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눈물 속으로
송년가
연말결산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겨울비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점등인의 노래
장마전선
일몰
雨 季
2월
4월
6月
7月
8月
9月
10월
11月
12월
가을의 창문을 열면
여름의 끝
표류기
가을비
은행나무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살에는
구름 걸린 미루나무
화선지
강이 흐르리
지렁이
봄날은 간다
시간퇴행(時間退行)
약속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엽서
여름엽서
살아간다는 것은
백수가
안개중독자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별
퇴근
입동
찔레꽃
벚꽃
풀꽃 술잔 나비
비오는 날 달맞이 꽃에게
바위를 위한 노래
놀
그대와 헤어지고
계란
사랑의 계단
앵두 한알
해거름
흔들림
모월모일
빨래줄
장대
공간소묘
첫사랑
날마다 하늘이 열리나니
엽서를 태우다가
변주곡
초생달
회복기
풀꽃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 2
우수雨秀
시간채색
성냥개비
진달래술
광장의 저녁바람
어느 가로수의 日記에서
시인의 이름
그대를 보내고
아직도 살아 있음
가을수첩
인연설
흑백사진을 보며
하지만 개떡 같은 세상이여
흔들림
회상수첩(回想手帖)
겨울예감
눈물겹게 사랑하는 마음
먼지
설야
기적을 기다리며
거울 밖에서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는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안으며
나지막히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밤마다 머리풀고 가문비나무 숲이 울더라
먼 강물 자욱히 물 넘는 소리
무덤마다 비가 오리라
쑥대풀은 우거지고
쓰러지고
반딧불 한 점 불려가더라
모두가 빈 집이더라
다만 자정 무렵 한 남자가
절벅절벅 젖은 양말로 돌아와
램프의 심지를 죽이며 낮게 울더라
~~~~~~~~~~~~~~~~~~~~~~~~~~~~~~~~~~~~
1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
2월
도시의 트럭들은 날마다 살해당한
감성의 낱말들을 쓰레기 하치장으로 실어나른다
내가 사랑하는 낱말들은
지명수배 상태로 지하실에 은둔해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예감
때문에 날마다 그대에게 엽서를 쓴다
세월이 그리움을 매장할 수는 없다
밤이면 선잠결에 그대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
소스라쳐 문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뜬눈으로 정박해 있는 도시
진눈깨비만 시린 눈썹 적시고 있다
~~~~~~~~~~~~~~~~~~~~~~~~~~~~~~~~~~~~
4월
4월에는 부끄러움 때문에 시를 쓸 수가 없다. 정치가들처럼
욕망 때문에 인생에 똥칠이나 하면서 살지 않으면 천만다행.
이미 젊은날 접질러진 내 날개는 하늘로 가서 구름으로 흐른
다. 문을 열면 온 세상이 시로 가득하거늘.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해가 떠 있음을 알고 저녁에 잠들어 꿈 속에 그대를
만나면 그뿐.
~~~~~~~~~~~~~~~~~~~~~~~~~~~~~~~~~~
6월
바람부는 날 은백양나무 숲으로 가면
청명한 날에도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귀를 막아도 들립니다
저무는 서쪽 하늘
걸음마다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知天命)
내 인생은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보행에 불편을 드리지는 않았는지요
오래 전부터
그대에게 엽서를 씁니다
그러나 주소를 몰라
보낼 수 없습니다
서랍을 열어도
온 천지에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한 평생 그리움은 불치병입니다
~~~~~~~~~~~~~~~~~~~~~~~~~~~~~~~~~~~~~~~~~~~~
7月
그대는
오늘도 부재중인가
정오의 햇빛 속에서
공허한 전화벨 소리처럼
매미들이 울고 있다
나는
세상을 등지고
원고지 속으로
망명한다
텅 빈 백색의 거리
모든 문들이
닫혀 있다
인생이 깊어지면
어쩔 수 없이
그리움도 깊어진다
나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방마다 입주시키고
빈혈을 앓으며 쓰러진다
끊임없이 목이 마르다
가을이 오면
그대 기다리는 일상을 접어야겠네
간이역 투명한 햇살 속에서
잘디잔 이파리마다 황금빛 몸살을 앓는
탱자나무 울타리
기다림은 사랑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밀려드나니
그대 이름 지우고
종일토록 내 마음 눈시런 하늘 저 멀리
가벼운 새털구름 한 자락으로나 걸어 두겠네
~~~~~~~~~~~~~~~~~~~~~~~~~~~~~~~~~~~~~~~~~~~~~~~
10월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
12월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조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아직 방황이 끝나지 않았는데
가을이 문을 닫는다
무참히 낙엽은 져 버리고
싸늘한 저녁비에 함몰하는 도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걸음을 멈추면
서늘하게 목덜미를 적시는
겨울예감
새떼들이 떠나 버린 광장
맹목의 개들만 어슬렁거리고 있다
예술이 암장되고
희망도 유보된 시대
시계탑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수은주의 눈금이 내려갈수록
눈물은 투명해진다
나는 투명해지는 눈물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해파리
홀로 시간의 바다를
표류한다
이제는 누구의 사랑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독약 같은 외로움만
일용할 양식이다
온 세상 푸르던 젊은 날에는
가난에 사랑도 박탈당하고
역마살로 한 세상 떠돌았지요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지요
그리운 이름들은 모두
구름 걸린 언덕에서
키 큰 미루나무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면 들리시나요
그대 이름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
~~~~~~~~~~~~~~~~~~~~~~~~~~~~~~~~~~~~~~~~
화선지 (畵 宣紙)
새 한 마리만 그려 넣으면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시집 : 도적놈 셋이서
~~~~~~~~~~~~~~~~~~~~~~~~~~~~~~~~~~~~~~
강이 흐르리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날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 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멀리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아,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
지렁이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 했습니까?
