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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03
12월13일[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대림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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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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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m0j-wJMN0Y
[서울대교구 김시몬 시몬 신부님 집전(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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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다들 얼마나 힘드신가요?>
여러 측면의 지표들이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시느라 다들 얼마나 힘드신가요? 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 안보이고, 기대할 것은 없고...
어디 그뿐인가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입고, 그 상처 부여안고 눈물 흘리고...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
우리가 그분께로 다가갈 때 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활짝 열린 두 팔로 환대하시고, 꼭 안아주시고, 고생 많다며 등을 토닥여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주로 부릅뜬 눈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여차하면 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시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하느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표현하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긴 하시는데, 거저 주시지는 않으시겠답니다. 당신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겠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 큰 고통에다, 그 숱한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특히 죽음과 내세에 대한 공포로 더욱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짐을 가볍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두가 외면한다 할지라도 나만은 너를 외면하지 않겠다, 나만은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 지고 가고 있는 많은 짐들을 순식간에 없애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나눠지시겠다고 하십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결국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마음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거기다 고통의 끝판왕인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언제나 고통과 십자가를 이고 지고, 손에 들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단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 못 이겨 신음할 때 우리 옆에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당신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복된 그 날까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인내하면서 살아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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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ChVLlPLf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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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 나를 무겁게 하는 짐의 정체를 먼저 알아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안식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성당에 다니기 위해 오는 사람 대부분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당 다니면서도 마음의 평화인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내가 내려놓아야 하는 ‘무거운 짐’의 정체를 잘 모르는 게 아닐까요?
영화 ‘디스 파이널 아워스’(2013)의 줄거리입니다. 이야기는 호주 퍼스를 배경으로 하며, 지구를 멸망시킬 재앙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12시간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는 생명을 잃은 운석이 북대서양을 강타하여 지구 전체를 천천히 휩쓸고 있는 세계적인
불 폭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제임스입니다. 제임스는 임신한 애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는 것도, 자신의 애인이 죽은 것도, 그 태중의 아기가 죽는 것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술을 마시며 광란의 파티를 하다 죽고 싶어 그녀를 떠납니다.
종말의 혼란 속에서 제임스는 아버지와 헤어진 채 어른들에게 끌려가는 어린 로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도와줍니다. 그녀는 아버지 옆에서 종말을 맞고 싶다고 제임스에게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임스는 생의 마지막을 아이를 도와주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광란의 파티에 갑니다. 거기에는 참다운 우정도 없고 거기에서도 어른들이 로즈를 마지막 노리갯감으로 쓰려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를 데려 나와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합니다. 로즈가 말한 아버지 집으로 갔더니 온 가족이 두려움에 자살한 상태였습니다. 제임스가 로즈와 함께 떠나려 하자 로즈는 그것을 거부하고 아빠 곁에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제임스는 아이를 보며 마지막 시간에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머문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고 싶은가 생각하다 자신의 짐처럼 여겨 떠났던 임신한 애인을 찾아 나섭니다. 도중에 차도 고장이 나지만 뛰어서 그녀가 있는 해변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용서를 빌고 그녀와 꼭 껴안은 채 바다에서 밀려오는 불 폭풍을 맞습니다. 이때 여자가 말합니다. “아름다워!”
사랑하는 사람과 맞는 죽음은 더는 공포가 아니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안식입니다.
제임스는 자신의 무거운 짐이 임신한 애인, 자기가 책임져야만 하는 가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짐을 벗어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안식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짐이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 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의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이 즐기다 죽어도 된다고 말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짐은 외적인 책임이 아닙니다. 바로 원죄에 물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아니라 외적인 무언가를 내려놓으려 하기에 영원히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마음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새로운 마음을 넣어주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짐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마음보다는 가볍습니다. 이전의 마음은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해 화가 나 있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 분노로 차 있습니다. 겸손하지 못해 감사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나에게 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원망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라는 아이를 통해 이 새로운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짐처럼 보였던 가족이 이젠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안식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가끔 자신 안에 마귀가 산다고 말하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안수로 그것들을 내쫓아 달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자신 안의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몸도 아프고 삶도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그 마귀들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짐은 ‘외로움’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믿는 척은 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믿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게 마귀 탓이라고 하며 진짜 무거운 짐을 부인입니다.
