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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1ㅣ 동유럽에서 브라질로 올해 K리그에 등록된 외국인선수는 후반기에 교체된 선수를 포함해 43명이다. 이 가운데 브라질 선수는 34명으로 79%를 차지한다. 세르비아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영입한 인천 유나이티드와 외국인선수를 보유할 수 없는 광주 상무를 빼면 K리그 모든 팀에서 한 명 이상의 브라질 선수가 활약했다.
K리그에 브라질 선수가 많아진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다. 1999년까지만 해도 K리그는 동유럽 출신 외국인선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992년 포항제철에 입단해 1996년까지 55골과 35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라데 보그다노비치와 1997년 정규리그와 컵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부산 대우의 3총사 뚜레, 샤샤, 마니치가 모두 옛 유고연방 출신이다. 또 1990년대 중반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히는 부천 SK의 조셉과 수원 삼성의 바데아는 각각 헝가리와 루마니아 출신이며 1996년 부천에서 22골을 넣은 공격수 세르게이는 러시아 출신이다.
브라질 선수들의 영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프로축구 최초의 외국인선수인 포항제철의 호세를 시작으로 1997년부터 2년 동안 천안 일화에서 활약한 루비까지 적지 않은 브라질 선수들이 한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1997년 전남에 입단한 수비수 마시엘을 제외하면 국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브라질 선수는 거의 없었다.
전남 드래곤즈의 박공원 선수지원팀장은 “브라질에는 주 리그를 포함해 여러 리그가 운영된다. 과거에는 브라질 주 리그 득점왕이 브라질 1부리그 득점왕으로 둔갑해 국내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며 브라질 선수들의 정보에 어두웠던 시절을 떠올렸다.
박팀장은 2000년대 들어 브라질 선수가 많아진 이유에 대해 “2000년을 전후해 전문화된 에이전트들이 생긴 데다 K리그 수준이 높아지면서 구단들이 기량이 뛰어난 브라질 공격수들을 원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브라질 출신 공격수로서 K리그에서 성공한 첫 번째 선수는 1999년 전남에 입단한 세자르다. 세자르는 1999년 13골을 시작으로 3시즌 연속 10골 이상을 기록했다. 세자르의 성공과 더불어 수준급 브라질 선수들의 영입이 본격화됐다. 2000년 안양 LG에 입단한 안드레는 첫 시즌 도움왕을 차지했고 2001년에는 수원 삼성의 산드로가 17골로 득점왕이 됐다. 또 같은 해 안양 LG에 입단한 뚜따는 13골을 터뜨려 브라질 공격수들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2002년부터는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들도 영입되기 시작했다. 첫 테이프를 끊은 선수가 2002년 전북 현대에 입단해 화제가 된 미드필더 레오마르다. 레오마르는 2001년 5월 한국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에 브라질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국내 무대 적응에 실패해 10경기만 뛴 뒤 보따리를 쌌다. 2003년에는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 공격수 두 명이 한꺼번에 한국을 찾아 팬들을 놀라게 했다.
울산 현대에 입단한 도도와 전북이 1년간 임대한 마그노 알베스가 주인공이다. 도도는 1990년대 후반 브라질 국내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브라질대표팀에 자주 이름을 올렸고 마그노는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당시 와싱톤과 함께 브라질대표팀을 이끌었다. 도도와 마그노는 한 차원 높은 기량을 선보이며 2003년 각각 27골을 기록했다.
도도와 마그노의 영입에 자극을 받은 수원 삼성은 같은 해 여름 브라질 올림픽대표팀 주전 공격수 나드손을 영입했고 이듬해엔 올림픽대표팀 동료인 마르셀를 추가로 끌어들여 K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수원의 나드손은 "브라질리그 최고의 스타였던 도도와 마그노가 한국으로 간 것은 브라질 선수들에게 K리그를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후 브라질의 수준급 선수들의 이적이 이어져 전북의 미드필더였던 보띠와 성남의 모따 그리고 포항의 따바레즈와 올시즌 득점왕을 차지한 경남의 까보레까지 많은 K리그 브라질 스타들이 탄생했다.
