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86
4월5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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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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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d_EjvXv5lQ (오석준 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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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광야에서 고통도 겪겠지만, 동시에 더 강렬한 주님 현존 체험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가운데 쉽게 읽히는 흥미로운 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민수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주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파별 야영 위치와 행진 순서, 사제와 레위인들의 임무와 규정, 재물에 대한 규정 등이 끝도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비록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민수기에는 두 번에 걸친 인구조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는 시나이산에 머물면서 광야 여정을 준비하던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는 광야 여정을 끝낸 후 약속의 땅 입구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두 번의 인구조사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모세에 의해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형성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제2차 인구조사는 모압 들판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601,730명이라는 수가 헤아려지는데, 1차 인구조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인데, 이 숫자는 꽤나 상징적입니다. 광야 여정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지은 이들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이들로 인해 인구수가 감소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 여정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중심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입니다. 백성들은 이집트 탈출을 통해 체험한 주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모세의 권위에 대해 대놓고 불평합니다. 이집트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에 대한 주님의 성취 능력이 인간의 불평불만에 부딪혀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배신과 적반하장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땅으로 당신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광야 여정 중에 발생한 구리 뱀, 불 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과 불신앙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끝도 없는 백성들의 불평불만 앞에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주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십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중재기도를 요청합니다. 진노에는 더디시고 용서에는 재빠르신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날 방도를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결정적인 시험대 앞에 서게 됩니다. 모세가 만들어 기둥 위에 매단 구리뱀을 쳐다보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백성들의 생사가 결정되는 이는 주님께 대한 순종의 시험이자, 동시에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광야에서도 주님의 현존과 권능이 드러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광야에 대한 큰 의미가 부여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장소로 부각된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현존과 역사하심을 가장 강하게 체험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라는 긴 광야 여정을 걸어온 우리입니다. 남아있는 여정 동안 우리는 이 광야에서 고통도 겪겠지만, 동시에 더 강렬한 주님 현존 체험과 은총 체험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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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ukOfSfbC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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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라고 하시며 사람은 아래와 위, 두 세상에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가 하늘에 속하고 유다인들은 땅에서 와서 땅에 속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다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으면 육신이 썩어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속한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당신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여기서 “내가 나”라는 뜻은 모세가 들은 하느님의 이름, 곧 ‘나는 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죄 속에서 죽습니다. 하늘에 속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자신이 속한 세상은 아버지가 만든 세상입니다. 아버지를 바꾸지 않으면 아버지의 세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페인 영화 ‘늑대의 살갗 아래’는 한 돈만 아는 아버지를 둔 두 딸의 인생이 그려집니다. 너무 큰 추위에 아무도 살지 않는 스페인 북부의 한 마을에서 늑대사냥을 하며 사는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겨우내 사냥하고 늑대 가죽을 무두질하여 이틀이나 걸쳐 산 밑으로 내려가 가죽을 팔아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사냥꾼이었습니다. 사람과 잘 소통하지 못합니다.
그는 사실 방앗간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주고 그 여인의 아버지와 거래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큰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깁니다. 그녀는 임신하였지만, 몸이 약했습니다. 그곳엔 의사가 올 수 없었기에 사냥꾼이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지만, 그녀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기를 낳다가 여인이 죽습니다. 아기도 죽습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가 딸이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도 자신에게 팔아넘겼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챕니다. 분노에 가득 찬 그는 아내의 시신을 지고 장인을 찾아갑니다. 장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이제 막내딸을 보여주며 돈을 내고 딸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딸은 이 사실도 모른 채 사냥꾼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냥꾼이 파놓은 언니와 조카의 두 무덤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사용하라고 독약과 같은 약초를 줍니다. 딸은 임신하여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곳을 탈출해야겠다고 여기고 차에 독초를 타서 남편을 죽이려 합니다. 사냥꾼은 이유도 모른 채 몸이 약해져 갑니다. 이를 틈 타 아내는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짐승을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립니다.