그 무거운 짐이란 자신을 외롭게 만든 하느님과 가족에게 화가 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부터 내려놓아야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장착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원한다면 사제가 시키는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성당에 매일 나와서 ‘하.사.시.’ 30분 읽고 성체조배 하며 그 내용을 묵상하라고 합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마귀가 나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귀와 자기를 그렇게 만든 환경이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만 없애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식을 위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불만스럽고 화가 나 있는 마음을 먼저 내려놓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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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도나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 한분이 친절하게 안내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600번 넘게 세도나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세도나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벨락(Bell Rock)’이라는 산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은 가파른 바위를 편안하게 올라갔습니다. 제게는 발을 놓을 자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안내 해 주는 대로 발을 놓으니 가파른 바위를 가뿐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열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숲길을 갈 때였습니다. 형제님은 제게 나무 지팡이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나무 지팡이로 균형을 잡으니 물가에서도 균형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멋진 그림이 나오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자리를 잡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모두가 하나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는데도 형제님의 도움으로 꼭 봐야하는 곳을 보면서 알찬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친절한 형제님은 세도나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모두 보내 주었고, 사진을 보면서 세도나에서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7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열혈청년처럼 세도나의 이곳저곳을 다니시는 형제님이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저는 8년간 보좌신부를 하면서 4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은 제게 사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은 무척 자유로웠습니다. 제게 스키도 가르쳐 주었고, 매일 동네 산보를 같이 다녔습니다. 엄격함과 질서보다는 자유와 넉넉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자유와 넉넉함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사제 생활의 중심은 사제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매일 기도에 충실하였던 신부님은 자유를 즐길 줄 아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수도자와 사목회장과 충분히 협의하였습니다. 제게도 자율권을 주었고, 충분히 저의 의견을 들어 주었습니다. 합리적인 신부님의 결정은 겸손함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겸손함으로 사제생활의 길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본당 신부님은 조직적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적재적소’에 신자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습니다. 성전신축을 위해서 사목회와 성전신축위원회를 분리하였습니다. 본당사목과 성전신축이라는 두 업무를 빈틈없이 추진하였습니다. 전 신자가 함께하는 ‘가족캠프’를 기획하였습니다. 기획분과, 총무, 청소년분과에게 적절한 임무를 주었고, 제게는 가족캠프의 총괄책임을 맡겨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과 캠프장을 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를 보면 하나를 알기도 벅찬데 신부님은 하나를 보면 열은 아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조직력은 다양한 독서에서 나왔습니다. 네 번째 본당 신부님은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처럼 영성은 깊고, 지식은 넓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은 성서는 물론 문학, 예술, 건축, 경제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감히 제가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는 ‘정중동(正中動)’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변하는 시대에 큰 바위 얼굴과 같았던 신부님의 영성이 새삼 그립습니다.
