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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5. 구름 한 점
바다 내음이 미풍에 실려 왔다. 오타루 항까지는 3,4백 미터는 될 것이다. 도오루는 이로나이 거리로 내려가는 언덕길에 멈춰 선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6월초의 오후 햇살이 어깨에 따갑게 내리쬐었다
도오루는 지금 미쓰이 게이코의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몇날 밤으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요코는 자신의 생모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요코의 본심인지 아닌지 주위 사람들이 살펴 줘야 한다고 도오루는 생각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인정상 만나고 싶은 것이 인간이 아닐까. 설사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만나고 싶은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요코를 위해 도오루는 미리 미쓰이 집의 사정을 알아두고 싶었다.
조금 전에 도오루는 공중 전화가 있는 역전 약국에서 전화 번호부를 찾아보앗다. 표지는 절반 이상이나 찢겨 나가고 손때로 더럽혀진 페이지는 모두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 더러운 전화 번호부에 요코 생모의 주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오루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미스이라는 성은 의외로 많았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짚으면서 찾아내려갔다. 보험 회사, 자동차 회사도 있었고 항공 서비스 영업소도 있었다. 미쓰이 이사무, 미쓰이 이치노스케, 미쓰이 다쓰오.....수많은 사람들이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이 찾는 미쓰이 가인지 도오루는 직업에도 유념하면서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미쓰이 야키치 상점(해산물)’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카기는 요코의 생모는 틀림없이 해산물 도매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었다. 미쓰이라는 해산물 상점은 한 지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도오루는 확인을 하기 위해 직업별 전화 번호부를 펼쳐 보았다. 역시 미쓰이라는 해산물 도매상은 한 집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전화는 대표전화 외에 자택 전화도 나와 있었다. 주소는 모두 이로나이마치 2가로 되어 있었다. 도오루는 수첩에 메모를 했다. 전화 번호부를 덮었을 때, 도오루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언덕길에 멈춰 선 채 도오루가 망설인 것은 집만 확인하고 돌아갈 것인가, 내침김에 미쓰이 게이코를 만나볼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다카기는 말햇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집 남편과 아들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어.”
찾아가면 곤란하다고 말햇을 때, 도오루는 반발을 느꼈었다. 요코의 친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런 일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하고 젊은 도오루른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오타루 거리에 가보고는 요코와 핏줄이 닿는 모든 사람들의 평화를 깨뜨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될까?’
도오루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뜻밖의 행운이 미쓰이 집안에 찾아들어 요코에게도 그 행운이 미치게 될 것 같기도 했다.
요코의 존재가 반드시 미쓰이 집안의 평화를 깨뜨린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이미 요코의 존재는 미쓰이 게이코의 남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한 인간의 출생이 아무리 비밀리에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과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완전히 숨겨질 수 있었을까. 도오루에게는 그 점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자기 집의 경우만 하더라도 어머니는 처음에는 자신이 요코를 낳았다며 절친한 친구인 다쓰코까지도 속였다. 그런데 누가 발설했는지 요코가 데려온 아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우여곡절 끝에 요코의 출생이 다카기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도오루로서는 미쓰이 집 사람들만 아무것도 모르고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쯤 요코의 어머니는 요코를 만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요코의 출현은 뜻밖에 기쁨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여기서 도오루의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갈등 속으로 요코를 몰아넣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인생이란 전혀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도오루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흰 구름 한 점이 둥실 떠 있었다. 부드럽고 두툼한 구름이 너무도 한가롭게 보였다.
‘그냥 돌아갈까? 요코의 신상에 이 이상의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다. 요코에게는 어머니도 형제도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요코의 오빠는 나 한사람으로 족하다. 요코의 부모는 나의 부모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정말로 그러면 되는 것일까?’
도오루는 여전히 언덕길에 멈춰 선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언덕 아래쪽에서 반소매의 푸른색 폴로셔츠를 입은 청년이 걸어왔다. 경쾌한 걸음걸이였다. 청년은 멈춰 서 있는 도오루를 보더니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집을 찾고 계신가요?”
