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다
임수랑
*
덮개가 열린 피아노의 하얀 건반이 어둠 속에서 보인다. 자려고 누운 여자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뿐이다. “아이브 신 잇 올 I、ve seen it all 아이 헤브 신 더 트리 I、ve seen the tree 아이 헤브 I、ve…….” 여자의 입가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둠 속의 댄서」 셀마의 노래다. 여자의 머릿속으로 ‘셀마’역을 열연한 가수 뷔욕의 모습이 순간 스쳐간다. 뷔욕은 언젠가 중국 공연에서 “티벳! 티벳!”을 부르짖었다. 여자는 피아노 위의 고장 난 오디오와 며칠 전부터 이 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걸 깨닫는다.
노래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결단을 내릴 날짜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재깍재깍.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소리가 심장을 갉아먹는 이빨소리만 같다. 여자는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막고 고개를 흔들다가 이불을 덮어쓴다. 쓰지 않은 하얀 오선지 한 장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반복하며 여자의 머릿속을 유영한다. 여자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
여자는 꿈을 자주 꾸었다. 현실인가 싶어 다리를 버둥거리다 눈을 떠보면 잠을 자다 깬 것이었다. 여자는 꿈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중세의 계단을 올라가기도 하고, 치파오 차림으로 돼지우리 바닥에서 서성거리다가 미끄러지기도 했다.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안갯속에 사라지기도 하고, 돼지우리에서 절뚝거리며 뛰쳐나와 뒷마당에서 수탉의 모이를 주기도 했다. 모이를 주다가 수탉이 할퀴어 여자의 손등에 상처가 나기도 했다.
안갯속에서 여자의 몸이 불쑥 나타나 하늘 위를 날기 시작했다. 여자는 계단이 있는 백양나무숲을 벗어나 마을로 날아갔다. 사람들은 하늘 위를 나는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교회당 건물의 뾰족탑을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마을에서 제일 큰 붉은 지붕 집을 지나고 가을걷이가 한창인 논과 밭 위를 날아갔다. 여자는 반대편에 있는 산 너머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방금 새가 한 마리 지나간 거라고 놀란 가슴을 쓰다듬고 논밭에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
여자는 무조건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해가 바르게 떴다. 날이 내내 축축하고, 흐렸다. 밖은 햇빛이 찬란했다. 여자는 눈이 부셨다. 여자는 하늘이 흐릴 때 날아가는 새와 검은 전선들이 더 잘 보였다. 오히려 햇빛이 여자의 눈앞을 가렸다. 여자는 두 눈을 찡그리며 앞의 사물들을 자세히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선명하지 않았다. 여자는 사방에서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에 오히려 사물의 진면목이 가려지는 것 같았다.
여자는 그늘이 그리웠다. 여자는 햇빛 아래에선 자신의 눈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밤에 주로 나다녔다. 여자는 눈썹을 자른 적이 있었다. 여자의 속눈썹은 유난히 길었다. 눈 밑에 그늘이 길게 질 정도였다. 눈동자는 짙은 검은 색이었다. 고혹적인,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검은 광석이라도 되는 듯했다. 눈의 크기가 큰 편인데도 불구하고 검은 눈자위가 여자의 눈 안에 가득 차는 것이 신기했다. 여자가 눈을 껌벅거릴 때마다 속눈썹 사이로 어떤 물체의 움직임이 엿보였다.
*
굴다리 밑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석상 박성이 구해주었다. 여자는 가끔 숨을 쉬지 않았다. 100미터 달리기 직전의 긴장 같은 거였다. 여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심장병으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여자를 자주 엄습했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
집에서 <로마>까지 걸어가려면 연희동 굴다리를 지나야 했다. 박성은 굴다리 아래에서 집 없이 돌아다니는 노숙인 무리나 버려진 동물들과 마주치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박성은 신호등이 많은 대로를 돌아서가는 불편을 감수할지라도 자동차를 가지고 다녔다. 한 번은 실제로 굴다리 아래서 얼어 죽은 남자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남자의 가족은 찾을 길이 없었다. 남자의 신장은 한쪽밖에 없었다. 수술한 부위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의 주검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박성은 문득 프로메테우스가 떠올랐다. 시체를 그대로 놔뒀으면 남자의 나머지 장기를 굴다리 밑의 들쥐들이 무지막지하게 파먹었을지도 모른다. 불법 장기매매와 관련된 것이라고 짐작만 할뿐 미궁에 빠진 사건이었다. 박성은 간밤에 꿈이 안 좋았다. 박성은 꿈의 예시를 믿는 편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운전대를 잡기가 꺼려졌다. 그리고 여자를 만났다. 그가 간밤에 나쁜 꿈을 꾸지 않았고, 평상시처럼 자동차로 출근 했더라면 여자를 만나는 일이 평생 없었을까.
