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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영화 <열정의 랩소디>
영화 〈열정의 랩소디〉는 어빙 스톤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빈센트 반 고흐의 전기 영화이다. 이 작품은 광기와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되는 불운한 천재 화가 고흐의 인생을 연대기 순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위대한 예술가를 그린 영화 중에서 수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영화는 고흐가 성직자가 되고자 했던 청년기부터 그의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전 생애를 그리고 있다.
또한 전기의 기본적 특성인 연대기를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고흐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의 만남을 몇 개의 시퀀스로 구성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더해 준다. 게다가 고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 들이 실제 그의 작품들과 결부되어 풍부하게 인용됨으로써 사실감도 더해 주고 있다.
미넬리 감독은 고흐가 살았던 벨기에의 보리나즈, 네덜란드의 뉘넨, 프랑스의 아를, 오베르에서 촬영을 하며 작품의 배경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흐 작품의 진품 소장가들로부터 촬영을 허락받아 관객들에게 200여 점에 달하는 진품을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해 준다.
진품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의 탁월함과 미묘한 차이를 카메라에 완벽하게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게다가 조명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작품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흐의 처절하고 고독했던 삶을 액션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생생히 연기하고 있다. 〈율리시즈>·<바이킹>·<스팔타카스〉등의 영화에서 전사(戰士) 같은 역할과는 달리, 열정적이지만 좌절과 고독 속에 묻혀 살았던 불안정한 성격의 예술가 고흐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1946년 데뷔 후 대부분 액션 영화에 출연하였던 더글라스였으나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되는 이미지의 화가로서 일생일대의 열연을 했다. 그는 1957년도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그해
<왕과 나〉의 율 브리너에게 밀려서 수상을 못했다. 골든 글러브 남우주연상과 뉴욕 비평가협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조연을 맡았던 안소니 퀸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안소니 퀸은 고갱의 역할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는 평을 받았다. 단 12분 출연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짧은 출연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배우로 기록됐다.
원제인 〈Lust for Life〉는 번역하자면 ‘삶에 대한 갈구’ 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뚱맞게 〈열정의 랩소디(음악용어로 ‘광시곡’)〉로 소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식 개봉은 안했고 이따금씩 EBS 등 TV에서 방영되곤 한다.
II.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안소니 퀸
안소니 퀸은 1915년 4월 21일 멕시코 북부 치와와에서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멕시코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유명한 *판초 비야의 혁명군에 가담해서 한가락 했던 아버지는 혁명세력이 와해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미국 텍사스 엘파소로 이주하여 노동자로 전전하다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 판초 비야
19세기 말엽에 활약했던 멕시코의 혁명가이다. 판초 비야는 멕시코의 의적, 농민의 친구, 멕시코 혁명의 영웅으로 불린다.
퀸은 10세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되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전전하며 힘겨운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자 화딱지가 난 그는 할머니와 동생들을 몽땅 데리고 집을 나온 뒤에는 이들을 부양하느라 더욱 힘든 생활을 했다.
그는 돈 받는 권투 스파링 파트너·공사장 심부름꾼·내기 권투선수 등을 전전했다. 어린 나이에 하도 고생해서 남들보다 훨씬 폭삭 늙어 보이는 얼굴을 갖게 된 퀸과 거리의 다른 소년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건축물 스케치 대회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
사진, 영화 <길>
그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어느 날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라이트가 퀸이 부정확한 발음을 고치고 오면 조수로 써주겠다고 제의했다.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 배우학원에 허드렛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등록한 그는 연기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퀸의 재능을 알아 본 여배우 매 웨스트의 추천으로 18세에 <깨끗한 침대>라는 연극 무대에 처음 섰다. 이 연극에서 얼굴이 늙어 보이는 퀸은 육십을 넘은 노인 역을 맡았다.