얼굴이 갸름하고 눈썹이 잘생긴 청년이었다.
“네, 저, 이로나이마치 2가는 어디쯤 되지요?”
도오루는 느닷없이 물어 오자 당황하여 말했다.
“이로나이마치 2가는 바로 여긴데요. 누구 집을 찾습니까?”
청년은 친절하게 물었다. 퍼머를 한 듯한 머리칼이 넓은 이마에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도오루는 그 이마를 바라보면서 망설이듯이 말했다.
“저........미쓰이 상점이라고 하던데........”
“그건 우리 가게인데, 누구시지요?”
“우리 가게?”
도오루는 머리에 피가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미쓰이 상점의 바로 옆이라고 들었는데.........”
“아, 그렇습니까? 어느 댁인가요?”
청년은 끝까지 친절했다.
도오루는 점점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렇다고 찾아 온 집 이름을 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토 씨라고......”
언젠가 도오루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좀도둑이 비어 있는 듯한 집 문을 열고 큰소리로,
“계십니까!”
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사람이 나오면,
“이 근처에 사토 씨라는 분이 안 사십니까?”
하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사토라는 성은 어느 동네에나 한 집쯤 있기 때문에 의심을 받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도오루는 지금 문득 그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다.
“사토 씨요?”
청년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글쎄요, 우리 동네에는 없는데요. 사토 뭐라고 부릅니까?”
“아니,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오루는 머리를 꾸벅 숙이고 나서 도망치듯 걷기 시작했다. 청년은 이상한 얼굴로 도오루를 쳐다보았다.
도오루는 소방서 모퉁이를 돌아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사람이 혹시 요코의 오빠가 아닐가?’
그 청년은 미쓰이 상점을 ‘우리 가게’라고 말했다. 우리 가게라는 말은 점원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청년은 학생으로 보였다. 도오루는 방금 만난 청년의 갸름한 얼굴에 반듯한 눈과 코의 모습을 떠 올렸다. 콧방울 옆에 약간 큰 사마귀가 있고 치아가 하얬다. 눈은 작았지만 맑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요코와는 닮은 데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 그 청년이 요코의 오빠일 것이다.’
도오루는 청년을 요코의 오빠라고 짐작했다. 유난히 친절한 사나이라고 생각하면서 도오루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소방서를 구부러져 가니 도로는 그늘이 져 있었다. 도오루는 윗도리와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 일대는 상당히 오래된 도매상 거리인듯했다. 큼직한 석조 상점이나 붉은 벽돌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크고 작은 트럭이 가게 앞에 세워져 있었다. 도오루는 얼마간 걸어가다가 소방서 근처에 있는 담배 가게로 다시 돌아갔다. 가게 앞에는 빵을 나르는 빈 상자 세 개가 쌓여 있었다. 넉 장의 유리로 된 낡은 문을 열고 도오루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라이트(담배 이름) 한 갑 주세요.”
낡은 상점에 어울리지 않게 명랑해 보이는 소녀가 포동포동한 손으로 담배를 건네 주었다. 도오루는 담배를 한 대 뽑아 입에 물었다.
“이 근처에 미쓰이 상점이 있습니까?”
“네.”
소녀는 커다란 눈을 굴리면서 갑자기 우스운 듯이 킥킥거렸다.
“미쓰이 상점은 바로 옆이에요.”
“아, 그래요? .......미쓰이 씨한테는 저만한 아들이 있죠?”
“그래요, 있어요. 저하고 나이가 비슷한 아들이 둘이 있지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소녀는 동그란 어깨를 흔들면서 다시 웃엇다.
“애석하게도라뇨?”
소녀가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지 도오루는 알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아버지를 닮았지 뭐예요. 어머니를 닮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도오루는 무심코 소녀에게 물었다.
“부인이 그렇게 미인인가요?”
“유명해요, 미쓰이 씨 부인은요. 아저씬 그것도 모르세요?”