본당신부로 8년을 지내면서 보좌신부님들과 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제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본당 신부님들처럼 보좌신부님들을 대했는지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저는 기도에서 나오는 자유를 보여주지 못했고, 겸손에서 나오는 합리적 결정을 보여주지 못했고, 다양한 독서에서 나오는 조직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정중동에서 나오는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모두 사목의 현장에서 잘 지내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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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깐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세상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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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세세하게 규정한 율법 관련 조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지켜야 한다는 강박 속에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고 살아야 하였습니다(마태 23,4 참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가벼운 짐과 편한 멍에를 마련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의 짐을 진다는 것은 그분의 뒤를 따르며(‘나에게 오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나에게 배워라.’)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길은, 곧 ‘안식’을 누리는 길입니다. 여기서 안식은 미래에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누릴 평안한 쉼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앞당겨 현재의 삶 속에서 이미 누리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은 그분께서 새롭게 마련하신 멍에를 메고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고 계십니까? 만일 어깨가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것 말고도 다른 짐들이 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여 봅시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짐 꾸러미를 하나둘 어깨 위에 계속 올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그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럽게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정작 짊어져야 할 짐은 예수님께서 주신 짐, 그것 하나뿐입니다. 알게 모르게 쌓아 올린 불필요한 삶의 멍에들을 차근차근 내려놓아 봅시다. 우리 어깨가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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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을 해설할 때, ‘무거운 짐’은 유대교 율법을 뜻한다고 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해설은 이천 년 전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대교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거운 짐’과 ‘멍에’는 ‘생로병사’로 표현되는 ‘인생고(人生苦)’입니다. “유대교 율법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리스도교 교회법이라는 무거운 짐이 새로 생기지 않았는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스도교 교회법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잘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 때,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유대교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는 지켜야만 살고 안 지키면 사형을 당하거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글자 그대로 ‘무거운 짐’이었고, ‘멍에’였지만, 그리스도교 교회법은 그런 짐과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또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부축해 주고 도와주는 조력자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십계명’은 무거운 짐도 아니고 멍에도 아닙니다. 십계명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마태 19,17-19) 예수님의 여러 가지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나에게 오너라.”는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에서 ‘안식’은, 모든 억압과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포함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얻어 누리게 될 구원, 생명, 평화,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뜻하는 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거나 사람들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마태 20,25-28)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짐과 멍에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신앙인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십자가가 지금 당장에는 무거운 짐과 멍에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끝까지 지고 가면, 십자가는 결코 짐과 멍에가 아니라, 온갖 짐과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과 순교자들이 이미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과 앞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안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슨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양으로서, 양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멍에와 짐을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고서 잘못 해설하는 이들이 많은데, 표현만 보고 뜻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내 멍에는 ‘편안함’이고, 내 짐은 ‘가벼움’이다.”, 즉 “나의 가르침은 너희를 멍에와 짐에서 해방시키고, 너희에게 편안함과 가벼움을 준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과 멍에를 가벼운 짐과 멍에로 바꿔 주시는 분이 아니라, 짐과 멍에 자체를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안식이란, 짐과 멍에가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누구든지 살다 보면 ‘힘든 일들’을 겪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의 죄와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보속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죄와 잘못 때문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닌 것이라면, 주님을 믿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본인 탓이 아닌 일들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가서 “불필요한 짐과 멍에를 내려놓아라.”라고 충고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짊어진 것도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내려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내려놓으라는 말만 하는 것은, ‘사랑 없는’ 잔인한 짓이고, 그런 말은 ‘빈말’일 뿐입니다. 우리는 ‘힘든 일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웃의 짐을 나누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 또는 대신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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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위대함과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자만은 눈을 멀게 하여 인간의 나약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언자는 각자의 삶과 온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작품을 보도록 우리의 눈을 들어 올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선은 스스로 안전과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여기는 자기 숭배에 빠지지 않게 해줍니다. 우리 자신의 첫 ‘우상’은 곧 ‘나’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여기고는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도움과 위로, 지지와 힘을 받습니다. 젊은이나 어른 모두 오로지 하느님만을 신뢰하라고 권고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보루이시고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삶의 수고 안에서 절망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 현존에 맞게 걸어가는 새로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권능과 능력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순하게 제시되십니다. 하느님 자비의 최고 표현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함께 나누기를 바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친밀감으로 들어 높이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은 무한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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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면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의 시작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주님의 초대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때론 비틀거리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초대에 응하지 않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압니다. 주님과 진솔한 관계 안에서만이, 삶에서 우러나오는 작고 큰 짐들을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지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렇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가벼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멍에와 집은 궁극적으로 나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보람찬 일을 할 때, 힘이 생기면서 마음이 뿌듯해지는 원리와 비슷합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걸머지면 주님의 죽음과 부화의 신비를 깨우치게 됩니다. 삶의 무게, 내 삶의 짐, 나의 십자가가 주님으로 인해 가벼워져서, 즐거이 지고 갈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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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현 안토니오 신부님]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
철부지 아이 같은 나의 투정을 언제나 말없이 받아 넘기고 부드러운 미소로 날 반기는 그대는 내 인생의 동반자 그대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의 샘터엔 행복이 가득 목마른 꽃잎 위에 촉촉한 이슬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가수 엄선영 씨가 부른 ‘내 인생의 동반자’란 대중가요의 노랫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노랫말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맺기 위한, 평생의 동반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 위한 힘겨운 여정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바로 우리들이 힘들고 지칠 때, 기대어 위로를 받고 편안한 쉼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인생의 동반자를 곁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멀리서만 찾아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당신 자신이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반자는 곁에 있는 사람과 보폭을 맞추며, 같은 곳을 향해 서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동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헤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먼저 손 내밀며 우리들의 동반자가 되어주시겠다고 다가오신 예수님과 우리가 언제나 함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은 어떠한 삶이겠습니까?
