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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2일 위령의 날
[청주] 우리는 천상을 희망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욥 19,1.23-27ㄴ
† 제2독서 로마 5,5-11
† 복음 마태 5,1-12ㄴ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오늘은 ‘위령의 날’로서 교회는 죽은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연옥의 영혼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하며 그들이 어서 정화되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간구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더욱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아가도록
결심해야겠습니다.
★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의 논거에 괴로워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안기신 고통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알고 있으며 그분을 기어이 뵙게 되리라는 확신을
고백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해서 말한다. 그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확인시켜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왔기 때문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를 통하여 참행복을 선언하신다. 또한 당신
때문에 박해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영화로도 만들어져 더욱 널리 알려진,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라는
소설은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흥미와 깊이를 가진 작품입니다. 이 소설
곳곳에는 우리의 신앙을 자극하는 인상적인 장면도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의 고백을 들으며 이 소설의 여러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소년 파이는 가족과 함께 인도에서 캐나다로 이민가기 위해 그들이
운영하던 동물원의 동물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만 파선되어 위기에
놓입니다. 가족도 동물들도 모두 잃은 채 소년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구명정에 남았는데, 그 보트에는 불행하게도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이미
타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하는 호랑이와
함께 보트에서 227일을 표류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또한 삶과 종교적 체험에 대한 속 깊은 우화이자 상징이라
하겠습니다.
소년은 마치 욥이 그랬듯이 죄 없이, 이유 없이 너무나 큰 고통을 겪습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이미 이렇게 밝힙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이 말은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소설은 소년이 이러한 확신에 다가가는 내적 여정을 보여
줍니다. 소년은 공포심과 자포자기의 유혹을 이겨 내며, ‘살아서 그분의
얼굴을 보리라.’는 희망을 악착같이 쥐고 있었던 오늘 독서의 욥처럼,
바다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가장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던 구명정 안의 호랑이였습니다. 호랑이는 그가 생의 의지를 잃지 않게
하면서 긴장감으로 버티게 했던 것입니다. 이 ‘호랑이의 존재’는 우리
인생길에서 때때로 맞닥뜨리는, 무정하고 매정하며 잔인하게까지 다가오는
하느님의 ‘얼굴’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욥은 이러한 하느님의 얼굴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소년 파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그 ‘잔인하고 두려운 얼굴’에 사실은 그분의
사랑이 숨겨져 있음을 믿고 기다리며 끝까지 분투하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 속에서 우리는 진정 새로
태어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위령의날 둘째미사
2014년 가해 11월2일 위령의 날 들째미사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5-30
우리는 신앙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함께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내일에게는 과거입니다. 오늘은 어제에게는 미래입니다.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할 수 있고, 천국에 있는
성인들은 지금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저도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군 생활은 무척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고참병들의 기압, 아침 일찍 일어나는 기상시간,
행군, 훈련, 늦은 시간의 보초, 내무반 생활’은 군인들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것과 생의 가장 젊은 시간을
통제와 규율이 엄격한 조직에서 보내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한지 26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군 생활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훈련과 단체 생활을 통해서 인내와 끈기를 배웠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건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군대에서 타자도 배웠고,
틈틈이 공부했던 영어는 나중에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위령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늙은 군인의 노래처럼, 무엇을 하였건, 무엇을 바랐건 모두 땅 속에
묻혔습니다. 그분들의 꽃다운 청춘도 바람 따라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들 모두는 지금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겪었고, 생로병사의 과정을 통해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하게 바라는 것을 이루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주 건강하게 살다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직업이 많은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안에서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고통과 절망의 삶이었다고 해도, 벌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
같다고 해도,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평화를 누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분들을 돌보아 준다고 믿습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할 때의 기분은 하늘을 날 것같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자유로운 생활이 있고, 가족들을 만날 수 있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죽음은 군대를 제대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다 해도, 주님을
믿으면 주님께서는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제 세상을 떠나, 머나먼 미지의 세계로 가야하는
이들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는 것은 주님의 이 가르침이 살아있는
우리에게도 힘과 용기를 주지만,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도 똑같은 위로와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위령 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므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현재
우리들이 바라는 것들이 과연 영원한 삶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영원한 삶에 장애가 되는가! 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합당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남아 있는 우리들도 지상에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 천상의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기도합니다. “주님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2014년 가해 11월1일 연중 제31주간 주일 위령의 날 복음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태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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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하다.”
무엇을 두고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일까?
쉽게 생각해서 가진 것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함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상처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에 나와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기쁨도 노여움도 슬픔도 즐거움도 있다.
