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기원전 356년∼323년)
∎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으로
이때야말로 진정으로 페르시아 정복 전쟁을 했던 기간이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걸로 페르시아 땅 전부를 차지했다고 오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 반란군을 잡으려고 동쪽 히르카니아 지역을 시작으로 마드리아를 거쳐 아리아 지역으로 진군하며 반란군과 기타 반군들을 진압하고 나바르자네스의 항복을 받는다. 그리고 아리아 지역의 수시아에서 반란군 수장 베수스가 박트리아(혹은 자리아스파로 불렸다) 지역으로 도망친 뒤 왕중왕(샤한샤)을 자칭하며 이름까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로 개명한 뒤 자신의 박트리아 군대와 스키타이의 지원군까지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군대를 모은 뒤 아리아 지역의 아르타코아나로 진군해 먼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에게 회유된 아리아의 지방관 사티바르자네스를 축출했고, 다음으로 드랑기아나(자랑기아)로 진군해 다리우스를 살해했던 지방관 바르사엔테스를 공격한다. 이때 바르사엔테스는 인더스강 서쪽까지 도망갔지만 현지인들이 오히려 바르사엔테스를 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압송해버렸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살해 죄를 물어 바르사엔테스를 처형한다. 자랑기아에서 필로타스의 반란음모를 겪은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지휘관을 바꾸고, 달아났던 사티바르자네스가 군대와 반란 세력을 이끌고 아리아 지역을 침공하자 진압하여 죽이는 등 군대와 지역을 재정비한 뒤 인도 캅카스(지금의 힌두쿠시 산맥)를 넘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가 다스리던 박트리아로 향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청야작전을 벌이며 진군을 방해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박트리아 지역으로 진군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는 옥수스 강(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도주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없는 박트리아 지역의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추적해서 옥수스 강을 건넌다. 이때 배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가 다 태워버리고 척박한 지역이라 땟목을 만들 나무도 부족했지만 가죽에 짚을 채운 배로 도하에 성공한다. 그렇게 추격하던 중 알렉산드로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의 부하인 스피타메네스와 다타페르네스가 베수스를 억류했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주겠다는 전갈을 받고 이 제안을 따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잡은 베수스를 발가벗긴 뒤 목줄을 매어 끌고 다니면서 모욕한 뒤 다리우스 살해를 추궁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는 자신은 공모한 사람중 하나에 불과하고 다리우스를 살해한 이유도 알렉산드로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변호했지만 다리우스 살해 후 도주한 시점부터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를 채찍질 시킨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베수스)를 사로잡은 뒤 타나이스 강(또는 약사르테스 강, 지금의 시르다리야 강) 지역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의 부하들과 동맹세력이던 지역부족들과 스키타이를 진압한다. 그렇게 가자를 시작으로 키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스키타이군까지 패퇴시킨 뒤 스키타이 왕과 휴전을 맺는다. 그 직후 스피타메네스(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배반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준 사람)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격퇴시킨 뒤 자리아스파(박트리아)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를 끌고와 다리우스 처형을 질타한 뒤 코와 귀를 잘라버린 뒤 오체분시로 공개처형을 시켜버린다.(기원전 329년, 출처-아리아노스, 알레산드로스 원정기)
사고디안 부족을 격파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하였는데 박트리아는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지역으로 인도와 꽤나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록사나라는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첫 번째 아내였다.
∎ 부하들에 의한 암살시도
이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음모를 주도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교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 뒤 페르시아식의 궁중예법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예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면 시종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만나서는 우선 반지에 입을 맞춰야 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있어 이러한 짓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중복을 입으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에 두었었다. 게다가 논공행상을 할 때도 많은 페르시아인 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입장에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그들과 동등한 직책을 맡은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파르메니온(Parmenio, 기원전 400년경∼330년)
이때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자 알렉산드로스 다음가는 사령관인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 암살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를 고문한 다음 죽인 뒤 파르메니온의 군인들에게서 받고 있는 높은 신뢰는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그를 매우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암살한 것.
