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태릉역까지 가는 길은 승용차로 내부순환도로와 북부간선도로 그리고 동부간선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아서 준비를 하였는데, 오늘따라 바쁜 일이 있어 마치고 답사지로 가려고 하는데 그 시간이 넘을 것 같았다. 아내의 운전에 내부순환로(路) 홍제터널로 빠져 들어갈 무렵에 최하경 회장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빨리 가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최홍순 부회장님께 전화를 하니 성수역 부근이라 하셨다. 터널 안에 들어서니 차들은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진행하고 있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도로 사정에 의해 더는 빨리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두 개의 터널을 나오니 차들은 주행속도 80km로 달리며 경주하듯 북부간선도로에 접어드니 또 차들이 가득하고 속도를 최대로 낮추어 걸어가듯 달리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경과되자 동부간선도로에 접어들면서 태릉방향으로 차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태릉역을 지나고 화랑대역까지 지나서 겨우 육사 후문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고 아내는 차를 돌려 본연의 업무를 위해 돌아갔다.
[육사교정 강제구소령동상 ]
육사에는 몇 차례 문화재로 다녔던 곳이다. 그 때 혼자 박물관과 청헌관, 연령대군 신도비를 둘러 보았는데 이번에는 전문향 가족들과 함께 하는 답사이어서 새롭게 접하는 것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많은 일들이 책상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전문향의 답사에는 꼭 참석하고 싶어서 하던 일도 하루를 묶어 두고 자연으로 탈입하였다. 멀리서 남녘에서 온 봄의 자태가 벌써 육사의 교정에도 들어와 화사한 봄날을 만들고 있었다. 지난해에 이곳에 왔을 때엔 이미 봄은 지나고 여름날이었는데, 늦게 도착하였는데 전문향 일행은 이미 맑은 은항아리계곡에서 시원하면서 경쾌한 물의 향음을 내는 듯한 목소리로 안내생도의 해설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뒤에서 걸어가며 전문향의 아름다운 미소로 인사를 하면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였다. 전시관에 도착하여 전망대에 오르니 육사생도들이 마음 놓고 무술을 연마하고 군의 전술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요람이 한눈에 모두 들어왔다. 자세한 안내로 모두 둘러보니 멀리 보이는 불암산이 나를 손짓하는 듯 하였다. 다음의 목적지로 향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박물관으로 향했다. 어딘가 들여오는 군가소리에 귀를 기우리니 35년전에 훈련소에서 부르던 군가소리가 아직도 이 곳 육사생도들 입에서 그 행군소리가 울러 퍼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 뛰고 달리고, 삼보이상 뛰라는 그 소리에 행군을 하면서 힘차게 불렀던 군가는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한 두 곡은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태양빛은 무르익은 봄이 여름으로 가고 있는 듯 따가웠다. 대롱대롱 달린 꽃들은 연병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깊은 향을 내고 아름다운 미모를 선 보이고 있는 모습이 전문향 여성들의 그 모습과 같았다. 박물관 야외에는 크고 작은 무기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특히 부하들의 목숨을 건지고 자신의 몸을 희생한 강제구 소령의 동상이 육사생도의 모체와 같은 힘으로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박물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오르니 역사속 시대별로 분류된 유물이 전시장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재는 사람이 찾음으로써 그 가치의 빛을 넣게 된다고 한다.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설이 시작되면서 각종 자료에서 본 자료가 많이 있지만 이곳에서 실물을 보고 해설사의 해설에 또 다른 가치를 얻을 수 있
[세총통:보물 제854호] [불량기자포:보물 제861호]