삶이 깊어갈 수록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인생의
덧없음이다. 덧없음의 체험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지만, 그 중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관계에서 나오는 상처가 아닐까?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도, 우정도, 의리도 시간과 함께 퇴색하고 마는 것을
부정할 이 있을까? 물론 강하게 묶인 사랑도 있고 우정도 있고 의리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처음과 같지 않음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상처라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 의한 상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안에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란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볼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결국 의지해야만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느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허락되는 마음이 아닐까?
서로 등을 돌리고 서로 피해자임을 외칠 수밖에 없는 상처의 악순환.
무엇보다도 내 안에 발견되는 반복음적 삶을 부정할 수 없음에 “내가
의지하고 향할 분은 오직 하느님 당신 밖에 없나이다.”라는 고백이 가능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일 아닐까?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면, 자신이 마음이 가난한 자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차지하고 계신가를
보아야 한다.
얼마나 그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얼마나 그분께서 당신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가?
얼마나 그분께서 당신이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 그분께 얼마나 의지하는가?
그분의 말씀이 당신에게 어떤 행복을 주고 있는가?
세상을 그분의 마음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보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곱씹고 곱씹어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어쩌면 무척 쉬운 일인데,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우리는 하지를 못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체험하는 것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님을 고백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0130610)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슬기로운 삶 -하늘 나라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2일 주일 위령의 날,
지혜4,7-15 사도6,3-9 마태25,1-13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슬기로운 삶 -하늘 나라의 삶-
제가 묘지를 찾을 때마다 우선 살피는 것은 묘비명입니다.
묘비명에 따라 더욱 친근하게 와 닿는 죽은 분들입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순례할 때 눈에 띄는 것은 마을마다 중심에 있는
성당이요 마을 주변에 약간 떨어져 있는 성당묘지였습니다.
또 어느 곳에는 성당 바로 옆 마당이 묘지였습니다.
산자들과 죽은자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는듯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화답송을 보는 순간 떠오른 묘비명입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의 부탁으로 선정해 드린 시편 구절의 묘비명인데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묘지를 찾는 산 자들에게도 마음에 깊은 평화와 위로를 주는 묘비명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지금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의 하늘 나라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의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의 영원을 사는 것이 죽음에
대한 최고의 답이자 슬기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 '슬기로운 삶-하늘 나라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십시오.
어제는 모든 성인들(all saints)의 날이었고, 오늘 11.2일은 위령
(all souls)의 날입니다. 괄호 안의 영어단어가 분명해서 좋습니다.
대부분 죽은 분들이 위 양편에 속해 있습니다.
모두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어제와 오늘입니다.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죽음입니다. 하여 옛 사막의
교부들이나 베네딕도 성인은 '늘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
강조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탐욕이나 허영의 환상은 걷혀 마음도 순수해지고
죽음에 초연할 수 있으니 이런 이가 의인입니다.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의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죽음과 더불어 염두에 둬워야 할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잘 살았느냐를 늘 염두에 둘 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늘 주님과 함께 있으십시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 될 것을 약속하신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이십니다.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바로 늘 곁에 계신 주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무지하여, 탐욕에 눈이 가려 가까이 계신 주님을 잊고 지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악의 마력은 좋은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솟구치는 욕망은 순수한
정신을 훼손합니다. 바로 주님을 잊을 때 자초하는 화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악은 이성을 변질시키지 못하고 거짓은 영혼을
기만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참 평화와 안정에 기쁨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삼 주님과 함께 할
때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 늘 새로운 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늘 깨어 있으십시오.
늘 기름을 준비하여 깨어있다가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다섯처녀들입니다. 신랑이 상징하는바 주님이요 죽음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언제 죽음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오늘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성녀 젤투르다 역시 죽음을
통해 오시는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때의 임종어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종인지요.
과연 우리는 '영혼의 등'에 믿음, 희망, 사랑의 기름을 가득 채워 놓고,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지요?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이미 닫힌 죽음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라면 얼마나 절망스럽겠는지요.
하여 주님은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위령의 날,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
하늘 나라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늘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사십시오.
2.늘 주님과 함께 있으십시오.