이후 주연급은 아니었지만 그는 거장 세실 B. 데밀(십계, 삼손과 데릴라의 감독)의 <평원아>에 출연하게 된다. 영화의 사실성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데밀은 그때 샤이언 족 인디언 배우를 찾고 있었다. 아일랜드와 멕시코 원주민의 피가 섞여있는 퀸은 데밀이 인디언을 찾고 있다는 광고를 보고 바로 달려갔다. 드밀이 "너, 인디언 맞아?"이라고 묻자 그는 "저는 진짜배기 샤이언입니다."라고 넉살을 떨었다. 일당 75달러였다.
막상 인디언 역을 맡은 퀸의 연기에 실망한 드밀이 그를 퇴짜 놓으려고 하자 옆에 있던 영화의 주인공인 게리 쿠퍼가 “퀸이 수더분하고 착하게 생겼는데 한번 써 봅시다.”라고 거들면서 퀸은 간신히 구제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퀸은 배우의 길로 들어선다. 특히 그곳에서 데밀의 수양딸인 캐서린을 첫 번째 아내로 얻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데밀은 배우로서 그랬던 것처럼 사위로서의 퀸도 끝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먼 훗날 퀸은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을 데밀에게 바쳤다.
이렇게 해서 할리우드 실력자의 사위가 된 퀸은 차츰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넓혀갔다. 퀸은 특이한 외모와 약간 쉰 목소리로 1947년까지 거의 5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 인도인·마피아·하와이안 족장·필리핀 자유투사·중국 게릴라·아랍인 족장 등 안 해 본 역이 없었다.
그때부터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그러나 1940년대 말 할리우드에도 빨갱이 소탕운동인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퀸은 재빨리 동료를 빨갱이로 고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살벌한 할리우드를 떠나 뉴욕의 연극무대로 발길을 돌렸다.
사진, 영화 <희랍인 조르바>
그곳에서 명장 엘리아 카잔의 눈에 띈 그는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말론 브랜도가 맡았던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어서 1952년에는 카잔이 감독한 영화 <혁명아 사파타>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사파타(말론 브랜도 분)의 동생 역을 맡아 혁명을 이끄는 형의 조력자에서 술주정뱅이로 타락하는 연기로 1953년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1954년에는 *네오리얼리즘으로 세계 영화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에서 짐승 같은 곡예사 잠파노 역으로 출연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다. 1956년에는 화가 고흐를 그린 <열정의 랩소디>에 고갱 역으로 고작 8분간 출연하면서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 네오리얼리즘
네오리얼리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영화운동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고자 한다. 루치노 비스콘티·로베르토 로셀리니·비토리오 데시카 등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
1964년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희랍인 조르바>에서 천하의 자유인이자 낙천가인 그리스인 조르바 역을 맡아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영화 촬영이 끝난 후 그는 "내가 바로 조르바"라고 말하면서 조르바라는 인물을 평생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살았다.
사진, <나바론의 요새>
이후 <노트르담의 꼽추>·<나바론 요새>·<바라바>·<아라비아의 로렌스>·<노인과 바다>·<25시>·<사막의 라이온> 등 150편이 넘는 영화를 통해 투박하고 선 굵은 남성적 연기를 하면서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모든 역할에 나 자신의 100%를 쏟는다. 그것이 B급 영화이던 C급 영화이던 간에...”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노년에는 회화와 조각에 몰두, 작품성을 인정받을 정도의 솜씨를 자랑했다. 198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선포 4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그의 그림이 실렸으며, 1998년 말에는 조각가 아들 로렌조와 함께 방한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퀸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10대 시절 동안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여러 미술 대회에서 입상했고 건축 스케치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그는 "예술이 없다면 삶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라는 말도 남겼다.
사진, <열정의 랩소디>에서 고갱으로 나오는 퀸
세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정부(情婦)로부터 열세명의 아이를 얻은 그는 “우굴거리는 자식들은 내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80세가 넘은 나이로 47세 연하의 여비서 캐시 벤빈과 결혼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생활이야 어쨌든 영화사적으로 수많은 걸작과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안소니 퀸은 2001년 3월 향년 86세의 나이로 미국 보스턴에서 눈을 감았다. 투박하고 강인한 얼굴이지만 어딘가 정겨운 이미지를 팬들에게 남겨준 퀸이었다.
