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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4.29 L.A. 폭동 1주년 특집-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 ?
이 글은 장태한 교수가 쓴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의 몇 개의 단원에서 부분 발췌한 것이다.
노예생활로부터의 탈출
흑인은 누구인가?
흑인은 검은 피부색깔을 가진 사람을 칭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색깔이 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흑인들 중 새까만 사람, 검은 사람, 비교적 하얀 피부색깔을 가진 사람 또는 거의 백인에 가까운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스스로를 '흑인'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두순자 여인 사건과 박태삼 씨 사건 등으로 한흑갈등이 연일 미국 주요 언론의 취재대상이 되고 있을 때 흑인사회를 대표한 대니 베이클웰이라는 사람이 TV 인터뷰를 하는 것이 종종 한인들에게 비쳤다. 많은 한인들은 의아해했다. 대니 베이크웨을 흑인인가? 백인인가? 그는 흑인보다는 백인에 가까운 하얀 피부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라틴계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흑인이며 흑인 사회가 받고있는 고통과 압박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흑인 사회의 지도자라고 자처한다.
흑인 역사를 조금 이해하는 분들은 이 같은 사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역대 흑인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백인 피가 많이 섞인 혼열아들이었다. 흑인 인권투쟁사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프래드릭 더글라스, 부커 T.워싱턴, W.E.B.듀 보이스(Du Bois),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등은 모두 백인 피가 많이 섞인 혼열아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흑인은 누구인가? 흑인은 대체 누구인가에 대한 일반적 이해도가 무척 낮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이 노예로 미국에 팔려 왔으며, 현재는 미국 사회의 빈민층을 형성하면서 사회범죄를 저지르고, 교육열이 낮으며, 게으르고, 예의범절이 없는 집단으로 흔히 알고 있다.
사실 흑인들의 사회집단은 독특한 면이 많이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흑인들의 대부분은 백인 피가 많이 섞여있어 진짜로 100% 흑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백인들 중에도 흑인 피가 섞인 사람 또한 상당수라는 연구조사가 발표된 바 있다. 노예시대 때 많은 흑인 노예 여성들이 백인 남자 주인의 성적 노리개감이 되어 자녀들을 출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 사회집단에는 혼혈아 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속어 「튀기」의 개념이 희박하다. 백인과 아시안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혼혈아라고 불린다. 백인과 라티노, 아시안과 라티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도 역시 혼혈아이다. 혼혈아들은 하나의 독특한 집단으로 인정되어 편견과 소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한국에서도 「혼혈아」 또는 「튀기」들이 얼마나 많은 멸시, 모욕,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그들은 소외된 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 단지 그들 부모 중 1명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핍박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 사실 그들에게는 죄가 없다. 이제 한국 사회도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관용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독특한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흑인으로 자신들의 신원을 밝히는 것일까?
피 한 방울의 법칙
미국사회에는 「피 한 방울의 법칙」이 있다. 이것은 특히 흑인들에게만 적용되어 왔고 현재도 불문율처럼 지속되고 있다. 흑인 피 한 방울만 섞여도 흑인으로 신분이 확정됨을 의미한다. 피부색깔과는 별 상관없이 부모 중 한 사람 또는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선조들 중 한 명이 흑인이었으면 그들 자손 모두가 흑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미국 사회의 불문율이었다. 특히 이같은 불문율이 미국 남부 사회에서는 철저히 지켜지고 실시되었다. 놀랍게도 이같은 사회적 인종 개념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1983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 살고 있던 수지 길로이 핍스라는 백인 여인이 있었다. 외국 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핍스여인은 여권 신청시 자신의 인종을 백인으로 기록했으나 여권발급소에서 핍스 여인은 흑인이므로 흑인으로 다시 정정해야 여권 발급을 해주겠다는 답변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인가? 핍스여인의 부모, 증조 선조들 모두 백인이며, 백인 지역에서 백인 친구들과 사귀었던 자신을 백인 아닌 딴 인종 특히 흑인이라고 하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직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여권 발급소에서는 핍스 여인을 흑인이라고 고집하며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핍스 여인은 잘못된 것이므로 정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여권 발급소는 자신들의 인종 표기가 맞기 때문에 정정해줄 수가 없다고 완강히 버티었다. 