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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영월에서 하루 10회 운행, 고한행 버스 승차, 마차치고개 하차. (영월버스터미널 033-374-2450) [sam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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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산행기[사람과 산]
벽암산(霹巖山 923m) 가는 날, 날씨가 꾸물거린다. 하늘을 무겁게 짓누른 구름이 금새라도 뇌성벽력과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손 시린 바람에 눈발까지 흩뿌린다. 산도 첩첩 물도 맑은 정선땅. 남면 별어곡과 신동읍 예미를 잇는 마차고개 아래의 마차고개식당 앞을 산행 들머리로 정했다. 자동차 한 대는 날머리가 되는 절골 입구에 놓아두고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한다.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 정이호(61세), 이상본(51세), 임대수(50세), 박복재(44세), 임한일(43세), 권택경(40세), 전재옥(33세), 원미화(30세), 전영옥씨(28세)와 함께다. 옥녀산발형국(玉女散髮形局)이라는 마차고개를 뒤로하고 북쪽 광덕재로 가는 콘크리트길을 따라 오른다. 5분도 되지 않아 박승옥씨집 앞 삼거리다. 계곡 물을 호스로 끌어올려 쓰는 박씨집에서 수통에 물을 채우고 북서 방면 콘크리트길로 곧장 가니 옛날 성황당이 있었음직한 광덕재 마루턱 삼거리다. 상수리나무, 단풍나무, 느릅나무, 층층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여기서 서쪽 능선으로 들어서면 곰봉(1014.9m)으로 가게 되고 동쪽 능선으로 올라서면 벽암산이다. 들머리 식당 앞에서 본 개가 보인다. 주둥이 언저리는 검고 털 빛깔은 누런 것이 전형적인 시골 개다. 웬일인지 광덕재까지 따라와 어슬렁거린다. 무심히 보아 넘기고 동쪽 이깔나무 능선으로 들어서는데 이놈이 앞장을 선다. 물방울처럼 생긴 첫번째봉을 올라서니 잡목과 가시덩굴 속에 터잡은 제주고씨 묘 3기가 나타난다. 묘에서 밭으로 내려선다. 밭에는 파란 냉이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득하다. 콩가루에 버무려 끊인 냉이국이 생각났다. 뒤를 돌아보니 곰봉과 닭이봉(1028m)이 고개를 바싹 쳐들고 따른다. 북쪽에는 광방마을이 닭이봉과 곰봉, 벽암산 사이에 끼어 있다. 옛날 이 마을은 농사가 잘 되어 부자마을이란 소문이 돌아 도적이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주민들의 탄식이 높아지던 중 이곳을 지나던 도승이 저간의 사정을 듣고 마을 이름을 ‘넓을 광(廣)’, ‘막을 방(防)’자 광방이라고 지어준 후 도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깔나무와 소나무가 뒤섞인 능선을 타고나니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긴 840봉에 닿는다. 840봉에서 휴식을 하며 마차고개계곡을 내려다보니 양어장이 보이고 38번 국도를 달리는 찻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840봉에서 능선이 둘로 갈라진다. 여기서 방심하다 북쪽 능선을 따라가면 광방마을로 그냥 하산하기 십상일 듯하다. 벽암산으로 가려면 길쭉한 고구마 끝에서 동쪽 급경사로 내려서야 한다.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따라오던 누렁이가 이제는 곁에 바싹 붙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이름을 모르니 그냥 ‘독(dog)’이라고 넘겨 부른다.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미끄럼을 타며 한참을 내려서니 양어장의 위 안부다.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방금 잡아놓은 듯 아직 톱밥이 마르지 않고 솔잎도 싱싱하다.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른 폼이 원체 특이해 땔감용으로 자른 것이 아닌 듯하다. “아! 이건 누가 지게를 만들려고 잘라 놓은 거야.” 임대수씨가 답안을 내놓으니 모두들 그렇다며 맞장구를 친다. 지게를 만들려고 한 짓이라니… 씁쓸한 입맛으로 안부를 뒤로하니 860봉 정상이다. 그제야 북동쪽으로 벽암산이 모습을 보여준다. 860봉에서 벽암산은 잠시 내려가는 듯하다가 올라선다. 겨울잠에 든 더덕 몇 뿌리를 챙긴 뒤 깃대가 쓰러져 있는 벽암산 정상에 선다. 정상의 삼각점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군데군데 약초를 캔 흔적이 있다. 강원도의 산 정상이라는 것이 거의가 헬기장인데 이곳은 어찌 살아남았을까? 정상에서의 조망은 날씨가 흐려 좋지 않다. 가끔씩 희뿌연 운해 사이로 주변 고봉들이 자막처럼 지나간다. 바람이 차다. 오목한 데를 찾아 점심을 먹으려는데 잠시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한다. 햇살이 깜박 꽂히고 지나간다. 누렁이가 라면을 좋아하지 않아 밥을 주니 금새 해치운다. 목이 말랐던지 물도 한 병 비우고 보초를 서듯 사방경계를 한다. 오후 1시 40분이다. 무조건 남쪽 방향으로 하산을 하면 몇십 분만에 38번 국도에 닿을 수 있을 듯했으나 너무 짧기에 동남동쪽 능선을 따르기로 했다. 880봉에서 수광암을 보고 절골을 따라 하산하기로 했다. 높낮이가 거의 없어 콧노래가 절로 나는 하산길이다. 능선에는 참나무와 노송이 즐비하고 가시 달린 엄나무도 자주 눈에 띈다. 통노구골쪽에서 올라온 목장 철선이 능선을 따라 잠시 이어지더니 다시 내려가버린다. 이 골짜기에 남면에서 신동읍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고 해 통로골(통노구골)이라 한다. 통로골이 내려다보이는 860봉 직전 안부에 이르니 운지버섯이 사방에 널려있다. 잠시 운행을 멈추고 보이는 대로 따 항암효과가 좋다는 운지차를 끓였다. 오지산행에서나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여유다. 운지차를 마신 다음이어선지 발걸음이 축지법을 운용하는 도인처럼 가볍고 날렵하다. 860봉을 넘어 곰골(고문동)로 내려서는 안부에 닿으니 병에 걸린 소나무가 유별나게 많다. 880봉으로 오르다 만삼을 발견하고 잠시 지체하였다. 그러자 앞선 일행을 따라가던 누렁이가 돌아와 앞장을 선다. 구릉지대 같은 880봉을 지나 능선 따라가던 것을 중지하고 남쪽의 절골로 내려선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산허리를 비스듬히 타고가는 내리막에는 팔뚝만한 참나무가 빼곡히 들어찼다. 잡초가 키를 넘는 묵밭을 지나 계류를 건너니 절벽 아래의 옛 수광암 터가 으스스하다. 정선군지에는 “백여년 전에 웅동에 사는 고아무개가 철불상을 우연히 얻어 암자에 안치하고 문중 자제들의 글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차차 불당으로 발전, 현재는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되어있다. 길은 계곡 오른쪽으로 희미하게 흔적만 있다. 숲 속에는 삐라를 운반, 살포하는 풍선이 뒹굴고 있다. 계곡을 따라 계속 가니 수광암이 나타난다. 대웅전, 산신각, 종각, 돌탑 2기가 전부인 아담한 절이다. 북에서 남파한 김신조 일당이 출몰할 때 철불상을 모시고 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예미에서 왔다는 신도의 말씀인 즉, 한두광업소가 절 입구를 막고있어 소음공해 때문에 이 암자도 곧 철거될 것 같다고 한다. 누렁이를 처음 만났던 장소까지 데려다 놓으니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글 사진·김부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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