*
연희동 굴다리 밑까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여자는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여자는 자정이 지났을 때쯤 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목림회관 앞에 내린 여자는 발길 닿는 대로 한참을 걸었다. 어디선가 길가에 쌓여있던 젖은 낙엽이나 쓰레기더미를 태우는지 매캐한 냄새가 새벽공기 속에 풍겨왔다. 여자는 갑자기 눈앞이 몽롱해지며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큼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바닥의 찬기를 정통으로 느끼는 순간 온몸에 오한이 났다. 악몽이라도 꾸다가 잠을 깼는지 여자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여자의 동공으로 낯선 남자의 둥근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
남자는 얼굴을 바짝 여자에게 맞대고 병든 동물의 상태를 살피는 수의사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정확히 둥글었다. 적당히 살이 붙은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중키보다 조금 작은 키에 통통한 느낌을 주지만 비만하다고 할 수 없었다. 마른 몸매는 더욱 아니었다. 다부진 몸매라고 하는 게 더 맞았다. 거기다가 박성은 금테안경을 썼다. 여자는 일어나려고 했다. 오른쪽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여자는 다시 주저앉았다. 119 구급대의 사이렌이 울렸다.
*
박성은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119에 연락했다. 그 전에 콩팥이 하나 떼어져 시체로 발견된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집은 연희동 굴다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경기도 신도시에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119대원에게도, 응급실 의사에게도 여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박성은 여자가 “기억”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응급처치가 끝나고, 거식증이라도 걸렸는지 몸이 해골처럼 마른 여의사가 응급실의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여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여의사는 여자의 증상에 대해서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 외엔 별다른 결론을 못 내렸다. 동굴처럼 찍힌 머릿속의 엑스레이 사진이 모니터에 떴다. 여의사는 군데군데 하얗게 뭉친 부분을 가리키면서 물혹일 수 있다며 그 부분에 대한 정밀검사를 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응급실 문을 나오며 여자는 박성에게 계좌번호를 달라고 했다. 코트 호주머니에 있는 잔돈푼 외엔 새벽에 집에서 아무것도 가져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링거액을 포함한 병원 치료비를 박성에게 갚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박성은 여자가 찾아올까 긴가민가하면서 명함 한 장을 여자에게 건넸다.
*
여자는 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 <로마> 안을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여자가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깔린 붉고 푹신한 카펫에 쏙쏙 발자국이 났다. 여자는 갈매빛 부츠를 신었다. 부츠의 모양은 두께가 과장스럽게 두툼하고 큰데다가 소재는 플라스틱 느낌이 났다. 하지만 군화를 신은 듯 무거워 보이는 여느 가죽부츠나 털 달린 어그부츠처럼 땀이 찰 것 같지 않았다. 신소재라도 사용한 것처럼 가벼워보였다. 여자는 연희동 굴다리 밑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날 여자는 추워 보였다. 거기다 여자는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런 자세로 더 있다간 동사를 걱정할 게 아니라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다.
여자는 어젯밤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다. 팔 것이 있어서 <로마>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여자가 병원을 나오며 전화하겠다고 했을 때 박성은 반신반의했다. 여자가 팔 것이 있어 <로마>에 찾아오겠다는 말은 핑계인지도 몰랐다. 일이 있은 후,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전화를 하더라도 여자가 몸을 추스르고 나서야 연락을 할 줄 알았다. 해골처럼 마른 여의사는 열흘 뒤로 검진날짜를 예약해줬다.
여자의 전화를 받고 박성은 뭔지 모를 기대로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갑자기 미니스커트를 입고 로티로리 머리띠를 한 채 놀이동산을 뛰어다니던 R의 발랄한 다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자에게서 그 정도의 가벼움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박성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클럽에서 만나 두 달간 심심하지 않게 만나던 R이 미성년자인 줄은 R의 엄마가 <로마>로 찾아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합의금 조로 받은 돈으로 R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호주로 떠났다.