~~~~~~~~~~~~~~~~~~~~~~~~~~~~~~~
봄날은 간다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 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
시간퇴행(時間退行) - 이외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젊음은 아름답지 않았어
가난이 질척거리는 길바닥 맨발의 슬픔으로
그대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
때로는 미농지처럼 바스락거리는 목숨으로
마른 꽃잎 한 장도 끼워 두었지
언제나 그대는 주소불명
편지는 반송되고
밤마다 허기진 불빛으로 돌아오는
남춘천 마지막 열차
나는 늑골을 적시는 겨울비에 진저리를 치면서
사랑을 예찬하는 모든 시인에게 침을 뱉았어
통금이 임박해 오는 목로주점
밤마다 흐린 백열전구 불빛에 흔들리며
차라리 자살한
어느 저음가수의 통속한 생애를 예찬했지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어
인생은 지느러미를 잘리운 채로
어두운 바다 절망의 동굴 속을 헤엄치는 꿈
내 시간의 폴더에는
불러오기 파일이 손상되고
어느새 무서리 내리는 지천명
잠결에 듣는 바람소리에도 온 생애가 펄럭거리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날을 회상하면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돌출하는 메시지
'당신의 인생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그대는 오지 않았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어
그리움 짙푸른 여름 한나절
눈부시게 표백되는 시간
가로질러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음악으로
멀어지는 강물소리
시집 ;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
엽서
울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더 높이 날수록 더 멀리 있는 그리움을 보는 눈
해마다 겨울이면
눈 내리는 내 방 창가로 날아와서
오스스 떨고 있는 記憶의 새 한마리
~~~~~~~~~~~~~~~~~~~~~~~~~~~~~~~~~~~~~~~~~~
여름엽서
마음으로만은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살 가슴앓이
死語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즈막히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
백수가
그대여,
오늘 하루도 잘,
뒹굴
뒹굴
하였는가.
봄날의 곰처럼
정오의 공작처럼
빈둥
빈둥
오, 아름다운 그대의 삶.
그대의 부모는
그대를 보고 말할 것이다.
"자~알 한다.."
"자~알 하는 짓이다."라고
아아.
나 역시 그대를 보고 말하나니
그대여 자~알 한다.
정말이지
자~알 하는 짓이다.
자~알 살고 있는 그대가
오늘도 나에게 물어왔다.
도대체 할 일이 없다고,
도무지
뭘 하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고
그대는 나에게 물어왔다.
그렇다 그대여.
지금 그대에게 할 일이 없다.
세상엔 정말이지
그대가 할 만한 일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듯하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그대가 지금 잘 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어느 기업인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거창한 말을 외쳤지만
뭐, 할 일이 그렇게도 많다면
많이들 하라 그러고,
오늘은 그대와 나
세계가 아무리 넓어도
도무지 할 일 없는 인간들끼리
뒹굴 뒹굴
빈둥빈둥
방바닥이나 문질러 보자.
그대여.
그대는 지금 멋지게 살고 있다.
그대의 삶은 지극히 정상이며,
지금 이 시기야말로
젊은 날 반드시 거쳐야 할
황금의 터널이니,
나는 그대가
진실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렇다 그대여.
백수가 아닌 젊음은
젊음이 아니다.