에피소드2ㅣ프리미어리거도 울고 간 K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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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이 외잘란(사진 제공=인천 유나이티드) |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K리그는 코드가 맞지 않은 것 같다. 몇몇 프리미어리거가 자신만만하게 K리그 무대를 밟았으나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이 부진했다. 그리고 끝도 좋지 않았다.
프리미어리거의 첫 K리그 진출은 2001년에 이뤄졌다. 대전 시티즌의 달리안 아킨슨이 테이프를 끊었다. 당시 33살로 선수생활 막바지에 이르렀으나 아스톤 빌라, 맨체스터 시티에서 뛴 관록이 있었다. 출발은 좋았다. 2001년 4월 11일 울산 현대와 치른 데뷔전에서 교체 출전해 후반 17분 골을 넣으며 팀의 4-0 대승을 도왔다. 이 골로 대전 외국인선수 득점 1호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대전 사령탑이었던 이태호 부산 동의대 감독은 "나이가 많았지만 요긴하게 잘 썼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85cm, 92kg의 큰 몸집으로 골문 앞에서 움직임이 둔했다. 그해 여름 이적시장에서 전북 현대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다. 2001-02시즌 아시안컵 위너스컵에 나서는 전북이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를 데려왔다. 그러나 '느림보' 아킨슨은 팀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조윤환 감독이 새로 지휘봉을 잡으면서 시즌 중반 퇴출됐다.
2004년에는 2명의 프리미어리거가 K리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인천 유나이티드와 부산 아이파크가 알파이 외잘란과 크리스토퍼 마스덴을 각각 영입했다. 외잘란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동료 선수들을 깔보는 등 문제가 많았다.
특유의 거친 플레이도 나아지지 않았다. 2004년 4월 3일 전북과 치른 데뷔전에서 거친 수비로 에드밀손의 십자인대를 끊어 놓는 등 8경기에서 경고 2회, 퇴장 1회 등 볼썽사나운 기록을 남겼다. 일본 J리그 우라와 레즈로 이적하면서 이적료 차액 40만 달러(약 3억 7천만 원)를 남겨 놓기는 했다.
고(故) 이안 포터필드 감독과 인연으로 한국을 찾은 마스덴은 팀의 구심점이 됐다. 마스덴은 2004년 4월 3일 FC 서울전에서 전반 4분 골을 터뜨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1호 득점으로 한국프로축구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스덴도 웃으며 한국을 떠나지 못했다. 우울증에 시달린 데다 가족의 완강한 반대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부산의 선수지원팀 김현희 대리는 "마스덴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향수병에 시달렸다. 계속 데리고 있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에피소드3ㅣ야반도주K리그 일선 지도자들은 외국인선수들이 대체로 착하고 순한 편이라고 말한다. 적응 문제 외에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성격이 괴팍하거나 꼼수를 쓰는 외국인선수도 적지 않다.
무단 이탈로 구단 관계자와 동료 선수들을 황당하게 한 외국인선수로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카메룬대표 미첼(전 성남)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 호주대표 아마드 엘리치(전 부산)가 있다.
미첼은 1997년 성남에 입단해 1999년까지 3년 동안 활약했다. 유연한 몸놀림과 탄탄한 수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도 일품이었다. 그러나 문제아였다. 199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출전했다가 복귀하지 않아 관계자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팀에 돌아왔으나 얼마 못 가 대형 사건을 일으켰다. 2000년 3월 구단의 공금 740만 원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또 구단과 상의 없이 러시아리그의 로코모티브 모스크바로 이적했다. 미첼은 2001년 한일컨페더레이션스컵 때 카메룬대표로 뽑혀 한국을 찾았으나 경찰에 체포됐다. 카메룬축구협회는 6천200달러(약 575만 원)에 성남과 합의했다. 미첼은 대회에 나서지 못한 채 카메룬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첼은 "K리그에서 다시 뛰고 싶다"고 했으나 전과가 있는 문제아를 받아 줄 구단은 없었다. 미첼과 성남에서 함께 뛴 이기범 대구 협성중 감독은 "재미난 친구였다. 그러나 엉뚱한 데다 성격도 고약했다. 늘 이런저런 불만을 터뜨리는 등 팀 분위기를 망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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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도 엘리치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아테네올림픽에서 2골을 넣으며 주가를 올린 엘리치는 올림픽이 끝난 뒤 부산에 합류해 오른쪽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데뷔 첫해 성적은 10경기에 출전해 1골 3도움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포터필드 감독의 전술과 맞지 않았다. 2005년 초 부상 치료와 개인적인 일을 이유로 호주로 돌아간 뒤 소식이 끊겼다.
