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록
1961년판 서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가디언’ 지(The Guardian)에 게재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가디언’지는 그 후에 폐간되었다. 행여 나의 글이 그 잡지의 폐간을 재촉하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적어도 한 명의 구독자는 잃은 것이 분명하다. 어느 시골 목회자 한 분이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이 편지에 담긴 많은 조언들은 그릇된 것들일 뿐 아니라 확실히 악마적”이라는 이유로 구독을 취소하겠다고 했다니 말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대대적인 반응을 얻었다. 상찬을 아끼지 않는 서평도 있었고 대단한 반감으로 가득 찬 서평도 있었는데, 이런 반감은 작가가 표적을 제대로 맞추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거였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엄청난 판매량(나의 기준으로 볼때)을 기록했으며, 꾸준히 인기를 유지 했다.
물론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해서 저자가 마냥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영국의 성경 판매량을 기준으로 영국인들의 성경 독서량을 계산한다면, 그야말로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규모는 작지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판매량에도 이와 비슷하게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 책은 대자(代子)에게 선물할 책이나 피정 기간에 낭독할 책으로 쓰이고 있다. 심지어 손님용 침실 한쪽에서 <길 고치는 사람>, <존 잉글선트>. <꿀벌의 생활> 같은 책들과 더불어 마냥 한적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때로는 이보다 더 보잘것없는 용도로 팔리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자분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 탕파(더운 물을 채워 자리 밑에 넣어 두는 그릇-역주)를 채워 준 견습 간호사가<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귀여운 아가씨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면접시험 볼 때 업무와 관련된 정식 질문이 끝나면 일반적으로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대요. 그럴 때 그 즈음에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몇 마디 하는 게 가장 좋다더군요. 그러면서 요즘 꽤 잘 팔리는 책 열 권 정도를 추천해 주었어요. 그 중에서 최소한 한 권 정도는 읽어 두라고 하면서요.”
“그런데 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골랐나요?”
“더 생각할 것도 없었죠. 그 책이 제일 얇았거든요.”
이런 독자들도 있지만 진정한 독자들도 아주 많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이 그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킨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흔한 질문은 내가 정말로 ‘악마’(the Devil)를 믿느냐는 것이다. 만일 그 ‘악마’가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자존적이되,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권세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내 대답은 분명 ‘아니오’이다. 하나님 외에 영원하고 자존적인 존재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완전한 선에 대적하는 ‘완전한 악’을 얻을 수 없다. 어떤 존재에게서 온갖 종류의 선(지성, 의지, 기억력, 에너지, 존재 그 자체)을 전부 제거해 버린다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 악마를 믿느냐고 묻기보다는 악마들(devils)을 믿느냐고 묻는 것이 더 적절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나는 천사들의 존재를 믿으며, 그들 중 일부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의 적이 되었고, 따라서 인간의 적이 되었음을 믿는다. 이렇게 타락한 천사들을 우리는 ‘악마들’이라고 부른다. 악마들은 선한 천사들과 본질이 아예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본질이 부패한 존재들이다. 악인이 선인의 반대이듯이 악마는 천사의 반대이다. 악마들의 지도자 내지 독재자인 사탄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미가엘과 반대되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 교의(敎義)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내 견해 가운데 하나로 믿고 이?T다. 그러니 설령 이 견해가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난다고 해도 내 신앙 자체는 무너질 염려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부정적(否定的)인 증거는 손에 넣기가 힘든 법이다─이 견해를 그대로 견지할 생각이다. 내가 볼 때 이 견해는 상당히 많은 사실들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이 견해는 성경의 명백한 의미와 기독교 세계의 전통, 그리고 거의 모든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신념들과 일치한다. 게다가 이 견해는 현재까지 과학이 사실로 입증한 그 어떤 지식과도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선한 천사든 악한 천사든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곧 예술이나 문학에서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있다. 흔히 악마는 박쥐의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천사는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할 경우 깃털이 박쥐의 날개처럼 막피 조직으로 변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쥐보다는 새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아무런 구애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의 신속성을 암시하기 위해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이성적 존재가 인간이므로 인간의 모습을 부여했다.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생물체든지 빗물질적 존재든지, 영적 자연 질서 속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피조물을 어쨌든 재현해 내려면 상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악마나 천사의 형태도 상징적인 것이다. 사고할 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도 실제로 신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조각상들처럼 선남선녀의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들의 시(詩)에는 신이 인간들에게 일시적으로 ‘나타나려고’할 때 인간의 모습을 가장했다고 쓰여 있다.