진실로 진실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나니,
아무런 주저 없이
그저 돈이나 벌기 위해
취직부터 하고 보는 젊음이야말로,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몰가치한 삶인가.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지만
무릇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에 불과하다.
그것이 직업이다.
자신의 직업, 귀하고 올바른 직업을 찾는데는
비록 평생을 바친다한들 아까운 일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직업을 통해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의 직업을 통해
그대의 삶,
그대 가족의 삶을 영위해야 함은 물론,
나아가 타인의 삶 역시
이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대의 직업은
늘 가슴 뛰고,
하면 할수록 보람차고 신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만이
진정으로 그대는
그대의 직업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대여.
직업을 찾는다는 것을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걸어가야 할 길을
오늘의 젊은이들은
너무나 쉽게,
너무나 간편하게
결정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한다.
일찍 취직을 했을수록,
크고 끗발 좋은 직장에 합격했을수록
그들의 어깨엔 힘이 들어가고
그들의 시각은
마비되어 버린다.
그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그런 것이며,
그들의 삶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다.
나는 그저 그런 식으로 직업을 선택한 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젊고,
싱싱한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에 마비되지 않은
진지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진 것이다.
그리고 다만
직업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그대가 무능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지금 그대의 길을 찾고 있는 중이며,
저 널려 있는
천한 직업의 지뢰밭을 통과해
귀하고 귀한
그대의 직업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젊음,
경건한 젊음을 지닌 이로서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그대여.
직업엔 분명 귀천이 있다.
물론 빌어먹을 세상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귀한 직업으로.
돈을 못 버는 직업을
천한 직업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천한 직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직업,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직업이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천한 직업들을 보아왔다.
사리사욕에 눈먼 정치가들,
뇌물로 돈을 모은 공무원들,
남의 재산을 탐하는 범죄자들,
아랫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직장의 간부들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이는 모두 천한 직업이다.
분명 이들은 직업을 잘못 선택했으며,
직업을 잘못 선택한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망치는 주범들이다.
나는 그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꼬봉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망치는 일에 일조하는 이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그대는 여지껏
참고 기다려 왔으며,
이제 잠시 후면
반드시 자신의 역량을 걸맞는
귀하고 귀한 직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늦어도
부끄럽지 않는 것.
늦고 늦을수록 그 쓰임이 크고 너그러워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그런 귀한 직업에 종사하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한다.
그대여.
귀한 직업을 가진 삶,
또 그 직업에 평생을 바친 이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을 찾기 위해,
날로 연마하고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이의 삶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렇다 그대여.
누가 백수를 무직이라 했는가.
백수야말로 직업선택업이라는
귀하고 귀한 젊음의 직업이니
보라.
그대의 이름은 백수,
백수는 프로보다 아름답다.
~~~~~~~~~~~~~~~~~~~~~~~~~~~~~~~~~~~~~
안개중독자
사랑아
그대가 떠나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지워진다
나는
아직도 안개중독자로 공지천을 떠돌고 있다
흐리게 지워지는 풍경 너머 어디쯤
지난 날 그대에게 엽서를 보내던 우체국이 매몰되어 있을까
길없는 허공에서 일어나 길없는 허공에서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토록 아파한 나날들도
손금 속에 각인되지 않은 채로 소멸한다
결국 춘천에서는
방황만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다
~~~~~~~~~~~~~~~~~~~~~~~~~~~~~~~~~~~~~~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 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
별
내 영혼이 죽은 채로 술병 속에
썩고 있을 때
잠들어 이대로 죽고 싶다
울고 있을 때
그대 무심히 초겨울 바람 속을 걸어와
별이 되었다
오늘은 서울에 찾아와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자욱한 문명의 먼지
내 별이 교신하는 소리 들리지 않고
나는 다만 마음에 점 하나만 찍어두노니
어느날 하늘 맑은 땅이 있어
문득 하늘을 보면
그 점도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
입동
날마다 오후 여섯시부터
길을 잃어 버리는 당신
~~~~~~~~~~~~~~~~~~~~~~~~~~~~~~~~~~~
찔레꽃
마음으로만은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살 가슴앓이
死語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
벚꽃
오늘 햇빛 이렇게 화사한 마을
빵 한 조각을 먹는다
아 부끄러워라
나는 왜 사나.
