜨내기 장사꾼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팔랑개비처럼 뻔질나게 들락거린다 싶더니 결국은 어머니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내는 장사꾼답지 않게 키도 훤칠하고 생김새도 최무룡이 뜸떠먹을 만큼 우뚝했다. 거기다가 붙임성도 좋아서 늘 주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무람없이 나대는 그런 점이 오히려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장 저 장 옮겨 다니며 늘 동가식서가숙 하는 그를 못마땅해 했다. 주변 사람들이 잘 생겼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때에도 어머니는 내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어찌 살다보니깐 여기까정 오긴 혔지만, 저 우라질 눔이 언제 내뺄 줄 알아! 사내꼽재기들이란 모두 믿을 것이 못되어!”
진득하지 못하다고, 늘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계집 아이 하나를 낳고, 이제는 좀 집안이 조용할까 싶을 무렵, 드디어 사단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장롱 깊숙이 숨겨놓은 돈을 훔쳐가지고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간 것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깜빡 속일 수 있을까. 사건의 전말이 모두 드러나자 이를 아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내 아버지를 비롯한 앞의 사내들에 대한 부분은 대개 귀순 엄마나 이웃 사람들에게서 귀동냥해 들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날의 사단만큼은 나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도둑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던 안방과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곁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던 귀순 엄마까지.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어머니는 그때에도 남의 일을 보듯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가겠다는 눔을 뭣으루 붙잡을 거여. 냅둬.”
어머니는 그날도 국밥을 말았다. 오히려 툴툴거리며 볼멘소리를 해대는 사람은 귀순 엄마였다.
나에게 아버지는 늘 수염이 텁수룩하고, 석유 냄새와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어머니에게 매양 ‘육시랄 눔’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껄껄 웃던 사람이었다. 술이 취한 채 밤늦게 들어와서 잠자던 나를 번쩍 안아들고는 그 수염으로 볼을 마구 비벼대는 통에 나는 울음을 터트리곤 하였다. 그 시간에 들어와서도 어머니가 썰어주는 오소리감투 한 접시를 안주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자던 아버지였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두고 제 아무리 장부같아 보여도 여자는 여자라고 쑤군거렸다.
4.
어느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였다.
제법 머리가 큰 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니는, 사랑이란 걸 해봤어요?”
나는 숨을 멈췄다.
식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뜬금없는 질문에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벼락이 떨어질 것 같은 무섬증이 엄습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썩을 년!”
식탁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용기를 얻은 듯 큰언니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그리움이 뭔지는 아세요?”
“미친 년! 이 년아, 그런 건 말루다 하는 게 아니여. 홈차 맴속으루다가 하는 것이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날, 아무리 목석연해도 어머니의 마음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문득 어머니가 신작로 끝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5.
우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어머니의 잔소리였다.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머니도 역시 공부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어머니처럼 제법 길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다른 어머니와 다른 점은 성적과 같은 결과에 꼭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성적이 우선이었다면 공부를 잘하는 큰오빠는 잔소리를 한 번도 듣지 않았어야 했으며, 공부를 잘 못하는 말더듬이 둘째 오빠와 셋째 언니는 머리가 아프도록 노상 잔소리를 들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하는 잔소리는 거의 같았다.
“니들두 나처럼 뜨거운 돼지 뼛국물에 손 담그구 살텨? 못 배우믄 그렇게 되는겨. 누군 이 짓거리 좋아서 하간. 그러니께 시킬 때 정신 채리구 공부혀.”
어머니는 자신이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나마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우치고, 계산법을 익혔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다.
어머니는 일단 잔소리를 시작하면 옛날 옛적 이야기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쏟아놓았다. 둘째 오빠가 하품을 빼어 물며 엄살을 떨어대도 소용이 없었다. 자기 할 이야기는 다 하고나서야 끝냈다. 특히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고 누군가 마루에 벌렁 누워 내동 게으름을 피우다가 걸리는 날이면, 그날은 여지없이 잔소리를 듣게 마련이었다.