제가 얼마 전 한 요양병원에 병자 방문을 했다가 그곳에 쓰인 글귀가 너무 좋아서 메모해서 온 것이 있는데, 바로 이 글귀 속에 들어있는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이 아닐까 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마음씨 따뜻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슴이 넉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은 먼저 남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삶을 성실히 가꾸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언제나 손 내밀며 다가오시는,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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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9)
흔히 스님들은 자신의 공력을 빗대면서 절밥 먹은 지 몇 년째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저 또한 출가해서 수도원 밥(?) 먹은 지 벌써 50년이 훌쩍 넘도록 이 공동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 생활은 한 마디로 ‘공동체 생활’이며, 공동체 생활은 나와 전혀 다른 부모와 출신 배경과 성격을 지닌 형제들과 주님 안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론 함께 사는 형제들과 동질감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존재들이며, 창립자의 정신을 기본으로 그리스도를 따른 동료이며 동반자라는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관점과 성향이 정화되고 성화 되기까지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는 자신들의 몸에 밴 생활 원리나 원칙을 살려고 할 때, 이것이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신 ‘멍에의 비유’를 토대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어떤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멍에란 본디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노예 생활의 모욕적이고도 경멸적인 상징과도 같습니다. 구약의 이집트 탈출기의 배경인 이집트에서, 농부들이 겨릿소에 멍에를 씌워 일정한 동선을 따라 일을 시킨 것처럼, 이집트인들은 히브리 노예들에게 멍에를 씌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9)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멍에는 바로 사랑의 멍에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5,14)라고 표현합니다. 이사야서는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40,28~29)고 하신 말씀은 곧 예수님은 사랑하심에 있어서 지칠 줄 모르시기에 우리가 사랑하도록 다그치시고, 재촉하시면서 사랑에 피곤할 때 힘을 주시고, 기운이 떨어질 때 기력을 북돋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단지 ‘악한 일 혹 나쁜 일’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동기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선을 넘어설까 두려워서가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금기를 넘어 본 자만이 왜 금기가 필요한지를 깨닫고, 금기를 넘어선 사랑의 계명을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바가 바로 우리에게 ‘생활 수칙이나 원리’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방식 곧 사랑’을 살도록 바라십니다. 사도 바오로가 언급했듯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3,23) 이렇게 우리 모두를 하느님과의 관계 곧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느님 사랑의 멍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제약하는 것, 묶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멍에입니다. 관계란 멍에와 비슷하며, 이 사랑의 멍에가 바로 우리 머리를 들어 세워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해주고, 허리를 고정해서 몸을 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다그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사랑의 멍에는 그리스도인인 저희에게 사랑함에 있어서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르게 힘을 줍니다. 사랑의 멍에는 그러기에 구속이나 속박이 아니고 저희 모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기답게 해주고 자연스럽게 해주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구속’입니다.
