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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구 (生口)
오종락
옛날부터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가축은 암소였다. 그 암소는 온순하고 쟁기도 잘 끌며 농사일도 잘 도왔다. 그래서 아버지는 거친 황소보다는 농사일에 부리기 쉬운 암소를 줄곧 키우는 편이었다. 또 암소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송아지를 낳아 우리 가족들을 모두 기쁘게 해주었다. 그 송아지를 잘 키우면 우리 집 살림 밑천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암소가 송아지를 낳고 나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번 송아지는 잘 키워 둘째 살림 내줄 때 사용할란다.” 하셨고, 어떤 해는 “이번 송아지는 너희들 공납금에 보탤 생각이다.” 하시며 송아지가 태어난 데 대하여 몹시 기뻐하시면서 앞으로의 청사진도 말씀하셨다. 집에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송아지를 길러서 팔아 그 돈을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내가 결혼 후 살림을 날 때도 아버지는 송아지 판 돈으로 전세방을 구해 주셨다. 그러고 보면 나도 암소가 낳은 송아지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내게 암소의 음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암소는 아버지께 칭찬을 자주 듣게 해주며 의리 있는 나의 친구 역할도 했다. 아버지는 논밭에 써레질이나 도구를 칠 때 암소가 말을 잘 들어 수월하게 일을 끝마치실 때나, 내가 끓여준 쇠죽을 다 먹고 소죽통을 말끔히 비운 것을 보실 때마다 소를 잘 돌봤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칭찬을 들을 경우 나는 더욱더 신이 났다. 하교 후 집에 도착하면 식은 보리밥을 물에 말아 한 그릇을 후다닥 먹고 꼴망태를 메고 쇠꼴을 베러 가곤 했다. 들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암소가 가장 좋아하는 쇠꼴을 골라 베어서 꼴망태에 한가득 담아오면서도 힘든 줄도 몰랐다.
몇 해 전 상영한 독립영화 ‘워낭 소리’를 통해서도 보았듯이 옛날 농촌에서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고된 농사일을 같이한 큰 일꾼이며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삶의 동반자였다. 신분은 동물이지만 한집 식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가축 중에서도 소를 생구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소를 생구라고 한 것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우리 집 생구였던 암소는 다른 동물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든든하고 충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외양간이라는 별채에 기거하는 식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런 느낌은 암소가 팔려서 떠나고 외양간이 빌 때면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암소가 늙어서 농사일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팔 수밖에 없었다. 새로 다른 암소를 살 때 까지는 외양간이 비워져 있었다. 암소가 떠나간 빈 외양간을 들어다볼 때면 가족들의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돼지, 강아지 등 다른 가축을 팔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모님은 암소를 살펴보실 때마다 “천석꾼의 살림살이도 소가 절반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가족들은 아침, 저녁으로 암소의 건강상태를 일일이 확인했다. 암소의 표정을 살피고 쇠죽은 남기지 않았는지, 쇠똥의 상태는 정상인지를 살폈다. 쇠죽을 남길 경우 부드러운 쌀겨를 쇠죽바가지에 가득 퍼가서 남긴 쇠죽에 골고루 섞어서 남긴 쇠죽을 모두 먹도록 했다. 또 물똥을 살 경우는 쇠꼴을 적게 넣고 볏짚과 쌀겨를 더 많이 넣어 쇠죽을 끓여 주었다. 농사일이 고되어 털이 까칠할 때는 보리쌀이나 콩을 듬뿍 넣어 쇠죽을 끓여 먹이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춥지 않도록 외양간 바닥에 볏짚을 두툼하게 깔아주고 등에 덕석을 입혀 주며 암소의 보온에도 무척 신경을 쓰기도 했다.
암소는 요즘 가정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암소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우리 집 애완동물의 왕이며 원조이다. 요즘 가정에서 강아지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많이 키우는데 비용이 만만찮게 든다고 한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좀 아프면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주사도 맞히고, 미용에도 엄청 신경을 쓰며 제법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 어르신들은 그런 행동에 대해 못마땅해하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요즘 젊은것들(며느리)은 시부모가 아프다고 하면 노환이라며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강아지가 아프면 즉각 병원으로 달려간다.”라고 푸념이시다. 가족보다 애완동물에게 너무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는 세태라는 것을 느낀다. 애완동물에 들이는 정성을 부모형제나 가족들에게 좀 돌렸으면 하는 바람은 나만의 생각일까?