나는 귀순이보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항상 중간에서 허우적거렸다. 재영이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늘 그 타령이었다. 그것은 아마 큰오빠의 말대로, 애당초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나쁜 유전인자를 지니고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열심히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게 약이 올라 어느 날은 성적표를 받아들고 하루종일 징징거리며, 버스기사였다는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도 피난처는 결국 어머니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안고 위로해주었다.
“걱정 말어. 사람마다 다 일등을 한다면 이 시상에서 꼴등은 누가 할 것인감?”
잔소리를 듣게 되는 또 하나의 원인은 자매간의 싸움이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은 자매간에는 큰소리가 별로 나지 않았지만, 연년생이거나 터울이 2년을 넘지 않는 경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딪쳤다. 부딪치면 또 서로 지지 않기 위해 악다구니를 썼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정말 싸워도 너무 많이 싸웠다. 어느 때는 그냥 눈만 마주쳐도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암튼 그로 인해서 집안은 늘 조용한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형제간의 싸움을 가장 싫어했다. 보았다 하면 가차가 없었다. 잘잘못은 따지지 않았다. 당사자들에게 불벼락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었으며, 그 바람에 나머지 남매들도 모두 끌려나와 덤터기를 쓰기 십상이었다.
“뭣이여? 니덜이 또 싸웠어? 가뜩이나 각성바지라고 남들이 흉보는 판국인디, 싸웠어? 내가 뭐라 그랬냐? 니네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믄 낭중에 시상 사람들이 헤피 본다고 했냐, 안했냐?”
어머니의 일갈이 떨어지면 시끄럽던 집안은 일순간, 숙연해졌다. 우리들은 모두 머리를 숙였다. 점직했다. 그 말이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수도 없이 들어왔던 잔소리였던 까닭이었다.
위로부터 명국, 미자, 영순, 정애, 희자, 화경, 진수, 경희, 혜숙 등, 우리 아홉 명의 남매들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간간한 밑반찬처럼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것은 또한 어머니의 큰 자랑거리였다.
6.
어머니는 쉬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도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쉰이 넘으면서 걸음발이 느려졌으며, 걸레질을 하다가도 이따금 힘에 부친 듯 길게 한숨을 토해내곤 하였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지나면서 우리들은 해바라기처럼 키가 자랐고, 키가 커진 만큼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달을 떨었다. 우리들은 이미 병아리가 아니었다. 혹은 벼슬이 선명한 중닭으로, 또 혹은 제법 몸태가 나는 영계로 자라 있었다.
그리고 다시 또 몇 년이 지나자 집안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불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큰언니를 필두로, 큰오빠, 둘째 언니가 집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가 정지된 틀 속에 갇힌 채 몸뻬를 입고 설쳐대는 동안 바깥으로 나돌던 오빠와 언니들은 자신들의 짝을 만났고,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둥지를 틀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평생 자식들을 보듬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벌써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남아있는 자식들을 위해 여전히 국밥을 말고는 있었으나 마음의 준비가 끝난 듯 떠나고자 하는 자식들을 붙잡지는 않았다. 짝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면 일상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던져보고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질문이라고 해봤자, ‘집은 어디여? 살만혀? 지금 하는 일은? 앞으루는 워찌케 살텨?’ 같은, 일상적인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날을 잡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바리바리 보따리를 싸주었다. 그동안 꽁꽁 숨겨두었던 뭉칫돈도 아까워하지 않고 풀었다. 큰오빠 서울 집을 장만하는 데는 그동안 국밥 말아 장만했던 임야를 팔아 보탰으며, 작은언니가 시집갈 때에는 장터에 세놓았던 점방을 처분했다. 귀순 엄마가 그렇게 하다가는 ‘청풍순대국’ 집 기둥뿌리가 다 빠져버리겠다고 지청구를 늘어놓았지만, 어머니는 대거리도 하지 않았다.
“이 여펜네야, 돈은 쓸 때 쓰려구 모으는 거여.”
어머니가 금쪽 같은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은 비단 자식들만이 아니었다. 전도사 사모가 된 귀순이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섬으로 들어갈 때에도 적잖은 뭉칫돈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럴 적마다 어머니가 그림에 그려져 있는 푸른 초장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뭐니뭐니해두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건 돈이여. 주머니에 돈이 빵빵하게 들어 있어봐. 마음부터 든든해지는 게 겁대가리가 없어진다니께.”