III. 한 많고 처절했던 고흐의 생애
어린 시절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형제가 많아 무척 가난했다. 고흐는 내성적이고 사소한 일에도 금방 상처를 입는 섬세하고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편으로는 다혈질이어서 자기 의견을 굽힐 줄 몰랐고 누군가가 억지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시키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성격 때문에 부모도 걱정을 많이 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를 못했다. 이때부터 혼자서 숲이나 들판을 거닐며 자연을 사랑하는 습관이 생겼다. 자연만은 그와 다투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 테오는 형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서 그런지 사이가 아주 각별해서 산책할 때는 항상 데리고 다녔다. 또한 그림에 재주가 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고흐는 어려서부터 연필화를 그렸고 수채화도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림 공부는 하지 않았다. 어린 그에게 특기할 일은 화상(畵商)인 숙부로부터 방학이 되면 그림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먼 친척 아저씨를 마중 나갔다가 그가 짐을 들어주겠다고 하니까 고흐는 ‘괜찮아요.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 법이에요’라고 도통한 어른처럼 대답을 했다고 한다.” 훗날의 고흐의 삶이 떠오르는 말이다.
청년 시절
학비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한 후 집에서 빈둥거리던 고흐를 부모는 숙부의 추천을 통해 헤이그에 있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의 견습사원으로 보냈다. 화상으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였다. 시골소년 고흐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무난한 화랑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의 고향이어서 여러 외가 친척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파는 세일즈맨으로서의 역할을 그럭저럭 잘 해냈다. 앞으로 훌륭한 화상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4년을 보내고 런던으로 영전(?)해 간다.
사진, 별이 빛나는 론강(이하 모두 고흐의 작품)
그의 전 생애를 생각해 보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딴 사람의 모습을 보인 것이 바로 이 시절이었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화랑 근처의 미술관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훗날 화가로서의 밑천을 쌓을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무엇보다도 바르비종파(야외의 자연을 주로 그리던 일단의 화가들)의 장 프랑스와 밀레의 그림에 푹 빠졌었다.
그의 그림에 밀레의 화풍이 일부 보이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고흐는 평생 엄청난 독서를 통해 대단한 교양과 학식을 구비했다. 그가 죽기 전까지 테오와 주고받은 625통의 서신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테오한테 보낸 편지는 네덜란드어·프랑스어·영어로 씌어 있다. 또한 이때부터 셰익스피어·궤테·발자크·톨스토이 등 세계적인 문호들의 작품들도 모두 섭렵했다.
런던의 구필화랑의 지점에서 근무하던 그는 하숙집 딸 유제니한테 홀랑 빠졌다. 그녀에게 간신히 사랑을 고백했으나 그녀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그는 충격에 빠졌으나 막무가내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무작정 접근해 오는 고흐에 대하여 유제니는 진저리를 쳤다. 이렇게 고흐의 성격에는 쉽사리 포기 못하는 집요한 면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면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포기하는 게 일반적인데 고흐의 집착은 유별났고 결국은 본인이나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유제니한테 일방적으로 걷어 채이고 비참한 몰골로 고향으로 돌아온 장남인 그를 보고 고흐의 부모는 한없이 실망했다. 부모는 고흐가 제대로 사람구실이나 제대로 하려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전도사 생활
고향에서 빈둥거리던 고흐는 이후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고 결심했다. 아마도 집안 분위기 탓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암스테르담에서 신학대학 준비를 하다가 중단한 고흐는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브뤼셀로 가서 전도사 양성학교에 다니던 고흐는 여기서도 기이한 행동을 보이면서 동료들과 한바탕 싸우고 자퇴를 했다.
이후 임시직이기는 하나 전도사 자격을 부여받은 고흐는 벨기에 남부의 탄광촌이 있는 보리나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전도생활에 열과 성을 몽땅 바쳤다.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복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복과 돈마저 탈탈 털어 나눠 주었고, 진정한 기독교인이길 자처하며 솔선수범했다.
