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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구원의 일부 측면들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
(Placuit Deo)
I. 머리말
1.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의와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에페 1,9 참조)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 이로써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사람들이 참여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2,18; 2베드 1,4 참조). …… 이 계시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 구원에 관한 심오한 진리가 중개자이시며 동시에 모든 계시의 충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밝혀집니다.”1)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에 대한 이 가르침을 우리는 언제나 더 깊이 이해하여야 합니다. 주 예수님만을 오롯이 바라보는 교회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향하면서 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계약에 담긴 온전한 계획을 알려 줍니다. 이는 성령을 통하여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에페 1,10) 계획입니다. 이 서한은, 위대한 신앙 전승에 비추어 그리고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참조하여, 최근의 문화적 변화로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그리스도교 구원의 일부 측면들을 밝히고자 합니다.
II. 현대의 문화적 변화가 그리스도교 구원의 의미에 주는 영향
2. 현대 세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 전체와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하는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사도 4,12; 로마 3,23-24; 1티모 2,4-5; 티토 2,11-15 참조).2) 한편으로, 자율적 주체 중심의 개인주의는 인간의 자아실현이 오로지 자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3) 이러한 관점에서는, 그리스도는 말과 몸짓으로 자애로운 행동을 보여 주는 모범적인 인물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또 우리 서로와 화해하게 해 주시고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머무시어 우리를 새로운 삶 안에 하나 되게 해 주심으로써(2코린 5,19; 에페 2,18 참조), 인간의 조건을 바꾸어 놓으신 바로 그분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순전히 내적인 구원관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다는 지나치게 강한 개인적 확신과 느낌을 조장하면서, 우리가 다른 이들과 또 창조된 세상과 맺는 관계를 인정하고 치유하며 쇄신할 필요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전망으로는 말씀의 강생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께서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 구원을 위하여 인류 가족의 일원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고 우리의 역사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당신의 통상적인 가르침에서 앞서 말한 두 경향에 대해 자주 언급하시면서, 이 경향들이 오래 전 두 이단, 펠라지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일부 측면들과 비슷하다고 하셨습니다.4) 신(新)펠라지우스주의가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신이 하느님과 다른 이들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개인은 근본적으로 자율적이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구원은 개인의 자력이나 순전히 인간적 체계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체계에서는 하느님 성령이 주시는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5) 또 다른 한편으로, 신(新)영지주의는 자기만의 주관주의에 갇혀 버리는 순전히 내적인 구원 모델을 제시합니다.6) 이 모델에서 구원은 자기의 지적 수양으로 이루어집니다. 곧, “지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육체를 넘어 미지의 신성의 신비를 향해 올라갈 수 있다.”7)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창조주의 섭리의 손길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육신과 물질세계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인간의 근본적인 정체성과는 동떨어져 있고 인간의 관심사에 따라 쉽게 조작될 수 있는 의미 없는 실재만 그리고 있습니다.8) 분명히, 이 서한에서 펠라지우스주의와 영지주의의 두 이단을 대비해 보는 것은 그 일반적인 공통된 특성들을 상기해 보려는 것이지 옛 오류들의 명확한 성격에 대한 판단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 두 이단이 태동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상황과 세속화된 현대 사회는 상당히 다릅니다.9) 그러나 영지주의와 펠라지우스주의는 성경 신앙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지속적인 위험을 보여 주고 있는 만큼, 앞서 말한 현대적 경향들과 오랜 이단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4. 신펠라지우스주의의 개인주의와 신영지주의의 육체 경시는 둘 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왜곡시켜 버립니다. 신펠라지우스가 주장하는 대로, 인간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서로 동떨어진 개개인이었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 가족의 계약을 중개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신영지주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대로, 만일 중요한 단 한 가지가 인간의 내적 실재를 육신과 물질세계의 한계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강생을 통해 중개된 구원, 곧 예수님께서 당신의 참다운 육신으로 몸소 겪으신 그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중개된 구원이 우리에게 다다를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두 경향에 맞서, 이 서한은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 있음을 재천명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또 인간들 사이에 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주시고 성령의 선물로 우리가 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드님 안에서 자녀들이 되어 아버지께 결합되고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마 8,29)이신 그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III.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열망