어머니는 그러나 자식들에게 그냥 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강하게, 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돈을 아끼라는, 당부의 말을 반드시 잊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어머니를 구두쇠라고 손가락질하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린고비가 아니었다. 가물었을 때 논물을 쓰기 위하여 일 년 내내 저수지에 물을 가두는 것처럼 어머니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잘 가. 편지 자주하고.”
“그래. 우리 또 만나자.”
“너는 반드시 잘 살 거야.”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귀순이가 떠나면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들이 곁을 떠날 적마다 어머니가 당부하는 말은 또 있었다. 애비는 다를지라도 한핏줄이라는 것을 평생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임의로 찾아가지는 않을 터이니 반드시 의무적으로 자신을 보러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얼핏 보면 매우 상식적인 것으로, 관례에 지나지 않는 당부처럼 들렸으나 아니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엄격한 약조를 의미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식들과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마지막 안간힘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채 떠나는 기분에 들떠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큰언니가 그랬고, 큰오빠가 그랬으며, 둘째 언니도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넷째 언니, 다섯째 언니, 셋째 언니는 물론, 결국에는 나를 비롯하여 막내까지 이어졌다.
결혼하는 순서는 나이대로 되지 않았다. 때로는 동생이 언니를 앞서기도 하였다. 아홉 남매 가운데 마지막에 혼인을 한 사람은 둘째 오빠였다. 말더듬이 오빠가 결혼하는 날, 어머니는 정말 덩실덩실 춤이라고 출 것처럼 기뻐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중매쟁이를 통해 몇 번 혼사가 오고갔으나 번번이 깨졌던 것이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내세울 것 없는 학벌에 더듬는 어투가 책잡힌 게 아닌가 싶었다. 더구나 생김새도 내세울 게 없는 입장 아닌가. 그런데도 어머니는 무슨 속셈인지 느긋했다. 귀순 엄마가 안달복달할 때마다 한마디로 잠재웠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짚신두 짝이 있는 벱인디 장개 못 갈까봐 걱정인감.”
어머니의 말은 맞았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중매쟁이가 여섯 번째 가지고 온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어머니는 그 중매쟁이와 귓속말을 주고받은 뒤, 오빠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죽자 살자 매달려봐. 이번에두 안 되믄 홈차 살겄다구 생각혀야 써. 타고난 팔짜루 돌리구, 알것남?”
어머니의 어조는 강했다. 다른 때와 달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정말 어머니의 기를 받은 것일까. 저녁 늦게 돌아온 오빠는 희색이 만면했다. 마침 입덧 때문에 잠시 집에 내려와 있던 나는 그 얼굴에서 뭔가 심상찮은 조짐을 읽을 수 있었다.
“어, 엄니, 내, 내일, 또, 또 만나기로 해, 했어요.”
“그려?”
“예, 예에. 헤어질 때, 그, 그 여자하고, 약, 약속을 해, 했어요.”
오빠의 말투는 몹시 빨랐다. 급하면 더 빨라지는 게 오빠의 버릇이기는 하지만, 침까지 튕겨가며 내뱉는 그 말의 속도는 따라잡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여자가 니를 알아보기는 하디?”
“예, 예에. 아, 아주, 자세히 아, 알고 있던데요. 청, 청풍 순대국집 아, 아들이라는 것까, 까지……….”
오빠는 신바람이 난다는 투였다. 벌써 성사가 다 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썩을 눔……….”
어머니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막 탐색이 시작되었을 뿐인데 왜 소리까지 내며 웃었을까. 그것은 분명 평소 어머니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행동이었다.
