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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닙바나(완전한 열반)에 대한 짧은 생각들
지은이 무념
1.종교와 철학은 존재론
빠리닙바나는 붓다와 아라한의 죽음, 존재의 끝을 말한다.
그러므로 빠리닙바나를 이해하려면 존재론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
종교나 철학은 사실 존재론이라는 의미이다.
“나는 어쩌다가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해 서양에서는 창조론, 진화론, 유물론, 실존주의가 등장한다.
창조론: 신이 너를 창조했다.
진화론: 자연의 선택과 변이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
유물론: 존재는 물질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실존주의: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서양은 신이 만든 존재(창조론)에서 출발해서, 자연의 진화론과 기계적 물질론(유물론)을 거쳐, 마침내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실존주의)로 존재론이 발전해왔다.
여기에 대해 동양에서는 도교의 실존주의(무위자연), 유교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 불교의 연기론이 등장한다.
무위자연: 인간의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 존재는 본질(이)과 물질 에너지(기)의 결합이다.
연기론: 조건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조건이 다하면 존재는 소멸한다.
선종의 공안도 존재론에서 예외가 아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태어나기 전 나의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뭐꼬(是甚麼): 물질과 정신을 이루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
중관의 연기즉공(緣起卽空)과 유식의 유식(唯識)도 결국 존재론이다.
연기즉공: 존재란 연기이다. 하지만 존재의 주체는 공이고 무아이다.
유식: 공이고 무아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식은 존재한다.
2. 존재론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
서양의 존재론은 대체로 물질주의 우선, 유(有)의 철학, 객관주의, 직선적이고 일회성이다.
동양의 존재론은 대체로 정신주의 우선, 무(無)의 철학, 주관주의, 순환적이고 연속성이다.
⓵서양의 존재론
창조론: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그리고 숨을 불어넣었다.” 이것은 물질이 있고 다음에 정신이 있게 되었다.죽으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삶은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
진화론: “살아남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자연의 선택에 적합한 형질을 가진 개체만이 살아남아 유전자를 후세에 전한다. 여기는 물질은 그렇다치고 정신이 없다. 유물론, 물질주의다.
맑스의 유물론: 진화하고 발전한 물질이 형성되고 나서, 정신은 물질 형태의 뇌의 작용일 뿐이다. 죽으면 화합 원소의 분해와 함께 소멸한다.
그 이후로 서양은 현대의 뇌과학, 양자역학, 진화생물학에서 “의식이나 영혼조차 뇌의 화학적 물리적 반응에 불과하다.’라는 물질주의적 시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서양의 존재론은 직선적이다.
“내가 어쩌다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지?”
창조론: 하나님이 너를 창조한 거야.
진화론: 자연의 순리, 생존을 위한 처절한 진화의 산물이야.
실존주의: 너는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졌어. 살아남으려면 투쟁하라.
서양의 존재론은 대체로 물질주의다. 물질주의이므로 물질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한다. 오직 지금 있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의 법칙이다. 존재는 단 한 번으로 끝나고 두 번째 기회가 없다. 창조론과 같이 천국이나 지옥에 태어나 영원히 살아간다는 상견과 유물론과 같이 죽으면 끝이다라는 단견, 두 극단을 벗어나지 못한다.
⓶동양의 존재론
서양의 존재론은 물질이 있고 나서 정신은 물질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한다면, 동양의 존재론은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정신, 기 에너지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존재의 근원으로 다룬다.
서양의 존재론이 직선적이고 일회성이라면 동양의 존재론은 순환의 법칙, 연속성의 법칙이다.
“내가 어쩌다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지?”
라는 물음에,
“자연도 돌고, 우주도 돌고, 지구도 돌고, 계절도 돌고 세상도 돈다. 삶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또 태어난다. 새옹지마, 전화위복, 고진감래, 흥망성쇠가 돈다. 돌고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다.”
라고 존재를 끝없는 순환을 되풀이 하는 뭔가로 본다.
서양의 존재론은
“존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에서 시작해서 “그럼 지금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서 끝을 맺는다.
동양의 존재론은
“시작도 알 수 없는 과거부터 끝없이 존재가 굴러가고 있어. 그러므로 존재의 시작을 알 필요는 없어. 그것보다는 어떻게 그 존재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존재의 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양의 존재론이 외부에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는다면, 동양의 존재론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나는 왜 지겹도록 윤회 속에서 헤매고 있을까? 혹시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정신주의자들은 그 존재의 원인을 정신에서 풀어야 한다는 동질적 인식론을 가지고 있다.