그 사랑의 멍에는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의 안식처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율법의 무겁고 힘든 멍에가 아니라 편하고 가벼운 사랑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가 가볍고 편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먼저 지고 가셨기 때문이며 우리 또한 당신이 짊어지고 가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사랑의 멍에를 기꺼이 지고 가도록 초대하시는 그분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처럼 힘겨운 인생의 무게로 지치고 힘들 때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왔거나 오리라 봅니다. 아니면 지금이 그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때 변진섭의 「우리 사랑이 필요한거죠」라는 노래가,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대 어깨 위에 놓인 짐이 너무 힘에 겨워서 길을 걷다 멈춰진 그 길가에서 마냥 울고 싶어질 때 아주 작고 약한 힘이지만 나의 손을 잡아요. 따뜻함을 느끼게 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줄께요.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때론 내가 혼자뿐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죠. 생각하면 그 어느 순간에서도 하늘만은 같이 있죠. 아주 작고 약한 힘이라도 내겐 큰 힘 되지요. 내가 울 때 그대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앞서가는 사람들과 뒤에서 오는 사람들 모두 다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지금 우리는 모두 위로가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에게로 오너라.’고 부르시는 주님께 나아가서 참된 안식을 얻고 위로받으며, 그 힘으로 지금 인생의 힘겨운 무게로 힘겨워하는 이웃의 손을 잡아 주고 사랑을 나누어 줍시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무게로 힘들어하는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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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당신께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사는 목적과 의미를 모르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부질 없는 것들을 ‘보물’인 양 착각하고 낑낑대며 지고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음 속에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점점 더 높이 쌓아가며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계명의 구름기둥, 실천의 불기둥을 보며 나아가야 하는데, 재물이라는 불기둥, 권력이라는 불기둥, 명예라는 불기둥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강렬한 빛만 보고 불 속에 뛰어든 나방이 화염에 휩싸여 사라지듯,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즐거움만 보고 세상의 불기둥에 날아든 이들은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과 집착의 화염에 휩싸여 재만 남고 말지요.
그러니 내 마음을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주는 진정한 안식을 누리고 싶다면, 세상의 불기둥에 뛰어들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팔 벌리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기대하고 바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주님은 해야 할 일을 좋아할 수 있어야 행복해진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내가 겪는 삶의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어야 행복해진다고 말하는데, 주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하진 않으십니다. 대신 힘겹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시며 우리가 걷는 이 길을 함께 걸어가주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삶이라는 여정을 멈출 수 없음을 잘 아시기에, 구원의 여정은 누가 대신 걸어줄 수 있는게 아니라 각자가 제 발로 걸어가야 함을 아시기에, ‘자기 종교만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능력도 대책도 없이 헛된 약속을 남발하는 사이비 교주들과는 달리, 우리가 든든한 ‘동반자’의 존재에서 힘을 얻도록 기꺼이 이 길을 함께 걸어주시겠다고 나서시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푹 쉬기만 해야 안식을 누리는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안식이 아니라 ‘휴식’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드는 소극적이고 나태한 마음으로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품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방법은 온유하고 겸손한 그분 마음을 닮아가는 겁니다.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온유함을, 주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시기를 바라며 기꺼이 따라가는 겸손함을 마음에 품는 겁니다. 고통과 시련을 마주할 때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일을 겪게 하시는가?’라고 억울해하고 분노하며 주님을 원망하는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마음의 짐을 더 무겁게 만들 뿐입니다. 반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십자가’를 기꺼이 끌어안고 간다면 그 십자가가 내 생각처럼 무겁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그 십자가가 때로는 나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떠받치는 부목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고통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라, 고통 때문에 불행한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불행합니다. 고통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 고통 당할 때 불행합니다. 고통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라 그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그저 고통으로만 당하기에 불행합니다. 그렇기에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한 게 아니라 고통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면 행복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한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 고통을 기꺼이 감당할 때 행복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참된 안식은 하느님 없이, 신앙 없이 잠시 안정된 상태로 있는게 아니라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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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민속학자가 남아메리카 한 마을의 부족 아이들을 불러 모은 뒤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나무 옆에 탐스러운 과일과 맛있는 과자 바구니를 두었으니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그 바구니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모두 출발점에 섰고, 민속학자는 출발 신호를 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누구하나 빨리 달리지 않고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구니 앞에 도착하자 모두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습니다.