기독교의 신학도 천사의 ‘나타남’을 거의 언제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해 왔다. 5세기의 신학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영들이 진짜 날개를 단 인간처럼 생겼을 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일 뿐이라고 했다.
조형미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천사에 대한 상징이 꾸준히 변질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안젤리코 수사(Fra Angelico)가 묘사한 천사들의 얼굴과 몸짓에서는 천국의 평화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나 라파엘(Paphael Sanzio)에 이르러서는 벌거벗은 통통한 아기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다가 19세기 예술에는 여리고 가냘프고 앳된 위로의 천사가 등장하게 되는데, 무척이나 여성적인 이 천사는 순전히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이슬람교의 낙원에 사는 불감증 걸린 미녀 같은 모습─덕분에 관능적 여성상이 될 위험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해로운 상징이다. 성경에 따르면 천사의 방문은 언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천사들은 “두려워 말라”는 말부터 해야 했다. 그런데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천사들은 마치 “오냐, 오냐”라고 말할 듯한 인상을 준다.
문학적 상징들은 쉽게 상징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가장 좋은 것은 단테(Dante Alighieri)의 상징이다. 그가 묘사하는 천사들 앞에 우리는 경외감으로 엎드리게 된다. 러스킨(John Ruskin)이 제대로 지적했듯이, 단테가 묘사하는 악마들의 사나움과 악의와 음란함은 밀턴(John Milton)의 악마들보다 훨씬 더 실제에 가깝다. 장엄한 풍모에 훌륭한 시까지 구사하는 밀턴의 악마들은 해롭기 그지없으며, 그가 묘사한 천사들은 호모(Homer)와 라파엘에게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진짜 위험한 이미지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메피스토펠레스이다. <파우스트>에서 집요하고도 병적으로 자아에 집착─이것은 지옥의 표지이다─하는 쪽은 악마가 아니라 파우스트이다. 유머 있고 세련되며 지각 있고 융통성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악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환상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보잘것없는 사람도 때로는 거장이 저지른 단 하나의 실수를 피할 수 있는 법이므로, 나는 악마의 상징을 선택할 때 적어도 괴테가 범했던 잘못은 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유머는 균형감각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 밖의 특징이라면 교만 때문에 죄를 지은 이 존재들에게 얼마든지 부여해 줄 수 있겠지만, 이 특징만큼은 부여해서는 안 된다. 체스터튼(G. K. Chesterton)의 말대로, 사탄은 심각함(force of gravity) 때문에 실패했다. 우리는 지옥을 그릴 때, 모두가 끊임없이 자신의 체면과 성공에만 신경을 쓰며, 모두가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모두가 시기와 자만심과 원망이라는 치명적일 만큼 엄숙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나머지 상징들은 아마도 나의 개인적 성향과 시대 상향에 많이 좌우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쥐보다 관료들을 더 싫어한다. 나는 경영의 시대이자 ‘행정’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제 가장 큰 악은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즐겨 그렸듯이 지저분한 ‘범죄의 소굴’에서 행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제수용소나 노동수용소에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장소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악의 최종적인 결과이다. 가장 큰 악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따뜻하고 깔끔한 사무실에서, 흰 셔츠를 차려 입고 손톱과 수염을 말쑥하게 깎은,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안하고 명령(제안하고 제청받고 통과시키고 의사록에 기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지옥에 대한 상징으로서 경찰 국가의 관료조직이나 아주 비열한 사업을 벌이는 사무실 비슷한 것을 택하게 되었다.
