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게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가 《논고》라면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 이하 《탐구》로 약칭함)이다. 두 저서를 관통하는 일관성은 두 저서 모두 언어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상반된다.
초기의 저서가 인공언어에 집중하고 있다면, 《탐구》에서 고찰되는 것은 일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언어가 지닌 규칙성에 대한 상반된 접근과 맞물려 있다. 《논고》에서 언어의 규칙은 엄격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어떠한 오류도 용납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서 《탐구》에 나타난 언어의 규칙은 엄격한 법칙이라기보다는 게임의 규칙과도 같은 것이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언어 활동을 종종 게임에 비유한다. 게임에서 규칙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닌 게임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유동적인 규칙에 불과하다. 가령 땅따먹기와 같은 게임의 규칙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땅따먹기라는 게임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규칙은 항진명제나 모순명제의 성격을 지니는 것도 아니며, 엄격한 함수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놀이를 하는 과정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단어를 빌자면 게임의 규칙은 그것에 참가한 사람들이 게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인터페이스’에 불과하다.
이렇게 언어를 게임에 빗대어 설명한다는 것은 곧 언어가 그것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언어 활동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언어의 의미나 규칙은 전적으로 언어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규칙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양식(forms of life)’에 기반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개념은 후설의 ‘생활세계(Lebenswelt)’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후설에게 모든 언술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 지층이 ‘생활세계’였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언어적 특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삶의 양식’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규칙을 더 이상 보편적인 법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모든 언어는 제각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맞물려 있으므로 다양한 특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삶의 양식이 지닌 다양성만큼이나 언어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언어는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기도 한다. 이러한 공통적 특성은 더 이상 논리적인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언어들이 지닌 공통적 특성을 지칭하기 위해서 ‘가족 유사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가령 외견상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해주는 엄격하고도 보편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한국인들에게는 어떤 외모적 유사성이 존재한다. 가족들 간에도 매우 엄격하게 규명할 수 있는 어떤 동질적 특성은 없지만 왠지 모를 외모상의 유사성이 존재한다. 바로 이러한 유사성을 ‘가족 유사성’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언어들은 서로 다르고 구분되지만 왠지 모를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는 결코 논리적 보편성이 아닌 어떤 직관적이고도 모호한 유사성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언어는 게임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