여자는 십여 분간 말없이 앉아있었다. 여자가 가방을 언제나 열까, 박성은 여자의 불룩한 가방을 눈여겨봤다. 분홍색과 갈색이 섞인 체크무늬 가방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금방 가방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유리주전자에 남은 허브차를 잔에 마저 따라 마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침묵이 상당히 고통스런 일로 다가온다. 보석상 박성이 그랬다.
보석상 박성은 남자치고는 말이 많은 편에 속했다. 창으로 치자면 추임새 같은 존재였다. 어찌 보면 자상해보이는 성격이지만 아주 자잘한 것에도 다 참견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남들의 관심을 받아야만 존재가치를 느끼는 이들이나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들에게 한이 맺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일이 끝나면 박성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것도 자신의 본성인 양 세련된 언변을 과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이 필드든 클럽이든, 와인바든, 실내 포장마차든 상관없었다.
굵은 나무 탁자 위에는 빈 유리주전자와 빈 잔만 남았다. 잔에 남아있던 온기마저 이제 다 사라졌다. 여자는 눈을 자주 깜박거렸다. 그럴 때마다 여자의 검은 눈동자 안에 있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반짝거리는 것과는 좀 다른 차원이었다. 박성은 검은 아메바가 떠올랐다. 여자의 과거라곤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눈이었다. 박성은 분홍색과 갈색이 섞인 여자의 불룩한 체크무늬 가방을 다시 한번 주시했다. 도대체 그 안에 무슨 보석이 들어있을까. 그것을 보고나서야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것 같았다.
박성은 여자가 얼른 핸드백 속에서 무슨 보석이든 꺼내주길 기다렸다. 그래서 얼른 여자와의 거래가 끝나기를. 그래서 여자와 마주한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을 어서 모면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곧 여자의 눈 속에서 검은 아메바라도 흘러나와 온통 끈적거리며 달라붙어 자신의 목을 옥죌 것 같았다. 그때 여자가 눈을 또 한번 깜박거렸다. 알고 보니 눈동자 안에서 움직이는 검은 물체는 속눈썹이 만든 그늘이었다.
*
차를 다 마신 여자는 진열대 앞으로 다시 갔다. 누런 거북이 때문에 진열대 속이 환했다. 흰색 천 위의 보석들 사이를 누런 거북이가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는 듯했다. 동화책에서 토끼와 경주를 하던 근면과 성실의 상징인 거북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것보다는 천 년을 산다는 장생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그런데 여자는 갑자기 못 볼 거라도 본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박성은 여자가 진열대에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사백이십구만 원짜리 루비 브로치를 보고 있는 줄 알고 입을 열었다.
“루비는 유색 보석 중에서 가장 고가로 판매되는 보석 중에 하나죠.”
박성이 말하는 동안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가 말하는 모습을 주시했다. 박성은 순간 눈이 부셨다. 여자의 눈에서 광채가 나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박성은 여자의 눈을 마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눈을 15도 쯤 내리깔고 여자에게 말했다.
“어른들에게 여쭤보면 사파이어보다 루비가 더 좋다고 할 걸요. 이거 보세요. 백 개의 쓰부다이아로 루비 알을 감싸 올린 디자인이 특이하지 않나요? 타오르는 불꽃같죠?”
“이건 불꽃이라기보다 선명한 핏빛 같군요.”
여자는 별 감흥 없이 말했다.
“아, 잘 보셨어요. 아닌 게 아니라 루비는 비둘기 핏빛을 최고로 칩니다. 루비스톤의 질에 따라서 루비의 가격 차이가 심한 편인데 이건 그 중 상품에 속하죠.”
박성은 여자가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루비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엊그제 새벽 연희동 굴다리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여자 생각은 잠시 잊었다. 여자가 오기 전에 쉬운 여자일 거라는 자극적인 기대를 한 것도 진작 떨쳐버렸다. 박성은 심각한 건 금세, 금세 잊어버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일 년 사이로 먼저 죽은 아버지를 따라 작년에 어머니가 자살했을 때도 그랬다. 지금 보석상 박성에겐 루비 브로치 앞에서 여자가 품은 욕망의 온도계를 잘 감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자자리 태생의 사람이 루비를 몸에 착용하면 나쁜 기를 누르고,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알려져 왔죠. 그래서 옛날부터 많은 임금이 호신부로 몸에 착용했어요. 중요한 것은 루비가 최고의 힘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왼손가락에 반지를 착용해야 하지요. 브로치라면 물론 신체의 좌측에 착용해야겠죠?”
“왼쪽에 있는 심장과 일맥상통한다는 말인가요?”