3.늘 깨어 있으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어,
일찍이 세례의 은총을 받은 그들이 영원한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인천] 후회할 것들을 줄여나가는 사람
2014년 가해 11월2일 위령의 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몇 해 전 대학입시에 79세, 77세의 할머니가 도전,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들에게 지금의 나이가 결코 적지 않은데,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학공부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자, “더 나이
들어 시작하면 늦을 것 같아서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정도의 나이라면 너무 늦어서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할머니들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바로 지금이 가장 빠른 때라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또 이런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100세가 되신 할아버지께서 백내장 수술을 하셨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은
그 연세에 위험하게 무슨 수술이냐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이
할아버지께서는 단호하게 “이봐, 이런 건 지금처럼 젊을 때 해놔야 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100세라는 나이가 이 할아버지의 남은 삶
안에서 가장 젊은 때라는 것입니다. 연세 높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이야기하다보니 이런 이야기도 생각나네요.
105세 되신 할머니께서 텔레비전에 출연하셨습니다. 사회자가 “할머니,
여기 출연하셨기 때문에 출연료가 나오거든요. 이 출연료 나오면 어디에
쓰실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할머니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노후를 위해서 모아 놔야지.”라고 대답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미 늦어 버렸습니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행동하기에 충분한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지금 가장 젊은 때를 살고
있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지금 행하기에 가장 빠른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할 수
없다’는 핑계들을 최소한 몇 개 이상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서’, ‘시간이 없어서’, ‘지금 해 봐야 뭐해?’ 등등의 핑계가 사라질 때,
우리는 지금의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위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만 기도 하는 날일까요? 아닙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도 되돌아보는 날입니다. 언젠가는 주님 앞에 서야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주님께서 주신 지금이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각종 핑계를 덧붙이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을 때,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섰을 때 분명 후회를 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후회할 것들을 줄여 나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가요?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내 자신이 더욱 더 지금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는 오늘 위령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올바른 순간에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삶의 모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찰리 채플린).
우리의 꿈을 향해 지금에 충실 합시다.
조선시대 임금들의 평균 수명은 44년 6개월이라고 합니다. 임금이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제일 좋은 것만 먹었고, 위험한 일도 하지 않으면서 또한
주변 사람들의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살았을 텐데, 지금으로 치면 엄청나게
짧은 삶을 산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장수를 했던 왕이 있습니다.
74세를 살았던 조선을 건국한 태조, 또 83세를 살았던 영조입니다. 지금
시대에서는 이 나이로 장수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의료기술이 변변치
않았던 그 시절을 떠올렸을 때 74세, 84세면 지금으로 치면 100세 이상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두 왕을 보면 왕조를 세우거나 또 번창을 시켰던 왕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꿈을 펼친 사람인 것입니다. 편안하고 아무 일도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던 왕들은 모두 일찍 삶을 마감해야만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꿈을 펼친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에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꿈 없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힘들다는 말만 하면서, 편안한 삶만을 지향하면서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주신 삶은 대충 살아도 되는 삶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분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우리는 천상을 희망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위령의 날 (마태 11,25-30)
2014년 가해 11월2일 위령의 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우리는 천상을 희망한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 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천상이 약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도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대에 재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야’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주님의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설익은 떫은 열매
2014년 가해 11월1일 위령의 날
<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복음: 마태 5,1-12ㄴ
< 설익은 떫은 열매>
얼마 전에 한 수도회를 나온 분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머물던
수도회가 자신과 맞지 않기 때문에 나왔는데, 이제는 교구사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교구에서는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역시나 교구에서는 나이 때문에 안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수도회들을 알아보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꼭 맞는
수도회를 찾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도록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것을 확신하여 다시 평신도로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들어오고 싶은 곳에서는 자격이 되지
못하여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고 다른 수도회들도 면담을 하고나서는 안
되겠다고 조심스레 퇴짜를 놓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저는 이 분에게 한 가지 자신을 돌아볼 것을 부탁했습니다. 만약 이전
수도회가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것인데도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나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어디든 들어가 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합당한 마음의 수련이 되어져야합니다. 어떠한 곳에서도 아담과
하와처럼 불만을 가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내 뜻을 온전히 버리고 그 곳에 죽기까지
속해있을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분의 상황이 연옥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연옥에 가는
사람들은 지옥에 속하지도 않고 천국에 속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완전해지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으면 모두가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
천국으로 들어갑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완전하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그저 그분을 만나 배우다가 중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는
완벽한 신앙인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한 비유에서 3년간이나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를 1년
동안 더 열매를 맺도록 거름을 주고 가꾸어 보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설익은 떫은 열매가 달고 토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데 열매가
완전히 익지 않았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시간이 부족하여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열매들을
맺게 할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저조차도 여기도 못 들어가고 저기도 못 들어가는 한 형제를 위해
조금이라도 변화되어 어디에 들어가든 끝까지 살아낼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은데 하느님께서 하물며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바로
지옥으로 보내실 리야 있으시겠습니까?