이에 화가 난 핍스 여인은 법원에 제소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백인의 신분을 돌려받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핍스 여인은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흑인이어야 할 이유를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그녀로서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스 여인은 법원제소에서 패배했다. 법원은 핍스 여인은 백인이 아닌 흑인이라는 놀라운 판결을 내리면서 그 이유로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법은 누구든지 32분의 1의 흑인 피가 섞인 사람을 흑인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32분의 1의 피가 섞인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 증증증증증증조 선조 중 1명이 흑인이었으면) 흑인으로 판명된다는 법이다. 핍스 여인은 220년 전 프랑스계 농장주인과 흑인여자 노예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의 후예로서 흑인 피가 섞였으므로 피부색깔이 하얗고, 친구, 부모가 백인이어도 흑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과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32분의 1의 피
핍스 여인 판결문은 다시 흑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겼다. 알렉스 헤일리가 쓴 책 《뿌리》는 흑 · 백 동양인 누구에게나 깊은 감명과 동정을 자아내면서 세계의 화제작으로 널리 읽혔다. 흑인의 뿌리와 족보를 캐내는 이 이야기가 특히 백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공 키타쿤타는 분명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리》의 주요 내용은 흑인의 뿌리를 찾는 내용이다. 아버지의 뿌리는 중요하지 않은가?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혼혈아로서 그는 백인의 자손 또는 흑인의 자손이 될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 불문율인 피 한 방울의 법칙에 따라 그는 흑인의 신분을 갖게 된 것이고 《뿌리》 책은 미국의 불문법을 그대로 인정하며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물론 꼭 그 이유 때문에 《뿌리》가 백인 아버지의 족보를 캐는 소설이었으면 과연 그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미국은 왜 「피 한 방울의 법칙」을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적용하는 것일까? 이것은 미국의 주류 그룹인 앵글로 색슨의 백인 우월주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영국에서의 흑인 개념은 더욱더 넓다. 아프리카 흑인 뿐만 아니라 아시아계인 스리랑카 · 파키스탄 · 인도인들도 흑인으로 신분이 확정되고 있다.
이같은 영국의 앵글로 색슨 문화에 영향을 받은 미국 백인들은 흑백간의 격리와 차이를 두기 위해 이처럼 철저한 분리의 근거를 주장해 왔다. 카리브해 연안 섬 나라들의 경우 흑인에 대한 정의가 미국과는 판이하다. 조상 또는 부모 중 누군가 흑인이었어도 피부색깔이 하야면 백인 행세를 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백인임을 인정해 준다. 인종차별 국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남아프리카 연방공화국도 흑백간의 결후에서 생긴 혼혈아들의 특수계층을 인정한다. 유독 미국만이 「피 한 방울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1931년 조지아 주 아틀랜타 시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이다. 한 행인이 과속으로 달리던 차에 치어 피를 흘리며 의식불명인 채 길가에 누워 있었다. 앰블런스가 긴급 출동하여 급히 병원으로 수송했다. 응급치료원들의 눈에 비친 의식불명의 행인은 분명 백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백인 전용 병원으로 쫓아냈다. 그 당시 미국 남부는 흑백 분리정책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흑인 전용과 백인 전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편 사건을 목격한 이웃 사람은 이 행인의 가족들에게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으며, 가족들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물론 흑인 전용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 병원에는 환자가 없었다. 나중에 백인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고는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의사는『깜둥이를 백인 병원에서 치료하고 있었단 말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흑인 병원으로 옮겼다.
며칠 후 그 흑인 환자는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미국 남부의 「피 한 방울의 원칙」은 잔인했고 흑인들을 쇠외시키며 차별하는 중요수단으로 사용했다. 흑인이 아닌 다른 민족의 경우 백인과의 결혼은 백인주류사회로의 「동화」를 의미한다. 한인 여성들도 백인들과 결혼하는 추세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아들은 백인같이 생겼으면 백인 행세를 할 수 있고 한국인같이 생겼으면 한국계 미국인의 신분을 가지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흑인들은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없다. 이것은 미국 주류사회는 흑인의 동화를 원치 않는다는 무서운 암시로 생각 할 수도 있다. 흑인들에게는 성장과 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피 한 방울의 원칙」을 이해하려면 미국 역사 특히 흑인역사에 대한 이해와 재조명이 필요하다.