“그럼 그 순환의 법칙에서 벗어나는데 어떤 특별한 노력이나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동양 종교 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3. 불교의 존재론
불교의 존재론은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선다. 마음이 으뜸이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Dhp1)”
라는 법구경 게송 1번에 함축되어 있다.
이 게송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네가 여기 존재하게 된 것은 마음 때문이다.”라는 것이고,
둘은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도 네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라는 것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게 된 것도 네 마음이고, 존재에서 해탈하는 것도 네 마음에 달려있다.
존재와 해탈이 의도와 결심 사항이다.
“내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건 나의 의도, 욕망, 업(까르마) 때문이다.”
“그럼 존재에서 해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욕망과 집착을 무너뜨리려는 노력과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는 지혜를 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특별한 노력으로 존재에서 해탈하게 되었다.
그럼 해탈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완전한 소멸인가 아니면 어떤 초월적 영역에 태어나 영원한 평화 속에 머무는가?
이것이 빠리닙바나(완전한 열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4. 아라한과, 윤회의 끝
⓵붓다와 아라한의 오도송
“집짓는 자를 찾지 못하여 거듭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네,
오, 집짓는 자여, 이제 그대를 보았으니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Dhp153~154)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범행은 성취되었고,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므로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무아경, S22.59).”
⓶초기경전에 자주 언급되는 깨달음의 네 레벨
수다원(sotāpanna) :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을 끊은 수다원은 최대 욕계(인간과 천상)에 7번 윤회하고 열반에 든다.
사다함(sakadāgāmī): 탐욕, 분노가 90%제거되어 욕계(인간과 천상)에 1번 윤회한 후 열반에 든다.
아나함(anāgāmī): 감각적 욕망과 분노가 100% 제거되어 욕계에 영원히 돌아오지 않고, 새계 정거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열반에 든다.
아라한(arahant): 나머지 족쇄,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자만, 들뜸, 무명을 완전히 제거하고 바로 열반에 든다.
<여기까지 해석>
불교의 깨달음은 윤회 열차에서 내리는 데 있다.
윤회 철도 999에서 내리려는데, 아직 역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일곱 정거장 남아있는가, 한 정거장 남아있는가, 마지막 역인가에 따라 깨달음의 경지가 정해진다.
범부는 정차역이 아직 999개, 아니 정차역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수다원은 정차역이 최대 일곱 정거장 남아있다.
사다함은 한 정거장 남아있다.
아나함은 마지막 정차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아라한은 열차에서 내린 사람이다.
붓다도 아라한이므로 이미 열차에서 내린 것은 동일하다.
아라한과(阿羅漢果) 위에 불과(佛果)라는 것은 없다.
아라한과에서 열차는 멈추고 존재의 끝을 맺는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로 오면서 이 자연의 법칙이 무시되고, 인위적으로 열차 운행을 재개한다.
원력에 의해 생사 윤회의 열차를 다시 탈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가 생겨난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인위적 법칙이 과연 가능할까?
5. 존재의 끝, 빠리닙바나
십바라밀을 완성한 붓다와 금생에 깨달음을 완성한 아라한은 존재의 끝에 도달했다.
더 이상 윤회 열차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
그럼 붓다와 아라한의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빠리닙바나 이후에는 존재하는가 소멸하는가 아니면 존재계를 떠났지만 어떤 특별한 영역에서 영원히 머무는가?
⓵십무기(十無記, 말륭꺄뿟따경, M63)
부처님 제자 중에서 말륭까뿟따 비구가 있다. 그도 여기에 의문이 항시 있었다. 그래서 붓다에게 질문했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합니까?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까?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말륭꺄뿟다 비구의 질문에 붓다께서는 강하게 꾸중하셨다고 한다.
“그딴 희론은 그만두고 독화살이나 뽑아라.”
하지만 붓다의 강력한 꾸중에도 불구하고, 붓다 빠리닙바나 후에 이 문제를 가지고 불교계는 끝없는 희론을 계속했다고 한다.
⓶불의 비유(왓차곳따불경; M72)
왓차라는 유행자(游行者, Paribbājaka)이 있다.