나의 그 의구심은 혼인을 치른 뒤에야 판명되었다. 어머니는 중매쟁이에게 주었던 언질을 생각하고 웃었던 것이 틀림없었으며, 그 언질이란 다름이 아니라 성사가 되면 ‘청풍순대국’ 집을 둘째 오빠에게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어머니의 공표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썩을 눔이 뭘 해 쳐묵고 살것냐. 구만리 같은 인생인디……. 그래서 궁리 끝에 이번 참에 내가 식당을 넘겨주기루 했으니께, 그리들 알구 토들 달 생각 말어.”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굳어있었다. 그 결정에 반기를 드는 자식은 한 명도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정했다면 반대한다고 해서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긴, 자식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가면서 어머니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 것이 더 많아지면서 어머니의 기운도 눈에 띄게 떨어져갔다. 누구를 가리지 않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육시랄 눔’, ‘썩을 눔’ 등, 된욕을 퍼붓는 것만큼은 여전했으나 목청에는 전과 같은 위엄이 실려 있지 않았으며, 하루 온종일 몸뻬를 입고 단거리 선수마냥 종종걸음을 치던 몸놀림도 왠지 자꾸만 굼떠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어머니의 결정은 자신이 그만 쉴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으로, 오히려 박수를 쳐줘야 할 일이었다.
둘째 올케는 평범한 생김새였다. 얼굴도, 키도, 몸매도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몰라보고 그냥 지나쳐버릴, 그런 여자 같았다. 하지만 무슨 켯속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는 데는 그런 여자가 제격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으며, 새 식구로 들어온 그녀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익혀온 순대 만드는 비법을 전수하기 바빴다.
“멈첨 돼지 소장에 붙어있는 기름기를 제거한 뒤 뒤집어 밀가루를 듬뿍 넣고는 폭폭 주물러서 안에 있는 이물질을 깨끗허게 씻어내야 헌다. 그걸 자칫 게을리 허면 돼지냄새가 스며들어 손님들이 당장 발걸음을 끊게 되는 벱이여. 손님들의 식성을 맞춰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여러 번 훑어내는 것을 잊지 말그라. 그 전에 준비해야 헐 것은 찹쌀을 물에 미리 몇 시간 불려놓구, 당면을 삶아서 잘게 썰어놓아야 허는 것이다. 또 숙주는 데쳐서 물기를 꽉 짜 채쳐놓구, 당근과 파두 곱게 채쳐놓아야 혀. 그 다음엔 그 재료들에 약간의 소금과 돼지피를 뿌리고는 고루고루 섞이도록 잘 버무려야 헌다. 순대의 손맛은 거기에서 난다는 것을 잊지 말그라. 그리고는 창자의 한쪽에 깔대기를 대고 준비한 재료를 빈틈없이 채우구 끝을 실로 묶어주어라. 그것이 모두 완성되었으믄 그 다음은 순대를 찜통에 넣구 사십 분 정도 푹 쪄줘야 써……….”
올케는 제법 눈썰미가 있는 여자였다. 어머니가 가르쳐주는 것을 곧잘 따라 했다. 물론 그 속내는 짐작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걸 통해서 올케가 순댓국집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는 것만큼은 우리 모두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전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뽀얀 빛깔이 나오도록 우려내야 하는 돼지 뼈 국물은 된장과 생강, 마늘 등을 얼마만큼 넣어야 냄새를 잡을 수 있고, 또 돼지 부속물은 어떻게 삶고 썰어야 쫄깃한 제 맛을 잃지 않으며, 깍두기와 양념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등, 정말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혼신을 다해 가르쳤다. 올케는 생각보다 잔손질이 많이 가는데 놀라는 눈치였으나 그 모든 과정을 잘 견뎌내었다. 그녀가 혼자 힘으로 처음 순대를 만든 날, 어머니는 첫솜씨치고는 제법이라고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녔다.
“이잔 알것쟈? 그렇게 해야 음식두 큰소리 쳐가며 파는 거여! 지들이 뭐 사람 보러 오간디, 맛보러 오지. 썩을 것들!”
어머니는 청풍순댓국집이 성공한 것을 자신의 음식 솜씨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자리가 성공의 비결이었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모르는 듯했다.
어머니는 올케에게 24시간 끓고 있는 가마솥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어머니는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했다.
7.
올케가 주인이 되면서 ‘청풍순대국’ 집은 하루가 다르게 그 모습이 바뀌어갔다. 우선 손님들에게 ‘청풍’이라는 옥호보다 ‘영자네’로 불리던 것이 사라졌으며, 주방에 있다가도 부르면 쪼르르, 달려나오던 귀 밝은 귀순 엄마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가 물러나는 것과 함께 그녀도 물러나, 장터 끝자락에 가게를 얻어 선지해장국집을 개업한 것이다.
