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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원나라 지배 하에서는 몽고풍습의 영향을 받아
일부다처(一夫多妻)가 성행했고 재가, 이혼이 자유로웠고
인구증가를 위한 다산(多産)이 지배계층에서 미덕으로 성행.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유교적 가족질서에 결정적 장애 요소.
하여, 일처일첩 외에, 여러 처를 거느리는 것을 금지 시켰다.
그래서, 본처 1인 외 나머지는 첩, 노비로 당장 강등시켜야 했다.
아울러, 첩에 대한 신분적 천대는 강화시켰다.
첩이 양반인 경우에 양첩, 천민 신분이면 천첩.
하여, 첩의 자식인 서얼(庶孼) 역시 신분적 차별.
양첩 소생의 아들은 서자이며, 천첩의 아들은 얼자.
그래서, 서얼의 신분 차별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서얼은 양첩의 자식 서(庶)와
천첩의 자식 얼(孼)을 합친 말.
1. 처는 1인만 둘 수 있고, 나머지는 첩으로 간주한다.
2. 만약, 정처를 첩으로 삼으면, 장100대에 처한다.
3, 첩을 정처로 삼으면, 장 90대 후, 원래대로 환원.
4.처가 있는데도 처를 취하면,
장 90대에 후처와는 이혼한다.
ㄱ, 문무관 2품 이상 양첩 서얼은 관직을 3품까지 제한.
ㄴ, 문무관 2품 이상 천첩 서얼은 관작을 5품까지 제한.
ㄷ, 6품 이상 양첩 서얼은 5품, 천첩 서얼은 6품까지 제한.
ㄹ, 7품 이하 관직없는 사람의 양첩 서얼은 5품까지 제한.
ㅁ, 7품 이하 관직없는 사람의 천첩 서얼은 7품까지 제한.
ㅂ, 양첩 아들의 천첩 자손은 7품까지 제한.
ㅅ, 양첩 아들의 천첩 자손은 8품까지 제한.
0, 2품 이상 관원의 첩 자손은
사역원 감상감 전의감 내수사
해민서 도화서 신학 율학 등의
기술직 관직에만 국한시킨다.
이는 조선 개국 당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고려 말, 일부다처제 제도로 골육상전을 겪고
그 병폐를 차단하기 위해 법으로 제도화한 결과.
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적자.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은.,서자.
천첩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얼자.
서자 + 얼자 = 서얼(庶孼)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적서차별 제도가 시작되었다.
강력한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양반 중심사회를 유지했던
조선시대 천민 신분은 백성 취급도 받지 못했던듯 여겨진다.
특히, 역적으로 몰린 후손인 경우
역적의 신분이 신원되지 않을 경우
대를 이어 천민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신원이 되면 원래 신분으로 회복된다.
장영실은 신원이 되었지만, 기생의 소생인.,천민.
당시 신분제도 하에서는 관직에 오를 수 없는.,천출.
당시 신분 계층은 크게 양반과 평민, 천민으로 나뉘지만,
실제로는 양반과 평민 사이에 중인(서얼) 신분이 있었다.
하지만, 서얼, 천출 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 인물로 세종 시대 천재과학자 장영실.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기술로
조선 전기의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던 그.
천출 신분에서 벗어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
그는 중국에서 유학한 후 물시계를 만들었고,
천체 운행, 위치측정, 관측기구 혼천의를 완성했고
또한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만든다.
또한 금속활자인 갑인자 제작을 비롯
태양의 높이와 일몰을 측정하는 규표 등
많은 과학기구를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었다.
특히 1441년에 세계 최초로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와
하천 수위를 측정해 하천 범람에 대처할 수표를 제작했다.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투옥 파면.
충남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장영실 추모비,
.......아산장씨 종친회 주장에 의하면......,
장영실의 출생은 1390년(공양왕 2년) 경.