도오루는 모른다고 대답하고 초콜릿과 캐러맬을 샀다.
“전 미쓰이 씨 부인이 너무 좋아요. 대학을 나온 아들이 있는데도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아요.”
“미인이라서 좋아하는 거예요?”
“아녜요. 친절하고 무척 좋은 분이에요. 누구나 그 부인을 보면 좋아할 거예요.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지요.”
소녀는 신이 나서 말햇다.
“그렇게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은 난 싫어요.”
솔직이 말해서 도오루는 아직 만나본 적조차 없는 미쓰이 게이코에게 무작정 적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녀에게까지 평판이 좋은 것은 뜻밖이었다. 게이코는 남편 몰래 다른 사내와 간통하여 아기를 낳았다. 그것만으로도 어두운 이미지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누구나 좋아할 사람이라는 말을 듣자 도오루는 당황스러웠다. 요코를 몰래 낳고도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일까,
“아저씨는 만나 보지도 않고 사람을 싫어하세요?”
소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도오루는 웃었다.
“그렇게 좋은 부인이라면 남편도 좋은 분이겠네요.”
“하지만 부인과는 비교도 안 돼요. 모두들 그렇게 말해요.”
“그런데 큰아들은 참 친절하더군요.”
“어머, 아저씨도 알고 계세요? 전 동생이 더 좋은데.”
“그래요? 그런데 부부 사이는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던데요.”
도오루는 슬쩍 떠보았다.
“아저씨는 ......말도 안 되는 말씀만 하네요. 두 분은 유난히 사이 좋기로 유명해요.”
‘그야말로 평화로운 가정인가?’
도오루는 담배를 한 갑 더 사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과연 바로 옆에 미쓰이 해산물 도매상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이 도드라져 보였다. 두꺼운 통판자에 가로로 쓴 간판 글씨가 양각으로 파여 있었다. 가게는 폭이 6칸, 길이가 10칸은 되어 보였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으나 천천히 걸어서 상점 안을 둘러보았다.
20평 가량 되는 컴컴한 상점 안에는 사무용 책상이 나란히 놓여 있고 15,6명의 남녀 사무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기가 요코의 어머니가 사는 집이구나.’
도오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도오루는 운하 입구에 걸려 있는 쓰키미 다리 위에 서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부두에 멍하니 시선을 주고 잇었다. 부두에서는 노란 포크리프트가 끊임없이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강철재를 실은 전용선인지 부두 기슭에 바싹 갖다댄 배에 크림색 크레인이 철재를 싣고 있었다. 7,8명 정도 되는 사나이들이 노란 헬멧을 쓰고 일하는 모습이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도오루는 방금 보고 온 미쓰이 상점을 떠올렸다.
상점과 이웃집 사이에는 폭이 3미터 가량 되는 공토가 있었다. 그 안쪽 막다른 곳에 낡은 격자문이 달린 현관이 보이고 ‘미쓰이’라고 쓴, 사기로 된 문패가 걸려 있었다. 그 현관문을 열면 미쓰이 게이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도오루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는 그 격자문을 바라보았다.
‘다른 집을 찾는 척하고 한번 들어가 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게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거리였다. 일부러 몇 미터나 깊숙이 들어가 있는 집에 가서 묻는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0여 마리의 괭이갈매기가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항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기름이 떠 있는 파란 바닷물 위에 비치고 있었다.
‘만일 아까 그 격자문을 열었더라면......’
분명히 미쓰이 게이코가 나왔을 것이다.
“당신은 제 여동생과 꼭 닮았군요.”
불쑥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신은 옛날에 딸을 낳은 적이 있지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면 아마도 게이코는 금세 얼굴색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낳은 그 애가 자살하려고 했어요.”
게이코는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당신은 얼마나 지독한 어머니입니까? 자식을 유아원에 맡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복하게 살아가다니요.”