는 것이 아닌가. 한참 동안 해설에 귀를 기울이며 가는 동안 보물 제854호인 세총통를 접하게 되었다. 이 세총통은 세종 14년에 만든 휴대용 화기로 총통 중에서 가장 작은 종류의 화기이다. 사정거리가 200보 정도이니 약 120m의 거리까지 날아가 목표물을 맞힐 수 있다는 것인데, 무기로서는 별 효력을 갖지 못하자 모두 폐기처분을 하려다가 1437년 평안도에 보내져 사용하다 보니 휴대와 발사가 간편하여 어린이와 부녀자도 쉽게 다룰 수 있고 적과 싸울 때 말 위에서 연속발사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은 세총통이 무기로써 그 가치를 갖는다니 우리의 문화재는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활용되고 어떤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더 가치를 갖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많은 유물중에 보물 제861호인 불랑기자포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불량기는 서구제국에서 이미 만들어져 중국 광동지역의 서역상선이 들어오면서, 조선 선조 25년에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에 사용되었고 신미양요 때는 미국의 군함에 맞서기 위해 강화도 초지진과 광성보진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가득한 옛 무기들이 가는 길을 더 잡아 두고 또 다시 하나하나 둘러 보다 보니 어느새 한
[부산순절도:보물 제391호] [동래순절도:보물 제392호]
층의 전시물을 모두 보게 되었는데 막 나오려고 하는데 벽에 걸린 족자에 그려진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이 순절도는 각각 보물 제391호와 392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부산진순절도는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그린 것이고, 동래부순절도는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두 그림은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은 3층의 전시실로 가보니 근현대의 유물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6.25사변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보았던 다양한 전시품을 오늘의 발전상과 비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육사 박물관을 모두 답사하고 전문향은 모두 강제구소령 동상앞에서 방문을 오래도록 남기고자 한 컷의 단체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사진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육사 박물관 답사를 하면서 이 사진은 정진해가 찍었다는 기억으로만 남겨 주었으면 한다. 연병장에는 아직 연두빛을 감추어 두고 있고, 비탈길에는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의 진달래가 아름답고 중후한 전문향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삼군부 청헌당] [연령군신도비]
삼군부청헌당에 도착하였다. 모두 문화재 안내판에 둘러서서 유승일팀장님의 해설을 경청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광화문 남쪽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던 것을 1967년 현 정부종합청사를 지을 때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삼군는 조선초 군령과 군무를 총괄하던 군사 기구로 의흥삼군부의 약칭하는 것으로 조선 말기에 이르는 동안 명칭의 변화가 여러번 있었다. ‘청헌당(淸憲堂)’이라고 쓴 현판은 조선 후기 무신 신관호(신헌)가 쓴 것이다. 청헌당 좌측에는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3호인 연령군신도비가 큼직한 귀부에 검은 대리석의 비신을, 그 위에 이수를 얹은 모습이다. 연령군은 숙종의 여섯번째 아들이며,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이었으나 21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종의 명으로 특별히 비를 세웠다. 이 비는 원래의 자리는 동작구의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으나, 1940년에 묘역은 충남 예산군 덕산으로 옮겨지고, 비석만 남아 있다가 1967년 8월 3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비문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이명이 지었고, 글씨는 소헌 조태구가 썼으며, 전액은 민진원이 썼다. 유승일팀장님의 해설을 모두 듣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육사 식당으로 향했다. 조용한 교내에는 오가는 생도들도 보이지 않고 수 많은 나무들이 교정을 지키고 잇는 듯 하다. 4천원짜리 생선까스 몇 조각에 흰밥 먹고나니 배는 부르고, 태릉으로 향했다.