아버지 장성휘는 장서(아산 장씨 시조)의 8세손.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함께 관노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후 장영실은 동래현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가 되었으며,
발명가인 장영실의 훌륭한 재주를 세종대왕이 인정하여 발탁
1421년(세종 4년) 그는 윤사웅, 최천형 등과 함께 명나라에 유학.
귀국 후, 34세에 1423년(세종 5년) 천문기기 제작 공로로 면천.
조정의 중론을 거쳐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
본관은 아산(牙山). 아버지는 귀화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동래현(東萊縣)에 속한 기녀였다고 한다.
유교 만이 세계의 질서로 여겨지던 15세기 조선시대.
그 가문은 대대로 군사, 과학기술 책임자로서
그의 부친은 동래현에 파견된 고위 기술자였다.
동래현는 고려 말, 왜구 침입이 잦았던 국방의 요지.
조선시대 동래현은 현재 부산광역시 전역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일부를 찾이한., 행정구역.
당시, 동래에 파견된 그의 부친., 장성휘.
그 무렵 장영실이 출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영실은 천출이지만 중국어와 아랍어에 능통.
고려 말, 전서 벼슬을 지낸 아버지.,장성휘.
동래현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9살까지 부유한 환경에서 정상 교육을 받은듯.
고려 말, 그의 부친이 지낸 벼슬.,전서.
정3품 관직으로서 중앙관청의 장관급.
부친의 5형제 모두 전서 벼슬을 지냈다.
하여,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교동은
고려 말, "5전서 마을"로 불리웠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그의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고
그의 가문은 몰락해 그는 천출이 된듯 하다.
아산장씨 족보 기록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원나라 귀화인이 아니고
고려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후 뿌리내린 것.
....................아산장씨(牙山蔣氏).............................
아산(牙山)은 충청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시대 아술현(牙述縣), 신라시대 음봉(陰峰 일명 음잠)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로 고쳤다가 그 후 아주(牙州)로 고쳤고,
1413(조선 태종 13) 아산으로 개칭. 1895년(조선 고종 32) 아산군.
시조 장서(蔣壻)는 송나라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신경위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고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상서(尙書) 이강(李綱)과 함께 항전할 것을 주장.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를 타고 망명하여 고려의 아산(牙山)에 표착.
그 사실을 좌복야(左僕射) 박인량과 재보(宰輔) 위계정으로부터 들은
고려 예종이 그에게 아산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그를 아산군(牙山君)에 봉.
시조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
집성촌은 김포, 아산, 청송, 의성, 문경, 진산, 강릉.
조선시대 아산 장씨는 무과 급제자 7명을 배출.
장기인 장명원 장명원 장승우 장언충 장원 장유흠
..................................................................
그는 천출 신분으로 평생 노비로 살 뻔했으나,
궁에 들어가 조선의 과학기술을 이끈 천재 과학자.
세종이 왕이 되면서 조정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세종은 학문에 열중하면서 새로운 문화정치를 편 것.
특히 과학을 크게 일으키려고 재주 있는 인재들을 발탁.
관노 출신인 장영실을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키워냈다.
태종의 혈흔 낭자한 정치기반 위에서 즉위한 세종.
당시 전제와 세제개혁이라는 화급한 과제와 마주쳤다.
토지 분배와 공정한 세금 징수제도는 국가 경영의 근본.
안정적인 국가경영과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경지 당 농업생산성을 대폭 향상시켜야 했다.
세종은 근대적 농법을 보급하고,
그당시 실정에 맞는 역법을 제작하여
시기에 맞는 파종과 추수를 가능하게 했다.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던 그 시기에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치력명시(治曆明時)’,
곧, 백성에게 농사 지을 최적기와 계절을 알려주는 것.
여기에서 세종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농업 발전을 위한 다양한 과학기기를 개발.
막연히 하늘의 뜻에 기대어 농사 지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서 자연의 변화를 계수화 함으로써
적기에 맞춰 수확량은 최대화, 손실은 최소화 하였다.