노예해방
북군 승리에 공헌한 흑인
북군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특히 흑인 노예들이 남북전쟁 때 북군에 입대하여 전세가 불리했던 북군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1862년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선언하여 흑인들의 북군입대를 적극 장려했다. 링컨 대통령을 노예해방을 선언한 위대항 대통령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흑인들의 처지에 동정적이거나 인간미가 넘치는 선한 사람을 결코 아니었다. 링컨은 주하원과 연방하원으로 재직 중 노예제도를 없애는 안건이 상정될 때마다 반대표를 던졌던 노예제도 지지파였다. 그의 주하원, 연방하원 시절의 기록은 100% 노예제도 고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전세를 뒤엎고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자리도 마련했던 것이다.
링컨 대통령의 공화당을 흑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선거에서의 승리를 보장받고자 했으며, 북부의 산업 공장주들은 남부의 값싼 노동력과 시장 개방을 노려 남부의 대농장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꺼렸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세 가지의 조항을 미국 헌법(Constitution)에 첨가시켰다. 제 13조(1865)는 이 땅에서 노예제도는 영원히 없어진다고 명시하여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 14조(1868)는 흑인들에게 미국시민권을 부여했으며, 제 15조(1870)는 미국 시민이 된 흑인 노예 출신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제 흑인들도 미국 시민으로서 법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근거아 마련되었으며, 흑백 차별을 없애고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듯했다. 또한 1875년에는 미국 최초로 민권법이 제정되어 흑인들에게 백인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와 공공시설 공동사용 권리 등이 부여되어 흑인들의 민권이 크게 향상되는 듯했다.
이처럼 북군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 이후 미국 연방정부는 여러가지 법안들을 상정하고 통과시켜 제도적 차별을 없애버리려는 노력을 해왔으나 미국 남부의 백인들은 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흑인 차별 「전통」과 「관습」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연방정부는 1875년에 민권법을 통과시켰으나 1883년 미국 대법원은 이 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려 실효성을 거두지 못한채 폐기되고 말았고, 미국 남부의 여러 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주법 · 시법 등을 제정하여 흑인들의 권리를 대폭 제한했으며, 노예제도 당시와 별다름이 없는 정치적 · 경제적 속박을 위한 모든 조치를 철저하게 취하기 시작했다.
참정권의 제한
특히 흑인들의 참정권을 제한하기 위한 온갖 법안들이 제정되었다. 그 이유는 흑인들이 투표에 참여하면 그들의 정치적 힘이 커지고 차별대우를 받는 그들이 사회적 · 정치적 변혁을 요구할 것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이다. 투표권이 없다는 사실은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미국 민주주의는 투표권이 있고 투표를 하는 사람의 이익이 대변되는 사회인 만큼, 투표권이 없거나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미국식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랜드파더 (Grandfather Clause)은 할아버지가 투표권이 있었던 사람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못박았다. 흑인 중 할아버지가 투표권이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노예였기 때문에 투표권이란 그 당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권리였다. 미국 헌법으로는 시민권과 참정권이 보장되었으나 주법 또는 시법 조례로 흑인들의 투표권이 교묘히 박탈당한 것이다. 또한 폴(Poll Tax)법안은 2달러의 선거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가난한 빈농 출신의 흑인들은 대부분 2달러의 세금을 내면서 투표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러한 철저한 제도적 차별로 흑인들에게 주어진 참정권은 사실상 그 효력을 잃게 되었다. 가령 루이지애나 주에서는1896년 당시 13만 344명의 흑인 유권자가 등록되었으나, 1900년에는 겨우 5,320명만이 유권자로 등록되었다.흑인들은 또한 글을 쓸 줄 아는가에 대한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만 투표권이 주어지는 문맹 테스트(Literacy Test)라는 것도 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 시험은 단순히 글을 읽고 쓸 줄 아는가에 대한 험이 아니라 변호사들도 잘 모르는 미국 헌법의 해석을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시험이었다. 노예시절 글 배우는 것이 금지되었던 노예 출신의 흑인들 중 이 험에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특히 루이지애나 주에서는 미국 헌법을 읽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해독할 수 없으면 투표권을 박탈했다. 이처럼 남부의 여러 주에서는 반흑인 법안들을 통과시켜 흑인들의 투표 참여를 적극 막았으며, 실제적으로흑인들이 어떤 제약이나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 않고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투표 참정권이 통과된 1965년도 이후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1965년의 투표 참정권은 흑인들의 주도로 투쟁한 민권운동의 결실이기도 했다.