~~~~~~~~~~~~~~~~~~~~~~~~~~~~~~~~~~~~~~~~~~~~
풀꽃 술잔 나비
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마음 여기 홀로 술 한잔을 마신다
이 나라 어두움도 모두 마신다
나는 나는 이 깊은 겨울
한마리 벌레처럼 잠을 자면서
어느 봄날 은혜의 날개를 달고
한마리 나비되는 꿈을 꾸면서
이 밤을 돌아앉아 촛불을 켠다
그대는 이 나라 어디 언덕에
그리운 풀꽃으로 흔들리느냐
오늘은 네 곁으로 바람이 불고
빈마음 여기 홀로 술을 마신다
~~~~~~~~~~~~~~~~~~~~~~~~~~~~~~~~~~~~~~~
비오는 날 달맞이 꽃에게
이 세상 슬픈 작별들은 모두
저문 강에 흐르는 물소리가 되더라
머리 풀고 흐느끼는
갈대밭이 되더라
해체되는 시간 저편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시어들은
무상한 실삼나무 숲이 되어 자라 오르고
목메이던 노래도 지금쯤
젖은 채로 떠돌다 바다에 닿았으리
작별 끝에 비로소 알게 되더라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노래가 되지 않고
더러는 회색하늘에 머물러서
울음이 되더라
범람하는 울음이 되더라
내 영혼을 허물더라
~~~~~~~~~~~~~~~~~~~~~~~~~~~~~~~~~~
바위를 위한 노래
날개가 없다고 어찌 비상을 꿈꾸지 않으랴
천만년 한 자리에 붙박혀 사는 바위도
날마다 무한창공을
바라보나니
기다리는 일은 사랑하는 일보다 눈물겹더라
허연 거품을 물고 실신하는 바람
절망하고
눈보라에 속절없이 매몰되는 바다
절망하고
겨울에는
사랑보다 증오가 깊어지더라
지금은 작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무덤이더라
그래도 천만년 스쳐가는 인연마다 살을 헐며
날마다 무한창공을
바라보나니
언젠가는 가벼운 먼지 한 점으로
부유하는 그날까지
날개가 없다고 어찌 비상을 꿈꾸지 않으랴
~~~~~~~~~~~~~~~~~~~~~~~~~~~~~~~~~~~~~~~~~
놀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가 그림자 지는 풍경 속에
배 한 척을 띄우고
복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뼈가루를 뿌리고 있다
살아 있는 날들은
무엇을 증오하고 무엇을 사랑하랴
나도 언젠가는 서산머리 불타는 놀 속에
영혼을 눕히리니
가슴에 못다한 말들이 남아 있어
더러는 저녁강에 잘디잔 물비늘로
되살아나서
안타까이 그대 이름 불러도
알지 못하리
걸음마다 이별이 기다리고
이별 끝에 저 하늘도 놀이 지나니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
그대와 헤어지고
그대와 헤어지고
겨울이 온다.
영원으로 깊이 잠든
빙하기의 하늘을 지나
비어나간 내 관절 속으로
와서 우는
가느다란 유리새 울음소리
그대도 깨어있을
지금은 새벽 두 시
빈 조롱 철사줄마다
뜬 눈으로 별들이 매달려 있다
~~~~~~~~~~~~~~~~~~~~~~~~~~~~~~~~~~~
계란
비록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죽은 것은 아니었어요
날개없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멎은 채로 가슴 안에 키우던 꿈
푸른 하늘이지요
당신은 겨우 나를 후라이팬에 튀겨
김밥 속에 쑤셔 넣고 있지만요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내 가슴 안에는
작은 아침 해 하나
금빛 꿈으로 들어 앉아 있었다구요
~~~~~~~~~~~~~~~~~~~~~~~~~~~~~~~~~~~~
사랑의 계단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깨위에 소리없이 내려앉는
한 점 먼지에게 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부여하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하찮은 요소까지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계단으로 오르는 문이 열리리라
~~~~~~~~~~~~~~~~~~~~~~~~~~~~~~~~~~~~~~~~~~~~~
앵두 한알
어린시절
처음으로 내 가슴
설레게 하던
여자애
가시에 찔린 손가락
호오 불어 주었지
그 선명한 피 한 방울
아직도
가슴 아리게 하네
~~~~~~~~~~~~~~~~~~~~~~~~~~~~~~~
해거름
누이야
전생길 떠날 때 뻐꾸기 피울음은
이승길 돌아와도
뻐꾸기 피울음이지
개망초 무성한 수풀 뒤로
햇살은 돌아눕고
한 걸음만 돌아서도 지워지는 사랑으로
눈썹 언저리에
날개접는 부전나비
누이야
아무리 걸어도 길은 낯설어
물소리만 저 홀로 깊어가더라
~~~~~~~~~~~~~~~~~~~~~~~~~~~~~~~~~
흔들림
바람 불 때 흔들리는 목숨들은
흔들리는 목숨대로
그만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나니
잔설 녹는 산비탈
봄날은 깊어
바람도 없는 한나절
꿀물같이 흐르는 햇살에
허리 적시고
산벌들 날개소리에도 흔들리는 싸리꽃.
