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인형도 기사가 다 있나. 못산다. 못살아." 감성마저 고증하는 1994. 그래서 가끔은 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괴롭습니다. 반가움이나 그리움까진 괜찮은데 그다음의 감정까지 건드려버리니까요. 그래서 하필 Aiwa 워크맨을 들고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를 듣는 6회의 나정이는 반가움 이상의 서글픔이었죠. 제가 나정이보다 어렸던 그 무렵에. 그녀와 같은 Aiwa 워크맨이 들려있었던 그 날. 처음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슬픈 가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러브송은 나의 테마송으로 변합니다. 그러니 깊은 밤. 홀로 밖으로 빠져나와 음악을 들을 만큼 짝사랑의 감성에 빠져있는 그녀가 이토록 매혹적인 러브스토리에 자신의 이야기를 대입해봤으리라는 것은 당연지사죠. "내가 너의 기사가 되어 항상 너를 지켜줄 거야." 이건 세상의 모든 소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있는 꿈이니까요.

"뭐 듣는데?" "야들 누군데? 유명한 아들이가?" 하지만 저는 심드렁하게 멜로디를 뽑아버리며 조소하는 쓰레기와 아직 이 노래를 울지 않고 들을 수 있는 나정이를 보며 그야말로 슬픈 코미디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녀에겐 아직 꿈이었고 소년에겐 상상조차 금기인 이 노래의 서사. 그들 자신이 벌써 십여 년이 넘게 진행 중인 러브스토리를 모르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랑해왔다고." 서로의 프러포즈를 차단한 상태에서 감정의 공백을 메우는 이 노래의 호소가 그래서 서글플 수밖에 없었죠.
응답하라 1994의 완성도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시절의 감성을 일깨우는 충실한 복원력이나 사람 설레게 하는 캠퍼스 러브라인 하나만은 아닙니다. 이 드라마의 소름 끼칠 만큼 놀라운, 완성도의 정점은 순정만화를 빙자해 감추어진 쓰레기라는 캐릭터의 세계관입니다. 이 드라마는 얼핏 보면 순정만화의 극치지만 차단된 쓰레기의 시점으로 세계를 넓혀보면 이보다 더 잘 만들어진 성장기가 없어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토록 공들여 만들었으면서도 이 카드를 철저하게 아껴서 사용하는 제작진입니다. 이토록 섬세한 캐릭터를 멋도 맛도 모르는 금수로 묘사해놓곤 그의 입장이나 변명을 도무지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6회까지 진행된 쓰레기의 심리는 오로지 '여지'와 '의혹' 뿐입니다. 그것조차도 스토리가 아닌 정우의 연기력 하나에 의존하고 있으니 정말 과감한 진행이라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음은 단순히 분위기를 업 시키는 멜로디가 아닙니다. 노래 자체가 시대의 고증이며 캐릭터의 서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너에게와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는 쓰레기를 유영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나 다름없죠. 여태껏 너에게는 쓰레기 단독 테마가 아닌 주로 나정이 사랑을 느끼는 순간에 사용되었던 멜로디라 오로지 그녀 자신의 테마송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병실 침대에서 오빠의 쓰다듬을 받으며 첫사랑에 빠지던 순간. 그를 잊지 못해 음성 메시지를 남기던 순간과 그의 메시지를 기다릴 때까지. 그라운드를 가로질러오는 반짝반짝한, 나의 첫사랑에게.

하지만 이 테마송의 영악한 반전은, 성나정의 짝사랑에 가장 어울리는 뉘앙스 아래에 감춰둔 쓰레기의 속삭임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노래는 성나정이 아닌 쓰레기를 위한 테마송이죠. 너무나 순수하고 애틋한 사람이라 혹여 내 사랑이 그녀를 망가뜨리지 않을까. 그래서 네가 보내는 따뜻한 미소를 때로는 외면하고 얼굴을 돌리며 이대로 너를 안고 싶은 마음마저 차단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여동생이라고 해도 너무 허물이 없다 싶을 만큼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퍼붓던 쓰레기가 이따금 진지해진 나정의 접촉에는 맥을 차리지 못합니다. 부자연스러울 만큼의 가족 관계를 연출하며 안간힘을 쓰곤 있지만, 무방비 상태에선 이성을 가로지른 본능을 이기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아마도, 이 너에게가 사용됐던 순간은 다시 쓰레기의 시점으로 전환되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엠티에서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남긴 나정이의 메시지. 그녀는 결국 메시지를 받지 못했지만 그 순간 쓰레기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고작 한컷에 일관할 뿐이었습니다. 메시지를 듣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나정이를 찾아오고야 마는 그날의 일들이 너에게와 함께 회상될지도 모르죠. 세수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그녀가 메시지를 기다리며 흘러나온 너에게는 결국 그 시간에 나정이를 생각하고 있었을 쓰레기의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너에게가 쓰레기의 현재 심리를 드러내는 노래라면 인형의 기사는 오랜 성나정 앓이의 역사이자 그의 맹세입니다. 나정의 회상에서 떠올려진 쓰레기가 아닌, 그녀의 친오빠는 물개 인형을 안고 울먹이는 여동생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워주는 소녀의 기사이자 인형의 기사였습니다. 허무하게 친구를 잃어버린 봄날의 사건이 없었더라면 쓰레기는 기사가 아닌 왕자님의 자리를 선점했을지도 모르죠. 두 사람의 위에서 짜잔 하고 나타난 그의 모습은 슈퍼맨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편 붉은 망토 두른 왕자의 이미지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오빠의 제사상 위에 놓인 유일한 장난감이 기사를 상징하는 말 탄 기수라는 것도 의미가 있는 연출이겠지요.