사냥꾼은 간신히 아내를 찾아 데려왔지만, 아내는 얼어서 거의 죽음 직전이었습니다. 유산은 했지만, 사냥꾼은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서 살려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를 놓아줍니다. 원하지 않으면 내려가라고 합니다. 사냥꾼은 아내가 자신에게 독을 먹였다는 것을 알았고 쓰러져서 혹독한 겨울을 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두 딸의 아버지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으로 딸을 팔아도 딸이 잘 살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아내를 사는 사람에게서 딸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건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사냥꾼도 지극정성으로 두 자매인 아내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만약 아내들을 위한다면 병원이 가까운 동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는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두 딸은 돈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자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운명은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상하고 사랑스러우면 아기는 세상을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악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악하면 자녀도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므로 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를 어떻게 한 번 정해진 바꿀까요? 잔인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기는 아빠가 일란성 쌍둥이일 때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그저 자신에게 밥을 주는 대상을 아버지, 어머니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실제로는 이 세상에 속하고 싶어서 세상 아버지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선택했으면 아기들처럼 그 아버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는 다섯 명의 범죄자 집단에서 길러진 화이란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범죄자 집단에서만 머문다면 당연히 범죄자가 됩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세상에 갇힙니다.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화이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돼야지…. 안 그래? 그래야 같이 살지.” 나쁜 아버지들은 화이가 자신들의 편이 되게 하려고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합니다. 화이는 그 아버지들과 살면서 괴물을 봅니다. 괴물 아버지들과 함께 머물면 괴물들의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화이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한 다섯 명의 아버지를 죽입니다. 우리는 괴물처럼 되어서 세상에서 적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참 아버지 하느님을 죽인 그 아버지를 죽여서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면 그분은 빛이 되어 우리가 지금까지 섬겨왔던 대상이 괴물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아에 조종당하여 죽인 분이 나의 진짜 아버지이심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1)
천국으로 가려면 새로운 아버지가 지금 나의 아버지를 죽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아버지를 죽여야 합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지옥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만 일어납니다. 이는 상황이 아닌 아버지를 잘못 선택한 탓입니다. 그 지옥이 지금까지 내가 섬겨온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모기로 머뭅니다. 모기는 사랑하려 해도 피를 빨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을 부모로 섬길 때 하느님의 자녀로 지금까지 키워주신 부모님을 사랑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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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21-30: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21절) 그분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박해하려고 찾았으며,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그분을 찾았다. 바리사이들은 악의에 차서 잘못된 방식으로 그분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24절) 하신 것이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된 의도로 찾는 이들에게 일어난다. 예수님은 악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시는 데 이들은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21절) 하셨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이는, 진리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와 지혜를 믿는 이는 불의를 행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25절) 하고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25절) 이 말씀은 그들은 그분의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처음부터”라는 말씀은 당신 자신이 이미 “한 처음”(요한 1,1)이신 말씀이심을 나타낸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미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당신도 참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참되신 분의 아들로서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이야기하셨으나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27절) 한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28절)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이 수난을 통하여 들어 올려지기 전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들어 올려짐’은 십자가로 들어 올려짐이며 이 들어 올려짐은 그분의 치욕이었다. 이 수난은 이 말씀을 들은 이들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으나 언제나 함께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이 가신 곳이면 어디나 계시다. 아드님을 버려두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29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경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는 부여되어 있지만,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다시 그 은총의 때를 맞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있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때를 잘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는 결단을 내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을 내릴 기회가 주어져 있으므로 거기에 관한 결과도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책임 있는 선택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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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간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나는 간다.”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이 곧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뒤에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나는 간다.”라는 말씀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끝끝내 거부하면, ‘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닥치면 그때서야 두려워하고 후회하면서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는 말씀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시는 재림의 날은, 믿고 회개할 기회는 없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니 믿고 회개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믿고 회개하는 일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후회할 틈도 없이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24)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3장에 있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위에서(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것만(세속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가지려고 애쓰면서 산다면, 그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죄에서 벗어나야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허무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라는 말씀은, “만일에 너희의 죄와 그 죄에 대한 심판에 관해서 말해야 한다면, 할 말이 아주 많다. 