~~~~~~~~~~~~~~~~~~~~~~~~~~~~~~~~~~~~~~~~~~
모월모일
먼 여행에서 돌아온 날
문틈에 시든 꽃 한 송이
물려 있다
그애가 왔다갔구나
첫사랑
이제야
마음 다 비운 줄 알았더니
수양버들 머리 풀고
달려오는 초여름
아직도 초록색 피 한 방울로
남아 있는
그대 이름
~~~~~~~~~~~~~~~~~~~~~~~~~~~~~~~
빨레줄
왜 당신의 마음은 세탁해서 널어놓지 않나요
~~~~~~~~~~~~~~~~~~~~~~~~~~
장대
오
로
지
그
리
움
하
나
때
문
에
사
시
장
철
이
런
몰
골
로
서
있
습
니
다
~~~~~~~~~~~~
공간소묘
사막이 문을 닫았다
갇힌 바람이 울고 있다
선인장 꽃 한 송이
금강경을 암송하고 있다
기울어 지는 여름
~~~~~~~~~~~~~~~~~~~~~~~~~~~~
첫사랑
이제야
마음 다 비운 줄 알았더니
수양버들 머리 풀고
달려오는 초여름
아직도 초록색 피 한 방울로
남아 있는
그대 이름
~~~~~~~~~~~~~~~~~~~~~~~~~~~~~~~~~~~
날마다 하늘이 열리나니
팔이 안으로만 굽는다 하여
어찌 등 뒤에 있는 그대를 껴안을 수 없으랴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
~~~~~~~~~~~~~~~~~~~~~~~~~~~~~~~~~~~~~
엽서를 태우다가
지난 밤 그대에게 보내려고 써 둔 엽서
아침에 다시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성냥불을 붙였다
끝까지 타지 않고 남은 글자들
외
로
움
~~~~~~~~~~~~~~~~~~~~~~~~~~~~~~~~~
변주곡
변두리 로만 떠돌던
내 이십대의 겨울
女子들이 언제나 먼저
나를 버렸지
폐결핵(肺結核)을 앓던 나날
굳게 닫힌 유리창(流璃窓)앞에 서면
가슴안에 돋아나는 저승꽃도 보였지
손톱으로 성에를 긁어내며
봄
이라고 자꾸만
써보곤 했지
밤이되면 벽(壁)속에는
가득한 바람 소리
떠나간 이들의 소식은 모두 끊어지고
잠들면 밤새도록 폭설(暴雪)이 내려
적설량(積雪量)은 내 키보다 높아만 가고
빙점(氷點)에 머물러 얼어 붙은채
누구의 입김으로도 녹일 수 없었던
시(詩)
사랑
눈물
이라는 생명(生命)의 말들
방 안 가득 하얗게 죽어있는
파지(破紙)들 이여
그러나 용서(容薯)하라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나는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나니
한 세상(世上) 어둠 안고 떠돌다가
어느덧 마흔해가 흘러 갔는데
오늘 서울 행 버스에서 본 경춘가도(京春街道)
무더기로 개나리가 피어 있더라
사람만은 떠나서 되돌아 오지않고
다만 의암호 깊은 물에
반짝이는 물비늘
그 겨울의 가난이
내 사랑을 죽였다 하더라도
내 낱말은 죽일수가 없었으리
폐결핵(肺結核)을 앓던 나날
굳게 닫힌 유리창(流璃窓)앞에 서면
가슴안에 돋아나는 저승꽃도 보였지만
손톱으로 성에를 긁어내며
봄
이라고 자꾸만
써보기도 했지만
풀꽃 술잔 나비 / 동문선 1987
~~~~~~~~~~~~~~~~~~~~~~~~~~~~~~~~~~
초생달
이제 기울어
가득 찬 일을 잊었다
소슬한 바람에도
허리굽혀 흐르나니
나 있는곳이
그대와 멀지않다
이따금 편지를 잊었어도
중천이 맑다
추신 없음.