이때 천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 발명가로 거듭난 장영실.
조선실록 기록에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 귀화인이다.
장영실이 살던 시기는
중원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때.
중국에서 왕조가 흥망하면
많은 망명객이 조선으로 귀화했다.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러한 귀화인이기에
양반은 아니더라도 양인 정도 신분을 얻었을 것.
그런데, 장영실이 어떻게 천민이 되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그의 생모가 동래현의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생모가 관기였으므로 그도 관청에 소속된 관노.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르면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민이라면 자식은 무조건 천민.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 조건은 완급을 되풀이했지만
생모가 천민이면 자식은 천민 신분을 갖는 천자수모(賤者隨母).
고려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바뀌지 않았던 신분제도.
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천출이 많았다.
이러한 강력한 신분제도 하에서도
장영실이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장영실을 선조로 모시는.,'아산장씨세보.'
그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과 족보 기록 상 다른 부분은
쉽게 사실 여부를 가릴 수는 없지만
그가 관노 신분이었던 점은 분명하다.
그가 기술자로서 이름이 알려졌던 시기는
태종 재위 때부터 한양까지 알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틈틈이 동래현의 병기 창고에 들어가
낡고 못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 자질을 발휘.
관상감 출신 남양부사 윤사웅 추천으로 궁중에서 일하게 된다.
1421년(세종 3년), 그는 윤사웅과 함께
북경에 가서 관성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성대는 13세기 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동양 최대 천문대.
각종 천문기기로 천문을 살피는 장소였고 이때 경험을 토대로
장영실은 세종 시대에 완성된 각종 천문기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세종은
“우리나라는 멀리 해외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하나같이
원 제도를 따라 시행하는데,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
세종은 정인지와 정초에게
천문기상기기를 연구하게 하였고,
이천과 그에게 천문기기 제작을 맡겼다.
당시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을 설치하고
장영실에게 책임에 맞은 벼슬을 내리려 했지만
그가 천출이라 중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장영실은 낙심하지 않고
1424년(세종 6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개선하여 실력을 증명.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상의원 별좌 벼슬을 내리려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때 허조는 “기생의 자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오히려 상의원에 적합하다.”며 찬성했다.
이에 세종이 다른 대신들을 불러 재차 묻자,
그중 유정현이 나서 상의원 임명에 찬성했다.
그렇게 세종은 여러 대신들의 공론을 거친 후에야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 벼슬을 내렸다.
그를 면천 과정에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의원(尙衣院)은 왕의 의복을 만들고
궐내의 재물과 보물을 관리하던 관청이었고,
별좌는 종5품 문반직으로 월급 없는 무록관(無祿官).
하지만 장영실이 천민의 너울을 벗는 데는 충분한 자리였다.
이런 영광이 그를 자만하게 만든걸까?
이듬해인 1425년(세종 년) 5월, 장영실은
이간이란 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사성 황현,
양주 부사 이승직 등과 함께 태형 20대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후에도 그는 세종의 배려로
한양 궁궐에서 자신의 직무에 종사했고,
수시로 명나라를 오가며 과학 기술을 입수.
1432년(세종 14년)부터 농업 생산성 향상
'과학기술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었고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 실시
세종은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총지휘를 맡기고
천문관측 관청 서운관을 확장하는 한편, 대형 천문대인
대간의대를 경복궁 안에, 소형 천문대를 광화방 인근에 지었다.
대간의대는 높이 9.5m 왕립천문대로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
이때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간의대에 필요한 각종 기구 제작에 나섰다.
여기에는 과거 명나라의 관성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커다란 밑천이 되었다.
두 사람은 우선 간의(簡儀)를 만들어 한성의 위도를 새로 측정
그 결과를 기준으로 각종 천문기상 기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간의는 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천문의기 혼천의(渾天儀)의 축소판.
혼천의는 천체의 위치와 시각과 함께
태양과 달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지만,
간의는 천체 위치만 측정하는 기기였다.