너희의 죄가 그만큼 크고, 또 많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지금 죄 속에서 살고 있다.”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처음부터 심판관으로 오셨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입니다.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는 “인간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구원을 선포할 뿐이고, 구원하려고 애쓸 뿐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믿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아라.”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3,17) <복음서에 있는, 심판과 멸망에 관한 말씀들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8-29).”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는 표현으로는 십자가 수난을 가리키는데, 뜻으로는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모두 뜻합니다.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는 “내가 구세주라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입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는 당신의 말씀들이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가르침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구세주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닫고, 나를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아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심판의 날이 닥치면, 그때서야 깨닫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라는 말씀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29절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쪽에서 한눈을 팔고, 딴 생각을 하면서 하느님(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을 때가 많고, 하느님(예수님)의 도움을 안 받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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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세계명작 동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인 마크 트웨인은 가난한 이, 흑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1905년 미국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명한 ‘가쓰라 태프트’조약입니다. 이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필리핀으로 보냈습니다. 젊은이들을 보내기 전에 교회는 ‘전쟁을 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필리핀에는 많은 전쟁고아와 과부들이 생겼습니다. 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필리핀의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의 을사늑약을 통해서 외교권이 박탈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의 기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우리 주 신이시여!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해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 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아멘.” 마크 트웨인 사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던 이 도전적인 이야기는 ‘거대한 흥분이 들끓어 오는 시대’가 묘사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진정 전쟁의 기도는 ‘적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부상병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며, 죽은 아들을 부여잡은 어머니의 울부짖음’이며, 또한 ‘적군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며 생명이 시들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후각은 개보다 못합니다. 표범보다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시력은 독수리보다 못합니다. 지구별에 살아온 시간도 인간은 다른 종보다 훨씬 짧습니다.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월주의는 다른 종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같은 종인 인간끼리도 폭력과 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었습니다. 인간은 혼인 잔치에 가장 늦게 초대된 손님일 뿐입니다. 같이 초대된 다른 종들을 죽이고, 혼인 잔치의 상을 엎어버리는 것은 손님으로서 할 행동이 아닙니다. 진화는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을 향한 과정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진화의 방향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모든 생명을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순시기’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에는 반드시 양면, 즉 고통과 기쁨, 빛과 어둠,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기쁨을 알 수 없고, 어둠이 없다면 빛을 분간할 수 없으며,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편안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광야를 건너지 않고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나무에 매달아 그 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치유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삶을 인정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요르단의 끝에 가면 바로 앞에 요르단 계곡이 있으며 그 계곡을 넘으면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르단 계곡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구리 뱀을 두른 십자가가 있으며, 기념성당도 있습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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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신자라면, 이 말씀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수난을 뜻한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의 불꽃을 보며 신비롭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데,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고 알려 주십니다.
이로 보아 ‘내가 나’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서 그분의 신성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불신하여 벌을 받아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는데,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 21,9)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구리 뱀이 생명의 표징이었듯이, 새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징표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입니다.(요한 3,14-15)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고 사람들이 물을 때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율법 안에 갇힌 구세주’, ‘이 세상의 메시아’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이 세상을 구원하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의 실존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세상을 거꾸로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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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온 곳을 모르면 가는 곳도 알 수 없다.>
요한복음 1장은 프롤로그(서문)와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퇴출과 예수의 등장을 다루고 있다. 2장부터는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이 시작되어 12장에 이르기까지 꼬박 3년간의 자기계시적 가르침과 활동을 들려준다.
