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화요일
필ᆢ승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해군 전우회 선후배님
오늘은
6·25전쟁 74회 비극이
일어난 날 입니다
요약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 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6·25전쟁발생시기주요사건
1949년
북한, 소련과 '조소군사비밀협정' 체결.
남한에서 주한미군철수.
1950년
미국, 애치슨라인 발표.
1950년 6월 23일
국군, 비상경계령 해제.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1950년 6월 25일
북한, 38선 전역에 걸친 국군 방어진지 기습공격 개시. YAK전투기 서울 상공에 침입.
미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즉시 소집 요구. 미국 결의안 채택(소련 결석)해 북한군 철수 요구.
1950년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회원국에 대한민국 원조를 권고하는 결의 채택.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1950년 10월
유엔군,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
1950년 11월
중공군 개입.
1950년 12월
북한지역에서 유엔군 철수.
1951년 1월
대한민국 정부 서울에서 철수.
1951년 2월
유엔 총회, 중공군 철수 요구.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1년 10월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김.
1952년 10월
공산측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문제로 유엔군 사령부 회담 중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 휴전이 조인.
잊지말자 625
6.25 전쟁은 400만 여명의 인명피해와 1.000만여명의 이산가족, 수많은 상이군인, 전쟁미망인 전쟁고아들이
생겨나고 국토의 80%이상이 파괴되는등 우리 민족사에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6.25전쟁 56주년을 맞이하여 북한 공산세력의 무력 적화통일 야욕을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위해
헌신한 국내,외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아울러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값진교훈을
우리의 후세들에게 올바로 인식시켜 주어야 하겠습니다
조국위해 희생하신
수많은 군인장병
비무장 일반 국민들께
명복을 빌며
받들어~총
필ᆢ승
작성자
scenarist
시네어러스트
방송작가 국문학자
작가고 올리고
필ᆢ승
첫댓글 선배님
이렇게 자세한 내용은 처음 접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