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단어에 너무나도 부끄러워 한적이 있었다. 철없던 시절... 누구와 함께 사냐 누군가가 물어오면 나는 당당하게 세식구라고만 대답했다. 친할머니와 친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세식구라고는 밝히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세식구라고 말하면 아버지,어머니,나.. 이렇게 알아들을 줄로만 알았다. 한때는 이런 내 가정환경에 못마땅한적이 있었다. 소풍갈때나 학예회때나 어린이날 꼭 그런날엔 왜 그렇게 슬펐는지 모른다. 기저귀도 떼지않은 2살때 아버지께서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잇따른 어머니의 가출... 어린 오빠와 나는 친할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어린시절.. 마루인형도 갖고싶었고, 군것질도 하고싶었고... 그 나이에 당연히 했을만한 그런 평범한일을 할수없음에 난 남들과 다른 환경이라는걸 몸으로 부딪히며 알아갔다. 먹고싶어도 참아야하는법을 알았으며... 입고싶은 옷을봐도 눈을찔끔 감아야만 하는것을 알았다. 너무일찍 돈에 대해서 시달려 살았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서 우리 세식구는 단칸방에서 살았다. 연탄불위에 국을 끓여먹고 전화기라고는 주인집 아주머니네 집에서 봤을뿐 우리집에서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여름이면 찬장에 음식을 넣어놓았던게 가끔씩은 상할때도 많았고... 겨울이면 수도꼭지가 얼어서 고생한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말그대로 가난이라는 단어를 뼈저리게 실감하며 살았다. 할머니들이 늘 그렇듯이 오빠와 나를 차별했다. 반찬만해도 그렇다 나는 늘 김치몇조각만 담겨있었고 오빠의 도시락통에는 지금은 천원정도하는 햄이 늘 놓여져 있었다. 항상 할머니를 원망했다. 내가 가난을 알아가게 되면서 할머니께 불평이 늘어갔다. 조금씩 커가면서 남들에게 뒤지고 싶지않았었고, 그러함에 따라서 나는 할머니께 용돈도 달라고하고 괜히 울기도 하며 할머니의 가슴을 많이 아프게했다. 초등학교 졸업식때 지팡이를 짚고오신 할머님이 부끄러워 나는 아는체도 하지 않았다. 내가 교문을 나와서야 그제서야 난 사진을 같이 찍어드렸다. 졸업식에는 부르지도 않았을뿐더러 다른 아이들은 다 부모님께서 꽃다발을 들고 오는데 난 친오빠와 오빠의 여자친구가 왔었다. 내가 졸업식때 울었던건 헤어짐이 슬퍼서라기보다는 그걸 핑계로 엄마가 그날따라 그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방황을하기 시작했다. 친오빠가 일찍부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게 할머니에겐 한이 되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나는 대학교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할머니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고는 했다. 그러나 난 할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느날, 날 버리고 가신 어머니께서 나타나셨다. 자고있는데 할머니께서 엄마가 왔단다. 눈을떠보니 나와 비슷하게 생긴 처음보는 낯선얼굴이 있었다. 난 엄마를 본뒤로 더더욱 반항이 심해졌다. 할머니에게 대들기 일쑤였고, 외박하는 일도 잦아졌다, 나는 내 나이에 하지 말아야할것들을 하며 나쁜짓을 일삼아왔다. 할머니께서는 그런 나를 하루종일 문기대어 기다리시며 하루를 보내시곤 했다. 가끔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께서는 이름모를 국을 끓여드시곤 했다. 난 쾌쾌한 그 냄새를 맡으며 그 국이 우리가 먹다남은 찌꺼기들로 만들어진 국이라는걸 금새 알아챌수 있었다. 하지만 방황하던 나에겐 할머님의 그 깊이를 몰랐다. 언제나 밥을 혼자 차려드셨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날이 훨씬 더 많았으므로, 차려줄 사람도 없었다. 추운겨울날 집에 들어가 누워있으면 잠시후에 할머니께서는 이불을 조용히 덮어주시고는 했다. 행여나 내가 깰까봐 조심조심 덮어주시는 할머님의 손길을 난 그때는 고마움인줄 정말 몰랐다. 제작년 추석이였다. 여느때처럼 난 외박을했다. 그리고 난 2틀후에서야 집에 들어갔다. 집에는 티비가 켜져있었고 할머니께서는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계셨다. 순간... 할머니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머니를 흔들어봤다. 난 모든걸 알았다. 할머니를 만지는 순간 난 모든걸 알았다. 무척이나 차갑고 딱딱해진 할머니를 만지는 순간 난 이제 다시는 볼수없음을... 할머니의 지난날의 모든 사랑들을.. 난 깨달을수 있었다.. 못난손녀 할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너무나도 절망적이였다.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나는 물한모금도 먹히지 않았으며, 잠도 오질 않았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릴수 있는지 난 그때 알았다. 난 효도다운 효도한번 해보질 못했는데.. 돌아가시는 그 순간 우리 남매에게 얼마나 하고싶은 말이 많으셨을까... 얼마나 우리 남매 걱정을 하시며 돌아가셨을까..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실걸 아셨나보다... 할머님이 아끼시던 한복에 얼굴을 묻으시고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치르고 친척들은 할머니를 화장시켰다. 할머니의 시신이 화장터로 갔을때에는 난 정말 미치는줄 알았다. 이제서야 모든걸 알았는데... ... ... ... ... ... 난 이제 효도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그리고.. 할머니의 시신이 다 타고난후 난 또 한번 미치는줄 알았다. 할머니께서 예전에 다리를 다치신적이 있었다. 그때 쇠를 허벅지에 넣으신적이 있는데.. 쇳덩어리가 하나도 타지않고 남아있었다. 이제 다신 볼수없는 할머니... 살아생전에 효도한번 해보지 못했는데.. 할머니.. 너무 고마웠어요... 철없던 날 키워주셔서.. 우리 남매때문에 고생한거.. 다 갚아드릴께요.. 할머니.. 우리 다음세상에서 꼭 만나기로해요. 할머니.. 너무나 고마운 할머니.. 편안히 눈감으세요.. . . . 이글은 MBC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첫댓글 소중한것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우리들..할머니의 그 깊은 사랑을 진작에 느꼈었더라면..조금은 덜 후회되고 조금덜 아쉬움 남을터인데..지난날 살아계실적 울 할머니도 생각나네요..유난히 어여쁘해주셨는데..그 가시는 길도 마중해드리지 못했는데..늘 감동글로나의삶을돌아봅니다ㅠ
첫댓글 소중한것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우리들..할머니의 그 깊은 사랑을 진작에 느꼈었더라면..조금은 덜 후회되고 조금덜 아쉬움 남을터인데..지난날 살아계실적 울 할머니도 생각나네요..유난히 어여쁘해주셨는데..그 가시는 길도 마중해드리지 못했는데..늘 감동글로나의삶을돌아봅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