∎ 클레이투스(Cleitus, 기원전 375년∼328년)
일찍이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로 건너온 뒤 벌인 첫 번째 전투인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생명을 구한 바가 있는 클레이투스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클레이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면서 사적으로도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접근을 거의 허가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모처럼 그들을 모아 놓고 술자리를 벌였다. 그는 모인 장군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인 필리포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 출신의 악사가 페르시아의 승리와 마케도니아의 패배를 뜻하는 노래를 불러 그것을 알렉산드로스가 좋게 듣자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불편해하다가 갑자기 클레이투스가 우리가 운이 없어 진 걸 왜 들먹이냐며 화를 내면서 분위기를 제대로 망친다. 알렉산드로스는 운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라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사태가 점점 나빠졌는데 클레이투스가 그럼 그라니코스에서 제가 용기가 없어 폐하를 구해드렸단 말입니까?라는 말로 화를 돋웠고 클레이투스나 알렉산드로스 모두 이 때 매우 취한 상태였는데 클레이투스는 멈추지 않고 알렉산드로스와 악사에게 맹비난을 퍼부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덕택이며 이것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필리포스를 폄하하며 자신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에 도취된 알렉산드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주변 사람들도 『이 인간이 미쳤나』 하고 생각하여 그만하라고 했지만 클레이토스는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으니, 폐하께서 자유가 싫으시다면 우리를 모두 쫓아내시고 노예들만 데려다가 잔치를 하시든지 하십시오.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불을 질렀고, 하마터면 알렉산드로스는 칼을 뽑을 뻔 했다.
신하들은 왕을 진정시키며 클레이투스를 내쫒으라고 명령하였으나 원래부터 거칠어서 술 취하면 더 심해지는 클레이투스는 근위병들한테 끌려가면서도 계속 불평을 토로하여 화를 자초한다.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나 싶을 때 다른 문으로 도로 들어온 클레이투스가 우리 수많은 용사들이 세운 공적을 왕이라는 한 사람이 빼앗아갔다!고 소리를 질렀고 가뜩이나 술 취한 데다 불평과 폭언에 정신이 나간 알렉산드로스는 호위병의 창을 빼앗아 클레이투스를 꿰뚫어 죽인다. 당연히 현장의 사람들은 당황했고 창을 들고 있던 왕 역시 패닉에 휩싸여 클레이투스를 찌른 창으로 목을 찌르려 했고, 놀란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제지해서 방으로 끌고 갔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음날 술에 깬 상태에서 클레이투스를 죽인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사흘간 죄책감과 슬픔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되는 바람에 신하들이 설득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마케도니아 장교들과 알렉산드로스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다.
∎ 인도 정벌의 착수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원정을 희망하였고 우선 인더스 강 서쪽, 지금의 파키스탄 서쪽 지역에 있던 지방 영주들을 소환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영주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 영주들은 반항하며 거부하였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해 군대로 공격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는 동안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그에게 반항하고 부상을 입힌 영주들은 일족까지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영주들 휘하의 도시 시민들도 모두 학살당했으며 건물 기초까지 부숴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그제 서야 지방 영주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하여 알아서 기어들어왔다.
알렉산드로스는 파키스탄 지역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지역까지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 대륙의 끝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남쪽에 위치한 파우라바라는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히다스페스 강 전투가 벌어진다. 알렉산드로스는 대략 4만여 병력이었고 포루스는 5만여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의 일부를 본 진영에 남겨 대군이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밤에 몰래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넜다. 포루스는 이에 주력을 이끌고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와 싸웠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우세한 기병(7천 대 4천)으로 포루스의 기병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배후로 돌아가 포루스의 보병을 팔랑크스와 협공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포루스의 파우라바군은 전투코끼리를 통제하는데 실패하여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에 폭주한 코끼리들이 되려 아군을 짓밟고 피해를 주었기에 공격하기가 더 쉬웠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파우라바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포루스는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항복하였고 포루스의 용맹함을 높이 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위에 그대로 앉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선에서 그를 풀어준다.
