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 내 삶의 중심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가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은 남들의 판단이고 내 삶의 무게는 언제나 무겁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그것이 인류 구원의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내가 그것을 짊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 살기 위해서다.
삶의 무게를 지고 있는 우리를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사이비 종교는 모든 일이 잘 되고 질병이 낫고 사업이 잘될 거라고 유혹한다. 반면에 예수님은 멍에를 치워주거나 삶의 무게를 없애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안식을 주겠다고,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공동번역 신약성서』) 하신다. 이 초대를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라는 뜻이 아닐까.
멍에는 하느님 계명의 은유다. 구약도 그 멍에의 기쁨, 하느님 계명을 지키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너희 목에 멍에를 씌우고 너희 영혼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여라. 그것은 곁에 있어 찾기 쉽다. 나 자신이 얼마나 적은 노력을 기울여 큰 안식을 얻게 되었는지 너희 눈으로 보아라(집회 51,26-27).”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은 수백 가지 율법을 지키는 게 버겁고, 또 먹고 사느라고 그 율법들을 다 지킬 수 없어 구원의 희망을 잃어버렸다.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나 지킬 수 있었다. 몰라서 못 지키고 알아도 다 못 지킨다. 그러니 삶이 기쁠 수 없고, 안 그런 척 해도 속마음이 평화로울 리 없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것들을 단 두 개의 계명, 그것을 다시 한 가지 계명으로 줄이셨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그것이고, 다시 서로 사랑함이다.
성취동기가 없으면 어떤 일이든 다 짐스러워 지속하지 못한다. 피곤한 하루 끝에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다시 힘이 솟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기쁨으로 힘겨운 시간을 견딜 수 있다. 성공을 위한 투신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헌신이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것, 사랑을 위한 헌신이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 예수님이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충실 하느라 가난해지셨다는 뜻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9).” 예수님은 멍에를 치우시는 게 아니라 멍에를 가벼운 것으로 그리고 편한 것으로 바꿔 주신다. 그 길은 당신에게 오라는 초대에 기꺼이 응답함이다. 내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게 함이다. 이는 종교적 맹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 외아들까지 희생시킬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참 편하고 가볍게 사셨다.
예수님, 사랑에 갈급한 이유는 삶의 무게 중 가장 무거운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 삶을 내어 맡길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 무거운 걸 들어 맡길 수 있는 분입니다. 제 영혼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처럼 제 마음이 더욱 가난해지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