~~~~~~~~~~~~~~~~~~~~~~~~~~~~~~~
회복기
나는 이제 사랑을 믿지 않는다
망초꽃 지천으로 흔들리는 벌판
그대 모습 보이지 않고
종일토록 구름 한 장으로 머물러
기다리던 젊은날
나는 이제 그리움도 믿지 않는다
어느 새 아름다운 언약들은
망실되고
깊어지는 손금 속으로
저물어 가는 세상
선명한 이름은
선명한 상처가 되지만
선명한 상처는
선명한 별이 되지 않는다
새들은
물기 어린 음표들을 하나씩 물고
헐벗은 내 영혼의
실삼나무를 떠난다
사랑은
봄밤에 꿈결같이 내리는 함박눈
내려서 탄식같이 스러지는
소망의 비늘이다
~~~~~~~~~~~~~~~~~~~~~~~~~~~~~~~~~~~~~~
풀꽃
세상길 오다가다
나도 법문 같은 개소리
몇 마디쯤 던질 줄은 알지만
낯선 시골길
한가로이 걷다 만나는 풀꽃 한 송이
너만 보면 절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렇다면
내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는 뜻
~~~~~~~~~~~~~~~~~~~~~~~~~~~~~~~~~~~~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
그 누군들 자살을 꿈꾸지 않았으랴.
삶은 외롭고 고달픈 것이니
그대는 지금 그 서러운 길 위에서
절망하고 있다.
절망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희망이 없는 것이니
그대여
우리의 인생사 서러워라
차가운 세상사
무한히 서러워라.
그대여,
나는 지금 자살을 꿈꾸는 그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우리의 인생은 서러운데,
별은 저리도 눈부셔 눈물만 나는구나.
이 뜨거운 삶의 담벼락에 기대앉아
서로의 이를 솎아 주듯
나는 그대와 얘기하고 싶다.
그대여,
희망은 과연 없는 것일까?
과연 세상은 눈곱만큼도 살 가치가 없는 것일까?
나는 지금,
그대 눈물이 마른자리 눈곱을 떼어 주며
눈곱만큼 작은
세상의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대여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이 운명의 뼈대를 피해 갈 수 없었나니
생 노 병 사 희 노 애 락
이 여덟 가지의 뼈대가 그것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무릇 모든 인간의 운명이
이 여덟 가지의 틀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그대는 우선 이 사실을 받아들여아 한다.
인생이 왜 서러운가?
이 운명의 뼈대 속에서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려 들기 때문이다.
기쁨이 아니라는 이유로, 즐거움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의 늙는 것을 탄식하고, 병듬을 두려워하며
분노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인생을 서러워한다.
그러나 그대여, 이제 알지어다.
生老病死 喜怒哀樂
이 모두가
그대가 '반드시' 겪게 될 인생이니
여지껏 그대의 인생 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다 하더라도
길고 긴 그대의 미래 속에는
그것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 2
그런 이유로
세상이 희망만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세상이 절망만으로 가득하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무리 큰 희망도, 아무리 큰 절망도
운명의 큰 계획 속에선 그저 눈곱에 불과한 것이니
그대여, 지금의 근심을 근심하지 말라.
근심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며,
또 모든 근심은 '100%' 없어지는 것이니
돌이켜 보라.
10년 전의 근심을 그대가 기억하고 있는지...
5년 전의 자지러졌던 그 근심이
아직껏 그대에게 남아 있는지
이제 알지어다.
희망도 절망도
그 모두가 눈곱이다.
그대여, 이제 나는 그대에게 이 모든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하려 한다.
태어난 사실을 사랑하라.
눈물겹게 사랑하라.
분노도 슬픔도
늙음조차도 사랑해아 하느니,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혼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탄생과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차원, 또 다른 공간으로 변화해 갈 뿐이다.
사랑하라 그대여,
生老病死 喜怒哀樂
이 모두가 그대의 소중한 영혼을 키오고 살찌우기 위한
우주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대여, 죽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래도 그대가 자살하고 싶다면
그대는 우선 세상 만물의 동의부터 구해야 한다.
그대의 생명은
그대만의 것이 아니니
진실로 진실로
그대의 생명은 세상 만물의 것이니
그대는 여지껏
부모님의 몸을 빌어 세상에 왔음은 물론,
세상 만물들 -
벼,
배추,
양파,
물고기,
가축...
이 모두의 생명을 지원 받아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대여, 진실로 그대가 자살하고 싶다면
우선 이들 모두로부터 허락을 받아라.
그 소중한 희생에 대해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간다면
세상에 이보다
째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대여, 이제 새상을 끊자.
생각을 끊고 마음으로 만물을 바라보자.
마음으로 그대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자.
우주가 계획한 그대의 인생을 바라보고,
그대 생명의 소중함을 바라보자.
죽음은
한 세상을 사랑하다 마감하는 경건한 영혼의 분기점이니
진실로 진실로
그대 앞의 생을 사랑한 후에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시처럼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거라.