하고 매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은 발동선이 운하에 들어가기 위해 ‘뚜’하고 고동을 울렸다. 한 사나이가 뱃머리에 서서 멍하니 푸른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햇볕에 그을린 얼굴이었다.
도오루는 쓴 웃음을 지었다. 격자문 앞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면서 지금 자신은 공상 속에서 멋대로 게이코에게 말을 걸고 추궁했던 것이다. 아무튼 집을 찾은 것에 만족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고 생각하면서 도오루는 항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또 다시 운하 입구에서 발동선이 고동을 울렸다. 물고기로 만든 퇴비를 잔뜩 실은 나룻배를 끌고 발동선은 다리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유람선이 항구에 들어왔다. 부두 안벽에는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커다란 타이어가 여러 개 미달려 있었다. 유람선 갑판에는 흰 양장을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홀로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오타루에 갔다왔다고?”
기타하라는 놀라면서 잔디 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응, 역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
도오루는 엎드린 채 부드러운 잔디를 살짝 쓰다듬었다. 한참 전부터 두 사람은 삿포로 나카노시마 공원의 연못가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다섯시 반이나 되었는데도 6월의 태양은 아직 높이 떠 있었다. 연못 맞은편에 르네상스식으로 지은 호헤이관의 하얀 건물이 푸른 숲을 배경으로 하여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특히 원형 발코니가 이국적이었다.
“미쓰이가를 찾아갔었지. 아주 큰 석조 건물이었어.”
도오루는 어제 본 미쓰이 상점의 어둠침침한 사무실과 안쪽 현관의 격자문 등에 대해 기타하라에게 얘기했다.
“만났어?”
“아니, 그냥 집만 알아두었을 뿐이야.”
“그랬겠지.”
기타하라는 요코에 대한 도오루의 감정을 생각하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기타하라는 도오루에 대해 무척이나 여동생을 위하는 오빠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 자신과 요코는 피가 섞여 있지 않댜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기타하라는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역시 조만간 요코 씨는 친어머니와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글쎄, 요코의 의사에 달려 있어.”
친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요코에게 행복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줄 알면서도 끝내 만나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요코 씨는 도오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타하라는 적어도 요코가 자살을 기도한 그 날까지는 분명히 자신을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오루의 감정은 그 며칠 동안 요코를 간호하는 중에 급속히 수면 위로 드러났다.
어찌 되었든 간에 기타하라는 그 나흘 동안의 혼수 상태가 자신에게서 과거의 요코를 멀리 밀어 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자신과 도오루뿐이고, 요코는 완전히 딴 세계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래란 무서운 거야.”
도오루가 말했다.
“응, 1초 앞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
“그래, 갑자기 일이 일어나지.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리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해. 우린 언제 어디서 무슨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 수 없어. 미래가 있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
“정말 그래.”
정겨운 기타하라의 목소리였다. 도오루가 지금 한 말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무게와 무관하지 않은 말이었다. 루리코가 살해되고 요코가 자살을 하려고 했다. 그 두 가지 사실만 해도 도오루에게는 얼마나 버거운 문제였겠는가.
“사실은 어제 무척 진땀 뺐어.”
도오루는 어제 일을 떠올리고는 웃었다. 옆에 피어 잇는 산달래가 잔디에 짙은 산달래가 잔디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도오루는 기타하라에게 이로나이 거리의 언덕에서 만났던 친절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 참 놀라운 일이군. 그런데 그 청년은 대체 누구야?”
“응, 점원으로는 보이지 않았어.”
“그럼 요코 씨의.......?”
“오빠일지도 몰라. 얼굴은 갸름한 게, 전혀 닮지 않았지만.”
“이상한 기분이었겠군.”
“응, 착잡했어. 그 청년이 요코의 오빠라면........”
“나도 만나 보고 싶어.”
도오루는 그렇게 말하는 기타하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기타하라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도오루는 기타하라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은 남의 집을 찾는 척하고 들어가 볼까도 생각했어.”
“그런데 들어가지는 못했군.”