[태릉의 석물] [강릉의 석물]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의 두번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왕후는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와 동원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봉은사 곁으로 천장하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히기를 원하였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이 곳 태릉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릉 정문에는 기념관을 짖는다고 한창 준비 중이다. 기념관에는 어떤 전시품이 들어와 전시될지 많은 의문이 벌써부터 가기 시작한다. 몇몇의 그림과 사진 그리고 왕가의 모조품으로 장식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전문향 모두 태릉 홍살문 주위와 신도에 앉아서 문정왕후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았으며 등등 홍인화팀장으로부터 해설을 듣는 시간이다. 왕릉답사팀원 3분이 릴레이식으로 태릉에 관해 모든 해설을 들고 능으로 올라갔다. 무겁고 큰 석재와 높이 쌓은 봉분이 5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왕후는 밤이면 잠시 넓다란 혼유석에 앉아 중종을 그리워 하다가 새벽녘이면 다시 봉분의 집으로 들어가기가 벌써 500년이 지났으니, 모두 둘러 앉아 이오장님의 서사시 태릉을 김명혜선생님의 낭송으로 깊은 뜻을 받게 되었다. 이제 강릉으로 가야되는데 다시 정문을 나가 버스를 타고 한 정류장을 향했다. 삼육대학교 앞에 내려 육교를 넘어 강릉으로 향하는데, 이곳은 비공개지역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다. 2주전에 이곳을 답사하겠다고 협조공문을 발송하였드니 4월5일에 "문화재학술연구"로 승인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었다. 입구에 우리를 인솔할 공원관리요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릉까지 오르니 모두 처음 왔다고 하였다. 나는 2번째인데, 이 기회에 오지 않으면 강릉을 일반공개가 되기 전까지는 발을 딛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카페에 많이 참석을 광고하였는데 정말 많은 전문향이 답사를 하게 되었다. 전체 인원 37명이라고 하면 정기답사 인원보다 더 많이 답사에 함께 한 것이다. 모두 홍인화팀장의 해설에 넋을 잃고 시원한 그늘에 앉으니 일어나기가 쉽지만 않은 듯 하였다. 홍팀장님의 해설에 모두 일어나 인순왕후릉에 서서 묘역의 구조물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에, 익어가는 태양빛의 더위도 모르고 끝까지 듣는 그 끈기가 이젠 전문향인 만이 할 수 있는 답사가 아닌가 생각케 하였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는데 많이 걸어서 인지 모두 녹초가 된 듯 하였다.
[불암사의 연등]
강릉을 벗어나 이번에는 불암사에서 정기를 받고 가자는 의견에 몇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불암사입구 종점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버스 종점에서 불암사 미니버스로 불암사로 향했다. 초파일이 다가오니 경내에는 수 많은 연등이 대웅전 앞 마당을 가득 장식하였다. 대웅전도 보고 극락전도 보고 명부전도 보고 마애불도 보고 사리탑도 보고 나니 이젠 앉아 볼까 하였지만 주위의 야생화에 또 다시 카메라 렌즈를 교체하여 몇 컷을 촬영하니, 대웅전 뒤 산수유 앞에서 김희영샘이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비교 해설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같은 과에 속하는 나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강나무와 산수유가 같은 점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즉 꽃 색만 같고 모든 것이 다른 각각의 목본이다.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이다. 생강은 꽃이 필 때 나무가지가 녹색으로 변하기 때문이고, 산수유는 나무가지가 짙은 갈색이면서 층층나무과이다. 줄기의 형태도 산수유는 거칠고, 생강나무는 매끈한 편이다. 가장 빨리 구분하는 것은 줄기를 보면 분별이 쉽게 된다는 것이다. 두 나무 모두 약욕식물이다. 이렇게 하여 김희영샘의 해설이 끝나고 마지막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로 하여 대웅전 계단에 모두 앉고 홍인화샘이 촬영하였다. 많은 답사시간이 지나자 최홍순부회장님은 걸어다니기가 힘겨워서 산방 마루에 앉아 하루의 답사를 회상하고, 최하경회장님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우리의 문화를 하나하나 둘러보고 있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듯 보고 또 보고, 또 다시 애기보살 앞에 모여 이번에는 내가 마지막 촬영하고 또 다시 우리를 태워준 분이 또 촬영하고 모든 답사를 끝을 맺었다. 모두 태릉역을 향해 버스에 오르고..... 출출한 돼지갈비살에 흰밥 한 그릇으로 또 하나의 전문향 답사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역사를 만든날이 2008년 음력 3월 3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8일이었다. 사진 촬영은 나와 홍인화샘이, 가끔 김희영샘과 오영준샘도 찍었고, 답사를 기획.시행한 팀은 서울문화산책팀이고, 삼군부청헌당과 연령군신도비는 유승일샘이 해설하였고, 태릉에서 홍인화샘의 해설과 백옥련샘과 김희영샘, 성무현샘이 함께 하였고, 김명혜샘은 태릉 서사시 낭독하였고, 강릉에서 홍인화샘이 또 해설하고, 김승원샘도 함께 하였고, 불암사에서 이희성샘이 해설하였고, 김희영샘이 나무해설하고, 홍인화샘과 나는 단체사진 촬영하고, 안희경샘이 총무하였다. 마지막으로 유승일샘이 답사 종료 선언을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