포루스를 격파하여 인더스 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자신의 죽은 애마인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딴 부케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이번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본토에 침입할 계획을 세운다.
∎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
이때 겐지스 강 남쪽엔 난다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포루스의 파우라바와(Paurava)는 달리 인도 북부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거대 국가였다. 포루스의 부하들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난다 왕조는 갠지스 건너편에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대, 6천 코끼리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라고 말하였고, 이런 사실을 들은 데다 너비가 6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인 베아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도 있어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은 파업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 서쪽으로 철군 명령을 내렸으나, 이 회군 과정 또한 험난하여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는 남은 병력이 인도에서 출발한 병력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보급을 담당한 함대가 인도양의 몬순에 바다 멀리 밀려가 버린 사고 때문이었는데,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대는 게드로시아(현대의 발루치스탄) 사막을 지나고 있었으며, 병사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떠다준 물을 나만 마실 수 없다고 쏟아버린 일화가 바로 이 사막 행군 중의 일이다. 아무튼 이 사람이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 어디까지 갔을 지에 대한 건 역사에서 유명한 얘깃거리 중 하나이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거쳐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는 원대한 중년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을 보면 회군한 게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는 코딱지만 한 땅인데 지금 정복 안 하면 언제 정복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는 엄청나게 넓은 것은 물론이며, 지금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해온 중동이나 페르시아 같은 땅은 넓어도 인구는 적었던 곳들과는 달리 예나 지금이나 인구밀도도 매우 높은 땅이다. 게다가 몹시 덥고, 습하며, 정글 지형까지 있어서 저 멀리서부터 몰려온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싸움이 아니더라도 전염병이나 풍토병에 병력뿐만 아니라 자신도 걸릴 확률이 높아서 그만두었을 것이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단기간에 빠르게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페르시아가 아케메네스조라는 하나의 통치체제 하에서 통일된 지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정치체제도 문화도 서로 다른 각각의 독립된 국가들이 통치하고 있고 지형상으로도 습지와 삼림이 널린 인도를 단기간에 통일한다는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불가능한 얘기다.
인도 원정에서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관료들이 부정 축재를 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 관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볼 때 이토록 빨리 원정을 중단해 귀국할 줄은 예상 못했고, 또한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전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음껏 부정 축재를 벌인 것인데 갑자기 돌아온 알렉산더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처형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 군에게 보상으로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 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 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거부하며 오피우스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 때까지 목을 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한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수스 때 사로잡은 다리우스의 큰 딸과 결혼한다. 재미난 사실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혼도 많았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다면 셀레우코스.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일평생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심복이었던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헤파이스티온의 갑작스러운 급사 때 자리를 비운 해당 의원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이고, 이후 콧사이오의 부족을 정벌했을 때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그 부족의 청장년 장정들을 모조리 목을 베어 학살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지기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젊었기 때문에 아랍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쓰러지기 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네아르코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일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다음 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에우메네스가 기록한 왕의 일지(Royal Journals)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독살의 징후는 없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사람을 서서히 죽어나가게 하는 독은 현대에도 드물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실려 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은 심한 열 때문에 목욕실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왕은 침실로 돌아와서 메디우스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왕은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심했다.
20일. 평소와 같이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목욕탕에 누워 네아르코스의 항해담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21일. 전날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만 열이 심해져서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다음 날은 열이 더욱 심해졌다. 왕은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나 목욕통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장군들과 의논을 하여 적당한 사람으로 군대에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로 했다.
24일. 병세가 더욱 나빠졌지만 왕은 일어나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장군들은 곁을 떠나지 말고, 하급 장교들은 문 밖을 지키며 밤을 새우라고 명령했다.