“응, 이상한 일이지. 막상 닥치고 보니 연극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기타하라 자네라면 어떻게 했겠나?”
“나라면 오타루까지 가지도 못했을 거야.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자격? 자격이라니.....?”
“요코 씨의 어머니 집을 방문할 자격 말이야.”
도오루는 말없이 기타하라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자네는 요코 씨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까.”
“아냐, 그런 의미라면 자네가 더 가깝잖아.”
도오루는 탐색하는 듯이 기타하라를 바라보았다.
기타하라는 잔잔하게 물결치는 연못으로 눈길을 돌렸다.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구령을 외치며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저만치 유원지 근처를 달려오는 트레이닝 팬츠 차림의 고교생 무리였다. 그들은 빠르게 두 사람 곁을 지나갔다. 도오루와 기타하라는 말없이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쓰지구치.”
기타하라는 결심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들었다.
“응?”
“실은 오래 전부터 자네와 진지하게 얘기해 보려고 생각했던 건데 말이야. 자네 나쓰메 소세키의 <고코로(마음)>를 읽어 본 적 있지?”
“응, 두 번 읽었어.”
친구 사이인 두 사나이가 한 여자를 사랑하다가 사랑에 패배한 남자는 자살하고, 배신하고 여자를 쟁취햇던 남자도 결혼 후에 결국 자살하는 내용이었다.
“우린 그렇게 되지 않도록.......”
“...............”
도오루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기타하라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6시 전이었다. 두 사람은 다카기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있었다.
“솔직히 말할게, 쓰지구치.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줘. 자네도 알고 있는 것처럼 나한테 요코 씨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리고 아마 요코 씨에게도 난 그런 존재였다고 생각해.”
도오루는 요코가 유서에 적었던 말을 떠올렸다. 요코는 “요코가 누구를 제일 그리워하고 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어요.”라고 도오루에게 썼다. 기타하라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네와 요코 씨가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약간 마음이 흔들렸어. 불안하기도 했고.”
도오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난 요코 씨를 자네에게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마음이 좀 달라졌어.”
“달라지다니?”
“응, 달라졌다고 할 수 있어. 자네는 아마도 훨씬 오래전 부터 요코 씨를 사랑하고 있었을 거야. 요코 씨가 사이시의 딸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야......”
“................”
“그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한 심정이었는지 난 잘 알 수 있어. 거기에 비하면 내 감정 따위는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기타하라.”
“아니, 비교도 안 돼. 난 최근 반년 동안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어.”
그런 도오루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요코에게 접근한 자신을 지금 다시금 상기하고 있었다. 날로 가까워지고 있는 자신과 요코를 도오루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래서 말이야, 난 요코 씨를 단념하려고 해. 요코 씨도 분명히 자네의 진실과 나의 단지 달콤한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챘을 거야. 요코 씨는 그럴 수 있어.”
“단념하다니? 기타하라.....그건 안 돼.”
도오루는 당황하여 말했다.
“안 된다고? 뭐가 안 된다는 거지?”
“그건 말이야, 요코에게 누가 더 소중한지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 않을까.”
도오루의 이 말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뜻밖의 말이었다. 확실히 그 유서는 죽음이라는 비상 사태를 눈앞에 둔 비정상적인 심리를 나타낸 것인지도 모든다. 도오루는 그 유서에 요코를 묶어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타하라의 태도가 뜻밖에도 도오루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요코 씨의 마음에 달려 있지만......”
기타하라는 잔디 위에 한쪽 팔을 괴고 옆으로 누운 채 무심한 표정으로 하얗게 빛나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도오루의 말대로 요코에게 누가 더 소중한가는 요코 자신이 결정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요코가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요코가 보내 온 편지는 겨우 엽서 한 장 뿐이었다. 걱정을 끼친 데 대한 감사 인사를 담은 내용에는 소녀다운 감정은 전혀 나타나 잇지 않았다. 기타하라에게는 알ㄹ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주소가 바뀌었다는 인쇄물 통지서를 받은 것보다 더 사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쓰지구치, 요코 씨에게 이미 나의 존재 따위는 불필요하게 여겨져.”