유행자라는 것은 불교도가 아니고 자유로운 방랑 수도승, 여러 사상가나 철학자, 깨달은 성인을 찾아다니며 철학적 토론을 하거나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다. 유행자는 화엄경에서 선재동자 포지션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만 해탈이니, 빠리닙바나라는 단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붓다 당시 인도 정신계에서 열 가지 철학적 질문이나, 해탈 이후의 존재론에 대한 문제가 흔한 토론 주제였다는 것이다.
왓차라는 유행승이 말륭꺄뿟따와 마찬가지로 붓다에게 찾아와서 십무기에 대해 질문했다.
붓다는 그 질문에
“그런 의미없는 철학적 견해는 그만두어라. 그런 견해들은 번뇌의 소멸, 깨달음, 해탈, 열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관념놀이일 뿐이다.” 라고 대답을 거부하셨다.
그러자 왓차는 좀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아니, 그럼 해탈한 비구는 태어난다는 이야기입니까?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까?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때 붓다는 불의 비유를 들었다고 한다.
“왓차여, 땔감이 다하여 불이 꺼졌는데, 그 꺼진 불이 동서남북 어디로 갔는가? 그건 질문이 잘못됐다. 다만 연료가 다하여 꺼졌을 뿐이다.”
⓷왕기사 이야기(법구경 게송 419~420번)
그는 출가 이전 재가자일 때 주문을 외워 신통을 얻었다. 그 신통은 죽은 사람의 해골을 두드려보고 그가 어디에 태어났는지 정확히 맞추는 것이다.. 그는 이 능력으로 인도를 떠돌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떠도는 중에 붓다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신통 대결을 신청했다. 붓다는 그 앞에 해골 다섯 개를 놓고 맞춰보라고 했다. 왕기사는 네 개의 해골의 주인이 태어난 곳, 지옥, 축생, 인간, 천상을 맞췄다. 그런데 마지막 아라한의 해골은 맞출 수가 없었다. 그가 어디로 간 것인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기사는 게임에서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붓다에게 자신이 모르는 신기술을 배우기 위해 출가했다. 붓다는 그에게 위빠사나를 가르쳤고 그는 아라한 분들 중의 한 분이 되었다. 그가 시인으로 유명한 왕기사이다. 장로게경에서 그가 깨달음을 노래한 시가 다수 실려있다.
<여기까지 해석>
아라한의 죽음, 빠리닙바나를 붓다는 이렇게 표현했다.
“불이 꺼졌다.”
불을 타오르게 하는 땔감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존재는 연기적 존재다.
조건이 있으면 존재하고, 조건이 다하면 존재도 소멸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갈애, 집착, 등 모든 오염된 마음이 조건이다.
그 조건들이 모두 소진되면 존재는 소멸한다.
살아생전에는 탐진치의 불이 꺼졌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마지막 요소, 오온의 불마저 꺼진다.
존재가 죽고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 특별한 물질로 몸을 이루어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취가 없다.
6. 빠리닙바나, 단멸론이라는 오해
⓵야마까 경(S22.85)
야마까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불꽃의 비유’나 ‘아라한은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라는 경의 말씀을 이렇게 오해했다.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번뇌가 다한 비구가 죽으면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단멸론)”
그가 그런 자신의 견해를 주위에 피력하자, 법의 장군으로 알려진 사리뿟따가 그를 찾아갔다.
“야마까여, 색수상행식이 무상합니까? “
“그렇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까?”
“타당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해석>
존재라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집합체이다. 색수상행식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다. 이것을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이와같이 색수상행식 거기 어디에도 존재라는 것은 없다.
원래부터 존재는 없었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색수상행식의 집합체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단멸론은 틀린 것이다. 원래 뭔가 있다가 없어져야 그것이 단멸론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 단멸론이 성립되지 않는다.
색수상행식을 나라고 동일시한 것이 잘못되었다. 조건지어져 형성된 것일 뿐이다. 조건이 소멸하면 형성된 것도 소멸한다.
⓶야마까 경(S22.85)
사리뿟따 존자의 질문이 계속됐다.
“야마까여, 그럼 색(몸)이 존재입니까?” .수상행식이 존재입니까? 색수상행식이 모두 모인 전체가 존재입니까? 색수상행식을 떠나 존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존재라고 할 게 없는데, 번뇌 다한 아라한은 죽음 이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단멸론)라는 것이 타당합니까?”
“사리뿟따여, 제가 사견을 가졌습니다. 존자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견을 버렸으며 올바로 법을 깨달았습니다.”
