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마음공부방] 교사(敎史)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제1장 새 회상(會上)의 공개(公開)
교사(敎史)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제1장 새 회상(會上)의 공개(公開)
2. 총부 기지의 확정과 건설, 3. 전무출신의 공동 생활
설교 : 규산 이광규 교무
일시 : 원기 107년 3월 30일
타이핑 : 심현승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제1장 새 회상(會上)의 공개(公開) 2. 총부 기지의 확정과 건설 창립 총회 후, 대종사, 각지 대표를 데리시고 이리 부근을 일일 순시하여 총부 건설의 기지를 택하시더니, 원기 9년(1924·甲子) 8월,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全羅北道益山郡北一面新龍里 現裡里市新龍洞)에 그 터를 확정하시었다. 회장 서 중안이 기지(3천여평)대금과 건축비 일부(6백여원)를 의연하였고, 각처 회원으로부터 상당한 의연금(근8백원)이 수납되었다. 9월에 임시 요인회를 열고 총부 본관 건축을 결의한 후, 바로 공사에 착수하여, 엄동의 추위를 무릅쓰고 10여명의 전무출신과 특별 후원인들의 성심 노력으로, 11월에 비로소 목조 초가(木造草家) 2동(棟) 도합 17간(間)을 성조(成造)하니, 이것이 새 회상 총부 본관의 첫 건설이며 [불법연구회] 간판을 세상에 드러내는 처음이었다. 창립 총회 당년(원기9년·1924)의 교세는 영산(靈山) 신흥(新興) 김제(金堤) 전주(全州) 부안(扶安) 서울(京城) 진안(鎭安) 각지의 회원이 남자 60여명, 여자 70여명으로 도합 130여명이었고, 전무출신은 영광 익산을 통하여 김광선 등 13명(별록7)이었다. 부서의 조직은 인원과 사무의 미비로, 7부 중 서무부(부장吳昌建서기宋道性) 교무부(부장宋萬京) 상조조합부(서기全飮光)의 형식만 두어 사무를 취급하였고, 자산은 정관평 언답과 영산 신흥 부안 익산에 약간의 건물이 있을 뿐이었으며, 언답은 아직 해독(海毒)이 다 해소되지 않아 수익이 아주 적었다. 따라서 비록 회상의 체제는 성립되었으나, 총부의 운영과 전무출신들의 생활 방로는 심히 아득하였다. 3. 전무출신의 공동 생활 이 때 전무출신 김 광선 등은 이리(朴元石집)에 임시 주접(住接)하였으나, 적수공권으로 생활 방로가 심히 막연하던 중, 부근 송학리(松鶴里)에 척식회사 소유 토지 약간을 빌려 근근 작농한 결과, 약간의 추수를 얻어 공부의 자금을 삼게 되었으니, 이것이 새 회상 산업부의 효시이다. 그 후 재가 출가의 일심 합력으로 근근히 총부의 첫 건설은 마쳤으나, 그 유지와 생활 방로는 계속 막연하므로, 송 적벽 등이 발의하여 원기 9년(1924·甲子) 12월에 엿 제조업(製造業)을 시작하였다. 이에, 몇 사람이 주무(主務)가 되고, 모든 인원은 행상(行商)이 되어, 그 이익으로 1년간 호구(糊口)를 하게 되었으나, 이익도 박하고 외경 접촉이 심하여 공부에 방해될 우려도 있으므로, 이듬해(원기10·1925) 7월에 드디어 폐지하였다. 그 후의 생활 대책으로는 만석리(萬石里)에 척식회사 소유답 약간을 다시 빌려, 출장 작농으로 선비(禪費)를 마련하였으며, 총부 경비는 약간의 회금(會金) 수입과 임원들의 출역 농작 등으로 충당하였으니, 이는 곧 생활 종교의 체제를 세우기 시작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당시 총부의 전무출신들은 평소 각자 가정에서 일찌기 한 번도 노동이나 행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처지였다. 폭염(暴炎)을 무릅쓰고 논과 밭에 작업하며 풍설을 무릅쓰고 거리와 마을을 배회할 때에 그 고생이 오죽하였으며, 대개는 엿밥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침구조차 부족한 누습한 방에서 종일 피곤한 몸을 쉬게 되었으니 그 간난함이 어떠하였으리요.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고생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새 회상 만난 기쁨으로 유일한 낙을 삼아서 모든 일에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석반 후에는 한 자리에 모여, 하루의 경과를 보고하고 감상과 처리건을 토론하며, 대종사께서는 간간히 법설로 대중의 공부를 지도해 주시니, 그 단란한 공동 생활은 이른 바 지상의 천국이었다. |
저희들이 원불교라는 교명을 갖기 이전에 첫 공식적인 모임으로 불법 연구회라는 공식 명칭을 통해서 세상의 이름을 드러내게 됐습니다. 그 때가 원기 9년(1924년)이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 상황을 살펴보면 토지조사 사업이라는 것을 통해 일본인들이 땅에 대한 소유권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런데 왜 익산, 당시의 이리라고 그랬죠, 익산이라는 곳에 총부 기지를 건설을 하셨을까요?