밀턴은 “악마는 서로 지독하게 굳게 뭉친다”고 했다. 어떻게 굳게 뭉치는가? 우정으로 뭉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사랑할 능력이 남아 있는 존재는 악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상징은 이 점에서도 유용해 보였다. 나는 이 상징 덕분에 지상에 있는 지옥의 유사물로서, 두려움과 탐욕으로만 똘똘 뭉친 관료 사회를 그려낼 수 있었다. 겉으로는 통상적으로 서로 정중하게 대한다. 상관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분명한 자살 행위이며, 동료를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허를 찌를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 조직체를 움직이는 원리는 ‘먹느냐 먹히느냐’이다. 모두가 자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망신을 당하고 좌천되고 파멸하기를 바란다. 모두가 기밀문서의 전문가이며, 동지인 척하다가 등 뒤에서 칼 찌르는 일에 능숙하다. 겉으로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고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며 서로의 업적을 ‘치하’하지만 이것은 허울에 불과하다. 가끔씩 그 허울이 찢어지면, 서로에 대한 광포한 적개심이 본색을 드러내며 터져 나온다.
이 상징은 악마들이 ‘악’ 그 자체를 사심 없이 추구한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을 제거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내 상징에서는 허깨비가 허용되지 않는다. 악한 천사는 악한 인간처럼 실리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그들은 두 가지 동기로 행동한다. 첫째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체주의 국가에 고문실이 있듯이, 내가 묘사하는 지옥에도 ‘무능한 악마를 위한 교도소’같은 더 깊은 지옥이 있다. 둘째 동기는 일종의 굶주림이다. 나는 악마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으며, 우리 인간도 잡아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도 같은 인간을 완전히 제 것으로 소화시키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지배의 열망을 보곤 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지적인 삶과 정서적인 삶 전체를 단지 자신의 연장선상에 두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을 통해 자기의 증오심을 발산하며, 자기의 불만을 터뜨리고, 자기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 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열정을 펼칠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열정을 억눌러 버린다. 그리고 혹시라도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은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지상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조종 ‘사랑’이라고 부르곤 한다. 나는 지옥에서는 이것을 굶주림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지옥의 굶주림은 더 극심하며, 따라서 더 잔뜩 배를 불리는 일도 가능하다. 생각건대 거기에서는 더 강한 영이 약한 영을 정말로 완전히 빨아들임으로써 약한 영의 유린당한 개성으로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을 것─이 일을 방해할 육체가 없을 테니까─이다. 악마들이 인간의 영혼과 다른 악마의 영혼을 갈망하는 것은(내가 만들어 놓은 바에 따르면)바로 이것을 위해서이다. 사탄이 자신의 모든 추종자들과 이브의 모든 자녀들과 천국의 모든 천사들을 갈망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이다. 사탄의 꿈은 모든 존재를 자기 뱃속에 집어삼켜서, 모든 존재가 오직 그를 거쳐서만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도구에서 종으로, 그리고 종에서 아들로 변화시킴으로써, 마침내 해방된 인간이 완벽한 개성의 절정에서 얻게 되는 사랑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과 다시 결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은혜에 대한 오만한 패러디요 그 나름대로의 모방이다.