5. 인간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자기 자신을 이렇게 하나의 수수께끼로 인식합니다. ‘존재하지만 나의 존재 원리가 내 안에 없는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면서 이용 가능한 여러 자원들의 도움을 받아 행복을 성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열망을 반드시 드러내 보이거나 공표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감추고 숨기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런데 이 열망은 특별한 위기를 만나면 언제라도 본 모습을 드러내려 합니다. 흔히 이는 신체적 건강에 대한 바람과 일치하기도 하고, 때로는 더욱 큰 경제적 번영을 염려하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넓게는 마음의 평화와 이웃과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욕구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구원에 대한 물음은 더욱 큰 선에 대한 헌신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지속적 인내와 고통 극복이라는 특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선을 이루어 내려는 싸움과 악을 피하려는 싸움은 함께 이루어집니다. 곧 무지와 오류, 취약함과 나약함, 질병과 죽음을 이기려는 투쟁도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6. 이러한 열망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온갖 자기완성의 주장들을 물리치면서, 오직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이끌어 주시어 가능하게 해 주셔야만 그 열망들이 완전히 충족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개인의 완전한 구원은 재산과 물질적 행복, 학문이나 기술, 권력이나 타인에 대한 영향력, 명성이나 자기만족 등 인간 개인이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10)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정해 놓으셨고, 하느님 안에서 쉴 수 있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찹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1)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입니다.”12) 이처럼 계시는, 오늘날의 개별적 바람에 대한 응답으로 구원을 선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판단이나 척도가 오히려 인간 존재의 실존적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구원자 하느님을 단지 우리 자신이 요구하는 이미지로 만들어 냈다는 의혹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13)
7. 또한, 성경의 믿음에 따르면, 악의 근원은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 어떤 굴레나 감옥으로 경험하는 세상인 물질과 육신의 세상 안에 없다는 점을 확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으니 온 세상이 좋고(창세 1,31; 지혜 1,13-14; 1티모 4,4 참조) 사람을 더 해치는 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선포합니다(마태 15,18-19; 창세 3,1-19 참조).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은 사랑의 원천을 저버리고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그릇된 형태의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친교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이렇게 떨어져 나온 것이 바로 개인들 사이 그리고 인간과 세상 사이의 조화를 깨뜨리고 분열과 죽음의 지배를 가져왔습니다(로마 5,12 참조). 결과적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알게 된 구원은 우리 내적 실재에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에도 연관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인간 전체, 곧 인간의 몸과 마음을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시어 당신과 이루는 친교 안에 살아가라고 부르셨습니다.
IV. 구세주 그리스도와 구원
8.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후손들(창세 3,15 참조)에게 당신의 구원을 저버리신 적은 역사상 어떤 때에도 없었습니다. 노아를 통하여 온 인류와 계약을 맺으시고(창세 9,9 참조), 이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창세 15,18 참조). 따라서 하느님의 구원은 온 인류가 공유하는 창조 질서의 모습을 띠고, 인류가 나아가는 구체적 여정의 역사에 함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뽑으시어 이들에게 죄악에 맞서고 당신께 가까이 나아갈 수단들을 주셨으며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 힘센 구원자”(루카 1,69)가 나시도록 준비하셨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분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4,23 참조). 하느님 섭리를 드러내 보이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다시금 그분의 고유한 위격을 보여 주는 표징, 곧 예수님께서 파스카 사건을 통해 삶과 죽음의 주인으로 충만하게 계시된 분이심을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복음에 따르면 모든 이의 구원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고 하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이름과 모습을 취하게 되니, 이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14)
9. 그리스도교 신앙은 강생하신 아드님의 이러한 구속 사업을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그려 왔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는 구원의 치유 차원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시는(2베드 1,4 참조) 들어 높이는 차원과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구원의 전망을 인간을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에서 시작하는 내려옴의 방식에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비추고 계시하시는 분, 구세주이자 해방자, 사람을 성화(聖化)하고 의화(義化)해 주시는 한 분이십니다. 구원의 전망을 하느님께 향하는 인간에게서 시작하는 올라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완전한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계약의 대사제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어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며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하느님 활동과 인간 행동의 놀라운 상승 작용이 드러납니다. 이 상승 작용은 개인주의적 관점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려옴의 관점은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활동이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구원하시는 그분 사랑에 응답하는 데에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필수적입니다. 동시에 올라감의 관점은, 아버지께서 당신 아드님의 완전한 인간 활동을 통해 우리 행동이 쇄신되기를 바라셨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그 선행’(에페 2,10 참조)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10.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 위격을 통해 가져오신 구원이 내적으로만 성취될 수는 없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외아드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과 이루는 구원의 친교를 전해 주시고자 사람이 되셨습니다(요한 1,14 참조). 육신을 취하심으로써(로마 8,3; 히브 2,14; 1요한 4,2 참조) 그리고 여인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갈라 4,4 참조),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이 되셨고”15) 우리의 형제가 되신 것입니다(히브 2,14 참조). 인류 가족의 일원이 되기까지 하셨기에 그분께서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고,”16)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또 온 인류와 맺는 새로운 관계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관계 질서 안에 들어가 하느님 아드님의 바로 그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구원 활동에 제약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 방식으로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을 중개하십니다.