해방된 흑인 노예들은 여러가지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의 통치권은 미국 연방정부로 넘어갔고 헌법 13조, 14조, 15조를 통과시켜 흑인들에 대한 법적 보호 조치를 내릴 수 있었으나, 연방정부는 흑인들에게 경제적 자립을 도와주는 토재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흑인들은 노예시절과 다름없는 악조건 속에 다시 백인 경영 농장의 품삯을 파는 노동자로 변신하여 돌아갔다. 연방정부가 법으로 규정한 노동자 보호법은 농장주들에 의해 무시된 채 노동착취가 미국 남부 전역에서 성행되었다.
이러한 방법들이 실패할 경우 남부의 주의회는 선거구 재조정을 단행하여 흑인표를 분산시킴으로써 흑인들의 정치적 힘을 약화시켰는데, 가령 버지니아 주에서는 17년 동안 필요할 때마다 5번이나 선거구를 재조정했다. 앨라배마 주에서도 역시 18만 1,471명의 흑인 남자 유권자 중 1900년에는 겨우 3,000명만이 유권자 등록에 남아 있었다.
북군이 남부에서 철수한 후 민주당이 다시 득세하여 백인 우월주의 정책을 재수립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 특히 백인 중하층과 하층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흑인 노동자 또는 농민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연합전선 구축은 점점 더 요원해졌다.
노예에서 노동자로
자유인의 몸이 된 흑인들에게 노예해방의 즐거움은 잠시였다. 많은 흑인들은 오히려 끼니 걱정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하루살이 인생으로 전락하여 노예시절보다 더 형편없는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400만명이 한꺼번에 노예에서 해방되어 직업을 찾기 시작했으니 그 경제적 영향과 손실은 대단한 것이었다. 노예시절에는 최소한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노예를 부려먹기 위해서 노예 주인들은 동물을 사육하는 것처럼 잘 먹여야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노예해방은 이러한 관계 즉 가부장주의 (Paternalism)의 관계를 청산시켰으며, 흑인들은 더 이상 백인 농장 주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흑인 노예제들에게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흑인 노동자들은 남자는 9달러에서 15달러 사이, 여자는 5달러에서 10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또한 음식 · 집 그리고 땔감 등의 기본적인 생필품도 무료로 제공받았다. 그러나 노예시절 흑인들은 기본 생필품 이외에 목화 · 옥수수 등을 무료로 제공받았으므로 비록 자유인의 몸이 되었으나 오히려 생활환경은 더 나빠진 경우가 많았고 피고용인과 고용주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폭력사태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노예해방 이후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들이 생산적인 노동자가'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노예 근성이 붙은 흑인들이 돈 받고 일하는 자유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며 흑인들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들은 열심히 일했고 생산력도 노예시절과 다름이 없어 1870경부터는 다시 많은 이윤을 남기는 대규모 농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1875년경에는 흑인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남부의 농장들이 이윤을 남기며 운영될 수 있다는 자심감을 갖게 되었다. 백인들은 흑인 노동력 착취로 많은 이윤을 남기며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재개했으며, 흑인들은 여전히 가난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남부의 경제부활에 흑인들의 노동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백인 농장주의 관점에서 보면 노예제도 시절보다 오히려 자유인이 된 흑인 노동자들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며, 오히려 이윤도 높아진 전화위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노예해방과 동시에 흑인들은 자유인이 된다는 기쁨과 경제적 향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연방정부가 적극 노력하여 그 동안 황폐화되었던 땅과 몰수한 땅들을 흑인들에게 재분배해 줄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었고 실제로 그러한 법이 1866년 제정되어 가장에게 40에이커를 분배해 주었다. 1874년 조지아 주에서만 흑인들의 토지 소유는 35만 에이커에 달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이미 거센 산업혁명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대농장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을 때 북부와 서부에서는 급속한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이로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거센 물결에 휩쓸려 흑인들의 도시이주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도시에서 기능공으로 일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던 백인 노동자들에게 흑인들의 이주는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경쟁자로 비쳐졌다. 특히 대장장이 · 목수 · 미장이 등의 기술직 백인들은 흑인들의 취업 문호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백인들만의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199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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