교사(敎史) 제2편 회상(會上)의 창립(創立) 제1장 새 회상(會上)의 공개(公開) 1.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 원기 9년(1924·甲子) 3월에, 대종사, 서울에서 이리를 거쳐 전주(全飮光집)에 오시니 각 처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에, 서중안 등 7인(별록5)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 준비를 토의할 제, 대종사, 총부 기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無産者)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에 편리할 듯 하니 그 곳으로 정함이 어떠하냐] 하심에, 일동이 그 말씀에 복종하였다. 또한 창립 총회 개최 장소는, 이리 부근 보광사(普光寺)로 예정하고 총부 건설지는 후일 실지 답사 후 확정하기로 하였다. |
대종사님께서는 불법 연구회 창립총회를 마치시고 익산이라는 곳은 넓은 광야가 있고 교통이 편리하다 그런 두 가지의 지리적 요건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광야가 있다는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터전이 많다는 것이고 그리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은 신자들의 오고 가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입니다.
[무산자들을 위한 불법연구회]
근데 여기서 누구를 대상으로 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산자(無産者)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에 편리할 듯 하니 그 곳으로 정함이 어떠하냐”라고 하였듯이 무산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그럼 무산자는 누구였을까요? 그것은 불법 연구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열일곱 가지로 얘기를 합니다.
「불법연구회 규약(佛法硏究會規約)」 본회(本會)의 취지 설명(趣旨說明) 혼몽(昏懜) 중에 있던 우리! 취중(醉中)에 있던 우리! 사농공상의 차서(次序)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우리! 상당한 사람을 쓰지 아니하고, 권세와 재산 형식을 쓰던 시대에 있던 우리! 외방 문명(外邦文明)과 물화(物貨)를 보지 못한 우리! 발원(發願) 없고, 연구(硏究) 없는 우리! 직업 없이 놀고먹는 우리! 매일 수입 지출을 알지 못하고, 예산 없이 지내던 우리! 유,무식 남녀 노소 선악 귀천을 물론하고, 융통하여 믿어 나오는 종교가 없는 우리! 문벌 있고 가세 있고 문필이 유여한 사람이라야 종교인이라 하던 우리! 천인(千人)이면 천 마음이 각각이요, 만인(萬人)이면 만 마음이 각각 된 우리! 박애심(博愛心)이 없고, 합자심(合資心)이 없고, 감화심(感化心)이 없던 우리! 일만 물건의 근본과 끝을 알지 못한 우리! 일만 일의 시종과 선후를 알지 못한 우리! 선악 귀천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시비와 이해를 알지 못하고, 한탄 원망에 그쳤던 우리! 식심(識心)있고 각심(覺心)있는 우리로서, 감각 없는 저 무정지물(無情之物)에게 소원(所願) 앙축(仰祝)하던 우리! 나의 일신(一身)하나도 제도(濟度)못한 우리가, 여러 사람의 호주(戶主)되어 여러 사람의 전정(前程)을 망해 준 우리! 자리 이타(自利利他)가 화(和)하지 못하여 내가 이(利)를 취하면 저 사람이 해(害)가 되고, 저 사람이 이를 취하면 내가 해를 입는 고(故)로 서로 상충(相衝)하야 서로 의리(義理)가 끊어지고 자행 자지로 백발(白髮)이 다된 우리! |
어떤 사람들이 무산자였냐. 첫 번째, “혼몽 중에 있던 우리, 취중에 있던 우리.” 땅도 나라도 뺏기고 모든 것이 다 뺏긴 그 상황에서 정신이 없던 우리. 혼몽 중에 있던 우리. 그러니까 의욕을 상실했다는 그런 말씀이죠.