그 외로도 변한 것은 ‘청풍순대국’ 집의 외양을 들 수 있었다. 이제 ‘청풍순대국’ 집은 함석지붕에 판지기로 닫고 열던 구닥다리 식당이 아니었다. 건물도 번듯한 2층 시멘구조물로 우뚝 섰으며, 출입문 이마에 크게 걸려있던 생철 간판도 이젠 밤이면 불이 환하게 켜지는 아크릴로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부도 현대식으로 변하였다. 기름때와 먼지에 절어 물걸레로 아무리 닦아도 구중중한 빛깔이 벗겨지지 않던 나무식탁도 산뜻한 원목으로 바뀌었고, 주방도 스텐리스 기구 일색으로 바뀌었다. 주방에서 조리를 맡은 종업원도 세 명으로 늘어났고, 유니폼을 입고 홀에서 서빙을 하는 종업원도 아래 위층 합쳐서 네 명이나 되었다. 그 속에서 올케가 하는 일이란 카운터에 앉아 주문을 체크하고, 계산을 하고, 이따금 주방에 들어가 조리를 간섭하고, 종업원들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둘째 오빠는 식자재 구입을 맡고 있었다. 이제 ‘청풍순대국’ 집은 옛날 어머니가 하던 작은 국밥집이 아니었다. 어느 새 그 규모가 대형식당으로 변모해 있었다.
식당을 올케에게 맡기고 안채로 물러앉은 어머니는 그러나 가만히 눌러앉아 있지 않았다. 심심하면 ‘청풍’에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가, 또 어느 때는 장터 끝자락까지 걸어가 귀순 엄마와 긴 시간 수다를 떨다 오곤 하였다. 그러다가 간혹 아는 손님이 인사라도 할라치면 옛 습관대로 또 아무데서나 걸걸하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늙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실감하곤 하였다. 시간은 어머니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강하게, 강하게 살아왔으나 어머니도 세월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가운데 나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어머니가 지금까지 태어난 곳에서 사방 백 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외국까지는 몰라도 국내 관광 정도는 걱정 없이 다닐 처지가 되었으나 어머니는 그것도 한사코 마다해 내 속을 끓게 했다.
“냅둬. 난 여기가 좋으니께. 거긴 뭐 별 건 간디? 사람 사는 데는 어디건 다 똑같은 거여!”
‘청풍’에 들르면 나는 습관처럼 카운터 뒤의 벽을 돌아다보곤 하였다. 나를 기억의 저편 세계로 끌고 갈 만한 옛것은 모두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림이 그 자리에 걸려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색깔이 많이 바래기는 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초록 들판에는 여전히 양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그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또한 여전히 맑았다. 그리고 그 옛날과 똑같이 상단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시가 글자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적혀있었다. 그 그림을 볼 적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속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의 꿈은 어디로 갔을까.
8.
남편을 소개해 준 사람은 귀순이었다. 그는 귀순의 남편과 고등학교 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귀순이가 그 말을 처음 꺼냈을 때 나는 사실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사내아이 같았던 까닭에 보는 눈이 어련하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핑계를 대며 거절하다가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 마지못해 나간 자리였다.
“손장섭이라고 합니다.”
“이경희예요…….”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중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재영이가 다시 내려온 줄 알았다. 그만큼 그의 얼굴은 재영이를 닮은 데가 많았다. 특히 쌍꺼풀진 눈과 오뚝한 콧날은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작은 무역회사에 다닌다는 그는 함부로 나대지도, 젠 체 하지도 않았다. 넥타이 색깔도 요란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싫어하는 눈웃음도 흘리지 않았다. 더구나 식구도 단출해 부모와 두 형제가 전부였으며, 그 가운데 그는 둘째였다.