25일. 강 건너편에 있는 궁궐로 자리를 옮긴 뒤 잠을 조금 잤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장군들이 침실에 들어갔을 때는 혼수상태에 있었다. 다음날도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돌아가신 줄 알고 모두 몰려와 소란을 일으키며 왕의 막료들을 협박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무장을 벗은 뒤 차례로 왕의 침상 곁을 지나며 쾌유를 빌었다. 같은 날 피톤과 셀레우코스를 세라피스의 신전으로 보내, 왕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나 옮기지 말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28일. 저녁에 마침내 왕이 돌아가셨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암살설을 제기하기도 하고, 너무 젊은 시절에 이룰 걸 다 이뤄서 의욕 상실로 병에 걸려 죽은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학설에서는 죽기 전에 포도주를 6.5리터가량(그것도 원액)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 헤파이스티온도 과음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빙성이 거의 없는 야사이긴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 때부터 독을 먹어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가장 유력한 학설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모기에 물리는 바람에 일종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감염설이 있고, 실제로 고대의 독살설이 제기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방의 풍토병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 말라리아가 의심되곤 한다.
비록, 가설이기는 하나 많은 학자들이 알렉산드로스의 말년의 증세가 말라리아의 감염증세와 너무 흡사하다는 의견이 많다. 말라리아 자체가 안에 있는 적혈구를 감염시키고 혼수상태와 구토와 심한 발열 증상을 나타내어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는데 당시 고대에는 말라리아에 대한 대처법이 아직 없는 상태라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망이 원정 도중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가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난폭한 방식으로 『풀어서』 세상을 정복했던 탓일까, 그의 적통 후계자들은 난폭한 방식으로 몰락하고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워낙 급작스럽고 또한 그가 젋은 나이였으므로 그는 후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록사나는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뱃속의 유복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아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이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왕으로 삼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그들이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이 합의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동생으로 간질에다가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필리포스 3세)를 왕으로 추대한다. 나중에 록사나가 결국 사내아이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양측은 합의하여 이 아기와 아리다이오스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지적장애인과 갓난아기였던 이 둘은 허수아비, 꼭두각시, 괴뢰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 고대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 1세와는 동명이인이다. 좀 더 컸을 때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서구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더불어 쌍벽으로 예우 받는 대철학자이자 자연 과학자였다. 그야말로 만능의 천재. 단 왕자 신분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아 학자로 활동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의 정복 전쟁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단, 그리스식 영웅주의에 아주 빠져 있어서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넣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일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렉산드로스가 항상 갖고 다닌 일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성해 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 이처럼 둘의 사제 관계는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처음에는 매우 좋았던 모양인데, 나중에 가면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동문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를 죽게 만들기도 했고....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죽을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와 계속 교류는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야심이 매우 커서, 부왕인 필리포스의 승전 소식을 들을 때면 매우 울적해 하며 친구들에게 부친께서 이렇게 나라들을 계속 정복하신다면 나와 너희들이 자라서 펼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작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큰 영광과 명성만을 탐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평생을 가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자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
부케팔로스의 일화에서 보이듯, 배짱도 강했다. 자신감이 늘 넘쳐났고, 죽음에 두려움을 보이는 일 없이 용감하였다. 모든 전투에서 선두에 선 것은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을 입었다. 가장 극적인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때에는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기가 찬 파르메니온이 가서 직접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우리가 이미 이기지 않았소? 도망 다니던 다리우스를 쫓아다니느라 우리가 기진맥진하였을 정도니 말이오. 라고 했다. 카파도키아 반도를 넘어가던 중,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얼음장 같은 온도에, 폐렴이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는데, 어의들은 혹 자기에게 책임이 물어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한 의사만이 대왕에 대한 애정으로 나서서, 그를 간호하고 약을 지어줬는데 며칠 후, 정신이 좀 든 알렉산드로스에게 파르메니온이 쓴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인즉 그 의사는 사실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전하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약을 통해 독살을 하려 한다.인 것. 의사가 약을 들고 천막으로 들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사발을 받고 쭈욱 들이키며 의사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편지를 읽은 의사는 바로 사색이 되어 땅에 엎드렸다. 의사는 자신은 절대 이러한 의도가 없다며 살려 달라 외쳤고 알렉산드로스는 남은 약을 들이킨 뒤,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일으켜 세웠다. 군의 2인자인 파르메니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 것이고 이는 들어맞았다.