11. 끝으로, 펠라지우스주의 성향의 개인 환원주의와, 순전히 내적인 구원을 약속하는 신영지주의 두 가지 모두에 대처하려면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 방식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만나는 길, 곧 당신 말씀에 순종하고 당신 모범을 본받음으로써 우리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그 길을 보여 주시는 데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몸소 그 길이 되십니다. “나는 길이다.”(요한 14,6)라고 하신 것입니다.17) 나아가, 이 길은 우리가 다른 이들 그리고 창조된 세상과 맺는 관계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순전히 내적인 여정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히브 10,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성을 온전히 취하시고 당신 아버지와 또 다른 이들과의 친교 안에서 인간의 삶을 충실히 사셨던 구세주이십니다. 그렇기에 구원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1요한 4,13 참조)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인성에 따라 특별한 방식으로 온갖 은총의 원천”18)이 되십니다. 그분께서는 구세주이신 동시에 구원이십니다.
V.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12.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구원을 받는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이 새로운 관계 질서 안으로 들어와 그리스도의 성령을 온전히 모실 수 있게 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로마 8,9 참조). 교회의 이러한 구원적 중재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환원주의적 경향을 극복하는 데에 핵심적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신펠라지우스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개인적 노력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은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교회의 친교를 이루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신영지주의 견해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순전한 내적 구원이 아니며 우리가 그분께서 몸소 실천해 오셨던 구체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이끄는 것이기에, 교회는 가시적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특히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통받는 형제자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어루만집니다. 따라서 “구원의 보편 성사”19)인 구원을 위한 교회의 중재는 구원이 고립된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개인과 하느님의 내적 결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줍니다. 대신에 구원은 삼위일체의 친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친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13. 구원에 대한 개인주의적이고 단순히 내적인 시각은 성사적 경륜과도 상치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사적 경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관계 질서에 참여하는 것은 성사들을 통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사들 가운데, 세례성사는 그 입문이며20) 성체성사는 그 원천이며 정점입니다.21) 이 부분에서, 인간의 노력에만 의존하는 자기 구원에 대한 주장들의 모순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속하는 지울 수 없는 인호를 새겨 주는 세례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는 세례에서 비롯됩니다(마태 28,19 참조). 그래서 원죄와 다른 모든 죄에서 정화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습니다(로마 6,4 참조). 일곱 성사의 은총으로, 믿는 이들은 계속 성장하고 영적으로 쇄신됩니다. 삶의 여정이 매우 힘겨울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믿는 이들이 죄를 지음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저버릴 때에는, 고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관계 질서 안에 다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믿는 이들이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1요한 2,6 참조).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최후의 심판을 바라봅니다. 이 최후의 심판 때에, 우리는 각자 특히 가장 작은 이에게 보여 준 진실한 사랑(로마 13,8-10 참조)에 따라 심판될 것입니다(마태 25,31-46 참조).
14. 또한 성사의 구원 경륜은 단순히 내적 구원만을 제시하는 경향과 상반됩니다. 실제로 영지주의는 그 자체로 창조 질서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과 연결되어 있어, 창조 질서를 인간 정신의 전적인 자유를 제약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에게 구원은 육체 그리고 한 개인의 삶에서 맺는 구체적 관계에서의 해방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히브 10,10; 참조: 콜로 1,22) 우리가 구원받았으므로, 진정한 구원은 육체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반대로 육체의 성화를 포함하는 것입니다(로마 12,1 참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만드셨고, 창조주의 선물을 깨닫고 자신의 형제자매와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인간을 초대하는 언어를 그 안에 새겨 주셨습니다.22) 구원자께서는 강생과 파스카 신비로 이러한 본래의 언어를 다시 정립하시고 새롭게 하셨으며 성사적 경륜 안에서 이를 전하셨습니다. 성사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은 육화되신 그리스도께 충실히 살아갈 수 있고, 그 결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구체적 관계 질서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관계 질서에 따라 우리는 자비의 영적 육체적 활동을 통해 특히 모든 고통받는 인간을 돌보아야 합니다.23)
V. 결론: 구세주를 고대하며 신앙을 전하기
15.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깨닫게 해 주신 충만한 삶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모든 기쁨과 빛을 선포하는 사명을 실천해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24)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하느님께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25)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으로 이끄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른 종교인들과 진실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는 복음화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서, 구세주의 결정적인 재림을 끊임없이 기원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기”(로마 8,24 참조) 때문입니다.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파멸되고(1코린 15,26 참조)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에 온전히 동참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형제자매들과 모든 피조물들과 맺는 관계를 충만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의 온전한 구원은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를 부르시는 최종 목적입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시며 가장 먼저 구원되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신앙에 기초하고 희망으로 견디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8년 1월 24일 신앙교리성 총회에서 채택된 이 서한을 2018년 2월 16일자로 승인하시고 이를 발표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로마에서
2018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신앙교리성
장관 루이스 프란시스코 라다리아 페레르 대주교
차관 자코모 모란디 대주교
<주>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제3판).