저녁을 먹고 헤어진 그날 이후 우리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만났다. 헤어질 시간이 되면 어느 새 나는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만날수록 나는 지금까지 결코 맡은 적이 없던 향기를 그에게서 맡았으며, 점점 그 향기에 마취되어갔다. 그는 정말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마법사였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던 탓일까. 그가 청혼했을 적에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갔다.
“손장섭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처음 보는 사내가 난데없이 나타나 넙죽 절을 하는데도 당혹해하지 않았다. 다른 자식들이 짝을 데리고 왔을 때처럼, 아래위를 한차례 훑어보고는 넌지시 예의 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어디 살어?’ ‘살만혀?’ ‘지금 하는 일은?’ ‘앞으루는 워찌케 살 작정이여?’ 남편이 성실하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도 판명되었다. 면접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그는 묻는 말마다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또박또박 분명하게 대답했다.
“지켜봐주십시오. 지금은 비록 가진 게 없지만, 힘을 합쳐서 잘 살아보겠습니다.”
“강해야 써. 강하게 살아야 혀. 약한 듯이 보이면 이눔 저눔들이 모두 잡아먹으려구 덤벼드는 게 이 시상이여. 알것남?”
“명심하겠습니다.”
“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뭣보담두 돈이 있어야 하는겨. 없다믄 지금부텀이라두 열심히 모아야 혀. 사람들이 놀리믄 무신 상관인감. 힘이 생기믄 그까짓 것은 저절루 꺼져버리는, 거품 같은 것이여.”
어머니는 남편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귀순이 엄마를 통해서 들은 말에 의하면, 인물이 훤한 게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배운 사람답게 태도가 가지런하고, 됨됨이가 가볍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물론 어머니에게 직접 듣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결혼한 후, 2년 만에 우리 부부는 사랑의 결실을 얻었다. 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부모가 그렇게 기다리던 첫아들을 낳았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는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사람들이 외할머니를 닮았다는 소리를 할 적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게 슬펐다. 그만큼 내가 들여다보아도 아이는 어머니의 판박이였다. 얼굴의 윤곽은 물론이고, 눈, 코, 입까지 어머니의 아이 때를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암팡지게 파고들어 젖을 빨 때에는 성미까지도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 겁이 덜컥, 날 정도였다. 하필이면 왜 어머니를 닮았단 말인가. 물론 남편은 외양이 닮았다고 해서 성격까지 닮은 것은 아니며, 더구나 아이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고, 또 설혹 닮았다고 해서 무엇이 나쁘냐고 위로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이 어머니를 곁에서 목격하지 못한 탓이었다.
“무얼 걱정해?”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그래도 어쨌든 성공한 삶이었잖아.”
“그러려니 오죽했겠어요?”
“그래도 난 어머니를 존경해. 어머닌 훌륭한 분이야.”
남편은 나를 다독거렸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본 어머니의 삶이란 한시도 평안한 날이 없는,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던 까닭이었다.
어머니는 내 아이가 자신을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9.
어머니는 우리들을 주기적으로 불러들였다. 물론 그 원인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그냥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인데도 어머니는 눈감아 주려 하지 않았다. 바쁜 일상 때문이라는, 핑계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썩을 눔들, 이 시상에 바쁘지 않은 눔들이 어디 있어? 콧구멍으로 공기 들여 마시는 눔들이믄 모두 다 바쁜 거여. 그럼, 사는 게 쉬운 줄 알았남.”
그런데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어머니는 마치 날마다 그것만 궁리하고 있는 것처럼 매우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 그래서 호출 당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허망하고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만큼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곤 하였다. 며칠씩 곡기를 끊는 것은 예사였으며, 어느 때는 일부러 쓰러져 자리보전을 하였고, 또 어느 때는 의사가 아무 이상이 없다고 머리를 흔드는데도 막무가내로 병원에 며칠씩 입원하여 우리를 불러들였다.
처음 그와 같은 소식을 올케로부터 들었을 때는 나도 만사 제쳐놓고 헐레벌떡 달려갔다. 큰일을 꼭 당할 것 같은, 상서롭지 못한 예감이 자꾸만 마음을 무겁게 억눌러 내려가면서부터 눈물을 뿌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늑대와 소년’처럼, 어머니는 번번이 다급한 심정으로 달려온 나를 정정한 모습으로 맞아주었다.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언제 내가 그랬느냐 듯이 딴청이었다.