“마찬가지야, 기타하라. 나도 지금의 요코에게서는 먼 곳에 있어.”
도오루에게 요코의 세계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둘러쳐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다만 요코의 유서만이 도오루를 지탱해 주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까?”
기타하라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그러니까 우리 서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기로 해.”
“응, 그렇기는 해.”
기타하라는 애매하게 대답하면서 요코를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나쓰에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타하라, 소세키의 <마음>처럼 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난 요코만 행복하게 되면 돼.”
기타하라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어.”
기타하라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다시 주홍색 트레이닝 팬츠 차림의 고교생 무리가 “하나둘, 하나둘”하고 구령을 외치면서 두 사람의 옆으로 돌아서 갔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못에 놓인 타원형 돌다리를 건너갔다. 공원 안에는 학생과 퇴근길인 듯한 직장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두 사람 앞을 지나가는 세일러복 차림의 여학생의 다리가 우윳빛으로 빛났다.
두 사람은 연못을 따라 등나무 덩굴 쪽으로 걸어갔다. 등꽃 봉오리가 잔뜩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기타하라. 요코는 사이시의 딸을 걱정하고 있어.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하고.”
“그래? 그럴 테지. 요코 씨에게는 이제 남의 일로 생각되지 않을 테니까.”
“응, 그런가봐. 친어머니보다도 그쪽이 더 마음에 걸릴 거야. 기타하라, 사이시의 딸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결혼식이라도 있는지 호헤이 관의 둥근 발코니 아래 울긋불긋한 후리소데(겨드랑이 밑을 꿰매지 않은 긴소매가 달린 일본 옷)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여러 명 서 있는 것이 보이고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안에 있을지도 몰라, 쓰지구치.”
“설마.”
도오루는 젊은 여성들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소세이 강의 작은 돌다리를 건너 공원을 빠져 나왓다. 이 근처의 소세이 강은 느릿느릿 완만하게 흘러내릭 있어 기슭에 늘어선 수양버들의 푸르름이 아주 선명했다. 소세이 강은 삿포로 시내를 남푹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강으로, 이름 그대로 도요히라 강에서 물줄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쓰지구치, 사이시의 딸이 정말로 후리소데를 입고 친구들과 밝게 웃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나.”
도오루는 문득 불단에 장식해 놓은 루리코의 사진을 떠올렸다.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데는 공감할 수 있었으나, 기타하라의 말에는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이시의 딸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 기타하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무거운 감정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도오루와 기타하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을 따라 뻗어 있는 뒷길을 걸었다. 왼쪽으로 공원이 보이고, 오른쪽 담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저택들이 늘어선 조용한 주ㅐㄱ가였다. 좁은 길을 때때로 클랙슨을 울리면서 차가 지나갈 뿐 사람 그림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도오루는 자신이 요코의 남편이 될지 기타하라가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다.
’만일 요코와 기타하라가 결혼하게 되면......?‘
도오루는 문득 주저앉고 싶을 만큼 쓸쓸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타하라의 말을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도오루는 곧잘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생각했다.
아스팔트길을 노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샌들을 끌면서 가볍게 걸어와 두 사람을 앞질렀다. 두 사람은 일식집 ’가모가와‘의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아 자갈과 모래를 섞어 깐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콘크리트 벽이 ’가모가와‘의 넓은 건물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백 미터쯤 맞은 편의 전차길이 보이는 왼쪽 모퉁이에 ‘다카기 산부인과’라고 쓴 플라스틱 간판이 보였다.
“쓰지구치, 다카기 선생에게는 오타루에 갔던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기타하라는 도오루의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응, 현재로서는. 하지만 다카기 아저씨한테도 책임이 있으니까 요코의 입장에서 생각해 줘야 할 거야.”
“하지만 말하는 시기가 문제야.”