두 번째, “사농공상에에 차서 있난 교육을 받지 못한 우리.”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선비의 교육, 그리고 농업의 교육, 공업의 교육, 상업의 교육을 순서 있게 받지 못한, 그러니까 산수를 배우는 것도 없었고, 절기를 배우는 것도 없었었고, 그런 농사적인 지식이나, 상업적인 지식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배울 수 없었던 우리의 형편이었던 우리.
“상당한 사람을 쓰지 아니하고 권세와 재산 형식을 쓰는 시대에 있는 우리” 권력이나 재산이 많이 가진 사람들이 득세하던 그런 시대의 우리.
“외박 문명과 물화를 보지 못한 우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외부 세력의 그런 영향들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런 우리였다.
그리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그런 의혹도 없던 “발원 없고 연구 없난 우리.” 직업 없이 놀고 먹난 우리 당시에는 뭐 생활의 근거지였던 땅도 뺏기니까 뭘 할 것이 없죠.
“직업 없이 놀고 먹난 우리.” “매일 수입 지출을 알지 못하고 예산 없이 지내던 우리” 버는 것이 없으니까 지출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 굳이 없었을 겁니다. 어떤 산업 활동이라는 것은 할 수가 없었던 그런 시대였던가 봐요.
여덟 번째 “유무식 남녀노소 선악 귀천을 물론하고 융통하여 믿어 나온 한 종교가 없는 우리” 남녀노소 선악 귀천을 물론하고 우리가 두루 통합해서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없던 그런 시대.
아홉 번째 “문벌 입고 가세 있고 문필이 유효한 사람이라야 종교인이라 하는 우리.” 그때 당시에는 종교인이라고 그러면 그래도 나름대로 집안의 세력도 좀 있고 글도 좀 쓰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종교인이라고 얘기를 했던 겁니다.
열 번째 “천인이면 천 마음이 각각이요 만인이면 만 마음이 각각 된 우리.” 모든 문화 정치를 통해서 일본이 저희들의 마음들을 다 갈라놨던 그런 시대의 우리의 모습.
“박애심 없고 합자심이 없고 가마심이 없던 우리.” 누구를 돕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었고 서로의 자본을 합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그런 마음도 없었던 그런 시대에 우리.
“일만 물건의 근본과 끝을 알지 못한 일반인의 시종과 선후를 알지 못한 우리.” “선악 귀천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시비와 이해를 알지 못하고 한탄 원망에 그쳤던 우리.” “식심 있고 각심 인난 우리로서 감각 엄난 저 무정지물에게 소원 앙축하던 우리.” 인식을 할 수 있고 우리가 깨달음을 할 수 있는 우리의 존재이지만 그 믿음을 어디에 뒀었다? 무정지물 성황당이나 우물가나 이런 곳에 우리가 그 원을 빌고 그랬었단 말이죠.
“나의 일신 하나도 제대로 못한 우리로 여러 사람이 호주되어 여러 사람의 전정을 망해준 우리.” 나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가족의 가장이 돼서 그 가족을 파탄 이경으로 몰아가는 술 마시고 놀고 먹고 그런 폐풍에 빠지다 보니까 결국은 그런 가장의 모습을 보였던 우리라는 얘기죠.
“자리 이타가 화하지 못하야 내가 이를 취하면, 내가 이로움을 취하면, 저 사람이 해가 되고, 저 사람에게 좋지 못한 영향이 미쳐지고, 저 사람이 이를 취하면 내가 해를 입난 거로 서로 상충하여 서로 의리가 끊어지고 자행자지로 백발이 다 된 우리.” 나는 이롭지만 상대는 해가 되었고 상대가 이로우면 내가 해가 됨으로 인해서 서로의 이익 다툼을 위해서 싸움이 많이 벌어졌던 그런 시대였다는 거죠.