“엄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마세요. 이렇게 안하셔도 부르시면 곧장 내려올게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니들은 민방위 훈련두 몰러?”
어머니는 오히려 너스레를 떨기 일쑤였다. 어머니에게 손을 잡힌 우리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어머니가 백수는 너끈히 넘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당 일을 놓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손바닥에는 여전히 굳은살이 박여있었고, 악력도 구십 노인답잖게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방법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아홉 명의 남매들이 옛날처럼 한자리에 모여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사실 흩어져서 살고 있는 탓에 서로 남남처럼 소식조차 뜸했던 남매들이 아닌가. 어찌 보면 방법이야 좀 치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머니가 얻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올케의 연락을 받고 혹시 이번에도 하는, 가설을 떠올리며 내려간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다른 때와 달랐다. 수긍하기 힘든 상황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머니는 그게 훈련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눈을 감은 채 어머니는 쉬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처럼, 연거푸 숨을 몰아쉬었다. 쉬익, 쉭, 쉬이익…….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가래 끓는 소리가 11월의 바람처럼 병상을 지키는 우리들의 마음을 음울하게 했다. 의사는 그날이 고비라고 말했다.
“화, 화장실에 드, 들어간 지, 하,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 나오지 않아서……….”
둘째 오빠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도 된다는 양 머리를 들지 못했다.
올케의 말에 의하면 사흘째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깡마른 얼굴에는 사금파리로 아무렇게나 그어놓은 것 같은 주름살이 질서 없이 굵게 패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흔적 같기도 하였으며, 그 시간만큼 걸어온 삶의 길이 같기도 하였다.
하루가 또 지났다. 어머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젠 세상에서 볼 것이 더 없다는 듯 감고 있는 눈두덩이 거북의 등껍질처럼 무거워 보였다. 입도 굳게 닫혀있었다. 그렇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것과는 반대로 어머니의 얼굴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평화를 느꼈다. 그렇게 보면 어머니가 지금까지 사람들을 향해 쏟아붓던 욕설은 사실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그 대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거대한 폭력 속에서 기죽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그와 같은 모양으로라도 몸부림을 쳐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픔이 갑자기 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밤을 하얗게 밝힌 자식들이 다시 병상 앞에 도열하듯 모였을 때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큰오빠였다. 사태가 이미 무망하다는 것을 직감한 듯 그는 결연한 얼굴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뵈라고, 식구들에게도 알려라……….”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장례식장은 그냥 이 병원을 이용하도록 하자. 그게 우리들에게도, 문상객들에게도 편해. 찾아오기도 쉽고………. 이의 없지?”
큰오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언니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어머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탕하게, 니들은 민방위 훈련도 몰러, 하고 일갈할 것 같았다. 울음바다가 되어버린 병실에서 나는 혼자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 좀 떠봐, 엄니!”
10.
아홉 쌍의 부부들과,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92세. 유언은 없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남매들이 의논하여 장호원 너머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산역은 관리소의 일꾼들이 맡아 전담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평토제를 지낼 때까지 가족들이 한 일이란 딱히 없었다. 하관한 뒤 삽으로 흙을 몇 번 퍼서 관 위에 뿌린 게 고작이었다.
49재에 다시 올라가본 어머니의 유택은 어느새 말끔히 정돈이 되어 있었다. 봉분도, 그 봉분 둘레를 싸고 있는 석축도, 묘비도, 상석도, 어디 하나 소홀한 데가 없었다.
나는 봉분 앞에 세워진 어머니의 묘비를 손바닥으로 몇 차례 쓰다듬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묘비에는 ‘진주강씨영자지묘’라는, 검은 글자가 깊게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면에는 아래와 같이 글자 몇 개가 조그맣게 기록되어 있었다.
―1920년 4월 11일(음) 생
―2011년 11월 6일(양) 졸
─『시에』 2012년 여름호
정수남
평남 평양 출생. 198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작품집 『분실시대』, 『별은 한낮에 빛나지 않는다』, 『타성의 새』,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시계탑이 있는 풍경』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