2. 신앙교리성,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2000.8.6., 5-8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7호(200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99-104면,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92(2000), 745-749면 참조.
3.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67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2판), AAS 105(2013), 1048면 참조.
4. 프란치스코,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 2013.6.29., 47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제1판), AAS 105(2013), 586-587면; 「복음의 기쁨」, 93-94항, AAS 105(2013), 1059면; 제5차 이탈리아 교회 대회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2015.11.10., 피렌체, AAS 107(2015), 1287면 참조.
5. 제5차 이탈리아 교회 대회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AAS 107(2015), 1288면 참조.
6. 「복음의 기쁨」, 94항, AAS 105(2013), 1059면: “영지주의의 매력입니다. 이는 특정한 경험이나 사상이나 정보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이로써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고 말게 합니다.”; 교황청 문화평의회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뉴에이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 A Christian Reflection on the “New Age”), 2003.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제1판).
7.「신앙의 빛」, 47항, AAS 105(2013), 586-587면.
8. 브레시아 교구에서 온 순례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2013.6.22., AAS 95(2013), 627면 참조: “이 세상에서 인간이 부인되고 있고 사람들은 영지주의의 길, …… ‘육신 없는’ 신, 육신을 취하지 않으신 신을 선호합니다.”
9. 펠라지우스를 중심으로 5세기에 발전된 펠라지우스주의 이단에 따르면,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구원받으려면 은총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은총은 (빛을 비추고 본보기를 보이며 힘을 북돋우는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를 외적으로 도울 뿐이다. 인간이 선행을 하고 영원한 삶에 이를 수 있도록, 사전에 쌓은 공로 없이도 인간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거듭나게 하는 주어진 은총은 아닌 것이다.
1-2세기에 수많은 형태로 나타난 영지주의 흐름은 더욱 복잡하다. 전반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은 심오한 지식이나 신비적 인식(그노시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러한 그노시스는 영지주의자에게 그 자신의 참 본질을, 곧 자기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 성령의 불꽃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참다운 인성과 무관한 육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한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에야, 그 영지주의자는 원죄의 타락으로 멀어져 버린 자기 본연의 존재, 하느님 안에서의 자신의 본래 존재로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0.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I, q.2 참조.
11.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es), I,1;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CCL) 27, 1.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2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제3판).
13. 국제신학위원회, 「구원자이신 하느님에 관한 신학적 문제 선별」(Select Questions on the Theology on God the Redeemer), 1995., 2항.
14. 베네딕토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12.25., 1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제1판 16쇄), AAS 98(2006), 217면; 참조: 「복음의 기쁨」, 3항, AAS 105(2013), 1020면.
15. 성 이레네오, 「이단 반박」(Adversus Haereses), III, 19, 1, 『그리스도교 원전』(Souces Chretiennes), 211, 374.
16. 사목 헌장 22항.
17. 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Tractatus in Ioannem), 13, 4, CCL, 36, 132 참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 진리를 찾는다면 그 길을 따르십시오. 그 길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목표와 따라야 하는 길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른 길을 따라서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로는 그리스도께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리스도께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이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습니까? 여러분은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 다다르게 됩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태초의 하느님이신 말씀에 가 닿는 것입니다.”
1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진리론」(Quaestio de Veritate), q. 29, a. 5, co.
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4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참조.
20. 『신학 대전』, III, q.63, a.3 참조.
21. 교회 헌장 1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10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참조.
22. 프란치스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5.24., 155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6(제1판), AAS 107(2015), 909-910면 참조.
23. 프란치스코, 교황 교서 「자비와 비참」(Misericordiae et Misera), 2016.11.20., 20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55호(2017), 81면, AAS 108(2016), 1325-1326면 참조.
24.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1990.12.7., 40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개정판), AAS 83(1991), 287-288면; 「복음의 기쁨」, 9-13항, AAS 105(2013), 1022-1025면 참조.
25. 사목 헌장 22항.
<원문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Letter Placuit Deo to the Bishops of the Catholic Church on Certain Aspects of Christian Salvation, 2018.2.16., 이탈리아어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