사진, 별이 빛나는 밤
굶주린 아이들에게 자신의 식사를 그대로 주었고, 입고 있던 옷을 그 자리에서 싹둑싹둑 잘라 광부들의 상처를 동여매어 주었다. 광부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목욕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매사에 극단적으로 덤벼드는 것이 그의 성격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지방 전도위원회는 해임해 버렸다.
고흐가 남들과 다른 열성적인 봉사활동을 하는 건 인정하지만 전도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설교에 필요한 말주변이 부족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이 밖에 교회의 권위와 위엄을 유지해야 할 성직자가 그들보다 더 더러운 옷을 걸치고 종교 활동을 했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파리 몽마르트르 시절
전도사의 길도 막히자 고흐는 그림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준 천직이라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는 활동 속에서 진정한 신의 존재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후 고향 에덴과 브뤼셀·헤이그·뉘넨 등을 전전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전념한다. 27세의 늦깎이 화가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 푼도 벌지 못한 그에게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동생 테오의 형에 대한 평생의 헌신적인 지원이 시작된다. 당시 파리에서 화상으로 있던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그림공부를 하면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전전하던 고흐는 32세 되던 해에 파리로 향한다. 그의 파리 체재는 1886년부터 1888년까지 2년간 계속되었다.
사진, 몽마르트
이때 그는 당시 파리 미술계에 떠오르는 여러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 동일한 화풍의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탈 인상파’에 가까웠고 후에 그의 그림은 현대 미술의 큰 장을 열었다. 고흐는 에밀 베르나르·앙리 로트렉 등과 특히 가깝게 지냈다. 나중에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되는 폴 고갱을 동생 테오로부터 소개받았다.
고흐보다 다섯 살 위였던 고갱은 당시 다니던 증권거래소를 청산하고 새로이 화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흐는 고갱의 그림과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그의 말투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는 고갱을 거칠고 야성적이지만 타락하지 않은 인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고갱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남의 염장을 지르는 데는 선수였다. 결국 이 때문에 나중에 두 사람은 아를에서 사단이 나고 만다.
아를에서의 생활
고흐는 이들과 어울리며 회화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도 하고 스스로도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몽마르트르에서 머문 지 2년이 되어 가면서 고흐는 점점 답답해졌다. 그림 실력은 향상되는 것 같았으나 정작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테오 역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팔았으나 정작 형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고흐는 탈출구로써 남부 프랑스의 아를 지방으로 옮길 것을 결심한다. 화가 로트랙이 간간히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프로방스 지방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곳이 마치 멋진 신세계처럼 생각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동생 테오가 요한나와 혼담이 오고가자 형으로서 한 푼도 못 벌면서 동생의 신혼집에서 눌러앉아 먹고 자고 하는 일이 너무나 염치없는 일로 생각되었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름대로의 새로운 그림을 추구할 공간과 시간도 절실해졌다. 남쪽지방의 빛나는 태양, 따뜻한 색채, 그리고 저렴한 생활비로 가난한 화가들을 불러 모아 화가 공동체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가득 찼다. 아를로 떠나는 형을 배웅하면서 동생 테오의 마음도 착잡했다. 화가로서 형의 놀라운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사진, 밤의 카페 테라스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밝은 태양과 짙푸른 하늘 등 아를 지방의 인상적인 풍경 속에서 맹렬하게 작품 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아를에는 특유의 미스트랄(남프랑스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차고 건조한 지방풍)이라는 돌풍이 거세게 불었다. 이 돌풍이 불 때에도 그는 말뚝을 땅에 박고 거기다 이젤을 단단히 묶어서 악착같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테오가 보내주는 돈이 변변치 않아서 물감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물과 빵으로 간신히 끼니를 때우면서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그는 오직 그림만 그렸다. 1888년 2월부터 1889년 5월까지 1년하고도 두 달 반 동안 고흐는 아를에서 무려 19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역시 한 가지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그의 성격이 그림 제작에 나타난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세상에 알려진 것들이 많다. 해바라기연작·도개교·밤의 카페 테라스·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노란 집·우편배달부 롤랭 등 고흐의 절정기 작품들이 이때 죄다 나왔다. 그러나 밑바닥 생활 때문에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한 그의 몸은 점차 쇠약해져 갔으며 예민한 그의 정신세계를 병적인 상태로 몰아갔다. 바로 이때 고갱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고흐가 아를에 온 목적 중 하나가 일종의 예술가들의 공동조합을 만드는 데 있었다.
