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하느님과 거래하듯 기도합니다. ‘무엇을 해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식으로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우리는 언제나 결핍과 불완전함을 안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느님의 더 큰 은총과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내가 아는 정도의 하느님으로만, 내가 바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하느님으로만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런 태도를 ‘우상숭배’라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시고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고작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을 만족시키고 임시방편의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을 고작 자신의 옹졸하고 편협한 생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은 ‘쌍방 계약’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방적인 계약’이었지만, 말 그대로 하느님과 거래를 할 생각이라면, 서로 내놓아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과 하느님께 내놓는 것이 과연 거래에 합당한지도 봐야합니다. 거래에 따라 하느님께서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어주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하느님께 제대로 드린 적이 과연 있었는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마태 7,11) 그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조건이나 거래를 두시지도 않으시겠지만, 만약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믿음과 순명>, 이 두 가지뿐입니다.
오늘 성모님은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하느님의 계획과 능력에 믿음으로 순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모든 성인들 위에 공경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 역시도 15살 소녀로서 자신의 수많은 계획과 의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계획과 능력에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믿음으로 순명하셨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어떤 거래나 계산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하루하루를 사셨고, 마침내 구원자이시자 사랑하는 아들이셨던 아들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순간에서도, 성모님 자신도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도 전능하신 하느님, 모든 선의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며 용기 있게 그 자리를 지켜 내셨습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순명의 삶에 하느님께서는 인내와 평화,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 믿음과 순명으로 인해 온 인류에게 평화의 임금이시며 구원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이 신앙의 모습은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구역과 본당 공동체 전체에 필요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믿음과 순명의 삶을 본받아 살기 시작할 때, 우리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평화와 기쁨, 구원의 빛이 비추어지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루카 1,3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