<여기까지 해석>
원래 나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집합체이고, 그 집합체가 내가 아니고, 그 집합체 안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집합체 밖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이 꺼졌을 때 그 불은 동쪽으로 갔는가 서쪽으로 갔는가?”
불은 원인이 있어서 일어났고, 원인이 다하자 꺼진 것이다.
이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모임이고, 이 모임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고, 조건이 다하여 소멸했다. 거기에 원래 나라고 하는 존재가 없었다.
탐진치라는 땔감으로 인해 타올랐다가 탐진치가 다해 꺼진 것이다.
존재는 오온이 전부다. 오온 이외에 영혼이나 그딴 것은 없다. 그 오온은 형성된 것이다. 원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원인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원인이 소멸하면 형성된 오온도 소멸한다. 그래서 무상하다는 것이다.
사리뿟따의 말처럼, 살아있을 때조차도 오온 어디에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아라한 또는 여래’가 없는데, 존재하지 않던 자아가 사후에 단멸한다는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조건이 다하여 소멸한 것이다.
그러므로 빠리닙바나는 원인의 소멸에 따른 결과의 그침이다.
7. 빠리닙바나, 초기불교 학자들의 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도 사이에서도 아라한의 죽음 이후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그럼 아라한은 완전히 무로 돌아갔단 말인가? 어떤 초월적 영역에서 영원한 평화를 즐기는가? 등등.
초기불교 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⓵완전한 소멸
틸만 베터(Tilmann Vetter), 요하네스 브롱크호르스트(Johannes Bronkhorst), 리스 데이비즈(Rhys Davids)
땔감이 다하여 꺼진 불처럼 아라한의 생전은 유여열반, 탐진치라는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이고, 아라한의 죽음은 존재를 구성하는 오온이라는 땔감 마저 완전히 소멸한 상태이다.
어떠한 영혼, 초월 의식, 초월적 자아도 남아있지 않다.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어떤 바탕(존재)도 남아있지 않은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이다.
⓶초월주의, 형언불가설
타니사로 비구(Thanissaro Bhikkhu), 루퍼트 게틴(Rupert Gethin), 노먼(K.R. Norman), 비구 보디(Bhikkhu Bodhi)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 자체가 유위법(오온)의 세계 안에서만 적용되는 언어적 프레임이다.
오온을 넘어선 아라한의 사후는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불이 꺼졌을 때 그 불이 어디로 갔는가?’라는 것처럼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조건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것을 무가 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빠리닙바나는 유위법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헤아릴 수도 없는 초월적 상태이다. 조건지어지지 않는 무위(asaṅkhata)의 경지다.
⓷실천론적 입장
데이비드 칼루파하나(David Kalupahana), 붓다다사 비구(Buddhadasa Bhikkhu), 아날라요 비구(Bhikkhu Anālayo), 리처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붓다는 형이상학 철학자가 아니다. 괴로움을 치료하는 의사다.
독화살을 맞았을 때, 독화살의 종류나 독의 종류를 조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화살을 뽑고 볼 일이다. 사후에 뭐가 남아있는 지를 아는 것은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붓다는 대답을 회피했다.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남이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초기불교의 핵심이다.
8. 빠리닙바나, 수행자들의 견해(미얀마 전통과 태국 숲속 전통)
초기불교도 학자들의 견해는 그렇다치고, 남방 불교에서 실참수행하는 스님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⓵미얀마 전통(마하시 사야도 등)
초기경전과 아비담마에 근거한 교학적 분석을 통해 ‘완전한 소멸’의 관점을 고수한다.
아라한의 사후에는 어떠한 정신적 물질적 현상도 남지 않고 완전히 소멸한다.
무명과 갈애가 완전히 뿌리뽑혔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오온이 만들어내는 연기의 고리가 끊어진다.
어떤 영원한 의식이나 초월적 자아가 남아있다는 것은 상견이라고 부정한다.
⓶태국 숲속 전통(아잔 문, 아잔 마하부아)
아잔 문은 당신이 아라한과를 증득했을 때, 붓다께서 많은 아라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삼매 속에 나타났다. 그들은 순수하고 밝고 투명한 빛의 형상이었다.
“그대는 마침내 괴로움의 바다를 건넜고, 모든 번뇌를 뿌리뽑았다.”
라고 축하해주고 깨달음을 인가해주었다.
그후로도 다른 과거의 붓다들과 아라한들이 순차적으로 찾아와 축하와 법문을 해주었다.