그 당시 무산자들은 이런 모습의 삶을 보여주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산자들을 위해서 먹고 살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줘야겠다는 것이 대종사님이 당시에 구상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대체 식품이라도 있다지만 당시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논농사를 짓거나 밭농사를 지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곡물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에 굉장히 절박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뜻을 먼저 알고 모인 당시의 인연들은 대종사님의 말씀에 따라 광활한 들판이 있고 교통이 편리한 이리에 총부 기지를 확정하도록 합의했습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 왜 아니었을까?]
제일 우측에 보이는 사진이 당시에 지어졌던 건물입니다. 대종사님이 주재하셨던 건물이고, 시대가 변하면서 색 있는 기화가 올라가기는 했습니다. 지금은 금강원이라는 곳입니다.
총부를 지나다니면 조실이라고 한 번씩 인사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안쪽에 있는 건물입니다. 그럴싸한 건물의 규모도 아니고 아주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습니다. 그 규모의 건물이 몇 동? 두 동이 지어졌습니다. 목조로, 볏집으로 올려져 있던 그런 건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열일곱 칸이 나눠서 잠을 자는 곳도 있고, 세탁하는 곳도 있고, 식사를 준비하는 곳도 있고, 그렇게 해서 열일곱 칸을 나눠가지고 두 동 건물에 살았습니다.
열일곱 칸이라고 하지만 이런 규모의 건축물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저는 이런 의심을 해봤습니다. 일제 치하 시절에 건물을 두 동이나 가지고 있고 더더군다나 당시에 총부 부지를 확보한 것이 삼천 평이었다는 말이죠. 일경들이나, 총독부에서 알았더라면 우리가 감시의 대상이 될 법도 한데 왜 되지 않았을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단의 교사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계신 서문성 교무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3천 평이라는 그런 부지라면 그 당시에도 나름대로 그렇게 작은 평수는 아니었을 텐데, 왜 그런 평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시의 대상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라고 여쭈니까 말씀드린 대로 신용동이라는 곳은 제뱃길이라고 언덕을 넘어가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산을 깎아서 만든 언덕 같은 도로였습니다. 그런 곳에다가 총부 기지를 확보를 한 거죠. “그 3천 평이라는 규모가 당시에는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라고 여쭈니까 집안에 선산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의 규모라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돌아가시면 사람도 묻기도 하고, 농사도 짓기도 하고 그런 정도의 규모였다는 거죠.
지금 원불교 중앙총부는 그럴싸하지만 당시에 신용동이라는 것은 익산의 한 귀퉁이었어요. 그러니까 3천 평 매입했다고 그래서 경찰들한테 그렇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볏짚으로 덮어진 건물들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거죠.
이렇게 생긴 이게 제뱃길이랍니다. 저기 밑에 작은 하얀 글씨로 본부 정문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본부 정문 약간 올라가는 언덕 위에 이렇게 총부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당시에 3천 평 규모는 조그마한 선산 정도였기 때문에 저희들은 그다지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 대종사님께서 정읍에 있는 내장사에서 불법 연구회의 창립총회를 했다든가 아니면 대종사님이 잠깐 기거를 하시면서 일원상을 구상하셨다는 김제의 금산사에 기지를 조성을 했다든가 아니면 지금도 그러지만 그 당시에도 번화한 전주권에서 총부기지를 준비를 했었다면 “얘네들 좀 이상한 애들 아니야?”라는 관심의 대상이 분명히 됐을 겁니다. 대종사님은 이런 안목까지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무산자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갈 방식들을 만들었어야 되는가? 뭔가를 할 수 없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라는 것을 살피다 결정하신 곳이 이런 곳이라는 것입니다. 회상 창립과 만생령을 파란고해에서 건지시고자 하신 소태산 대종사님의 성자혼을 불과 100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기에 저희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큰 행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까운 시일에 저희들이 이런 의식들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한 일입니다. 이것이 천 년이 지나고 이천 년이 지났을 때 “그때 왜 그랬지?” 라고 생각을 한다고 그러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지 않았겠습니까? 당시에 대종사님께서는 정말 우리 민중의 가슴 아픈 삶에 어떻게든지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 노력하신 그 모습이 역력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왜 전법이 아닌 총부 건설일까?]