여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박성은 여자의 말을 들었다.
“말하자면 그렇죠.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심장이니까요.”
“제일 따뜻한 곳이기도 하죠. 빨간 하트모양이잖아요.”
“거기다가 인류에게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 뭡니까? 불과 태양 아닙니까? 이 루비의 빛은 불과 태양을 닮았잖아요? 그리고 이건 품질에 비해서 가격이 아주 좋게 나온 거예요. 쓰부다이아까지 치자면 이 브로치엔 백한 개의 알이 들어가 있는 셈이죠.”
박성은 여자에게 얘기하면서도 그 전에 굴다리 밑에서 시체로 발견된 남자가 생각났다. 장기를 떼어내고 수술한 부위가 채 아물지 않은 채, 발견된 남자는 그에게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시켰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는 걸 반대했고, 명령을 어긴 프로메테우스에게 지독한 벌을 내렸다. 불을 사용하여 인간은 무기와 도구를 만들게 되었고 무기를 이용하여 다른 동물을 정복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토지를 경작해 물질을 얻게 됐다. 실제로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더 월등한 존재가 되었지만 무기는 더 많이 만들어지고, 전쟁과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불은 인간의 탐욕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존재인 게 분명했다. 박성은 말해놓고 나서 스스로 멋쩍어졌다. 하지만 인간에게 불을 빼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더더군다나 지금 말이다. 박성은 누구든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백한 개라는 숫자가…….”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백한 개의 숫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좌우로 두 번 흔들었다. 브로치에 박힌 보석이 백한 개가 아니면 진짜 그것을 살려고 했던 사람처럼. 박성은 여자의 강박적인 태도는 위선에 불과할 것이라고, 원래부터 여자는 루비 브로치 따위를 살 생각이 없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여자의 머릿속으로 101마리 달마시안의 크루엘라가 스쳐 지나가기라도 한 걸까?
영화에서 크루엘라는 모피회사의 사장이면서 동물원의 호랑이도 잡아서 가죽 코트를 해 입을 정도로 가죽옷에 빠져있는 인물로 나왔다. 크루엘라는 온갖 소동을 벌이고 나서도 결국은 101마리의 달마시안 가죽으로 코트를 해 입으려던 그녀의 욕망을 건질 수 없었다. 누구든지 그녀를 아주 거북살스럽게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 그리 비극적이지 않았다. 크루엘라의 우스꽝스러운 머리하며 과장스럽게 표현된 행동거지며 박성의 눈으로 보기엔 차라리 희극적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영화로 희극적으로 환기시켜 놓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지금 세상에선 좀 더 탐욕적이어야 한다. 그래도 티가 날까말까 하다. 박성은 그것이 자신을 이때껏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벌써 낙오자로, 세상의 중심이 아닌, 세상의 맨 끄트머리로 밀려났을 거라고 믿었다.
박성은 아버지의 등쌀에 S대 법대에 들어갔지만 공부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박성은 아버지가 하던 보석상점을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대로 물려받았다. 어쨌든 아버지 덕분에 법조인 친구들을 주변에 두게 되고 자신은 <로마>의 오너가 되었다. R의 일이 잘 해결된 것도, 모녀 꽃뱀으로 집어넣는다고 겁을 줘서 합의를 유도한 검사 친구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치마폭 아래에서 과잉으로 행해진 박성의 나태한 생활태도와 낭비벽은 아버지를 자주 열받게 했다. 고혈압과 심장질환을 앓던 아버지는 박성이 라스베가스에서 긁고 온 카드값 때문에 화를 내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박성은 죄책감 같은 감정에 잠깐 빠지기도 했지만 급하게 팽창된 아버지의 혈관이 한 몫 한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원성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자신은 단지 고질병을 앓던 아버지의 병세에 잠깐 리듬을 탔던 것뿐이라며 금방 잊어버렸다. 여자가 루비 브로치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박성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왜죠?”
박성은 여자의 진심을 좀 더 알고 싶었다.
“너무 많아요.”
박성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들어 간다고 여겼다.
“백한 개의 숫자와 연관된 영화를 보신 적 있으세요?”
“백한…… 번째의 프러포즈던가, 그런 영화를 본 적은 있어요.”