하지만 부하들의 불평을 흘려듣지 않고 간언을 듣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하나, 이건 인도 원정을 중간에 그만두고 회군한 것처럼 예외의 경우들이다. 파르메니온과 클레이투스와 칼리스테네스가 괜히 죽은 것이 아니다.
자신감이 높은 만큼, 자존감도 높았는데, 술을 마시면 자기자랑을 거하게 하는 편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신탁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신이라 믿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회군하던 때, 화살을 맞은 그가 피를 흘리며 이것은 신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구나.라고 슬프게 말하기도 했다.
물욕, 육욕에 대한 자제심이 매우 강했다. 이수스 전투 이후,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리우스의 아내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그녀의 미모를 나에게 말하지도, 상기시키지도 말 것이다.라고 부하들에게 말하기도 했으며, 페르시아의 여자들은 눈이 아플 만큼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라면서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식욕 또한 필요한 만큼만 먹고, 그 이상의 낭비는 하지 않았는데, 저는 레오니다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식사법을 배웠으니 훌륭한 요리사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침을 맛있게 먹으려면 야간 행군을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으려면 아침을 적게 먹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원정 중반을 넘어가며, 재화가 숙영지에 넘쳐흐르던 때부터는 식사가 사치해 졌으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늘 군인다운 검소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는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욕이 없는 만큼, 베푸는 것의 기쁨을 잘 아는 이가 알렉산드로스였는데, 그는 주위의 인물들에게 지나치리만큼 후한 대접을 하여, 친구들이나 동료 장군들의 부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페르시아의 한 고관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왕께서 오시기 전에 페르시아에는 다리우스 왕 하나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여럿입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장군도 아닌 서기관 에우메네스가 자기 막사에 숨겨놓은 돈이 금과 은 1000탈렌트 이상이었을 정도다. 일개 병사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여서, 어느 날 나귀가 지나치게 무거운 보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을 본 병사가 보물을 나눠 짊어지자, 대왕이 몸소 그 옆으로 다가가 힘을 내거라. 캠프까지 네가 그 보물을 들고 간다면 그것은 모두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정도 깊어, 한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거짓되게 진술하고 전역하려 한 것이 걸렸는데, 그 사유가 고향에 두고 온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게 되자, 대왕이 이를 용서하며 그를 전역시켜 준적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점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도 융화정책을 펴서 그들의 충성을 얻어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철학에 감화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집트에 갔을 때도 굳이 파라오 칭호를 받은 것도 이집트인을 포용하기 위한 것. 사실 페르시아에 쳐들어갔을 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복수하자고 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다. 문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랑 휴전을 했던 것.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의 지배를 받는 걸 못마땅해 하자 시선을 밖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 이후에도 그 야만인들을 잘 구슬려서 충성을 받은 걸 보면 정치적인 융화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제력이 매우 강한 편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충동적 행동도 적지 않았다. 자제력이 강한 모습들도 이러한 충동적 천성 때문에 생겨난 태도가 아닐까 싶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 후회한 것이나,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회한 것, 술에 취해 자신의 은인이자 신뢰받던 장군이던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 등이 그것이다.
수많은 정부 중 하나인 판카스테와의 일화는 그의 자제력을 알아주는 좋은 일화이다. 판카스테를 모델로 한 여신그림을 그려달라고 화가에게 부탁했는데 판카스테가 그 화가와 사랑에 빠져 연인으로 발전했고 이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판카스테와 화가의 결혼식을 도와주었다.