세종은 그 과정에서 장영실에게
정5품 무관직 ‘행사직(行司直)’을 제수.
장영실은 불과 1년 만에 혼천의 제작에 성공.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하는데,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
천체 운행에 맞게 돌아가는.,혼천시계(渾天時計)이다.
《조선왕조실록》 1437년(세종 19년) 4월 15일자
기록에는 혼천의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시계가 없던 고대에는 낮에 해그림자로 시간을 측정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날씨가 흐리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아 만든 물시계.
기원전 7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된 물시계는 매우 단순한 구조.
물을 채운 항아리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떨어지게 한 다음 다른 항아리에
그 물방울을 받아 부피를 잰 다음 12등분하여
한 시간의 길이를 계산했던 것이 물시계의 구조.
물시계는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했고,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해도 물이 말라
정확한 시간을 제대로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은
1091년경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 물시계를 발명했지만 장치가 복잡하여
기술 전수자가 없었기에 그가 죽은 뒤 사라졌다.
12~13세기 아라비아인들이
쇠공이 굴려 종이나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를 제작.
세종은 일찍이 자동 물시계를 구상했지만
시계 제작에 필요한 자료와 기술이 없었다.
그당시만 해도 과학기술의 불모지였던 조선.
그런데 정인지와 정초가
중국에서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의 물시계 자료를 수집.
장영실이 그것을 바탕으로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오랜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자 세종은 기뻐하며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짓고 자격루를 설치.
궁궐 안에 있다고 하여 금루(禁漏)라고도 불렸던 자격루.
혼천의가 세종 재위 당시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면
자격루(自擊漏)는 백성들을 위한 순수한 창작품이었던 것.
당시 세종이 장영실의 공로를 치하하며
정4품 무관직인 ‘호군(護軍)’을 제수하자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황희가 과거 태종이
김인이라는 평양의 관노를 호군으로 제수한 적이 있다는
전례를 듦으로써 무리 없이 통과되었고 그 무렵 세종은 장영실이
똑똑하다는 이유로 늘 곁에 두고 내시 대신 왕명을 받들게 하기도 했다.
1434년(세종 16년) 7월 1일, 세종은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 시계로 선포.
그때부터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에 있는 종루에서 북이나 종을 쳐서
오정(낮 12시), 인정(밤 10시경) 등 시각을 알렸다.
서울거리 이름인 종로(鐘路)는
바로 이 종루에서부터 유래된 것.
《조선왕조실록》기록에는 자격루가
당시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알게 해준다.
‘보루각에 새 누기(漏器)를 놓고
서운관생으로 하여금 번갈아 입직하여 감독.
경회루 남문과 월화문·근정문에 각각 금고(金鼓)를 설치,
광화문에 대종고(大鍾鼓)를 세워, 각 문의 쇠북을 맡은 자가
당일 밤에 목인(木人)의 금고 소리를 듣고는 차례로 전하여 친다.
영추문에도 큰 북을 세우고,
오시에 목인의 북소리를 듣고 북을 치고,
광화문의 북을 맡은 자도 전하여 북을 친다.
경회루 남문과 영추문·광화문은 서운관생이 맡고,
나머지 문은 각각 그 문에 숙직하는 갑사들이 맡았다.’
1438년(세종 20년), 장영실이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완성하자,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欽敬閣)에 짓고 옥루를 설치.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 관측기능을 합친 다목적 물시계.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필요한 농사 일까지 알려주는 기계가 탄생한 것.
세종은 새삼 장영실의 능력에 감탄하며
우승지 김돈에게 〈흠경각기(欽敬閣記)〉를 짓게 했다.
안타깝게도 옥루는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제작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무렵 장영실이 제작한 과학기기는
혼천의를 간소화한 대간의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시간, 남북 방위를 알려주는 해시계.,앙부일구,
밤낮으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만든 일성정시의,
해 그림자에 따라 절기를 알 수 있는 규표 등이다.