여자가 기억하는 영화는 「백한 번째의 프러포즈」였다. 박성은 「백한 번째의 프러포즈」를 본 적이 있던가,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여자는 어느새 옆 칸의 진열대로 옮겨 갔다. 박성은 여자의 눈이 루비 브로치 옆에 있는 사파이어 반지에 가 있는 걸 보았다. 여자는 20대 후반쯤 되었다. 사파이어는 젊은 여자들이 더 선호하는 편이긴 했다. 박성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파이어는 9월의 탄생석이기도 하죠.”
여자는 박성의 말에 자신이 태어난 달이 3월인 걸 생각해냈다. 3월의 탄생석이 무엇인지 언젠가 잡지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긴 했다. 그땐 알았었는데 지금은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는 그 모든 걸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1월의 석류석이니 2월의 자수정이니 흥미도 없고 갖지도 못할 보석에 대해 이름 같은 것을 줄줄 꿰고 싶지 않았다. 지금 실감나지 않는 기억들은 동굴처럼 생긴 뇌 속에 가둬놓는 게 차라리 나았다. 여자는 흐린 날이 더 좋았다. 환한 시간의 세상은 시끄럽고 욕망이 가득했다. 박성은 여자의 생각과 상관없이 계속 보석과 얽혀있는 에피소드를 나열했다.
“9월의 탄생석 사파이어는 자애와 성실, 그리고 덕망을 상징하는 보석입니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비에게 약혼반지로 주었던 것도 9캐럿짜리 사파이어였죠. 영원히 우리의 사랑이 푸르길 바랐던 거 아니었을까요? 나중에 보니까, 그것도 아니었지만.”
박성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여자는 박성을 보지 않고 계속 진열대 속만 바라봤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사파이어가 눈병을 치유해준다고 믿었죠. 특히 눈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는 물에 담갔다가 눈에 대주면 좋다고 믿었어요. 다른 사람의 악의에 찬 눈길을 막아준다는 말도 전해 내려오죠.”
“사파이어가 악의에 찬 눈길을 막아준다……그런데 저는 루비와 사파이어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여자는 박성에게 말했다. 루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파이어도 원하지 않다니. 박성은 김이 빠졌다. 이때까지 앵무새처럼 줄줄 늘어놓은 얘기들은 뭐가 될까. 그래도 여자와의 거래를 성사시키려면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긴장해야 했다. 박성은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여자는 루비나 사파이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보석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주말에 대학 동문들과 필드 약속이 잡혔다. 하룻밤만 지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그 생각을 하자 박성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루비와 사파이어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가 없죠. 지금 당신은 그것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 슬쩍 지나가듯 보지 않는 척 하면서도 속눈썹으로 가린 여자의 눈동자는 욕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박성이 보기에는 그랬다. 눈 속 깊숙이 숨겨 논 욕망을 여자에게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맞아요. 저는 지금 루비와 사파이어를 보고 있어요.”
여자는 박성의 말에 동의한다면서 가방을 가슴에 안고 팔짱을 찐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릴 때, 여자의 웨이브 진 긴 머리칼이 함께 출렁거렸다.
“그런데, 왜…….”
“루비와 사파이어가 단지 저의 눈에 지금 보이기 때문에 봤을 뿐이죠. 당신이 앞에 보이는 것처럼요. 당신도 나를 보고 있죠. 거리에 나가면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가 보이고 고가도로 위의 달리는 차가 보이죠. 땅을 보는 것처럼요. 루비와 사파이어가 이 자리에 있으니까 보는 거죠. 이 자리에 없는 것은 못 보잖아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죠.”
박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연이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말하자면……눈으로 보이는 게 문제죠. 대부분의 욕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아름다움과 추함 뭐든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이면 볼 수밖에요. 어떤 악당 행동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알 수 없잖아요. 짐작만 할 뿐이지요.”
여자는 팔 것이 있어서 박성의 상점을 찾아왔고, 박성은 지금 루비와 사파이어를 여자에게 팔아야 했다. 하지만 여자는 루비와 사파이어를 살 생각은 없고 악당 얘기나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말 앞에서 솔직히 찔리는 구석이 있는 박성은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숨이 막혀 오는 듯했다.
