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_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 교향곡을 듣는 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_이기철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
우리가 죽을 때 세상의 빛깔은 무슨 색일까,
무성하던 식욕은 어디로 갈까,
성욕은 어디로 사라질까,
추억이 내려놓은 저 형형색색의 길을
누구가 제 신발을 신고 타박타박 걸어갈까,
비와 구름과 번개와 검은 밤이
윤회처럼 돌아나간 창을 달고 집들은 서 있다.
문은 오늘도 습관처럼 한 가족을 받아들인다.
이제 늙어서 햇빛만 쬐고 있는 건물들
길과 정원들은 언제나 예절 바르고
집들은 항상 단정하고 공손하다.
그 바깥에 주둔군처럼 머물고 있는 외설스러운 빌딩들과 간판들
인생이라는 수신자 없는 우편 행랑을 지고
내 저 길을 참 오래 걸어왔다.
내일은 또 누가 새로운 식욕을 되질하며 저 길을 걸어갈까,
앞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지우면서 내 이 길을 걸어왔으니
함께 선 나무보다 혼자 선 나무가 아름다움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내 풍경 속에 천 번은 서 있었으니
생은 왜 혼자 먹는 저녁밥 같은가를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해가 지면 울고 싶다
_문형렬
너는 알겠지
속도 모르고 해가 지면
왜 강물은 반짝반짝하는지
기다리는 사랑은 또 얼마나 흘러가야 하는지
너는 알겠지 한 발 다가서면
더러움으로 흐르는 강도
멀리서는 저렇게 붉게 일렁여
한 생애를 지나가는 것을
더러움이 아름다움을 가릴 수 없는데도
붉은 노을이 지면
저 더러움도
스스로 빛나 우리 가슴으로 흐르는 것을
내가 너의 속을 알고
네가 내 속을 알아서
더러움과 아름다움,
그 말없는 하루의 길에 서서
해가 지면 끝없이 소리 없이 울고 싶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_황인숙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곤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그 사람
_허홍구
급하다고…
꼭, 갚겠다고 …
날 못 믿으시냐고 …
그래서 가져간 내 돈 이천만원
자식들에게도
내가 돈이 어딧노 했고
마누라도 모르는 내 쌈짓돈
친구가 한 달만 빌리자 해도
단호히 거절했던 돈
그 돈 그만 떼이고 말았다
애타게 찾던 그 사람
몇 개월 만에 전화가 왔다
제가 그 돈은 꼭 갚아야 한다며
은행통장 번호를 알려 달란다
고맙고 고맙다며
감격하여 전화를 받았다
자기 식당 말아먹고 남의 집에서
하루 일당 5만원을 받아
어떤 날은 3만원을
또 어떤 날은
2만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
오늘도 그 사람 행방을 모르고
눈물 3만원어치를 받았다
기쁨도 3만원어치 받았다
돈보다 귀한 눈물을 받았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부디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시라
내게 그 눈물은 행복이다
나도 눈물 3만원어치를 보낸다.
한밤중에
_정양
한밤중에 잠이 깨어
물끄러미 보이는 것들이
소용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언젠가는 저것들을
버릴 날이 있을 것인가
안 버리고 못 버리고
끄리고 지내다가
저것들이 마침내
나를 버릴 것만 같다
여백이 있는 풍경이 아름답다
_도종환
여백이 있는 풍경이 아름답다
사람도 여백이 있는
사람이 인간답게 느껴진다.
빈틈이 없고 매사에 완벽하며
늘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보다는 어딘가 한군데는
빈 여백을 지니고 있는 듯 해 보이는
사람이 정겹게 느껴진다.
뒤에 언제나 든든한 힘과
막강한 무엇이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보다는 텅 비어있는
허공이 배경이 되어있는 사람이
더 인간다운 매력을 준다.
여백이 있는 풍경이 아름답듯
여백을 지닌 사람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까?
욕심을 털어버린 모습으로
허공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
환상의 빛
_강성은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오후를 견디는 법
_오명선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꽃에 대한 예의
_황인숙
유독
꽃을 버릴 때가 되면
곤혹스럽다
재활용은 안될 테고
일반쓰레기 봉투랑 음식물쓰레기 봉투
어느 쪽에 버리는 게 마땅한지
망설이다 종종
동네화단 덤불에 슬쩍 얹어놓곤 했다
때가 되어간다
이미 지났을지도
꽃병은 바닥까지 말랐을 것이다
물을 부어주는 게
왠지 계면쩍었던 때가
그때였을까?
꽃병 속에서
시든 꽃이 말라간다
낱낱 꽃잎들과 꽃가루가
식탁 위와 방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다
전날도 아니고, 전전날도 아니고
오래 전 화장이 얼룩덜룩
빛바랜 꽃이여
유독
꽃을 버리는 건
버릇이 되지 않는다
버릇처럼 피어나
버릇처럼 시드는
꽃을.
내 고향은 명왕성
_ 강영은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버려졌다
한 생애 내내 내 곁에 있었던 그에게 주어진
134340호, 그게 명왕성의 새이름이란다
그렇게 내 집도 버려져 길바닥에 뭉개졌다
을지로 5가에서 청계천 5가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
하늘을 올려보던 창은 이제 그 아래 땅만 보여준다
아직도 발바닥에 묻어나는, 한련화며 채송화며,
거기서 피어나던 꽃들의 향기
한밤중이면 혼자서 깨어나 울던 형광등의 불빛이
방산동 4의 14, 손톱만큼 남은 땅의 지번을 보여준다
명왕성은 망원경 저편에서 어둡기 그지없지만
땅속의 내 집에서는 아직도 휘황찬란하다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어둡고 춥고 버려진 것들이 서로 껴안은
내 집에서는 명왕성을 등 대신 켜놓고 산다
마루 벽에 달아놓은 가족사진 액자,
어머니, 아버지, 형님들, 누이들을 환하게 비추어 준다
134340호에 살기 싫은 명왕성은 이제
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나도 내 집을 다시 찾았다
내 가슴 속에 내 집을 다시 지었다.
첫댓글 저 며칠째 밤을 잊고 살고있었는데 잘볼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바밤바
댓글좀요~~~&&
히얼
감사합니다.
아 좋아요 요새 시가 점점 좋아지는데 게시물덕분인듯도 하규 ㅋㅋ
댓글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