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하느님 자식이 있으면 좋겠다. 소유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다. 그를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어 기쁘고, 다 퍼주고도 더 주지 못해 죄스럽고,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진 거처럼 갖다 바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어느 광고 문구처럼 사랑을 책으로 배우고 있는 거 같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닮았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크고 깊어도 그것은 여전히 죄인의 사랑이다. 가장 큰 사랑을 주는 사람도,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도 부모다. 외적으로는 유전적인 질병부터 내적으로는 장애가 되는 성격 형성의 원인이 바로 부모다. 부모가 알고 믿는 최고의 선(善)이 자식에게도 똑같이 최고가 아니다. 자식이 소유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해서 분리되지 못하고, 때론 여러 형태의 폭력까지 가하게 된다. 부모는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내놓으셨다. 이 사랑이 어떻게 부모의 자식 사랑과 같을 수 있나. 하느님 사랑은 ‘이보다 더 클 수 없는 사랑’이라서 가장 큰 사랑이라곤 자식 사랑밖에 모르는 우리 죄인은 있는 힘을 다해 믿을 뿐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처음 만난 이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바라신 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거였다.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그렇게 많이 일으키신 고장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저주에 가까운 화를 내셨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4).” 너무 타락해서 유황과 불의 재앙을 벌로 받아야 했던 소돔과 고모라(창세 19,24)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니. 예수님이 우리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시는지 알겠다. 마음을 바꾸지 않은 벌이 아니라 이렇게 좋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시간에 대한 깊은 후회와 그 괴로움이 그렇게 크다는 뜻일 거다.
평신도 신학자의 책을 보면 다양성을 맛볼 수 있어 좋은데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도자의 글을 보면 깊이는 있는데 왠지 이론적이거나 실생활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걸 걸고, 수도자는 좋아하지 않거나 새로 만나는 이들을 사랑하려고 애쓴다. 이 둘을 합치면 하느님 사랑과 가장 가까울 거 같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하느님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알 수 없는 분이고, 그분의 사랑은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깊을 수 없고, 이보다 더 넓을 수 없는 사랑, 그래서 하느님은 믿어야 하는 분이다.
예수님, 세상 것들은 물론이고 저 자신에게조차 실오라기 하나로라도 묶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홀로 자유롭게 살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모든 이를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부족한 제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 겉옷은 햇빛을 모두 흡수하는 깊은 바닷물 색이고, 그 안감은 은총의 녹색입니다. 믿음은 정말이니 은총의 선물입니다. 믿음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셨으니,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것을 아드님께 받아 제게 전해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