“참. 어제 저에게 뭘 팔러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박성이 묻자 그제야 여자가 진열대에 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 박성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박성은 여자의 눈길을 피했다. 박성은 뭔가 강하고 이상한 기가 여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로마> 안을 맴돌고 있는 듯했다. 박성은 왠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제 그만 소파에 앉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아직 고를 것이 있는 것처럼 진열대 앞을 계속 서성거렸다. 여자는 이제 뜸을 그만 들이고 어떤 보석이든 하나 고르려는 것인가. <로마>를 찾아온 사람이다. 박성은 품격 있는 <로마>의 주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박성이 여자에게 계속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성은 약간 의심스러웠지만 바지춤을 치켜 올리고 양손을 비비며 여자를 한번 더 거들어주기로 했다. 여자 옆으로 다가가며 한번 더 힘을 내자고 혼자 다짐했다. 피부색이 검은 편인 여자에겐 화이트골드보다 옐로우골드가 더 잘 어울릴 것이다.
*
여자는 붉은 카펫을 밟고 접대용 소파로 가서 보석상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가까이서 보는 박성의 얼굴이 확실히 둥글다고 생각했다. 그날 새벽에 연희동 굴다리에서 봤던 얼굴과 똑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자가 별안간 말했다.
“제 눈을 팔게요.”
박성은 굵지만 투박하지 않은 검지와 가운뎃손가락으로 기름진 이마에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허리를 바로 폈다. 어젯밤 여자는 무언가 팔 것이 있어 보석상점에 오겠다고 했다. 여자가 보석상점에서 팔려고 하는 것은 삼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결혼반지도 아니고 순금 목걸이도 아니고 쓰부다이아가 박힌 액세서리 십팔금 귀걸이도 아닌 눈이었다. 두 눈. 여자는 눈을 팔러왔다. 박성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곰곰이 다시 되새겼다.
박성은 심호흡을 한번 했다. <로마> 안의 어디엔가 저주의 눈빛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불길했다. 자신을 향한 죽은 어머니의 원망스런 눈빛 같기도 했다. 진열대 안에 전시 된 사파이어도 이 눈빛을 막아주지 못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일 뿐. 그것은 사파이어를 파는 상인이 지어낸 음모였는지 몰랐다. 진실처럼 믿고 싶은 것을 적당한 진실로 바꿔 전달하고 전달받았을지도.
박성은 여자를 아침부터 기다렸지만, 여자는 늦은 오후에 왔다. 밖은 어스름이 이미 다 내려앉았다. 해가 짧은 시기였다. 곧 깜깜해질 것이었다. 조명이 진열대 안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진열대를 벗어난, 할로겐 불빛 사이의 구석은 정확히 어두웠다. 박성은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눈을 팔게요.”
여자는 다시 한번 말했다. 박성은 여자가 재차 말하자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피할 수 없었다.
“권위 있는 곳에서 발행된 감정서가 있으십니까? 그게 없으면 절대 살 수가 없습니다.”
박성은 눈의 감정서를 요구했다. 여자는 감정서가 종이로 되어 있는 거냐고 물었다.
“그럼, 호랑이 가죽이라도 되는 줄 아셨습니까?”
박성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겠다는 식으로 접대용 소파자리에서 일어나 원래 있던 진열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슨 감정서가 필요한가요? 내 눈인데. 내 꺼, 내가 파는데 무슨 감정서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직접 확인하시면 되죠. 자, 보세요.”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렇다고 더 많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여자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 눈이 저절로 떠진 것처럼 여자는 보석상을 따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여자는 보석상 박성에게 바짝 얼굴을 갖다 댔다. 박성은 더웠다. 보석상점 사방 벽에 디스플레이 된 보석에서 열이 발산되는 것 같았다. 여자의 몸도 한낮 내내 뙤약볕 속에 방치된 돌멩이처럼 뜨거워졌다. 낡아서 물이 새고 온도조절이 되지 않는 스팀에서 수증기라도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여자는 발산되는 열을 피하기 위해 유리진열대에 얼굴을 박았다.
화이트골드에 푸른 사파이어가 심플하게 세팅된 반지가 여자의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박성은 여자가 어떻게든 눈을 팔려고 하소연이라도 시작할 참인 줄 알고 팔짱을 끼며 더 고집스러운 태도를 연출했다. 상대방이 넘어오려 할 때, 오히려 잡으려고 하면 상대방이 넘어오려다 그냥 말 수도 있다. 고객이 거의 넘어오려 할 때 뒤로 슬쩍 빠지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래야 고객이 완전히 넘어올 확률이 크다. 어머니의 치마폭을 벗어나면서 혼자 터득한 장사의 방식 같은 거였다.
“안될 일이지요. 보증서가 없으면 여기선 취급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이아몬드도 감정서가 필요한데, 그것도 공신력이 있는 곳에서 발행된 것이라야 됩니다. 그런데 눈에 무슨 감정서라니요. 현실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닙니까?”