부산 관계자는 "금방 다녀온다더니 잠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럽리그 이적을 추진하고 있었다.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고 새삼 분통을 터뜨렸다. 부산은 엘리치 문제를 국제축구연맹(FIFA) 재정위원회에 제소해 법적 공방까지 이어졌다. FIFA는 부산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감정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에피소드4ㅣ가장 흔한 이름외국인선수의 이름은 어렵다. 올시즌 K리그 득점왕(18골) 까보레(경남)의 경우 에베랄도 데 지저스 페레이라 까보레가 정식 이름이다. 매우 길고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각 구단은 줄인 이름을 쓴다. 까보레처럼 정식 이름의 한 부분을 따서 사용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선수 이름 등록에 관해 특별히 규제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별명을 등록명으로 하기도 한다. 뽀뽀(경남), 아트(전 부산), 아톰(전 제주), 쿠키(전 전북)가 대표적인 예다.
가장 많은 외국인선수 등록 이름은 조란과 실바다. 각각 4명씩 K리그에서 활동했지만 8명 모두 활약이 미미했다. 산토스도 3명으로 많다.
에피소드5ㅣ뜻밖의 활약1996년 울산에는 생소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선수가 있었다. 아프리카대륙 동부 인도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 모리셔스 출신의 마니다. 이적료와 연봉이 각각 1만 달러(약 900만 원)로 헐값이었다.
마니의 영입에는 2002년 월드컵 유치에 나선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낙하산 인사'라는 눈총을 받았으나 마니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10경기(교체 9경기)에서 3골을 터뜨렸다. 마니의 활약이 더해져 울산은 첫 K리그 우승의 꿈을 이뤘다.
정정수축구교실의 정정수 감독은 마니에 대해 “운동을 열심히 했다. 스피드도 있고 개인기량도 좋았다. 한국에서 성공하겠다는 의욕도 넘쳤다. 나이가 어린 데다 살갑게 굴어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기억했다.
울산은 우승한 뒤 외국인선수를 정리했는데 4명의 보유 선수 가운데 마니만 재계약했다. 마니가 1997년 울산의 유일한 외국인선수였던 건 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SPORTS2.0 제 80호(발행일 12월 3일) 기사
장지현, 이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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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럽 골기퍼 신의손 누구지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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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체프 선수요..ㅋ 옛날에 천안에서 뛰다가 골키퍼규제로 자국으로 갔다가 안양으로 귀화 후 이름을 바꾸고 돌아왔던선수!! 지금은 서울GK코치로 있을꺼예요~ 그런데.. 러시아가 아니고 다른나라 국적 아닌가?? 어떤 나라였지??ㅋㅋ
신의손을 모르시다니 ;; 골기퍼 외국인 규제 만든 장본인인데 ;;
러시아 맞음 .ㅎ
진짜 모르시는건가 ㅜㅜ 이때까지 코치님 모르시는분 본적이 없어서...
러시아라기보다는 구소련 출신이죠.. 러시아 태생은 맞지만 타지키스탄 국가대표로 뛴 기록도 있고요
경남코치일걸요
아.. 경남 코치로 계시는군요.. ^^
신의손 ㅎㅎ
축구에 조금만 관심 가져도 알게되는 신의손을...
샤리체프!!!ㅋㅋㅋ 진짜 얄미워ㅋ
아킨슨........................
우리나라 외국선수본좌는 샤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