13장부터 17장까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제자들과의 만찬석상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고별사를, 18장에서 19장은 체포, 심문, 사형선고, 수난, 죽음과 무덤에 묻힘을, 20장에서 마지막 21장은 예수부활, 발현사화, 그리고 에필로그(맺음말)로 요한복음은 끝난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에 걸쳐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서 하느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제공된 정보들은 참으로 심오하고 귀중하고 값진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 1장은 '전실존적(前實存的) 그리스도론'을 2장부터 12장은 '하향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 신성의 하느님 본성과의 일치성을, 13장부터 17장은 성령론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값지고 귀중하고 심오한 진리가 당장 그 자리에서 진가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의 진리는 유다교의 지식층으로부터 많은 반대와 오해를 받았고, 갈등과 논쟁을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진리선포와 자기계시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29절) 요한복음 7장에서 8장은 어떤 특별한 육체적 활동 없이 예수님의 순순한 자기계시적 가르침을 피력하고 있다.
물론 후대에 삽입된 요한 8,1-1(간음한 여인에 대한 유다인의 고발과 예수님의 용서의 이야기)을 빼고 봐도 좋고, 넣고 봐도 무방하다.
7장이 예수의 메시아적 기원에 관한 논쟁과 증언을 다루고 있다면, 8장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자기증언으로 예수님의 자기계시가 고조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7장은 나자렛 예수의 인성(人性)에 대한 논란을 통하여 메시아적 신성에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는 반면, 8장은 예수님의 신성에 중점을 둔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정말 그리스도인가? 질문하는 편과 대답하는 편의 간격은 갈수록 멀어지고 더 이상 오갈 수 없는 절벽으로 벌어진다. 이 점에 있어서는 법대로 처리하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냉정함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자비로 용서를 베푸는 예수님의 입장(8,1-11)이 한 몫을 한다.
"나는 간다. 그러나 너희는 그곳에 오지 못한다. 나는 위에서 왔지만, 너희는 아래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21절)
이러한 언명은 예수님과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에 절벽만 있을 뿐 더 이상 이해 가능한 지평이나 공감대가 없음을 뜻한다.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르는 유다인들이 예수가 어디로 가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오신 곳으로 다시 가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더욱 확실한 대답을 주신다. 물론 질문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이지만 군중으로부터는 믿음을 얻는다.(30절)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 하느님 자기계시의 한 방법인 '나는 ~ 이다'(ego eimi; 에고 에이미)라는 도식을 이용하신다고 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주 이 도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 할 것 없다"(6,20)라고 하신 부분이다.
그 외에도 예수께서 '나는 빛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착한 목자이다.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모두 이 도식에 속한다.
이 도식은 참으로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다. 일찍이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조리 있는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탈출 3,14)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는 뜻이 '야훼'라는 말이다.
'야훼'라는 하느님 이름의 참 뜻이 무엇인가?
① 이는 '나는 있는 자 그로다'는 뜻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自存者)임을 말한다.
② 이는 "나는 있게 하는 자 그로다"는 뜻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있게 만든 자, 즉 창조주(創造主)임을 말한다.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필연자(必然者)임을 뜻한다.
③ 이는 '나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자 그로다'는 뜻으로 하느님의 자유와 초월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도식을 사용하실 때에는 하느님께서 본성(本性)에 의거하여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모든 특성이 예수님께도 가감없이 똑같이 해당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유다인도 이런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결국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높이 달려질 때 가서야 예수님의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운명이다. 수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듯이, 십자가 없이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정확한 진리도 없다.
그렇다고 십자가가 목적이거나 끝은 아니다. 예수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목적이요 끝이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아 죽이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께서 오신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목이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더 많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십자가의 운명을 목전에 두고도 아버지께서 기뻐하는 일을 한다(29절)는 예수님의 입가엔 미소가 도는 듯하다. 나의 십자가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도 웃으며 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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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재만 마르코 신부님]
옛날에 한 왕이 의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하루에 얼마만큼 먹는 것이 좋겠소?”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현재의 폐하의 상태로는 하루에 500그램의 음식을 드셔야 음식이 폐하를 지탱해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드시면 폐하가 그것을 지탱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알맞은 음식은 왕을 활기차게 건강하게 해 줄 수 있지만 지나친 음식은 왕의 몸을 비만상태로 만들어 왕에게 큰 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같은 음식이라고 몸을 건강하게 할 수도, 건강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생명이시다. 하느님은 진리이시다.”란 말씀이 성경에 있지만 이 말씀들을 생각하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이 하느님 자녀로서 본분을 다한다고 할 수 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고, 또 우리인간은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이나 진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형태로 인간이 만든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 등이 필요합니다.