“심지어 다이아몬드라니요? 분명 당신은 지금 제 눈이 저 다이아몬드보다도 못하다는 뜻으로 말한 건가요?”
여자는 이제껏 취하던 정적인 태도와는 달리 다소 흥분된 상태였다. 다이아몬드 얘기는 괜히 한 건가.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꼴이 됐다. 박성은 진땀이 났다. 하지만 아직은 설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제 박성이 뒤로 물러나 여자의 말을 찬찬히 따지는 동안에도 여자는 흥분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말이 그렇게 되나요? 잘 들어보세요. 그건 아니지만, 다이아몬드는 물론이고 사파이어, 루비 모두 감정서가 필요하다니까요. 컷, 칼라, 투명도의 상태 전부 중요하지만, 천연 다이아몬드의 대부분은 육안으론 식별이 어려운 자연 상태의 내포물이 존재하거든요. 다이아몬드는 무색에 가까울수록 값어치가 더 나가요. 다이아몬드는 내포물이 적을수록 빛의 흐름이 방해되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색상이 거의 없어 보여도 많은 다이아몬드가 옐로우, 또는 갈색을 띠고 있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죠. 말하자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 거예요. 더군다나 눈을 겉으로만 보고 살 수는 없는 것이죠. 그 눈의 프로필이 따로 필요해요. 눈의 출신성분은 무엇이고, 그동안 그 눈으로 보고 담은 것은 무엇인지. 눈에 담은 내용의 질도 중요하지만 양도 중요하죠. 그 눈이 오르가슴을 느낀 횟수는, 그 눈이 흘렸던 눈물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 말이에요. 힌트를 말하자면 요즘 같은 시대엔 눈물의 양이 적을수록 더 값어치가 나가긴 하죠. 이렇게 눈을 감정하는데 그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어떤 눈인 줄 모르고 살 순 없죠. 사고, 판다는 거,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심지어 농산물도 인증서를 첨부하지 않습니까?”
박성은 감정서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박성이 말하는 동안 여자는 꽉 쥐어짠 듯이 땀이 배어 나오는 그의 이마를 주시했다.
“제 눈에 대한 감정서 같은 건 없습니다.”
여자는 풀이 죽어서 말했다.
“그럼 여기선 눈을 팔 수 없습니다. 다른 거 없어요? 금목걸이나, 금팔찌……요즘 환율이 치솟아 금값이 장난 아니잖아요? 가격을 많이 쳐 줄 수 있는데…….”
박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며 말했다.
“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죠.”
“진짜 아무것도?”
“고장 난 오디오와…… 건반이 닳아서 가운데 ‘솔’음이 나지 않는 피아노가 하나 있을 뿐이죠. 팔아봤자 헐값이겠…….”
여자의 표정은 애절했다. 박성은 어떻게 할지 몰라 안절부절하다가 여자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감정서 없이는 팔 수 없습니다. 액세서리 십팔금 귀걸이라도 없어요? 아니면 거기, 손에 낀 반지…….”
여자의 까무잡잡한 피부에 잘 어울릴 것 같던 옐로우골드다. 하지만 박성의 눈에는 너무 가늘게 보였다.
“아, 실반지군요. 얼마 되진 않겠지만…….”
“실, 실, 실반지라고 하셨나요? 이게 실반지로 보이세요? 이, 이건 안 돼요.”
여자는 왼손을 앞으로 꺼내 가리키며 울부짖듯이 말하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성은 여자가 왼쪽 손가락에 낀 실반지가 여자에게는 아주 소중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가 어디로 갔을지 헤아리며 붉은 소파에 한참 그대로 앉아있었다.