“물론 그건 알고 있어. 요코의 기분에 맞춰야겠지.”
요코를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참을 각오가 되어 있는 도오루였다.
“좋겠어, 자넨.”
기타하라가 중얼거렸다.
“뭐가?”
“아니......”
자신은 입밖에 내거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일도 도오루에게는 허용되어 있다. 기타하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활짝 피어 향기를 내뿜고 있는 라일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3층 건물인 다카기 병원 앞에 이르렀다.
전차가 땅을 울리면서 지나갔다.
다카기의 살림집은 병원 안에 있었다. 널찍한 현관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사무실이 있고 이어서 대합실, 진찰실, 분만실, 수술실 등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었다.
현관 왼쪽의 커다란 문이 다카기의 살림집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벨을 누르자 깡마른 몸집의 다카기의 어머니가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났다.
“어머,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카기와는 전혀 닮지 않은 가느다란 눈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하고 하나도 닮지 않은 미인이지, 우리 어머닌?”
이따금 다카기가 자랑할 만큼 어딘지 깔끔하고 세련된 용모였다.
다카기가 사는 집은 5칸짜리 방이 둘, 4칸짜리 거실, 3칸짜리 부엌과 욕실로 되어 있었다. 다카기의 어머니는 양실을 싫어해서 어느 방에도 소파나 의자는 놓여 있지 않았다.
“야, 미래의 이학 박사와 의학 박사님이 오셨군. 잘 왔어.”
다카기의 감색 유카다(목욕을 한 뒤 또는 여름철에 입는 무명 홑옷) 깃이 벌어져 가슴털이 훤히 보였다.
“그때 헤어진 후로 처음이군. 그땐 이학 박사님께 호되게 당했지만, 부탁이니 오늘은 좀 부드럽게 대해 주게.”
다카기는 아름다운 정원수가 보이는 응접실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자마자 커다란 손으로 맥주병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그땐 좀 흥분해서.......”
기타하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청풍재죽림(清風在竹林)’이라고 쓴 액자가 도코노마에 걸려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복수초 그림이 걸려 있었다. 다섯 달 전에 바로 이 방에서 기타하라는 다카기에게 요코의 친어머니를 격렬하게 비난했었다. 다카기에게 덤벼들 기세였던 그때 일이 기타하라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각되었다.
다카기는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에 대해 폭로했다는 말을 듣자 놀라서 기타하라와 함께 부리나케 아사히가와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날 두 사람은 요코의 음독 자살 기도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자네들은 같은 기숙사에 있다고 했지, 아마?”
“네. 방도 같이 써요.”
“그래, 그 인연으로 기타하라 군은 요코의 애인이 된 건가?”
그때 기타하라는 말했었다. 요코가 어떤 사람의 딸이든 자신은 요코와 헤어질 수 없다고. 그때 기타하라의 진지한 표정을 다카기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기타하라를 요코의 애인이라고 한 다카기의 말에 두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다카기는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응, 그렇군. 자네들은 나와 쓰지구치 게이조와 같은 사이구만.”
팔짱 낀 팔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다카기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 아저씨와 아버지와 같은 사이라니요?”
도오루가 다카기의 어머니가 거져온 그린아스파라에 젓가락을 가져가면서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응, 한마디로 말하면 라이벌이라고나 할까.”
“라이벌요? 하하.......”
도오루가 웃었다.
“웃기는. 하긴 내 경우는 애초에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어. 쓰지구치는 날 라이벌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자네들은 적수가 될 만한 라이벌인가 보군.”
“천만에요. 우린 그런 라이벌 관계가 아녜요.”
기타하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렇게 부정할 필요는 없어, 기타하라 군. 라이벌도 좋은 거야. 그렇지 않아? 나와 쓰지구치처럼 사이 좋은 라이벌이 되어 주게.”
다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는 거냐. 젊은이들이 진짜인 줄 알겠구나.”