그는 가난한 화가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생활하면 식비와 집세 등의 비용이 절약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파리의 여러 화가들에게 이곳으로 와서 같이 작업을 하자고 계속 편지를 보냈는데 이들 중 고갱만 혼자 찾아 온 것이다.
고흐와 고갱 두 사람은 미래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 생활은 불과 두 달밖에 계속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성격과 예술관은 완전히 극과 극인데다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둘이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을라치면 서로가 상대방 그림의 결점을 지적하기에 바빴다.
이러니 두 사람이 온전히 지내기란 거의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날씨 탓에 집안에 콕 박혀 있자 두 사람은 더욱 더 승강이가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고흐는 해바라기를, 고갱은 고흐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갱이 그린 고흐는 미친 사람처럼 보여 고흐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다가 또 한 번 대판 싸움을 벌였다.
사진, 고갱
이럴 때는 신경이 섬세한 사람이 신경이 두꺼운 사람한테 백전백패하는 법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어코 188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고갱이 온 지 꼭 두 달이 되는 날이었다. 고흐와 또 언쟁이 붙자 고갱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고갱이 동네 라마르틴 광장을 막 건너가려고 했을 때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그의 뒤를 쫓고 있던 것을 보았다. 골목길 입구에서 고갱이 홱 고개를 돌려 노려보자 고흐는 바로 고개를 푹 떨구고 그 길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귀를 잘라 종이에 싸서 평소 알고 지내는 창녀에게 주었다. 그 다음날 짐을 싸려고 고흐의 집에 들른 고갱은 고흐가 귀를 싸매고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테오에게 전보를 치고 파리로 돌아갔다. 밤늦게 테오가 도착했고 밖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고흐가 살점 하나 없이 귀만 싹둑 도려낸 것을 두고 연신 입방아를 찧어대고 있었다. 고갱은 이후에도 고흐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절한 가난과 장기간의 제작활동으로 심신이 지쳐 있었던 데다가 심적으로 계속 긁고 있는 고갱과의 관계가 고흐에게 면도칼을 쥐게 했을 것이다. 한편 동생 테오의 결혼이 진행되면서 그가 보내오는 송금이 끊길지 모른다고 조마조마했고 그림도 여전히 한 점도 팔리지 않는 등 불안감이 극도로 가중되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강한 자극을 받거나 하면 발작이 재발하는 증상이 심해져 갔다.
자신의 귀를 자른 이 미치광이 화가가 다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마을 사람들에게 커다란 불안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고흐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동네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급기야 그들은 미치광이를 감방에 가두어 달라는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고흐는 아를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당했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의 생활
고흐도 이런 분위기의 아를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끔찍하고 불쾌했던 기억이 가득 찬 이 시골마을에서 한시바삐 떠나고 싶어 했다. 그는 아를 북동쪽 25킬로미터에 위치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병원 측은 고흐가 광인이 아니라 간질 발작 정도라고 진단했다. 훗날에는 이런 증세를 정신분열증이라고 했다.
고흐는 병원에서도 작품 활 동을 계속했다. 테오는 아를에서 형이 보내온 우편배달부 롤랭·씨 뿌리는 남자·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 등을 받고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아직 일반 애호가들이 형의 그림의 진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위로했다.