물론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공로로 한 번 죄가 용서받았다는
믿음만 있으면 완전히 깨끗해졌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바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연옥의 교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완전히 믿는다면야 하늘나라에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께서 부르신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없다거나 믿음이 약하다는 말을 너무도 많이 하셨습니다. 풍랑에 두려워
떨거나 물 위를 걷던 베드로에게 “왜 이리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셨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려버리시고 나서는 그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조차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도정’에 있는 것이지
한 번 믿었다고 해서 완전하게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산을 옮겨보라고 하십시오. 혹은 믿음이 조금 있다고 한다면
물위를 걸어보라고 하십시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루에 세
번이나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첫 번째 편지 3장에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즉, 진정 믿음으로 태어났다면 절대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고 있다면 아직은 악에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저는 연옥이
없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과연 죄를
하나도 짓지 않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래도 죄를 하나도 짓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요한이 말하는 또 이런 말씀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우리는 이쪽도 저쪽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어쩔지 모르는
처지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죄도 짓고 하느님도 받아들입니다. 열매로
따지자면 아직은 ‘설익은 떫은 열매’라 버리기에도 아깝고 먹지도 못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가을이 되면 여기저기 단풍이 물들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감정도 풍부해 지는데, 어떤 이들은 ‘올해도 한 것도 없이 또
지나가네’라며 안타까워합니다. 단풍이란 잎이 죽어가면서 내는 색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때 나에게 열매가 맺혀있다면 참
아름답게 죽는 모습이겠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다면 안타까울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일은 열심히 하고 바쁘게 살지만 실제로 뒤져보면
하늘나라에 가져갈 귀한 열매를 하나도 맺지 못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 가서 우리가 그분께 바쳐드려야 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즉 우리들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령께서 내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믿음 등입니다. 결국 믿음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 자신을 씻고 그분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참 행복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아닌 세상의
영화만을 위해 산다면 아주 작은 설익은 열매도 맺혀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겐 희망은 없습니다. 시간을 주어도 믿음의 열매는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더 이상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면
반드시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의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성인들처럼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믿음의 ‘도정’ 중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완전해 지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고 그
기간이 바로 연옥의 기간입니다. 열매가 차고 익기 위해서는 가을 따가운
햇볕을 받아야하듯 연옥에서도 따가운 불의 단련을 받습니다. 순도
99.9%의 금이 되기 위해서는 불로 단련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괴로워하는 연옥영혼들에게 연민의 정을 베풀어야합니다.
그것이 미래의 우리 모습이겠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위령성월은 죽음에
대해 묵상하며 돌아가신 분들과 우리 자신들에게도 큰 은총의 시간이 되는
때입니다.
마카베오서에 죽은 이들의 죄사함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보내고
기도하게 한 일이 매우 고귀하고 갸륵한 일이라고 나옵니다. 사실 우리
부모님들이 이 세상에서 조금만 아프더라도 그 부모님을 찾아뵙고 위로해
드려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불구덩이 속에서 이 세상
모든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며 계신데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큰 불효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정말 갸륵하고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며 더 완전해 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뿌리(위령의 날)
2014년 가해 11월2일 주일 위령의 날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1.23-27ㄴ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5-11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위령의 날(2014년 11월 02일)
뿌리
오늘 아침 수도형제들이 잠들어 있는 수도원 묘지에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날씨가 잔뜩 흐립니다. 바람도 붑니다. 물기를 잔뜩 먹은 낮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비도 간간히 내립니다. 기도서는 조금씩 젖어들었습니다. 낮은
연도 소리에 마음은 기억에 실려 뿌리를 향해 내려갑니다. 우리 발 밑에는
우리의 뿌리들이 생명을 바라며 묻혀 있습니다. 우리 뿌리들은 부모, 형제,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모든 이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히 우리의 뿌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솟아난 줄기들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땅속 뿌리가 될 것입니다. 뿌리들이 있었기에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뿌리들을 기억하면 고마움이 더해집니다. 그리움도 잔잔히
스쳐갑니다. 세월호 유가족처럼 어떤 이에는 아픔도 비수처럼 더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도 땅속에
묻혀 뿌리가 되셨습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뿌리이십니다. 이분 때문에 다른
뿌리들도 생명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마지막 실재가 아닙니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오늘
마음에서 반복해야 합니다. “나는 내게로 오는 사람을 결코 쫓아내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6,37 이하). 이 말씀 덕분에 어떠한 두려움도 슬픔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주님, 죽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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