아내를 여럿(아시아 계통) 두었다. 첫 번째 왕비는 박트리아 부족장의 딸인 록사나였는데, 록사나와 결혼한 이유는 아마 다리우스 3세의 장녀 스타테이라 2세와 결혼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록사나와 관계를 맺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두었으나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원정에 쏟아 부었고, 아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요절했으니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적장이었던 로도스의 멤논의 아내였던 바르시네를 후궁으로 삼아 또 다른 아들도 두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 하지만 헤라클레스 역시 그가 죽은 뒤 등장한 디아도코이(Diadochi, 후계자) 간의 내전 중에 카산드로스에게 독살 당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이자 최측근이던 헤파이스티온은 흔히 알렉산더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고 오히려 헤파이스티온이 더 키도 크고 잘생겨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막사에 들어왔을 때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그 외 일가는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인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얘기가 있다. 헤파이스티온이 정말로 그의 연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그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할 당시에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슬픔과 좌절감에 사로잡혀서 헤파이스티온의 건강을 돌본 의원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죽은 헤파이스티온을 기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거대한 기념물들을 건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또다른 동성 연인으로 유력한 인물은 페르시아 출신의 미소년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였다. 그는 외모가 아름답고 가무에 능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총애를 받았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떠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한 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용 경연이 열었는데, 당시에 바고아스가 아름다운 춤을 추어 우승하고 덤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고아스는 관련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심지어 바고아스를 주인공으로 한 《Persian Boy》라는 소설도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20세기에 들면서부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남아 있는 전신상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나타났던 어떤 미적인 규칙을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한쪽 눈은 검푸르고 다른쪽 눈은 하늘색, 그러니까 오드아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떤 유전적인 장애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다시피 한 사람이 영국의 역사가 피터 그린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평균적인 마케도니아 남자의 신장에도 못 미치고 몸은 뒤틀려있고, 목소리는 거친데다 수염도 성기게 나기 때문에 볼품이 안 나서 일부러 면도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다만 혹자들이 제기하곤 하는 필리포스 왕이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외모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택하는 것을 망설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은, 일단 알렉산드로스의 외모가 당시 기준으로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알렉산드로스가 지닌 여러 외모상의 문제점, 그러니까 뒤틀어진 골격이나 오드아이, 거친 목소리 등을 부왕 필리포스로부터의 유전, 나아가서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실의 유전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서출 형제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의 장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추측되는 부분이 있는 바, 때문에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외모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게다가 아직도 알렉산드로스의 외모에 대해서는 꽃미남설이 다수설이다. 불확실한 점이 많다는 것.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부각되었는데, 그의 외모에 대한 논쟁은 그에 대한 논쟁들 중 메이저는 아닐지라도 2천년은 족히 지속되어온 오래된 가십거리로 쉽게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일단 정설로 취급받는 학설은 역사에 획을 그을 정도의 추남은 아니라는 것. 즉 미남이 아닐 수는 있어도 보자마자 혐오감을 느낄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을 거란 것이다. 만약 역사에 회자될 정도의 추남이었다면 그에 관련된 루머나 역사책이 상당 수 남아 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의 절반을 흽쓴 양반이 보자마자 토할 정도의 얼굴인데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도 소소한 장애는 보유하고 있을 수 있어도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장애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일화 중에 날뛰는 난폭한 말에 올라탔다는 일화, 무용담, 또 왕에게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을 경우 왕이 되기 힘든 그 당시 사회상, 언제나 전쟁터에 군대와 함께 섰었다는 걸 생각했을 때 장애설은 신빙성이 낮다. 