인간 공동체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는님 말씀, 진리의 정신이 담긴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 등이 필요합니다. 이런 각종 지켜야 할 것들은 우리들이 하느님 말씀, 진리를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을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 말씀, 진리의 정신이 담긴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 등이 계속 후손대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악한 욕심은 항상 자신의 나쁜 욕심을 채우는데 잘 빠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심지어 하느님까지 속이면서까지 나쁜 욕심을 채우는데 골몰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선한 것처럼 위선적인 삶을 삽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하느님 말씀, 진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을 지키는 척 하지만 실상은 그 본정신은 모두 내팽개치고, 껍데기로만 지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각종 율법, 계명들이 그랬습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참 이상한듯한 풍습,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이신 하느님께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이상한 모습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음식이 왕에게 건강한 몸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듯이, 인간 세상의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도 그것이 하느님 말씀, 진리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악마가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플라스틱이 햇빛에 쐬게 되면 진인지, 기름인지가 다 빠져버리고 나중에는 맥없이 부스러져 버립니다.
하느님 말씀, 진리라는 진(기름)이 다 빠져버린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느님께 아무 가치도 없게 되고 단지 악마의 즐거운 쉼터, 왕국의 역할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인간 육신을 지니고 오셨으며, 우리들도 하느님의 창조 작품이기에, 예수님이 위에서 오셨다면, 당연히 우리 인간들도 위에서 와야 할 것입니다.
세상 인간이 아래서 왔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지 못하고, 하느님 말씀, 진리의 진(기름)이 다 빠져버린 단지 껍데기뿐인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 등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런 큰 잘못된 심각한 병에 그 당시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선한 체 했지만 교만과 착취의 죄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 구조적인 비리를 예수님이 그냥 눈감을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호되게 비판하셨습니다.
이런 잘못은 꼭 그 시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나쁜 욕심을 채우는 일 곧 유혹에 떨어지는 일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썩어질 세상 이익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들 인간은 썩어 없어질 세상 이익이 전부이고 완전한 것인양 착각을 잘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는 사이에 하느님 말씀, 진리의 진(기름)으로 가득차 있던 법, 질서, 규칙, 도덕, 풍습 등이 조금씩 빠져나가서 나중에는 하느님 보시기에 아무 가치없는 쓰레기로 변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더 이상 위에서 온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위에서 오신 구세주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생명,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본시는 위에서 왔지만, 위에서 온 인간으로 살지 못하는 인생,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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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
오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들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모든 것이 단절된 다음에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된다는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미사를 드리기에 앞서 주님이 누구인지 알아뵈올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자신의 고정관념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과연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일화를 하나 소개하면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정말 성실히 살아가는 젊은 수녀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기도나 주어진 소임에서 항상 충실했으며 모든 일에 빈틈이 없으셨습니다. 늘 가난한 이를 염두에 두고 절제된 삶을 사셨던 수녀님이 어느 날 공동체의 대표로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동안 계속된 총회는 매번 밤 늦도록 계속 되었고 참석자들은 지쳐갔습니다.