~~~~~~~~~~~~~~~~~~~~~~~~~~~~~~~~~~~~~~~~
우수雨秀
밤마다 머리풀고 가문비나무 숲이 울더라
먼 강물 자욱히 물 넘는 소리
무덤마다 비가 오리라
쑥대풀은 우거지고
쓰러지고
반딧불 한 점 불려가더라
모두가 빈집이더라
다만 자정 무렵 한 남자가
절벅절벅 젖은 양말로 돌아와
램프의 심지를 죽이며 낮게 울더라
~~~~~~~~~~~~~~~~~~~~~~~~~~~~~~~~~~~~~~~~~~~~~~
시간채색
허송세월
발목 잡는 세속에 등 돌리고
세필에 맑은 먹물
가느다란 선 하나로 산을 그렸다
이런 날 그대는
어찌 지내시는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내가 그린 산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거기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해는 이마를 지우며
어느새 등성이를 넘고 있다
李外秀의 시간채색 11월호
~~~~~~~~~~~~~~~~~~~~~~~~~~~~~~~~~
성냥개비
그대는 알고 있을까
물소리 저 홀로 깊어지는 가을날
그대 유년의 바람부는 벌판에서
나는
한 그루
몽상의 미루나무
가지마다 순금빛 음표들 나부끼며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네
유년의 물소리 머나 먼 바다에 이르러
돌아오지 않고
통로가 보이지 않는
직육면체의 단칸방
나는
전신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쪼개진 채
가느다란 뼈 하나로 남아 있다네
그대 손바닥 위에
내가 놓여 있어도
그대는 기억할 수 없으리
그대 유년의 바람부는 벌판에서
나는
한 그루
몽상의 미루나무
지금은 소멸의 갈망 속에 침묵하다가
그대 가벼운 손짓 한 번에도
점화대는
영혼의 불꽃
그대는 끝내 알지 못하리
어둠이 짙을수록
눈부시게 소멸하고
소멸한 그 자리에
내가 느낌표 하나로 남아 있어도
창문을 연다
가을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떠나는구나
나는
하늘 한 조각을 오려서
노트 갈피에 끼우고
사랑은 끝내 시리다
라고 적는다
2004년 10월 29일
~~~~~~~~~~~~~~~~~~~~~~~~~~~~~~~~~~~~~~~~
인연설
안개꽃은
싸락눈을 연상시킵니다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어느 날 해묵은 기억의 서랍을 떠나
이 세상 어딘가에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방황해 보아도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불면 속에서
도시는 눈보라에 함몰하고
작별은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면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아무래도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
흑백사진을 보며
언젠가는 그대도 만나게 되리
적막강산
흐린 풍경 속으로
새떼들이 떠나고
정지한 벽시계의 문자판
속으로 쏟아지는 함박눈
교통이 두절되고
날이 저물고
그토록 눈부시던 추억마저
무채색으로 퇴락해 버린 자리
기진한 걸음으로 도달한
윤회의 건널목에서
그대는 비로소 알게 되리
시간은 언제나 정지해 있었는데
그대 자신만
부질없이 흐르고 있었음을
~~~~~~~~~~~~~~~~~~~~~~~~~~~~~~~~~~
하지만 개떡 같은 세상이여
몸은 병들어
비틀거리고
글은 쓸수록 까마득한데
어느새
머리에는 하얀 무서리
하지만 개떡 같은 세상이여
까불지 마라
아직은
가운데 손가락
힘차게 뻗어
뻑큐를 먹일 기력은 남아 있으니
내 목숨 다 하는 그날까지
겨울에도
시퍼런 대숲
자라오르고
그 위로 보름달 하나
청명하리라
~~~~~~~~~~~~~~~~~~~~~~~~~~~~~~~~
흔들림
바람 불 때 흔들리는 목숨들은
흔들리는 목숨대로
그만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나니
양지바른 산비탈 봄날은 깊어
바람도 없는 한나절
꿀물같이 흐르는 햇살에 허리 적시고
산벌들 날개소리에도 흔들리는 싸리꽃
~~~~~~~~~~~~~~~~~~~~~~~~~~~~~~~~~~~~~~~~~
회상수첩(回想手帖)
그해 겨울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언제나
바람이 허파 속에서
부러진 날개를 푸득거리고 있었어
생손앓이 사랑 끝에 도시는 폐쇄되고
톱질 당한 다리 절름거리며
무채색 하늘을 건너가는 가로수들
거리에는 음악소리 저물어 가고
내 목숨 마른 풀잎 하나로 허공을 떠돌았지
기다리던 함박눈은 내리지 않았어
어느새 인적이 끊어진 지하도 가판대
석간신문들은 거만한 목소리로
낭만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지
끝내 실종된 친구들은 돌아오지 않았어
시간의 늑골을 분지르며 질주하는 전동차
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흔들리며
겨울의 중심부로 유배되고 있었지
아무도 침몰하는 세상을 욕하지 않았어
다만 흐린 밀감빛 등불 아래
어느 서정시인의 시집을 펼쳐들고
한 여자가 소리죽여 울고 있었지
문득 고백하고 싶었어
만약 이 세상에 진실로 봄이 온다면
날마다 그녀가 차리는 아침 식탁
내 영혼 푸른 채소 한 잎으로 놓이겠다고
~~~~~~~~~~~~~~~~~~~~~~~~~~~~~~~~~~~~~~~~~
겨울예감
텅 빈 시간의 강물 가로질러 어디로 날아가니