발을 절뚝거리며 몸이 뒤틀린 사람이 전쟁터에서 선봉에 서고도 살아 돌아오는 걸 반복할 가능성은 낮다. 물론 신체장애가 있음에도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사례도 상당히 있는 편이며, 한 예로 영국의 리처드 3세는 심한 척추측만증으로 별명이 곱추왕이었지만 전쟁터에서 뛰어난 기사로 이름을 남겼다. 절름발이였던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왕이 되려 하자 불구인 왕이 나라를 몰락시킨다는 신탁이 나왔다. 그러나 리산드로스가 신탁에 대해 부정한 태생의 사람이 왕이 되면 왕국이 절름발이가 된다는 의미로 주장하여 사생아로 의심을 받던 조카를 제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애시당초 위에 나온 추남설은 대다수가 근대에 와서 제시되기 시작한 의견으로 『클레오파트라』는 미녀가 아니었다 등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 당시의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 확실하게 미남인지, 평범한지, 추남인지는 유해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유해가 있을 곳으로 보이는 지역이 알렉산드리아이고 유력한 곳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궁전 지역인데, 현재 바닷속인데다가 추정만 할 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의 행보는 사실 냉철한 현실주의에 기반한 합리적 행적들이라기보다는, 야망에 불타오르는 청년의 겁 없는 모험담에 가까운 면모가 많다. 이를테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된 그의 왕자 시절 모습과, 군주 시절의 원정 준비 작업을 살짝 들여다보자.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하고 말겠어.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 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군대는 보병 3만 명과 기병 4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보병 4만 3천 명 그리고 기병 3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설에 의하면 그는 70탈렌트 정도의 군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두리스의 설로는 군량미 30일 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오네시크리토스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에게 2백 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쨌든 대규모적인 계획의 준비로서는 변변치 못한 준비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일이 염려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 자에게는 많은 토지를 주고, 어떤 자에게는 한 마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구를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에 맞도록 각각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야 군비를 수송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라고 그는 대부분의 왕실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그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다. 희망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말했다.
그럼 대왕을 모시고 떠나는 저희들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열전』 中
또한 그는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전을 내팽개치고는, 전투 대형의 맨 앞에서 보통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위험을 무릅썼다. 물론 적들은 복장을 통해 알렉산드로스를 알아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유사시 그가 사망하여 발생할 정국의 불안정을 막기 위해 혼인해서 자식을 낳을 때까지 정복을 멈춰달라는 조언들마저도 무시했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일화이기는 하지만 그는 후계자에 대해서 가장 강한 자(kratistos)!라는 말만 남기고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당연히 이러한 행동들은 후대의 군주들이 절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될 무모함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사나이의 피가 끓지 않는가? 바로 이 때문에, 따라 해서는 안 되는데 뭔가 멋있는 사람으로 후대인들에게 길이길이 회자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군주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대왕병을 앓게 된다. 대표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들 수 있는데, 카이사르가 33살의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내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죽었지만, 나는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개탄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물론 헬레니즘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에다가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합쳐놓은 정도의 판도이기에, 넓기는 하지만 몽골 제국이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후대의 거대 제국들에 비하면 의외로 작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대 그리스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유서 깊은 문명 지역이란, 그리스,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 인도였으며, 이러한 영토들 중 인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했다. 게다가 대영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형성된 거대 제국이기에, 개인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비견될 만큼 거대한 영토를 정복한 군주는 칭기즈칸 정도 꼽을 수 있겠다.