그러자 넷째 날 오후, 진행을 맡은 신부님이 참석자들을 배려하여 휴식 시간을 갖게 했습니다. 참석자 모두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운 오후 한 때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그 젊은 수녀는 처음에는 일행과 함께 어울리다가 화가 나서 이내 버스 안으로 들어와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생각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오후 한 나절 쉬지 않으면 더 빨리 회의가 진행되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을 텐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논의하면서 이렇게 고급스런 음식을 먹고 쇼핑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데 긴 시간 혼자 버스 안에 앉아 있으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오늘 함께 있던 동료들과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수녀님의 대답은 “Yes” 였습니다. 술꾼이요 먹보라고 불리울 만큼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리셨으며, 제자들을 자신의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
총회를 마치는 파견 미사의 나눔 시간에 수녀님은 자신이 얼마나 성숙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지 못한 차가운 사람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어진 아버지의 비유에서 큰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하느님에 갇혀 있던 수녀님은 이 체험을 통해 자기 곁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수녀님의 이야기는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유대인들, 새로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상기시켜 주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당신이 누구이신지 말씀을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수난 앞에 세 번이나 배반하고 말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본 뒤에야 진실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것들로부터의 죽음이 필요하구나. 나를 온전히 내려 놓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수녀님이 홀로 버스 안에서 처음에는 다른 이들을 비판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던 선으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의 선으로 건너갈 수 있었듯이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들이 사라지고 무너져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비로소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참외가 호박에 접붙여지는 말씀을 드렸듯이 그렇게 우리의 뿌리가 잘리고 그분의 뿌리에 딱 붙어 그분과 하나되어 자랄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그분의 마음의 드는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자신이 생각해 왔던 하느님관의 뿌리를 잘라내는 일 자체가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완전히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고 그분으로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과 전혀 다른 예수님께서 다가오실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라고 유다인처럼 예수님께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이미 일어 주신 그분, 십자가를 지시고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신 그분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말하고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께 믿음을 두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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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신원을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사실, 예수님께서는 앞 문장에서 이미 당신의 신원을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두 가지로 밝히십니다.
<첫째>는 ‘위에서 온 분’으로, 곧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니 그분께 속한 이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둘째>는 ‘내가 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를 일곱 번에 걸쳐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그렇습니다. 진정,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나”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입은 이 빛 안에서 사순의 길을 따라 갑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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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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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세상 그 너머>
요한 8,21-30 (예수님의 신원)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이 세상 그 너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지만
이 세상에
기꺼이 속하신 분을
참으로 깨닫는
단 하나의 길은
이 세상에
속할 수밖에 없지만
이 세상에
애써 속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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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 마음과 하나 되길>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으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갖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났다면 큰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없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기왕이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과를 보내되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엮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아래에서 왔다고 아래 것만 생각하고 아랫것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갇히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순응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 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0)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어떤 아가씨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답니다. 램프를 쓱쓱 문지르니 요정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입니다.”
그 아가씨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돈도 가지고 싶고, 남자도 만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한 번에 다 말하면 되겠다!”
그래서 램프의 요정에게 말했습니다.
“돈남자결혼!”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아가씨는 ‘정신이 돈 남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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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불 뱀과 구리 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히브리 백성은 광야 생활을 하며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고, 불 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백성이 모세에게, 모세가 하느님께 간청하자, 하느님께서는 기둥에 구리 뱀을 만들어 매달아 놓게 하십니다. 그 결과, 불 뱀에 물렸던 자들도 구리 뱀을 바라보고 다시 살아납니다. 여기서 불 뱀은 저주와 죽음을, 구리 뱀은 구원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 높이 올려 지시어 저주받은 죄인처럼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영광스럽게 현양되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의 구리 뱀과 같이, 죄와 죽음의 저주 속에 갇힌 인류를 구원과 생명으로 이끄시는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광야 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처럼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민수기 이야기 속의 불 뱀에게 물린 이들과 같이 저주와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까요? 특별히 미사 때마다 높이 들어 올려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바라볼 때, 우리는 구약의 구리 뱀을 바라본 이스라엘 백성처럼 영원한 생명과 참된 구원으로 초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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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
<당신은 누구요?>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보니,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로부터 점점 더 센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겁니다.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누구요?"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8,28)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십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를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입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21,8)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다시 살아납시다!
제8처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이 십자가 길에서 부인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십자가의 길에도 많은 구경꾼들이 있는데, 그들도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를 보고 위로받게 됩니다. 십자가 자체는 순간순간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내가 짊어진 십자가는 세상에 위로를 줍니다. 아름다운 감동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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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 방학을 맞이해서 본당에 있는데 사무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 왔는데 조금 만나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이었는데, 이 형제님께서는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신학생이면서 나를 못 알아보느냐?”