민속학자는 “누구든지 먼저 간 사람에게 바구니를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달려갔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나도 “우분투”라는 단어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몰라서 당황하는데, 한 아이가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혼자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분투’라는 아메리카 말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남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윤리 의식이었습니다. 이 ‘우분투’가 지금에도 울려 퍼져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 살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무관심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분투’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우분투’ 정신이 가득하면 편안할까요? 편안하지 않을까요? 이 정신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편안해질 것입니다. 또한 삶이 어렵고 힘들다면서 너무 무겁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기쁘고 행복하다면 가벼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께 오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행복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아마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편함과 가벼움을 줄 수 있는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분투’ 정신으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은 절대로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하나 되는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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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무 좋습니다>
마태오 11,28-30 (내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무 좋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11,30)
가짐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베풂의 멍에를 메니
참 편하네요
너무 좋습니다
밀침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품음의 멍에를 메니
참 편하네요
너무 좋습니다
가름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이음의 멍에를 메니
참 편하네요
너무 좋습니다
불신의 짐을 내려놓고
믿음의 짐을 지니
참 가볍네요
너무 좋습니다
절망의 짐을 내려놓고
희망의 짐을 지니
참 가볍네요
너무 좋습니다
미움의 짐을 내려놓고
사랑의 짐을 지니
참 가볍네요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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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더군다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없이 복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으며,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다교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었는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계명은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 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5,3) 사랑의 법을 제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짐이요, 멍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기에 편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넉넉한 삶의 편안함에서 오는 무사태평함이나 악과 공존하기 위해 놓여 진 안일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여정도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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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개안開眼의 여정, 사랑의 여정-
“루멘 체치스!(Lumen Caecis;눈 먼이에게 빛을!)”
오늘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간 떠오른 우리 연합회의 모토입니다. “루멘체치스” 라틴어 발음도 명쾌하고 “눈먼 이에게 빛을!”이란 뜻도 기막히게 좋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무지에 눈먼 시각장애인들입니다. “눈먼 이에게 빛을!” 말마디에 연이어 떠오른 말마디들입니다. “길을 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을 잃은 이에게 희망을!”, “꿈을 잃은 이에게 꿈을!” 바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절박한 소망이자 우리의 선교소명이기도 합니다.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빛을 잃고,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꿈을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잃고 병들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주님과 만남의 은총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근원적 처방은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 하나뿐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의 신바람 나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대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언젠가의 “그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이때” 일어나는 치유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루멘체치스, 눈먼 이에게 빛을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런 은총의 빛과 더불어 날로 맑고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그대로 우리 삶의 여정은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에서는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틸리아 동정 대축일”을 지냅니다. 루멘체치스; 눈먼 이에게 빛을! 이라는 선교소명을 뜻하는 연합회의 모토도 오딜리아 성녀로부터 유래합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성녀는 673년 레겐스부르크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기적적으로 눈이 열려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수녀원의 원장으로 소임을 다하다가 720년경 선종합니다. 이미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들, 그리고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침내 교황 비오 7세는 공식적으로 오딜리아 성녀를 알자스 지방과 시각장애인 및 눈병으로 고통받은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오늘은 성녀 오딜리아와 더불어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빛을 뜻하는 “룩스Lux”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지닌 성녀 루치아는 313년경 순교합니다. 모진 고문으로 눈알이 뽑히는 형벌까지 받았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뽑힌 눈알을 돌려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루시아 동정순교자는 어둠을 밝히는 성녀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으니 성녀 오딜리아와 너무 흡사합니다.
말 그대로 두 분 성녀 다 주님의 빛을 발하는 빛의 성녀들입니다. 빛의 성녀인 오딜리아와 루치아 두 분의 전구로 우리 역시 희망과 기쁨의 빛이 넘치는,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 가는 개안의 여정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개안의 여정에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전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주님의 등불이, 주님 은총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 마음과 더불어 온몸도 환해질 것이고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참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게 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눈먼 무지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빛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요 우리는 날로 맑고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게 됩니다. 우리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동정 성녀들이 주님께 바쳤던 그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순수, 사랑의 초연함, 사랑의 정주 끝이 없습니다.
첫째, 사랑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에, 사랑의 빛에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살아야 할 이런 사랑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을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끝없는 즐거움이 너희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너희와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둘째, 사랑의 순수입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빛나는 동정 성녀들이 그 모범입니다. 사랑할수록 순수해지는 마음에, 날로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요 지혜의 눈 혜안입니다. 동정녀 축일 때 마다 부르는 저녁기도 후렴의 아름다움에, 은혜로움에 늘 감동합니다. 노래로 부르면 더욱 감동적인 첫째, 둘째 후렴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순결을 보존하여 찬란히 빛나는 등불을 들고 신랑인 당신을 마중 나가나이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리다.”