이것이 미얀마 전통이나 태국 교학승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전통 교학승들의 비판: 아라한이 빠리닙바나에 들면 오온이 완전히 소멸하므로 어떤 형상도 의식도 법신도 남아있을 수 없다. 붓다가 찾아와 축하해주었다는 것은 초기불교 교리에 어긋난다. 이것은 삼매 중에 나타나는 환각(vipallāsa)이다.
아잔 마하부아의 해명: 소멸한 것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오온일 뿐이다. 번뇌가 완전히 제거된 의식은 무위법, 법신이 되어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이 법신은 언어와 차원을 초월해 실재하며, 깨달은 자와 깊은 삼매 속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다.
9. 빠리닙바나와 용수의 중도
용수가 중도의 논리를 전개할 때, 대승 경전이 아닌 초기 경전인 <깟짜야나 경>을 명시적으로 인용했다.
“"세존께서는 유(有)와 무(無)의 실상을 깊이 통찰하시고, 『가전연경(깟짜야나 경)』에서 '존재한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부정하셨다." <중론, 제15장 관유무품 제7게송>
용수는 자신의 공, 중도 논리가 자신이 창안한 것이 아니고, 붓다의 말씀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
용수는 자신의 주장의 뿌리가 깟짜야나 경이라고 했으니, 우리도 여기서 깟짜야나 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⓵깟짜야나 경(S12.15)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해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세상의 일어남을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다. 이런 양극단에 의지하지 않고 중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노사우비고뇌가 발생한다.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 소멸하면 행이…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노사우비고뇌가 소멸한다.”
⓶깟짜야나 경에 대한 용수의 설명
“연기(緣起)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 부른다. 그것은 (연하여) 시설된 것(假名)이며,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다."(중론 24품 18게)
이로서 그 유명한 공식이 성립한다.
“연기=공=가명=중도”
연기가 곧 공이며 중도다.
그럼 연기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되는가?
연기하지 않은 것에서는 연기=공=가명=중도가 성립되지 않은 것 아닌가?
그것에 대해서 용수는 ‘연기하지 않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연기하지 않은 것, 무위법, 열반, 빠리닙바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열반, 무위법, 빠리닙바나의 실체화하면, 그것이 ‘있다’는 견해(상견)에 빠지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열반과 세간(윤회)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고, 세간과 열반도 또한 털끝만큼의 차이가 없다." (중론 25품 19~20게)
여기서 그 유명한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 등장한다.
용수는 대승의 핵심 논리인 원력생사(願力生死)와 중생구제, 무주처열반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대승의 핵심 논리의 바탕이 되었다.
이로서 그는 대승의 아버지가 되었다.
⓷용수의 중론에 대한 반론, 초기불교 입장에서
⒜깟짜야나 경에 대한 오해
“이 세상은 두 가지에 의지해 있나니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라는 문장에서 ‘이 세상’은 유위법(saṅkhata-loka)의 세상이다.
유위법의 세상에서는 유무에 의지해 있고, 조건에 의지해 있고, 연기가 굴러가고 있다.
연기가 굴러가므로 여기서는 중도적 관점이 필요하다.
그럼 유무가 없는 세상도 있나?
있다. 그것이 무위법의 세상(asaṅkhata-loka)이다.
여기서는 조건이 소멸하고 연기가 굴러가지 않는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는 유위법과 무위법을 철저히 구분한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영역이 있다.”(우다나, U8.3)
"비구들이여, 그 영역에는 지수화풍이 없다. 그곳에는 공무변처도 없고, 식무변처도 없고, 무소유처도 없고, 비상비비상처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해와 달 둘 다 없다. 나는 이것을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조건지어진 것이 아니고 시작도 없고 의지하는 대상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끝이다." (우다나, U8.1)
⒝생사즉열반
용수는 무위법의 세상, 깨달음의 세계, 열반, 빠리닙바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무위법의 세계를 인정하는 순간, 그것이 또 하나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한데, 그것은 공하지 않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체가 있다는 것이 되므로, 양극단 중 하나인 ‘있다는 견해’에 빠지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거짓이 된다는 것이다. 중도에서 벗어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생사와 열반이 차이가 없다.’라고 함으로써 그것이 극복되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용수의 생각은 윤회가 계속되고, 연기가 계속 굴러간다고 한다. 연기가 굴러가는데 그 연기의 주체는 비어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는 말인가?
자율주행차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운전수가 없는데 차가 굴러간다는 말인가?