어느 봄날. 기사를 잃어버리고 울먹이는 소녀를 위해 그는 맹세했겠지요. 내가 그를 대신해주겠다고. "내가 너의 오빠(기사)가 되어 항상 너를 지켜줄 거야." 너의 머리를 쓸어주고 울고 있는 네 곁을 지켜주겠다고. 연민과 의무감. 혹여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면 죄책감까지 포함해서. 기사의 작위를 물려받은 그는 성씨 집안의 아들이자 나정의 오빠로 남습니다. 한 번씩 사무치는 친구의 여동생을 향한 마음이 이 공간을 깨뜨릴까 그는 감정을 차단합니다. 멋도 맛도 모르는 쓰레기가 되어서.
어린 날의 트라우마가 그를 얼마나 옥죄고 있는가는 가족조차 잊어버린 친구의 생일을 홀로 기억하고 있던 장면이나 의대 실습에서 만난 환자의 아이들에게 지나치리만큼 깊이 공감하는 장면에서 드러나고 있지요. 가족의 죽음을 겪어야 할 아이들에게서 아마도 그는 그 무렵의 나정이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을 것입니다. 친구의 기일. 그는 잃어버린 물개 인형을 나정에게 선물합니다. 인형의 기사처럼. 오빠의 역할을 변함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와도 다름없었겠죠.

아이러니하게도 쓰레기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친구의 생일날. 새 생명의 신호가 감지됩니다. 성씨 가문의 진짜 아들이 등장하는 순간이죠. 그가 맹세의 의미처럼 물개의 인형을 바치자 나정은 오히려 프러포즈를 하며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회상씬에서 물개 인형의 마지막 행방은 나정의 품이 아닌 오빠의 제사상 위였습니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지만 이 고지식한 친구에게 먼 곳의 소년이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 같군요.

덧. 분명 인형의 기사는 새드 엔딩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숨겨둔 채 오월의 신부를 배웅하는. 제작진은 노래 속에 힌트가 들어있다고 밝혔었죠. 그렇다고 해서 쓰레기의 사랑이 슬픈 결말을 맺을 것이라는 장담은 어불성설입니다. 응답하라 1994의 전신이었던 1997에서도 서인국의 테마로 슬픈 결말을 담은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이 쓰였지만, 드라마의 결론은 결국 해피엔딩이었으니까요.
첫댓글 처음 형님이 샀던 aiwa 카세트를 들어보고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는데....
가면 갈수록... 쓰레기는 1997 서인국 형같고.. 칠봉이가 서인국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시간이 흐를수록.. 쓰레기보단.. 칠봉이한테 애잔함을 더 주는게.. 칠봉이 같다는..
전 해태가 나정이 남편일거라고 생각합니돠~!!! (-_-)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신랑 뒷통수는 절대 쓰레기로 보이지 않았다.. 점더 풍성한 머리카락발... 한올 한올 빠져가는 머리카락에 민감한 나이를 살고 있는 이가 신경 쓰면서 봤슴 ... ...믿으셈...
대역썼다고 기사 본,, 듯,, 해요,,,
ㅋㅋ 윗분 말씀처럼 결혼식
장면의 신랑은 다 대역이래여
칠봉이가 신랑같은 느낌이 드네요. 여자의 심리에 관하여 질문할때 오직 칠봉이만 나정이의 정답을 맞추었죠.
왠지 다른 복선보다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많은 의미를 주네요....그때 아 슬프지만 칠봉이가 신랑이 아닐까하는 개인적인 확신이 드네요.
그런데 전 쓰레기가 신랑이였으면 좋겠어요.
전 칠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