저는 여기서 또 하나의 궁금증이 좀 생겼습니다. 다른 성인들께서는 당신들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세상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세상을 다니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돌아다니시면서 당신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메시아로부터 받은 그 성령의 혼들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셨고 부처님께서도 당신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바를 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설파를 하셨는데 왜 대종사님께서는 총부기지라는 것을 건설을 하셨을까?
그렇지만 대종사님께서는 익산 기지를 확정하신 것은 분명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었겠느냐?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한 번 해봤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익산이라는 곳에 총부기지를 건설하신 의미는 교단의 방향이나 교화를 펼쳐나가고자 하는 그런 방향에 따라 산 속에 있던 불법을 대중에게 다 알릴 필요가 있겠다. 과거엔 찾아 들어가야 되는 산 속에 있는 불교에서 이제는 세상 속으로 나와야 되겠다. 그런 불법이 우리한테 중요한 삶의 정신적 가치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깨달은 바를 이제는 대중 속으로 알려야 되겠다. 스님들, 출가자들 중심의 소수의 불법을 대중의 불법으로 알릴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시대에 맞지 않는 불법들을 시대에 맞는 불법으로 알릴 필요가 있겠다.
이런 것이 총부를 중심으로 교화를 펼치신 이유였지 않겠느냐? 다른 어떤 성자철인도 보면 교화를 펼치시기 위해서 어떤 장소를 정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교화를 하셨던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불법을 개혁하시겠다는 그런 굳은 의지를 가지고 총부 의지를 건설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저희들의 그런 실용적인 삶을 그대로 구현을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전무출신의 공동 생활]
그렇게 총부기지가 건설이 됐는데 이제부터는 전무 출신들이 대종사님 뜻을 오롯이 받들어서 총부기지를 만들어서 교화를 통해서 세상의 대종사님 교법을 전해보겠다는 분들이 중앙총부에 모이셨습니다. 그러나 모이고보니 마땅히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불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신 서중안이라는 선진님께서 그런 모습을 보시고 동양척식회사 간부들을 집으로 초청을 합니다. 식사를 제공을 하면서 ‘내가 이만저만 해서 익산에서 땅을 가지고 작농을 좀 하려고 하는데 나한테 그걸 일부를 불화를 하십시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랬더니 동양척식회사 간부들이 몇 사람 그 식사 자리에 참여를 해서 대뜸 그 얘기를 듣고 증권증서를 불쑥 내밉니다. 그 증권 증서를 내민다는 것은 동양 척식회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비용을 대는 데에 서명을 해라는 의미였습니다. 굉장히 우리들의 자존심을 꺾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서중안 선진님은 거기에 도장을 찍습니다. 누가 이런 얘기를 해 주셨냐면 서중안 선진의 부인이신 정세월 선진님이라는 분께서 당시의 상황을 지켜보시고 박용덕 교무님이라는 분을 통해서 그 상황들이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도장을 찍고 나서 저희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몇 평의 땅을 얻어냈습니다. 건축물을 만드는 비용을 서중안 선진이 희사합니다. 그것이 얼마였냐면 당시 돈으로 300원이었습니다. 1924년에 쌀값은 0.021189원이었고 지금 쌀값은 얼마냐면 22만 원입니다. 쌀 값을 기준으로 환산을 해보면 1억 382만 배의 환율적 가치가 나옵니다. 이 기준으로 300원으로 계산을 해보면 지금 당시에 한 30억 정도를 희사하신 걸로 봐야죠.
그런데 서중안 선진이라는 분이 무슨 일을 그 당시에 하고 계셨냐면 전북 의사협회 회장을 하고 계셨어요. 당신이 돈을 모으실 수 있는 그런 기반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300원을 불법연구회에 내놓으시면서 ‘그러면 그 땅을 저희들이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는 그 등기 비용도 거기서 해결을 해라 집도 지어라’ 해서 만들어진 것이 당시의 총부의 초막 두 칸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얻어낸 땅을 가지고 선진들이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공부를 하고 그런 시간들을 보냈는데 하루는 농사를 짓는데 퇴비가 없는 거예요. 근데 그 퇴비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였냐면 척식 주식회사 간부들이 사는 사택에서 구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것을 떠다가 여기다 퇴비를 주려고 그러니까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던 거죠. 그래서 이동환 선진이라는 분이 ‘우리가 정말 이렇게 농사를 지어야 되겠냐. 이거 그만하자.’ 이렇게 이제 강하게 주장을 하시니까 문정규 선진님께서 발휘를 하죠. 정읍인가에서 송적벽 선진님께서 엿을 고는 일을 하셨던가 봐요. 그러면 ‘그 엿 고는 기술을 배우다가 이쪽에서 한번 해보자.’ 그렇게 해서 문정규 선진과 송적벽 선진이 기술을 대고 문정규 선진이 발휘를 해서 엿 장사가 시작이 됩니다.