친구 헤파이스티온과의 뜨거운 관계로 다른 방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또한 부하 장병들에게 현지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하였는데, 이 역시 그리스와 동양을 혈통적으로 결합하여 이상적인 세계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정된다. 이런 동서 문화 융합 정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해서 반역 음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런 융합 정책 때문인지 로마 때는 폭군으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지만 소아시아의 왕들 중에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로 부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한 영웅시되는 일이 더 많았다. 일례로 티무르의 생애를 다룬 열전에서 그 지역의 위대한 왕들의 이름을 얘기 할 때 알렉산드로스도 언급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 있어서 책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터키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oun 또는 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한 우월감을 상징하는 인물로 쓰이기도 하며 이 인물 때문에 과거의 마케도니아와 관련 없는 현재의 마케도니아도 그리스와 관계가 복잡해진다. 아이러니한 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동방 문화를 받아들여서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욕을 단단히 먹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는 역사서들은 옹호와 비판의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옹호 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예찬하는 경향이 지나쳐서 《창천항로(蒼天航路)》의 조조급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판 쪽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잔인함과 술주정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
그 인기 때문인지 이슬람권에서는 침략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거쳐 서아시아 세계에 전파되어 그의 정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플라톤의 비중도 굉장히 큰 편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가 오래 살았다면 세계 제국과 과학의 발전이 일찌감치 성공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거꾸로 그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남아 있던 헬레니즘 문화의 바탕인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인들의 무지에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사실상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제국을 그대로 계승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현실을 볼 때 설득력 없는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성격이 어쨌든 상관없이 말이다. 앞에서 말한 계획대로 로마로 진공했다고 해도 한니발이나 피로스의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원본은 로마 장군이 연설하면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우리 로마에 쳐들어왔으면 깨졌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주장은 당대에서부터 제기되었는데,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로마로 왔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당시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국력 차이와 인재풀을 생각하면 설사 원정을 실패해도 한니발과 피로스의 신세가 될 확률은 낮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저자였던 유대인들의 땅을 침략한 인물이다 보니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고 있다.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땅 끝까지 진격하여 많은 민족에게서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세상이 그 앞에서 평온해지니 그는 마음이 우쭐하고 오만해졌다. 그가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지방과 민족과 통치자를 굴복시키자, 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앓아 눕게 되자 죽음이 닥친 것을 알고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 자란 대장군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나라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 그의 장군들은 저마다 자기 영토를 다스렸다. 그들은 그가 죽은 뒤에 모두 왕관을 쓰고, 그들의 자손들도 그 뒤를 이어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
한편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전근대 이란인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사산왕조시대 유행하던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관점이며, 둘째는 사산왕조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등장한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역사에 존재한 그냥 유명한 영웅 중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의 견해는 주로 조로아스터교 경전이나 사산왕조 당대의 기록에 의거한다. 이에 따르면 『로마인』 알레크산다르는 성스러운 경전들을 없애고, 성스러운 불꽃들을 꺼뜨렸으며, 이란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이 악의 화신이란 말이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라 악신인 아흐리만, 악룡 아지다하카, 투란의 왕 아프라시압 등과 함께 당당히 실제 악의 화신으로 쓰여져 있다. 이렇게 사악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 이란에 혼란과 분열의 시대가 찾아왔으나, 이를 수습하여 이란에 질서와 정의, 종교와 신앙을 되돌려 놓은 것이 바로 아르다시르 1세라는 것이 사산왕조의 공식 입장이었다.
반면 이슬람세력의 정복 이후, 구체적으로는 10세기 이후 페르도우시의 샤나메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저술된 에스칸다르나메 등에 등장하는 에스칸다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에스칸다르가 사실 이란 혈통이라는 주장도 있고, 이란을 정복한 후에도 특별히 뭘 파괴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패배자인 다라 왕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자기 딸을 에스칸다르에게 결혼시켜 왕위를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란의 왕이 된 에스칸다르는 세계 각지를 정복하며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된다. 나중 가서는 정복왕이 아니라 현자, 예언자라고 쓸 지경이다.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에스칸다르 전설 자체가 유럽의 알렉산드로스 전설들이 수입/번안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이슬람적/이란적 색채로 변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란이 타국 세력에 정복된 이후이고, 이란의 지배 세력이자 독자 정체성의 근간이던 조로아스터교 세력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외국 침략자에 대한 혐오가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산왕조시대에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증오가 상당히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났음은 전술한 대로다.
현대 이란의 일반적인 평가는 비록 적이었지만 솔직히 대단했다는 건 인정함 정도이다. 워낙 오래된 일인 데다가,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산나와 결혼하는 등 동서 화합을 모색했고, 키루스 2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는 등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 인들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대 이란의 평가는 꽤 좋은 편이다. 때로는 그냥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중세 이후에는 신화적인 존재나 위대한 왕으로 묘사한 경우가 굉장히 많으며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가 지은 『이스칸다르의 서』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매우 긍정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이 동네도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 (칭기즈칸과 함께)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악마』적인 이미지도 물론 있으며 『영웅(英雄)』적인 이미지와 양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