암소 못지않게 살림 밑천인 송아지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햇볕 좋은 날은 암소를 외양간 밖 두엄더미 옆 말뚝에 고삐를 친친 묶어놓고 일광욕을 시켰다. 어미를 따라 외양간 밖으로 나온 장난꾸러기 송아지는 온 집을 헤집고 다니며 저지레를 했다. 안마당 멍석에 널어놓은 곡식을 마구 밟고 흐트러뜨려 놓고 가기 일쑤였다. 그런 송아지도 태어 난지 일 년쯤 지나면 코뚜레를 끼웠다. 노간주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둥근 코뚜레 서너 개는 항상 외양간 벽에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작고 가느다란 것을 골라 송아지 코에다 코뚜레를 끼었다. 코뚜레를 끼운 송아지는 어미소와 분리하여 다른 외양간으로 옮겨 키웠다. 머지않은 장래에 다른 집으로 팔려 간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미소와 떨어진 송아지는 ‘음메, 음메’ 하고 울면서 어미소를 불렀다. 어미소도 새끼가 보고 싶어 외양간 문틈 사이로 큰 눈을 휘둥거리며 ‘으음, 으음’ 하며 새끼를 찾았다. 그 소리와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미소를 부르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는, ‘엄~마, 엄~마’ 하는 아기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와 흡사하게 들린다. 그런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 생구인 암소와 송아지가 예부터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오면서 발성도 인간을 닮아 그런 것은 아닐까 한다. 세상에는 많은 동물들이 존재하지만 우리 집 생구 만큼 주인과 끈끈히 교감하면서 함께 살아온 충직한 동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사랑채 모퉁이에 있는 외양간에는 쇠죽을 넣어 주는 작은 문이 안채 쪽으로 나 있었다. 암소는 대청마루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며 새끼를 보내 달라고 ‘으음, 으음’ 하며 울었다. 지금도 그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우리 집 생구였던 암소와 함께 한 옛 시절이 몹시 그립다. (2016.5.1)
첫댓글 생구 이야기 감동적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 시절 그 생구는 사람과 함께하는 큰 일꾼이자 가족이었지요. 아주 젊잔하고 믿음직한..... 잘 읽었습니다.
생구는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생구에 대하여 공감의 말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정서는 특별한 농경문화의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생구라는 말의 의미가 함축하고 있는 뜻은 가축이라는 뜻하고는 아주 다를 것입니다. 또 소라고 똑 같지 않습니다. 유순한 성질의 한우만이 생구로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소의 문화사를 읽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유순하고 쟁기 잘 끄는 생구에 대하여 공감의 말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生口' 처음 알았습니다. 조부모 아래서 7 년 정도 살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는 소 먹일 꼴 베러 다니고 농한기엔 소들을 산으로 몰고 가서 풀어놓고 실컷 풀 뜯어먹게 하고 아이들은 산에서 놀았답니다. 소와 사람들 서로 돕고 아껴주던 시절의 모습 선명하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저희도 여름방학 기간에는 매일 소를 산에다 방목하여 풀을 마음껏 먹게 했습니다. 소를 풀어 놓기 전에 쇠뿔에다 고삐를 친친 감아 고삐가 나무에 걸리지 않도록 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녁 무렵에 워낭소리를 듣고 소를 찾곤 했습니다. 공감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엣날 농촌에 소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한가족이며 큰일꾼이고 살림밑천 이였지요.학교를
마치고 집에돌아오면 소꼴에 소먹이 가는것이
당시 우리들의 일상이였어요.그 옛날이 그리워지는 추억서린글 감사드립니다.
쇠꼴베기, 소먹이기 등 그 당시는 힘든 일상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공감의 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린시절 고향집생각이 납니다.소를 길러서 농가소득에 기여하지만 힘도많이 듭니다. 소풀이며 쇠죽등 힘든일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골에서 어린시절 힘든 가운데서도 보람찼던 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향집 안마당으로 울려 퍼지는 워낭소리와 암소의 모습은 온 집안을 가득 채워준 생구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공감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엣날 농촌모습 잘 읽었습니다. 최상순드림
공감의 말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웃집에 소가 없어지면 온 동네가 난리가 났지요. 생구 오늘 배우고 갑니다. 지금도 우리소가 그립습니다. 죽도록 일하던
일을 소같이 한다는 말과같이 지금처럼 고기를 팔기위해 키우는게 아니라 일을 하는 일꾼이었지요 잘 읽고 갑니다.
옛시절 우리의 농촌경제에는 생구의 역할이 참 중요했습니다. 동네마다 소를 잃어 버려서 난리가 난 소식을 더러 접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감의 의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