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의 단편적 자료들② 명도전은 연나라 화폐가 아니라 고조선의 화폐이다.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은 매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일반인이 알기 어려우므로 이를 이해하기 쉽고 또 활용하기도 쉽도록 이들 고대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고 퍼뜨려져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다는 왜색식민사학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반드시 폐기되고 대륙에 위치해 있던 한사군의 바른 위치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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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명도전은 연나라의 화폐가 아니라 고조선의 화폐이다.
명도전의 설명에 앞서 연(燕)나라에 대해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연나라는 중국의 주(周)나라 무왕의 아우 소공 석(召公 奭)이 분봉 받아 주나라 북쪽에 세워진 제후국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는 국력이 매우 약한 약소국이었으며, 한 때 제나라에게 패해(BC 314) 제나라의 속국이 되기도 하였다.
원래 주나라의 처음 영토가 협소하였기 때문에 분봉 받은 연나라는 남쪽의 제나라(산동성)와 서쪽의 조나라(산서성 서남부)에 끼어 있는 약소국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양왕(昭襄王) 때 부국강병책을 써서 나라가 발전하였고, 진개(BC 311-279)에게 명하여 조선을 침략하니 동호(東胡: 조선)가 1천여리를 물러났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연나라는 또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서 동호의 침략을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사기 흉노열전(『史記』卷一百十, 匈奴列傳第五十)>
연나라는 조양(朝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동쪽의 끝인 요동군의 양평은 어데인가? 『後漢書 李賢의 註』에 의하면 “양평은 요동의 속현으로 금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노룡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며, 이보다 서남쪽에 있는 곳은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은 조양(朝陽)과 상곡(上谷)인데, 당시의 조양(造陽)은 상곡(上谷)에 소속된 땅으로 연장성의 동쪽 끝인 양평(唐山)에서 서쪽으로 천리 정도 떨어진 영성하 북쪽에 위치한 곳이고, 상곡(上谷)은 조양과 지금의 북경 중간의 장가구(張家口) 부근에 위치한 땅이다. 이들의 땅은 진개의 침략 이전에 고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안경전 역 환단고기 581p 참고)
위와 같은 진개의 침략 전 고조선 영토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깊숙한 곳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고조선의 지역은 명도전이 발굴된 지역과 일치한다. 결코 연나라의 명도전이 될 수 잆다.
연나라는 진개(BC 311-279)가 고조선의 땅 1천여 리를 빼앗은 후 70년도 못된 222년 진시황에게 멸망당했으며, 멸망 이전에도 진나라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연나라 진개가 죽은(BC 279) 후 불과 57년 후인 BC 222년 연나라가 망했는데, 이 57년 동안에 요동과 조선 땅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연나라의 화폐가 엄청나게 통용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명도전은 연나라의 수도이었던 계(薊: 천진시 북쪽에 있는 하북성 형태시) 이남에서는 명도전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명도전은 연나라와 이웃해 있던 조(趙)나라나 제(齊)나라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아서 이들 나라가 명도전에 의한 연나라와의 교역은 없었고, 연나라의 화폐가 아님을 증명한다.
명도전은 대체로 BC 3-2세기(BC 201-101년)로 추정되는 시기에 요동과 서북한, 하북성 지역에 집중 분포된다고 한다. 서북한 지역에서는 BC 1세기(BC 1-100년) 이후의 오수전(五銖錢)과 함께 평양시 정백동 3호무덤의 출토예가 알려져 있기도 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고학사전). 연나라가 진나라에게 멸망당한 것이 BC 222년이므로 BC 3-2세기는 연나라가 멸망당한 이후의 일이며, BC 1세기(BC 1-100년)은 위만조선(BC 194-108) 시기에 해당되어 한나라 시기에 해당되므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고학사전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사학계는 '전국시대 연나라(기원전 323-222년)에서 만들어진 청동제 화폐'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약소국가이던 연나라가 불과 100년 사이에 한반도와 요동 및 조선이 점령하고 있던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 지역에 엄청난 명도전을 만들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〇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화폐를 사용했다고 기록한 고조선
한서지리지에 조선의 팔조금법(八條禁法)에는
1.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2.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3.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가 노비로 삼는다. 단 스스로 면하려면 1사람 당 50만 전(錢)을 내야 한다. 고 하여 8개의 조목 중 3개의 조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도둑질을 했는데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것은 고조선에 화폐가 사용되었다고 하는 기록이다.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로 봄이 타당하다.
〇명도전에 관련된 연구
명도전에 대한 연구는 지난 2000년 박선미 연구원이 발표한 석사학위 논문 ' <기원전 3-2세기 고조선 문화와 명도전 유적>'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논문은 명도전 유적 분포와 러시아 학자 유 엠 부찐이 그린 '조선의 영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길림대학 역사학과 장박천(張博泉) 교수는 2004년 <북방문물北方文物) 학술지에 <명도전연구속설>이라는 주제로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라고 주장했다.“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첨수도, 원절식도폐, 방절식도폐가 그것이다.
첨수도는 끝이 뾰족한 것이고 원절식은 화폐를 묶기 위해 구멍을 원으로 낸 것, 방절식은 구멍이 사각형으로 된 것을 말한다. 이들 화폐 가운데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고 관련 족의 화폐이고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 화폐다.”라고 하였는데,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많은 명도전이 원절식이다.
〇명도전의 고고학사전에 실린 잘못된 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고학사전에 실린 아래의 설명은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임에도 불구하고 연나라 화례라는 왜곡된 주장으로 한국고대사를 잘못 기재하고 있다. 식민사학자들은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무시하고만 있어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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