자동충전 전기자동차라도 된단 말인가? 연료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차가 계속 굴러간다는 말인가?
생사가 없는 열반을 깨달았는데 왜 생사가 계속된다는 것인가?
그럼 진실은 무엇인가?
운전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무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생사의 수레바퀴는 ‘멈춘다’라는 것이 초기불교 붓다의 말씀이다.
운전수가 원래 없었다. 그런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 욕망이 생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그러다가 그 생각이 깨진다. 그 순간 수레바퀴는 멈춘다.
⒞끝이 있다.
붓다께서도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으리라.”라고 했고,
아라한들도 “더 이상 태어남은 없다.”라고 했다.
수다원은 7생이내에 끝이 있고, 사다함은 한 생 이내에 끝이 있고, 아나함은 곧 끝이 예정되어 있다.
윤회열차999는 종착역이 있다.
번뇌도 끝이 있고, 오염원도 끝이 있고, 탐진치도 끝이 있다.
빛이 일어나면 어둠은 소멸한다.
지혜가 일어나면 무지는 타파되고 해탈이 일어난다.
그것을 무위법, 열반, 빠리닙바나라고 부른다.
⒟중도 논리의 허구
중도에서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끝이 있다고 하는 순간 단견에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도에서는 무위법, 열반, 빠리닙바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면 상견에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깟짜야나 경에서 말하는 양극단은 ‘유위법의 세상’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의 세계는 무위법의 세상이다. 양극단이 원래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연기의 발생이 있고, 연기의 소멸이 있는데, 그 중간에서 보면 모든 것이 비어있다.’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원래, 연기=공=중도 전체가 비어있다.
연기가 있는데 그것은 비어있다는 말이 아니고, 원래 연기=공=중도 전체가 없었다. 그냥 착각이 있었을 뿐이다.
내가 있다는 착각으로 존재가 일어나고 온 세상이 일어나고 연기가 굴러간다.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원래 거기에 존재도 없고 세상도 없고 연기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
⒠논증의 오용
용수의 중도론은 하나의 철학이다. 철학이라는 것은 지적인 영역이지 경험적 영역이 아니다. 쉽게 말해 머리로 생각해낸 것이지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알게 된 지혜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철학적 논리는 반드시 오류가 일어난다.
이것은 학자들의 반론이다.
첫째 자기 파괴적 모순이다. ‘모든 것은 공하다.’라는 용수의 주장은 하나의 명제다. 그럼 모든 것은 공한데 ‘모든 것은 공하다.’라는 그 명제는 왜 공하지 않다는 것인가? 이것은 스스로가 논리적 함정에 빠진다.
둘째 귀류논증의 오류다. 용수는 상대방을 논리를 무너뜨리는 귀류논증을 사용한다. 오직 상대방의 논리를 비판하기만 하고 긍정적 입장, 건설적 논증은 없다.
셋째 허무주의적 귀결이다. 언어가 실재를 담아낼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가치관, 결과가 없는, 또 하나의 극단적 회의론이나 불능론으로 흐르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 빠리닙바나와 중론
붓다의 가르침은 해탈, 열반, 빠리닙바나에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용수는 해탈, 열반, 빠리닙바나를 또 하나의 극단, 상견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생사즉열반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만들어냈다.
“번뇌의 불이 꺼지면 생사의 수레바퀴도 소멸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아무리 무한한 자비심으로 원력생사를 계속한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열반 상태이지만 생사가 계속된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된다.
생사가 계속된다는 것은 생사의 주체가 있다는 것이고, 주체가 있다면 공하지 않고, 공하지 않으므로 열반이 아니다.
자비심이니 원력이니 하는 것도 말만 다를 뿐이며, 개체가 남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개체가 남아있다면 공하지 않은 것이다.
10. 빠리닙바나와 유식
대승불교도들에게 중도, 중관철학은 매우 익숙하다.
중관철학의 핵심사상인 반야심경, 금강경을 매일 읊고 다니지 않은가.
그러나 유식은 대승불교 철학이기는 하지만 대승불교도에게 그리 친숙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식의 허구에 대한 것만 언급하겠다.
①유식무경(唯識無境): 외부 대상이 마음이 만든 환상, 마음의 투영이라는 이론.
-그럼 환상을 깨뜨린, 깨달은 사람에게는 외부 대상이 없는가?
②전오식, 육식, 제7말라식, 제8아뢰야식이라는 이론.
