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작별하고 그들 곁을 떠나셨다. 이제 제자들은 외적으로는 그분을 따를 수 없다. 예수는 추종해야 할 구루(Guru)가 아니다. 그분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가까이 계시려고 하늘로 가셨다. 그분은 우리 내면의 스승이 되셨다. 문제는, 누구든 언제 진정으로 우리 가까이 오는가 하는 것이다. 접촉하고, 이야기 나누고, 입맞춤할 때 그는 가까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깝게 있어도 늘 거리감이 느껴진다. 다른 이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많다. 접촉하면서도 피상적일 때가 많기에 다른 이의 마음에는 가닿지 못한다.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아, 우리는 그분을 만지고 더듬고 붙잡을 수 없다.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실 수 있도록 이제 놓아드려야 한다. 우리는 삶을 두고 스스로 지어낸 환상들과 결별해야 한다. 이는 의존과 종속, 과거의 짐, 인생사의 상처와 결별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늘 질질 끌고 다녀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삶이 너무 고달프지 않겠는가. 어떻게 예수와 함께 하늘 높은 곳으로 들어올려질 수 있겠는가.
구루를 따라 맴도는 일이 바야흐로 중독처럼 번지는 시대다. 누구는 감히 스스로를 구루라 참칭하고, 또 누구는 추종세력들로 인해 구루가 된다. 우리가 예수의 겉모습만 본뜨지 말고 속으로도 닮으라고 그분께서는 하늘로 오르셨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더러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으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사상만을 좇을 것이 아니라 그분의 내밀한 본질, 정신, 그분 전체와 하나 되어야 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부정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내적 자아와 일치하고 내면의 스승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내면의 스승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 꿈과 육체, 주의깊게 듣기만 하면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온갖 자극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예수의 내면의 스승이라는 말은, 그분이 우리의 초자아가 되셨고, 그분의 근본 가르침을 부모님 말씀처럼 그저 명심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내면의 스승은 끊임없는 맞대결을 원한다. 우리는 내면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예수와 대결시키고 그분 편에서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뭘 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실까?"라고 자문해 보라는 사람도 있다. 물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초자아(超自我)의 소리를 예수와 뒤섞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알려면 우선 자신에게 귀기울여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도 자신의 상상을 예수와 혼동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몇번이고 대면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지 말고 그 안에서 예수의 영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말씀 속으로 들어가 묵상해야 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고린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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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면의 스승은 아십니까? 아니면 더 안전한 길인 듯 싶어서 외적인 스승을 더 따르고 그에게 몸을 맡깁니까? 내면의 스승 그리스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 갈 길을 가리키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삶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그대 마음 안에 있습니다. 남의 의견에 기대지 마십시오! 참삶의 길을 남들한테서 찾지 마십시오! 그대 내면의 스승은 하느님이 만드신 유일하고 특별한 모습으로 그대를 자라게 할 것입니다.
내면에 귀기울인다면 무엇이 진정 좋은 것인지, 또 무엇이 정말 그대 내면의 길로 인도하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내면의 스승에 대한 신뢰가 꼭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지를 남한테서 인증(認證)받아 안정감을 얻으려 하지요. 그런 인증 절차를 무시하고 내면의 스승을 신뢰하십시오. 그가 어떤 영성 지도자나 전문 치료사들보다 그대를 더 잘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