[불법연구회가]
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대로 나와서 살지도 않고 저 한쪽 구석에 들어가서 저렇게 거지같이 사냐? 그분들이 살던 문막 같은 그 집은 오기가 득실득실하고 피를 빨아먹는 그런 것을 빈대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것이 득실득실한 그런 곳에서 낮이면 일을 하고 밤이면 들어가서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깔깔대면서 그렇게 웃으면서 공부를 하더란 말이죠.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봐도 저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에요. 그때 당시의 모습들을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거 불법 연구회 사람들 참 이상한 사람들이여. 세상에 이런 막막한 숲 속에 개딱지만” 한 얼마나 작았으면 개딱지만 하다고 그러겠어요. “개딱지만한 초가집을 지어놓고 연목판 매고 돌아다니다니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생김새를 보면 멀쩡들한데 괜한 고생을 스스로 지어서 하는 것 같아. 사람이 아무리 가난한데 하루 한 끼 밥이야 못 먹겠냐.”
그런데 당시에 그 선진들이 먹었던 것은 아까 밀운 교우도 얘기한 것처럼 엿밥 남은 것을 그거를 집어먹고 아카시아 잎을 반찬으로 먹고 그러셨던가 봐요.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까 “한 끼 밥이야 못 먹겠냐 그런데 왜 저렇게 먹고 사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하루 한 끼도 어렵다니 엿 밥으로 끼니를 이을 때가 많다는군. 세상 오래 살지 않아도 별난 사람들 다 보겠네 세상에 저렇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먹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옷 입은 꼴을 보면 영락없이 각설이 떼들이야” 이런 얘기를 들었다. 어찌 보면 비난과 조소를 받으면서 그렇게 선진들은 사리셨던 거죠.
그러면서도 마음 한 편에 이렇게 당신들은 뿌듯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도덕 사업이 무엇인지 대종사님이 어떠한 성인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큰 뜻과 굳은 서원의 불타는 전무 출신들이야 모르는 사람들의 비방과 조서에 조금도 마음이 끌리는 바가 없었다는 것이죠. 전무 출신들은 아무리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항상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당시에 부른 노래가 지금의 성가 120장 ‘불법연구회가’ 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시면서 저녁을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노래를 부르시면서 하루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제 120장 물욕 충만 이 세상에(佛法硏究 會歌) 會報, 圓紀 52년 正化社 제정 1. 물욕충만 이 세상에 위기 따라서 구주이신 대종사님 탄생하시사 자수성각 하신후에 법음 전하니 유연중생 모여들어 도문열도다 2. 공부요도 삼학팔조 제정하시고 인생요도 사은사요 밝혀내시니 미묘하온 자비바람 우주에 불고 찬란스런 공덕꽃이 시방에 피네 3. 제생의세 주장하는 우리동지들 결함없는 양대요도 정진하여서 물욕제거 하온후에 도중생하며 육도계를 자유대로 낙수용하세 4. 전무후무 유일하신 우리대종사 만유관통 이도덕을 끊임없도록 삼라만상 갖은 문명 기계삼아서 천양무궁 만만겁을 즐겨봅시다. |
이런 가사의 노래를 저녁이면 부르시면서 그리고 하루를 보내시면서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네. 오늘은 저런 일이 있었다네.” 그런 감상을 나누시면서 여러분들이 토요일날 법회 끝나고 교화단회를 통해서 ‘우리가 일주일간 어떻게 살았다네.’ 이렇게 나누듯이 매일 그런 일들을 하셨던가 봐요.