그러나 그림(Wilhelm Karl Grimm)의 동화에 나오는 “다만 꿈이었네”라는 말처럼, 이것은 모두 신화요 상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에 대한 나의 견해는 궁금해하는 사람들한테야 대답 할 필요가 있겠지만,<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는 데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만들어 낸 악마들을 구체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추상적 개념들의 의인화로 받아들이면서 이 책을 풍유(allegory)로 읽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읽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악마의 삶을 고찰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글을 쓴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니며, 17세기에 이미 누군가가 악마가 보낸 편지 형식의 글을 쓴 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직 그 책을 보지는 못했지만, 주로 정치적 경향을 띤 책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티분 맥켄나(Stephen McKenna) 의 <선의를 가진 여자의 고백>(The Confessions of a Well-Meaning Woman)에 빚진 사실은 기꺼이 인정해야겠다. 연관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똑같이 도덕을 거꾸로 뒤집는 것─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는 것─과, 유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인물의 말이 유머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영혼을 잡아먹는다는 개념은 데이빗 린지(David Lindsay)의 잘 알려지지 않은 책 <대각성으로 가는 여행>(Voyage to Arcturus)에 나오는 그 끔찍한 ‘흡수’장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내가 악마들에게 붙인 이름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그 나름대로 여러 추축들을 내놓았으나, 제대로 맞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 나는 그저 듣기 싫은 소리가 나는 이름─이것도 린지에게 빚진 부분이라고 생각한다─을 만들려고 했을 뿐이다. 일단 이름들을 짓고 난 후에는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똑깥이─내가 그 이름들을 지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이 이름들이 어떤 음성학적 연상 작용을 일으켜서 불쾌한 느낌을 주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주인공인 스크루테이프(Screwtape)의 이름이 내는 효과에는 아마도 스크루지(Scrooge), 꼬인 나사(screw), 손가락을 비트는 고문기구(thumbscrew), 촌충(tapeworm), 관료적 형식주의의 상징인 빨간 끈(red tape) 등이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지 않나 싶다. 슬럽갑(Slubgob)은 얼간이(slob), 징징거리다(slobber), 엉성하게 하다(slubber), 입에 가득한 침(gob)등이 합쳐진 말일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수년 간에 걸친 도덕적, 금욕적 신학 연구의 열매일 거라면서 과분한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이들이 몇몇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혹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즉 신학처럼 명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신뢰할 만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나의 마음─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이 내게 경건치 못한 자의 사악함을 보여 주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증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요청이나 권고를 종종 받곤 했지만, 수년 동안은 그럴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 책만큼 쉽게 쓴 책도 없지만, 이 책만큼 즐기지 못하면서 쓴 책도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쉽게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스위프크(Jonathan Swift) 의 거인과 난쟁이나 <에리원>(Erewhon)에 나오는 의학적, 윤리적 철학이나 엔스티(Christopher Anstey)의 가루다 스톤(Garuda Stone)처럼, 악마가 보낸 편지 같은 글은 일단 착상만 하고 나면 그 후에는 저절로 풀려나가는 법이니 말이다. 앞부분만 시작해 놓으면 천 페이지도 쉽게 써내려 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악마의 마음으로 비트는 일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쉽다고 해도, 결코 재미있거나 오래 할 일은 못 된다. 그렇게 계속 마음을 비틀고 있다가는 일종의 영적 경련이 오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스크루테이프를 통해 말하고 있는 내내, 온갖 먼지와 티끌과 갈망과 욕망으로 나 자신을 몰아가야 했고 아름답고 상쾌하고 온화한 것은 흔적도 없이 몰아내야 했다. 그러다보니 책을 다 끝내기도 전에 거의 질식할 지경이 되었다. 책이 더 길어졌다면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 책이 나 아닌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독특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 유감스러웠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웜우드에게 주는 스크루테이프의 충고와 함께 환자의 수호천사에게 주는 천사장의 충고들도 함께 실렸어야 균형이 맞는다. 이러한 균형 없이 인간의 삶을 묘사하다 보면 아무래도 한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설령 어떤 사람─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이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과연 ‘적합한 문제’까지 구사할 수 있겠는가? 단순히 천사의 충고를 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문장에서 천국의 향기가 묻어나야 한다. 요즘에는 트러헌(Thomas Traherne)처럼 신문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글을 쓰지는 못할 형편이 되었다. ‘기능주의’라는 규범이 문학의 기능을 절반이나 못쓰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본질적으로 문체가 추구하는 이상은 단지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내용의 종류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쓸 때 느꼈던 질식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을 다시 스크루테이프의 시각을 통해 다루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처럼 편지 형식으로는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신 강의나 ‘연설’같은 형태로 글을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잊혀지고 또 떠올랐다가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은 채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지 (Saturday Evening Post)의 청탁을 받고 마침내 펜을 들게 된 것이다(Screwtape Porposes a Toast를 가리키는 말- 역주).
1960년 5월 18일.
케임브리지
모들린 대학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