-전오식과 육식은 초기불교에 등장하지만 제7식과 제8식은 유식학자들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가설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식이 여러 개 있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식은 ‘단지 아는 마음’이다. 식은 한 순간에 하나의 대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 식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오식은 다섯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대상과 함께한 식이고, 육식은 기억, 생각과 같은 마음작용과 함께한 식이고, 제7말라식은 자만과 함께 한 식이고, 제8아뢰야식은 잠재성향과 함께한 식이다. 식은 순수의식이라고 할 때의 식이다.
③전식득지(轉識得智) : 제8아뢰야식은 오염식이고, 이 오염된 식이 바뀌어 지혜를 이룬다는 이론.
-식은 원래 순수의식이고, 번뇌의 구름에 가려있을 뿐이다. 지혜를 일으켜 그 구름을 걷어내면 찬란한 태양이 원래 거기 있었음을 안다. 식은 단지 아는 마음이고, 오염된 마음들(탐진치)이 바뀌어 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일으켜 오염된 마음들을 무너뜨리고 제거해야 한다.
④빠리닙바나와 식: 유식에서 빠리닙바나는 식의 소멸이 아니고, 유루식은 소멸하고 무루의 청정한 참된 식으로 전환되어 영원히 상주하며 중생구제를 하는 법신으로 남는다는 이론.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식은 오온 중 하나이며, 오온(색수상행식)은 조건지어져 일어난 것이고, 조건이 다하면(열반) 소멸한다는 붓다의 말씀에 어긋난다.
⑤유혹윤생(留惑潤生): 성유식론 제8권에서 나오는 말이다. 보살은 중생을 불쌍히 여겨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야 하므로, 번뇌를 모두 끊지 않고, 미세 번뇌를 남겨 윤회의 몸을 받는다는 이론.
-이건 남방불교도들도 하는 말인데, 수다원이 되기 전이나 수다원 쯤에서 수행을 멈추고 중생구제를 위해 생사를 계속한다는 분들이 있다. 이건 가능하다.
⑥원력생사: 번뇌를 완전히 끊었지만 강력한 서원의 힘으로 번뇌나 속박없이 자유자재하게 태어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이론.
-번뇌를 완전히 끊으면, 식은 소멸하며 더 이상 생사를 할 수 없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⑦식과 영혼의 개념
갈애 멸진의 긴 경(M38)
사띠(Sāti) 비구가 있었다.
“내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식이 계속 윤회한다.”라는 그에게 삿된 견해가 일어났다.
동료 비구들이 그를 부처님께 데려갔다. 붓다께서 그를 크게 꾸짓었다.
“어리석은 자여,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냐? 식이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고 조건이 다하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모태에 드는 것은 세 가지가 만나서 이루어진다. 부모의 결합, 어머니의 배란기, 그리고 간답바이다.”
여기서 간답바(gandhabba)라는 용어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주체, 전생의 업에 이끌려 바로 다음생으로 이어지려는 마음의 흐름이다. 나중에 아비담마에서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그럼 “식이 윤회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것이 영혼과 같은 개념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식과 영혼은 다른 개념이다.
식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조건지어져 일어난 것이다.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한다. 항상한 것이 아니고 무상한 것이다. 그 조건을 무너뜨린 성인에게 식은 소멸한다.
반대로 영혼이라는 개념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거나 어딘가에 계속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11. 우리가 해야 할 일
열반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열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열반에 대한 정의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다. 갈애의 멸진,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없음이다.” (초전법륜경, S56.11)
“모든 형성된 것의 고요해짐이요, 모든 집착의 놓아버림이요, 갈애의 멸진이요, 욕망의 빛바램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M26, A3.32, M64, A10.60)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대반열반경, D16)
형성된 것들(saṅkhārā)은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말은 오온, 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진 집합체는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의 집합체이고, 그것은 조건지어져 일어난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에게는 그 조건이 다하여 소멸한다. 그것이 빠리닙바나이다.
만약에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이라는 중도 논리라면 형성된 것들(상카라)은 소멸하지 않는다. 존재의 속성, 갈애와 집착, 욕망이 남아있다면 오온은 계속 굴러가고 삶은 계속된다. 열반이 일어나지 않고 빠리닙바나가 일어나지 않는다.
번뇌가 계속되면 형성된 것들은 계속된다. 끝없는 생사의 반복이 일어나고, 그것은 괴로움이다.
그래서 붓다는 마지막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내린 것이다.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