[엿장사]
이동환 선진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 드리면서 오늘 시간을 마칠까 합니다. 당시 3.1 운동을 계기로 국내의 독립운동이 비폭력 항쟁으로 이렇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떤 학살 사건으로 세계에서 일본이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이제 우리도 비폭력 운동으로 그 운동 방식을 바꾸게 되죠. 그러면서 대종사님처럼 이렇게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데 더 주안점을 둬야 되겠다. 무산자들을 살려나가는 데 더 도움을 줘야 되겠다.’ 이런 의식 개혁 운동들이 많이 당시에 일어났던 겁니다. 그래서 경제를 자립하고 지식 수준을 높이고 그리고 생산성을 높이는 교육하는 데 애를 썼던 거죠. 이동환 선진이라는 분도 신흥 땅에서 그 지역 주민들을 모아서 ‘우리는 경제 자립도 해야 된다. 지식도 우리는 더 넓혀가야 된다.’ 이런 운동들을 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신흥이라는 곳을 굉장히 몇 년 사이에 잘 살도록 해주셨어요. 근데 그곳을 그만큼 잘 살게 해줬더니 당신이 마음에 좀 부족하셨던 모양입니다. ‘조금 내가 더 넓은 세상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들을 가지고 이제는 국가나 사회에 영향력을 미쳐야 되겠다.’ 이러던 차에 팔촌 형님이었던 대종사님의 제자이신 이재철 선진님을 통해서 대종사님을 만납니다. 대종사님의 어떤 그런 모습들을 보니까 제자가 돼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제자가 됩니다. 그렇게 제자가 되신 이후에 대종사님이 그 사은사요에 대한 내용들을 설법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이 이것이 신흥 땅, 이 나라, 이 국가 정도에 한정된 일이 아니겠구나. 정말 만생령을 살릴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앞으로 바꿔가야 되겠구나.’ 이 마음을 갖게 되셨다는 거죠. 총부를 건립할 때 ‘전무 출신 할 사람?’ 그러니까 얼른 손 들고 나오신 분이 이동환 선진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익산 총부로 오셔서 엿장사를 시작을 하셨는데 이분이 시골에서는 살았지만 어렵지 않은 집안에 이렇게 살으셨던 모양이에요. 총부 오셔가지고 당신이 주장을 해서 우리가 일본 사람 똥은 우리가 고만 푸고 엿장사 하자고 그래서 엿장사 하라고 목판을 이렇게 딱 지워주면서 그러면 당신도 나가서 해보시오 라고 했는데 “엿 사세요. 엿” 이런 말이 이렇게 쉽게 나왔었겠어요. 먹고 사는 게 그렇게 어려움이 없었던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엿 사세요. 엿” 그 얘기가 쉽게 나왔죠. 그런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처음에 꾀를 내셨을 때 어떻게 꾀를 내셨냐면 엿 몇 개를 집어가지고 동네 애들을 모으셨답니다. 애들을 모아가지고 엿을 몇 개를 주면서 이거 엿이 진짜 맛있는지 너희들이 확인하고 진짜 맛있으면 “엿 사세요.” 이것을 좀 앞에서 외쳐줘라. 그렇게 얘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막 외치는 소리를 따라서 이렇게 본인이 몇 판을 들고 가다 보면 사람들이 그것을 샀다는 얘기가 있어요.
몇 번을 본인이 아이들을 통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본인이 가지고 있던 이 치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이것을 다시금 저녁 때 불법 연구에 돌아와서 ‘내가 오늘 이런 마음을 냈다. 감정하면서 또 그 마음들이 어떤 마음이었다.’ 고무신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던 것을 저녁 때 또 나누고 ‘그때 내 마음이 이랬다.’ 이런 마음을 나누시면서 그 불법 연구에 초창기를 이루셨던 그분들은 이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 교단에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진 한 점을 찍어주셨던 겁니다. 그렇게 간난하고 어려운 삶이었지만 그런 삶 속에서 그 희망을 잃지 않고 정말 많은 생명을 구하겠다는 그 결연한 마음으로 대종사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가 함께 새 회상 건설을 하겠다는 그 마음으로 우리 선진님들께서는 초창의 모습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https://cafe.daum.net/jnyouth/974Q/30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