스스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믿지 않는 유다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표징을 통해 충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자기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보여 준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믿으라고 말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연락받고 성당에 오신 그분의 부모님께서는 집에서도 자기가 예수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가족을 폭행했다고 하더군요. 알아보지 못해서 화가 난다며, 집안의 집기류를 집어던지고 욕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폭력적인 모습으로 오실까요?
과거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정신이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이라는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봐야 했습니다. 그 행하신 일은 전혀 보려하지 않고 무조건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믿으려 들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해 마지막 소리를 돋우어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십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려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믿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잃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믿기 힘들다면서 “당신이 누구요?”라고만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한낱 갈릴래아 사람, 나자렛 예수 등으로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틀 밖에 있는 예수님 모습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알려줘도 그들에게는 우이독경이라는 사자성어처럼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믿으려 들지 않는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보낸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갖출 수 있도록 많은 사랑과 은총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과거 유다인들처럼 믿을 수 없는 이유만을 만들면서 주님 곁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구원도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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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신원>
-예수님 믿음, 예수님 따름, 예수님 닮음-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가 평생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묻고 찾으며 알고 믿고 닮아가야 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역설적으로 ‘참내(眞我)’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다음 바리사이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세례 받기전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바로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이란 말마디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처럼, 예수님은 성부와 같은 신적 차원의 존재이기에 절대적으로 성실하시고 또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아래에서 와서 세상에 속해 살다가 죄 속에 죽을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밝혀지는 예수님의 신원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우리의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 공부에 열중함으로 주님과 일치의 관상적 삶을 살 때 이를 수 있는 경지의 고백일 것입니다. 어제 예수님의 명언의 진리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자기를 계시하신 주님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늘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바로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어둠과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빛과 생명의 구원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는 어둠과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뜻하고, 죽는다는 것은 그런 영역으로 영원히 빠져버림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어둠과 죽음에 빠진 죄인들의 모습이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모세의 영도하에 어둠과 죽음의 땅을 상징하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여정’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련에 직면하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져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그대로 우리 인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세례받았다 하여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아니라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분투의 노력이 삶이 있어야 함을 봅니다. 여기서 중재자 모세는 그대로 예수님의 예표처럼 보입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진저리가 나오.”
과거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를 까맣게 잊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백성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찬미와 감사로 표현되기 마련인데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은, 찬미와 감사는 완전히 실종된 모습입니다. 정말 깨어 살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도 이렇게 죄 속에 떨어질 수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의 죄로 죽어가던 백성들의 간청에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드렸고 주님은 기꺼이 응답해 주십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불평의 죄입니다. 모세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모세는 즉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에 물린 사람마다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그대로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이 상징하는 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여기 제대 뒷면 벽에 높이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영원한 믿음의 표지,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임을 깨닫습니다.
어둠과 죄에서 벗어나 생명과 빛의 구원을 살게 하는 십자가의 예수님 은총입니다. 참으로 우러러 바라볼 대상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의 신원은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신적 존재임을,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런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님처럼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구원과 행복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처럼 살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참 행복의 구원의 길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말미의 예수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또한 예수님의 고백처럼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예언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12,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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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S6UVVx3w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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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닫을 것이다."(요한 8, 28)
포장을
뜯어버리면
거기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로
찾아 오시는
주님이시다.
들어 올려진
십자가로
참된 사랑을
드러내시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십자가로
말씀하시는
주님이시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진실한 구원의
선물이 된다.
조건 없는
사랑이신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는
하느님의
들어 올려진
가장 좋은
선물이 되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서로를 살리는
길이 되었다.
십자가 없이는
열매가 맺어질 수
없다.
사랑이
십자가이며
십자가가
사랑이다.
십자가가
거짓 사랑을
허문다.
사랑을
가리키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만나는 사순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합일점이
되는 십자가이다.
우리 삶에
하느님의
현존인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가
참된 삶의
깨달음이다.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로
하느님의 일을
뜨겁게 하신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십자가임을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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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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