*
여자는 어두운 밤거리를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거리의 어느 작은 가게에서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이 이미 옛노래가 되어 흘러나오는데, 아픈 이별을 뒤로하고 반복되는 노랫말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런 서울이 그리운 시대였다. 지금은 어딜 가나 무시무시한 공룡처럼 여기저기 커다란 건물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여자는 집이 있는 신도시를 향해 북쪽으로 걷다가 연희동 굴다리 앞까지 왔다. 여자는 약간 망설이다가 굴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빛을 더 이상 보기 싫었다. 이미 고통을 제대로 안다는 말과 같았다. 여자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더 이상 노래를 만들 수 없었다. 여자에게 보이는 현실은 <로마>에 있는 보석들처럼 윤택하게 반짝이는 것이 아니었다. 손도 갖다 댈 수 없이 뜨거워 쇳물이 끓고 있는 용광로 같았다. 젊은 인부가 용광로에 떨어져 불길 속에 목숨을 잃는 참변도 끔찍했고, 자본과 경찰의 침탈에 항거하며 분신한 비정규직인 하청 노동자의 소식도 들려왔다. 언제부턴가 개나 소나 경제를 입에 달고 사는 탐욕의 시대였다. 유해환경 속에서 작업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강이니, 공장이니, 건설현장 곳곳에서 안전사고로 재해를 입거나 죽어나갔다. 목숨을 내걸고 일터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이런 세상 속에서 여자의 불화는 여전했고, 아름다운 하모니는 더 이상 엮어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진작부터 했다. 여자가 꿈꾸는 세상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 사이에 있는 흐린 하늘 같은 거였다. 아니면 흐린 하늘을 넘어서서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몰랐다. 여자는 병원 응급실에서 몸이 해골처럼 마른 여의사가 보여준 컴퓨터 모니터가 떠올랐다. 머릿속이 동굴처럼 찍힌 엑스레이 사진에는 군데군데 하얗게 뭉친 부분이 있었는데, 이렇게 답답한 세상의 모습과 일면 다르지 않았다. 세상이 정말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 고장 난 것들은 일단 시끄러웠다. 거기서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렇게 어긋나버린 세상을 담은 여자의 비틀어진 노래는 당연히 팔리지 않았다. 똬리를 틀고 낮은 곳에서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는 뱀처럼 여자는 엑스레이에 찍힌 동굴 속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밀어 넣었다. 이젠 더 이상 동굴 속은 여유가 없었고, 그것만으로도 여자가 눈을 팔 이유는 충분했다.
*
일주일째 흐린 날이 이어졌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박성은 자동차 키를 아내에게 맡기고 집을 나섰다. 한 손에 지팡이 삼아 자동우산을 들고 박성은 걸어서 <로마>에 도착했다. 검은 코트를 걸친 박성의 어깨에 진눈깨비가 허옇게 쌓였다. 박성은 어깨를 손으로 툭툭 털어낸 후 상점의 셔터를 올리고 비밀번호를 눌러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다리 한 짝이 갈매빛 부츠를 신은 채 커다란 모딜리아니 그림 액자 위로 떠다녔다. 희미한 조명등이 비치는 천장 위에는 팔 한 짝이 매달려 있었다. 왼쪽 팔이었다. 두께가 일 밀리미터인 옐로우골드 링이 손가락에 끼어있었다. 여자였다. 여자의 팔이 분명했다. 박성은 여자의 오른 팔을 찾아 <로마>의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렸다.
젖꼭지가 유난히 붉은 가슴 한쪽이 먼지 자국이 뿌연 꽃무늬유리창에 붙어있었다. 박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박성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붉은 융단 카펫이 물결처럼 움직였다. 여자의 오른팔은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다리 한쪽은 어디 있을까. 그때 진열장 안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박성은 벌떡 일어서서 붉은 물결 사이를 휘청휘청 걸어갔다. 겨우 진열장 앞으로 다가갔다. 여자가 팔겠다던 눈이었다. 금돼지와 금거북이 있던 자리에 여자의 두 눈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없었다. 속눈썹도 없었다.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이 두 눈알만 버젓이 남아있었다. 제 몸을 분열시켜 분열되지 않은 세상을 꿈꾸기라도 하듯, 진정 그렇게 해야만 카운터 위에 있는 약간 기울어진 지구의 360도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있었다.
박성의 온몸이 통째로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눈에 띄지 않는 발작이라도 한바탕 지나간 것 같이 몸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순간 박성의 90도 뒤집어진 눈앞에 보석상점 구석에 돼지 두 마리가 꿀꿀거리며 바닥을 핥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수탉 한 마리가 바닥을 어슬렁거리며 붉은 벼슬을 한 번씩 흔들며 무언가를 쪼고 있었다. 수탉이 날카로운 부리로 쪼고 있는 것은 바로 거북의 딱딱한 등이었다. 살아있는 거북이었다. 거북은 꼼짝하지 않고 수탉과 두 마리의 돼지 사이에 정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박성은 두 팔을 꼿꼿하게 바닥에 붙인 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잘 몰라서 박성은 온몸을 푸르르 떨었다.
─『시에』 2012년 여름호
임수랑
서울 출생. 200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상도찜질방』, 『검은 침대』, 『리플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