맥주를 가지고 다시 들어온 다카기의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대화를 끊으시면 곤란해요. 전 사랑에 실패하여 독신으로 일생을 마치는 비극의 주인공 역을 맡은 셈이니까요.”
다카기가 크게 웃었다.
“정말 그런 건가요? 다카기 선생님? 독신으로 사시는 게 쓰지구치의 어머니를 잊을 수 없어서인가요?”
“응,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또 허튼 소릴 하는구나.”
다카기의 어머니가 다카기의 무릎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도오루와 다카기는 함께 웃었다. 그러나 기타하라는 웬일인지 웃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요코를 그리워하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 훗날 이처럼 농담으로 얼버무리면서 웃는 얼굴로 이야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기타하라는 콩을 소리나게 씹었다.
이때 젊은 가정부가 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선생님, 고아원에서 전화예요.”
“아, 그래?”
다카키는 곧 일어섰다. 도오루는 놀란 표정으로 다카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카기는 금방 돌아왔다.
“아저씨, 아저씨는 유아원뿐만 아니라 고아원에도 관계하고 계세요?”
도오루가 대뜸 물었다.
“물론 관계하고 있지. 유아원에는 아무도 데려갈 사람이 없는 아이들이 있잖아? 그런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 고아원으로 보내야 하니까.”
“아, 그렇군요. 그럼 고아원에도 데려가지 않는 아이가 있겠군요.”
“물론이지. 친부모도 찾으러 오지 않고 다른 사람도 데려가지 않는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중학교를 마치면 사회로 나가게 돼. 정말 마음 아픈 일이야.”
다카기는 그답지 않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심정을 도오루는 상상도 못할 것 같앗다. 요코도 어쩌면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쓰지구치 집에서 자라는 것보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살로까지 내몰리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도오루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그래도 고아원에서 자라는 요코를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가엾게 여겨졌다.
‘사이시의 딸도 누가 데려다 길렀을까?’
도오루는 다카기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도오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니에요, 잠시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 세상의 젊은 녀석들은 자기 부모 밑에서 자라는 행복을 알아야 해. 하긴 나처럼 이 나이가 되도록 부모 밑에서 살고 있는 건 고마움이 많다 못해 넘치는 일이지만 말이야.”
“선생님은 왜 결혼하시지 않습니까?”
“알고 싶은가, 기타하라 군?”
“물론 알고 싶습니다. 선생님 나이에 독신이라면 희소가치가 있으니까요.”
“내 나이라니 무슨 말이야? 이래 뵈도 난 아직 청년으로 자부하는데.”
다카기는 김으로 만 버터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말을 슬쩍 피하시면 곤란해요, 선생님.”
“뭐 피하는 건 아냐. 독신으로 지내는 이유가 딱히 없어서지. 어찌어찌 하다 보니 벌써 마흔 고개를 넘어서게 된 거고.”
“그래요?”
기타하라가 의아한 듯 말했다.
“그럼, 그렇다니까. 산부인과를 운영하다 보면 여자가 신비한 존재로 보이지 않아. 게다가 유아원 일도 있지 않은가. 이혼한 부부의 아이들이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여자도 아이고 아무 생각이 없어지지.”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세상 사내들이 다 결혼한다고 해서 나도 꼭 그래야 한다는 법도 없고. 독신으로 사는 것도 괜찮아. 귀찮게 바가지나 긁히고 살 수는 없으니까. 이 세상 사내들 중에 자기 아내와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잖은가? 누구나 후회하고 있지. 어때, 나 많이 알고 있지?”
“하지만 외롭지 않나요, 선생님?”
“천만에. 외로운 건 오히려 결혼한 놈들 쪽일 거야.”
“이 모양이라니까, 유지로는.”
다카기의 어머니는 핀잔을 주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듯이 다카기를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은 말이야. 이렇게 잔소리가 많으신 어머니를 보면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훤히 내다보여. 나처럼 대가 약한 사내는 그 틈에서 못 배겨낼 거야. 그래서.....”
도대체 어디까지가 본심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