우리나라 금속활자 개발은 고려 고종 때인 1234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조선에서는 1403년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子)가 만들어다.
이는 크기도 일정하지 않았고
활자를 고정하는데 밀랍을 사용해
많은 양의 인쇄물을 찍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만 인쇄해도 밀랍이 녹아버렸기 때문.
1420년, 장영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해
이천, 김돈, 김빈 등과 함께 계미자보다
작고 정교한 경자자(更子字)를 만들었고,
이를 다시 개량한 것이 갑인자(甲寅字)이다.
대소 활자 두 종류로 20여만 자가 넘는 갑인자 효용은 대단
아름답고 선명한 인쇄는 물론이고 종전보다 2배나 빨리 인쇄.
주자소에서 수많은 서적을 인쇄해 세종때 문화발전에 일조했다.
현재 갑인자는 전해지지 않지만
《대학연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등
갑인자로 찍어낸 서책들이 그 유적을 보여준다.
장영실이 만든 또 하나의 회심의 작품이 바로 측우기(測雨器).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농산물의 생산량이 곧 국력의 바로미터.
정밀한 강우량 측정은 농사의 질과 양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그때까지 조선은 비가 땅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1436년 전후 한발과 폭우로 인한 흉년이 거듭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측우기 개발을 명했고 세자 이향, 장영실이
함께 1441년 높이 41.2cm, 직경 16.5cm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였다.
이 측우기는 이듬해 높이 30.9cm
직경 14.1 cm로 규격이 통일되었다.
측우기는 정밀해 대량 제작이 어려웠다.
하여, 장영실은 대중성 있는 측우기를 구상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표(水標)이다.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된 수표
백성들이 쉽게 강우량을 알 수 있어 매우 실용적.
수표교(水標橋)라는 다리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장영실은 이처럼 조선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종3품 대호군까지 승진.
하지만, 천재과학자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장영실은
세종대의 유명한 천문학자 김담의 매형.
'김담'의 실력을 발휘한 천문 분야에 대한
지식 원천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조선시대 세종의 과학입국을 선도했던 장영실.
<세종실록> 1442년 3월 16일 자.,기록.
바로 그 해 세종이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 발생.
어가는 장영실이 설계하고 장인 임효돈이 제작한 것.
그 일로 인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죄인의 몸이 된.,장영실.
대신들은 때를 만난 듯 그를 성토했고,
파직과 함께 곤장 100대 형벌을 상주했다.
그런데 세종의 조치는 뜻밖이었다.
곤장 80대로 감해주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장영실을 중용하고 아꼈던 세종
그 마음이 왜 그렇듯 냉정하게 돌아선걸까?
그 이후 장영실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생활은 물론이고 말년의 행적조차 깨끗하게 묻혀버렸다.
일개 관노에서 종3품 벼슬까지 올랐던 그의 영광도 거기서 끝.
미천한 출신때문에 사가들로부터 외면당했을까?
혹은 그가 갑작스런 지위 상승으로 인해 오만하고
나태해져서 완벽주의자 세종에게 버림받았던 것일까?
그가 몇차례 뇌물 수수로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정도 잘못으로 빛나는 업적이 상쇄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는 과학입국을 지향한 세종의 대표주자 아닌가?
그러기에 오늘날 그의 말년 행적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돌지만 대부분 드라마틱한 허구.
장영실은 미천한 천출 신분으로 태어났기에
그의 유년시절 및 성장과정 기록을 찾을 수 없고
언제 출생했는지 언제 죽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에 관한 기록이 상당 부분 후대에 멸실된듯.
그러나, 장영실은 귀천이 엄연했던.,조선시대
신분의 벽을 뚫고 조선 최고 과학자가 된 인물.
오늘날 우주를 유영하는 소행성 68719호에는
‘장영실(Jangyeongsil)’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그 명성은 우주를 유영하며 별빛처럼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