주님을 기다리는, 개안의 여정 중인 대림시기에 잘 어울리는 기쁨 가득 선사하는 사랑의 고백같은 가사입니다. 그대로 성녀 오틸리아, 성녀 루치아의 주님 향한 순수한 사랑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바로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사랑의 초연함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 깨끗한 사랑, 품위있는 사랑입니다. 덧없이 흐르는 세상이 아닌 영원하신 하느님께 사랑의 닻을 내린 동정 성녀들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 공감합니다.
“형제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러해도 안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위선이 아니라 사랑의 지혜, 삶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수록 이런 초연한 사랑입니다.
넷째, 사랑의 정주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는 내적여정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역동적인 정주는 산속의 강같은 삶입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라는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산속의 강”
동정녀 축일 저녁기도 세 번째 후렴이 바로 사랑의 정주 행복을 노래합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떼제 마르코 수사님이 참으로 좋아하며 극찬했던 곡입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았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정주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날로 초연한 사랑의 여정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눈먼 이에게 빛을, 길잃은 이에게 길을, 희망과 꿈을 잃은 이에게 희망과 꿈을 끊임없이, 한결같이 선물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개안의 여정, 사랑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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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휴식이 아니라 안식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여러분은 어디서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까?
어머니의 품?
연인의 무릎?
아니면 누구?
주님은 어떠십니까? 주님께서 안식을 누리러 오라 하시는데 가시겠습니까?
영원한 안식은 물론 주님 안에서 누려야겠지만 지금 누리고픈 안식도 주님인지 묻는 것입니다.
저에 대해서 말씀드린다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천주교 수도자가 이런 얘기를 하다니 깜짝 놀라시겠지요? 그러나 놀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에 누리고프지 않은 것입니다. 안식을 못 누리기에 누리고픈 것도 아니고, 주님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안식을 누리기에 이제는 주님 안에서 누리고픈 것도 아니라는 얘깁니다.
언제부턴가 성체 앞에서 누리는 안식이 좋았는데 대전에 와서는 더 그렇습니다. 오전 11시경 경당의 햇빛이 드는 창가에 가부좌 틀고 앉으면 최고의 안식이 제게 깃듭니다.
이 안식安息은 휴식休息과 확실히 다릅니다. 휴식은 무엇을, 힘든 일을 잠시 멈추고, 몸과 마음이 잠시 쉬는 정도입니다.
안식은 힘든 것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고, 몸과 마음이 쉬는 정도도 아니고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듯 주님께 안주하는 것이고, 사랑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곤을 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피곤하고 휴식을 필요로 했던 젊은 날보다 사랑에 잠기고 사랑을 관조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좋습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영원한 안식에 마침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만 있다면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성공한 인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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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예수님의 멍에!>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그 목적이 돈일 수도 있고 권력과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묵상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도구들을 통해서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라는 안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안식을 얻으려면,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
멍에는 달구지(마차)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해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나 말 목에 얹은 멍에를 이용해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힘든 일을 손쉽게 하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짊어진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 아버지 뜻을 십자가 죽음으로 따른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이제는 내가 짊어져야 할 멍에가 있습니다. 너와 공동체와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위해서,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멍에'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순종'이요, '나의 순종'입니다. 오늘도 참기쁨과 참평화와 참행복이라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과 너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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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TC-_IFLwxUg?si=StjPTTpide37SB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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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세상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십자가는
은총이고
멍에와 짐은
우리를 살리는
선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없는
위로와 휴식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휴식은 소중한
삶의 질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질서를 빼앗는
분이 아니라
다정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나누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안식이 있기에
깨어있는 마음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삶에 갇혀 있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고생이
안식일 수는
없습니다.
편하고
가벼운
휴식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안식이
기쁨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휴식으로
답을 하여
주십니다.
휴식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만나는
은총이기에
실패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휴식으로
새 날을
맞이합니다.
십자가는
은총이고
안식은
기쁨입니다.
기쁨을 얻는
지혜입니다.
지혜의 멍에와
은총의 짐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선물이
됩니다.
선물을 만나며
참된
사랑을 배우는
대림시기의
나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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