목덜미를 적시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사랑 부질없더라 갈대수풀 우거진
벌판 맨발로 절룩거리며 피흘리던 나날도 부
질없더라
목메이게 부르고 싶던 이름 이제는 떠오르지
않고 안타까이 멀어져 가는 기러기떼 울음만
남아 청명한 서쪽 하늘 해마다 겨울은 예감부
터 먼저 당도해 서슬 푸른 비수로 내 가슴을
에이더라
별이며 새며 꽃과 나비에도
모두 사람의 마음이 실려 있고
집과 길과 전신주와 쓰레기통 속에도
누군가의 마음이 실려 있다
길섶에서 자라는 보잘 것 없는 풀꽃 하나라도
부디 눈물겹게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가
길섶에서 자라는
보잘 것 없는 풀꽃이 되어야 한다
외롭고 슬픈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자
온실에서 자란 꽃은 섬약하다
비록 그것이 순간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내놓았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갈 것인지는 확실히 보장할 수가 없다.
사랑... 낭만이라는 강변에 피어난 꽃이여!
인간을 사랑하라. 그리고 낭만도 사랑하라
낭만이 없는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다.
메마른 모래 사막에서는
한 포기의 풀잎도 자랄 수 없듯이......
<이외수가 전해주는 마음의 열쇠 "뼈" > 중에서
~~~~~~~~~~~~~~~~~~~~~~~~~~~~~~~~~~~~~~~~~~~~~~~~~
먼지
어쩐지 먼 곳으로 떠나는 예감 햇빛 밝은 날
~~~~~~~~~~~~~~~~~~~~~~~~~~~~~~~~~~~~~~~~~~~~~
설야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며
눈이 내린다는 말 한마디
어디선가
나귀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죽인 새벽 두 시
생각나느니 그리운 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 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 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시간 누구든 홀로
깨어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 있음을
~~~~~~~~~~~~~~~~~~~~~~~~~~~~~~~~~~
기적을 기다리며
인류의 종말은 어디까지 도래했나
어둠 속에서
시뻘건 십자가들만 발악적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도시
산성비가 내린다
이제 영혼이 투명한 자들은
모두 어디로 유배되어 갔을까
척박한 세월
가문 날 논바닥처럼 갈라지는 가슴으로
술을 마시면
아직도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
이게 바로 기적이라는 것일까
~~~~~~~~~~~~~~~~~~~~~~~~~~~~~~~~~
거울 밖에서
날이 저물고
나는 실종된다
이제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현실에 절망하는 자에게만
미래에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암전?도시
허파 속으로
비가 내리고
일기장 갈피마다 날갯죽지가 부러진 새들
안쓰럽게 파닥거리는 소리
누군가 나를 미행하고 있다
~~~~~~~~~~~~~~~~~~~~~~~~~~~~~~~~~~~~
비에 관한 명상 수첩
1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이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2
비가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의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3
비는 뼛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4
빗속에서는 시간이 정체된다.
나는 도시를 방황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범람하는 통곡 속에서 해체된다. 폐점시간이 임박한 목로주점. 홀로 마시는 술은 독약처럼 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바하의 우울한 첼로를 듣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날이 새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이 메인다.
5
우리가 못다한 말들이 비가 되어 내린다.
결별 끝에는 언제나 침묵이 남는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해도 돌아갈 수 없는 전생.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가. 유배당한 영혼으로 떠도는 세속의 거리에는 예술이 암장되고 신화가 은폐된다. 물안개 자욱한 윤회의 강변 어디쯤에서 아직도 그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쓰라린 기억의 편린들을 간직한 채 그대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야 한다. 세속의 시간은 언제나 사랑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