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편 고구려와 隋의 전쟁
제 1장 臨渝關 싸움
고구려ㆍ隋 전쟁의 원인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비록 수많은 족속이 대립하였지마는 다 무무하고 미개한 유목의 야만족드이라 혹 한때 정치상 세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붕괴하는 날에는 다시 일어날 터까지 없어지거니와, 토착(土着)한 민족으로 오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지나와 조선이었다.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파탄과 불안이 있어서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였을 것이다.
상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구려 건국 이래로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 상태에 있어 여러 나라가 서로 번갈아 침범하므로 외정(外征) 할 힘이 없고 지나는 한(漢)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한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다.
태조(太祖)ㆍ차대(次大) 두 대왕 때에는 고구려가 비록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는 거의 대적할 세력이 없었으므로 한을 쳐서 요동(遼東)을 점령하는동시에 직예(直匠)ㆍ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 안에 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하여 왕위 쟁탈의 난리가 거듭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을 들어 공손도(公孫度)에게 항복해서 고구려는 가장 인민이 많이 모여 사는 기름진 땅을 잃어 약한 나라가 되었다. 고구려가 그 약한 나라의 지위를 면하려고, 조조(曹操) 자손의 위(魏)며 모용씨(慕容氏)의 연(燕), 곧 지나 북방의 나라들에 향하여 도전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쪽에서 일어나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이루었다.
고국양(故國壤)ㆍ소수림(小獸林)ㆍ광개토(廣開土) 세 대왕이 일어나서 요동을 치고, 또 서북으로 글안을 정복하여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였으며, 장수왕(長壽王)이 70년 동안 백성의 힘을 길러 인구가 크게 불고 나라의 힘이 팽창하여 지나와 맞서 싸울 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쪽 네 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공수동맹이 이루어져서 뒤에서 견제를 받아 장수왕 이래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쪽 통일에 힘썼고, 지나도 남북으로 나뉘어서 산해관(山海關) 동쪽을 엿볼 겨를이 없으므로 위(魏)의 척발씨(拓跋氏)의 백제 침입(제8편 제2장 참고), 주(周)의 우문씨(宇文氏)의 고구려 침입(곧 溫達이 격퇴한)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의 흥망을 다투는 계속적 혈전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경에 이르러 우문씨의 제위(帝位)를 빼앗은 수(隋)의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江南 6국의 하나)을 아우르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어(수의 황가와 장국이나 재상들이 거의 다 鮮卑族으로 지나에 同化된 지 오래임)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깔보았는데 북쪽의 돌궐(突厥)이나 남쪽의 토욕혼(土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였고, 오직 동쪽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저 오만하고 자존(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을 수 있는 일이랴.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첫째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 년 동안 서로 풀지 못할 원수를 맺었지마는 갑자기 옹서(翁婿)간의 나라가 되어서(제9편 제1장 참고) 피차 화호(和好)하고 두 나라가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각기 사신을 수(隋)에 보내서 고구려 치기를 청하고, 또 가끔 고구려 국정의 허실을 수에 알려주어 수의 임금과 신하의 야심을 조장시켰다.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둘째 원인이었다. 뒤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구구한 반 독립국이나마 지녀 내려온 것은 고구려의 오랜 동안 끈덕진 저항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었던 때문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에게 망했더라면 백제나 신라도 다 수의 한 군현(郡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를 읽을 때에 신라ㆍ백제가 수에 대해 응원을 청한 사실을 보고는 책을 물리고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隋文帝의 모욕적인 글과 姜以式의 북벌 주장
기원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文帝)가 진(秦)을 병합하여 지나를 통일한 지 17년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고구려에 대해 자웅을 다투고자 무망(誣罔)이 심하고 패만(悖慢)하기 이를 데 없는 모욕적인 글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짐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기는 것은 교화(敎化)를 드날려서 원로방지(圓顱方趾)로 각기 그 천성(天性)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 해마다 조공(朝貢)하니, (다른 나라가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함은 지나 춘추시대 이래의 상례로 그들의 역사책에나 그렇게 썼을 뿐 대등한 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한 번 싸우고자 고의로 쓴 것임) 비록 번부(藩附)라 일컫기는 하지마는 정성이 미흡하다. 왕이 이미 짐의 신하 이니 짐의 덕을 본받음이 옳은데, 왕은 말갈(靺鞨)을 구축하고 글안을 가두어 왕의 신첩(臣妾)을 만들고 짐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 착한 사람이 의를 사모한을 밉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해독이 심하냐? 짐의 태부(太府)에 공인(工人)이 적지 아니하니 왕이 쓰고자 할진대 아뢰면 얼마든지 보낼 것인데,(부강함을 과장한 말) 왕이 지난번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을 이용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하려 함이냐.……
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는 이제 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랴.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 揚子江)과 어찌 비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陳國)과 비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을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리리 무슨 큰 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삼국사기에는 수의 문제가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기원 590년)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에는 문제의 개황(開皇) 17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원왕 3년은 문제 개황 17년이 아니니, 삼국사기에는 연조를 잘못 기록하였고,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돌아간 지 7년 뒤이니, 수서에는 왕의 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웃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양 그 사실을 보고해온 해에 기록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발생한 연조를 틀리게 고쳐 쓰는 것은 지나의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므로 수서에 그러한 잘못된 기록이 생기게 된 것인데, 삼국사기는 평원(平原)ㆍ영양(嬰陽) 두 본기의 연대는 고기(古記)를 좇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서에서 뽑아 기록하여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사기에 그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사실에 관계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姜以式)이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하고 곧 개전(開戰)하기를 주장하니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를 삼아서 정명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臨渝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濊 : 隋書의 靺鞨) 군사 1만으로 요서(遼西)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게 하고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것은 수서만을 뽑아 기록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薩水戰爭) 때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 때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좇는다.
臨渝關 전쟁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睺)로 수군총관(水軍總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영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 하니, 수의 군사는 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아홉이었다.”고 하여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薩水)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에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피차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었다
첫댓글 제10편 고구려와 隋의 전쟁
제 1장 臨渝關 싸움에 대한
조선상고사를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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