이어서 곧 파리에서 개최되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고흐의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드디어 고흐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내어 평가의 대상이 되는 날이 온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흐가 아를에서 귀를 자르던 사건 이후 두 번째 발작이 엄습했다. 잠시 조용했던 발작이 재발한 것이다. 고흐는 자신이 그 병원에 있다는 것 자체가 발작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수도원이었던 이 정신병원의 어떤 종교적인 무엇인가가 자기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 병원은 가끔 음식에서 바퀴벌레가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급식을 비롯한 여러 환경이 지독하게 열악했다. 닷새 동안이나 발작이 계속되었고, 자살소동까지 벌이게 됐다. 그는 병원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그곳을 나가고 싶어 했다.
* 앙데팡당 전시회
1884년 프랑스에서 전통적이고 관료적인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화가들에 의해 주최된 자유출품제로서 진보적인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고흐의 마지막 거처 오베르
1890년 5월 17일 고흐는 잠깐 파리에 들렀다가 5월 21일 그의 마지막을 보낸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도착했다. 오베르로 간 것은 테오가 형의 친구이자 너그러운 품성의 화가 피사로에게 형의 거처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피사로는 그곳에 폴 가셰라는 의사가 있어 고흐를 가까이 돌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까마귀 나는 밀밭
고흐는 그곳에서 의사이자 미술애호가인 가셰를 만났고 라부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 2층 거처에 여장을 풀었다. 아래층은 식당 겸 카페인데 지금도 그대로이고 2층은 고흐가 살던 당시 그대로 재현해 놓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 집을 ‘고흐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1890년 7월 27일에 권총 자살을 기도하고 이틀 후인 29일에 절명하기까지 약 70일 동안 고흐는 소묘를 포함하여 53점이라는 경이적인 숫자의 작품을 그렸다. 게다가 그림의 내용도 훨씬 훌륭해졌다. 그림의 밝기도 전체적으로 약간 억제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본인도 자신의 그림에 만족스러워했다.
7월 27일, 고흐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여관집 라부 부부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해가 진 후 현관문을 열고 고흐가 돌아왔다. 몸을 구부리고 들어 온 고흐에게 라부 부부가 웬일이냐고 묻자 끙끙거리며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이상하게 여긴 라부 부부가 급히 올라가자 고흐는 총탄이 관통한 심장 근처의 상처를 보여 주었다.
사진, 마지막 거처 라부 여관
고흐의 주치의 비슷한 가셰가 급히 달려와서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고 파리의 테오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튿날 아침 테오는 형에게 즉시 달려왔고 온종일 형을 간호했다. 총알은 심장 아주 가까운 부위에 박혀 있어 수술도 불가능했다. 29일 오전 1시 30분 동생 테오는 형과 나란히 누워 형의 머리를 안았다. 잠시 뒤에 고흐는 “이대로 죽고 싶다.”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날 아침 파리와 여러 곳에서 일곱 명의 친구들이 찾아와 해바라기로 방을 장식했고, 관 옆에는 그의 그림들이 진열되었다. 7월 30일에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한 이는 베르나르·탕기·라발·카미유 피사로·요한나의 오빠 그리고 가셰였다. 고갱은 참석하지 않았다. 고갱은 얼마 있다가 남태평양의 타이티 섬으로 떠났다. 그도 결국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못 받았다.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는 고흐가 불타오르는 듯한 황금색 밀밭에서 권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고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고흐가 말년에 그린 음산한 분위기의 작품 <까마귀 나는 밀밭>을 보고 대충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면 고흐는 왜 자살했을까?
유언을 남기지 않아 확실하게는 몰라도 자꾸만 발작 증세가 도지면서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신경이 그렇게 몰아갔다는 설도 있다. 고흐의 죽음이 있은 후 테오는 착란증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6개월 후에 신장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진, 형제의 묘지(왼편이 고흐의 무덤)
형이 죽은 지 불과 6개월만이었다. 23년 후 1914년 요한나는 테오의 유골을 오베르의 고흐 곁에 묻어주었다. 이 두 형제는 현재 오베르에 있는 묘지에 나란히 잠들고 있다. 묘지 울타리 너머에는 한없이 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다. “두 형제는 어떠한 성공에 대한 보장도, 일체의 지원도 없이 자기들이 꿈꾸는 미래를 관철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면서 돌진하다가 패잔병처럼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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