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87신]이런 출판기념회가 있었답니다
평생 잊지 못할 ‘출판기념회’를 치른 ‘작은 거인’ 선배께.
아, 어제는 선배의 ‘79년 인생’에 정말 기념비적인 날이었겠지요.
가족, 친지, 종친親親(전주이씨 화의공파-세종대왕의 9남)와 고교·대학(보성고등학교와 고려대 정치학과)의 오랜 친구들
그리고 35년을 넘게 몸 담은 동아일보의 선배와 동료 60여명을,
이 코로나시국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장소(내셔녈프레스클럼)에 초대하여 출판기념회를 갖고 양식을 대접하다니요.
물론 방역수칙에 어긋나지 않아 이 행사를 할 수 있었고, 당신은 생각지도 안했다는 행사를
후배 서너 명이 “이런 대작을 펴냈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며 강권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요.
그러니 아무리 낙향거사落鄕居士라고 해도 어찌 올라가 축하를 드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로서도 모처럼 십 수년만에 전직장 선배들을 뵐 수 있어 좋았습니다.
70대 후반∼80대 중반의 존성대명尊姓大名 언론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지요.
무엇보다 그분들이 축사 등에서 무려 967쪽(원고지 3650장)이나 되는 선배의 《너는 뭘 했냐》를 읽은 소감을 말하며
칭찬, 부러움, 격려 일변도인 것도 인상적이었지요.
십 수년 전 어느 식장에서 선배의 어머님이 어쩌면 큰 생각없이 말했을 수도 있는 “너는 뭘 했냐?”라는 물음에 대해,
희수喜壽(77세)가 넘은 나이에 책으로 뒤늦은 답변을 드린 셈이지요.
지난 4월말, 포천의 부모님 산소에 따끈따근한 책을 바치며 홀로 한참 동안 호곡號哭하셨다했지요.
14살이나 어린 저에게 그 현장에서 전화를 하며 울먹이시던, 천상 효자이신 선배.
그때 저는 75세에 고애자孤哀子가 되었다며 우편으로 보내준 감사장의 구절들이 생각나 한동안 먹먹했습니다.
책 속에서 밝힌 젊은 시절 ‘불가피한 불륜不倫’에 대한 고백과
‘환갑 우정’들이 선배를 대신하여 형수님에게 용서해주시라는 간청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선배가 그만큼 삶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착하게 살아오신 때문이겠지요.
형수님이 현수막에 쓰신 ≪두고두고 복수할 거야/대신 사랑해♡/하는 것 봐서≫라는 축하인사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무렴, 그래야지요.
금혼식金婚式(결혼 50주년)이 올해인데, 황혼이혼이 웬말이란 말입니까?
두 분은 ‘용서容恕의 연륜’을 그만큼 사랑으로 살아오신 것입니다.
이 책을 수식하는 문구는 차고 넘칠 것입니다.
한 후배는 <이충남의 작은 현대사>, 출판사에서는 보도자료에 <보통가족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라고,
어느 작가는 <민중자서전>이라고 하더군요.
인터뷰기자는 헤드라인을 “어머니, 저 있을 자리에 있었습니다”라고 뽑았더군요
(80세 그 기자는 어제 당신의 인터뷰기사 출판기념회도 된다하여 모두 웃었지요).
모두 ‘정답’일 것입니다.
선배는 답사에서 “하늘에서 부모가 아시면 ‘무슨 쓸데없는 일을 했느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백이 넘어 드리는 답변이 책으로 나온 게 무척 기쁘다”고 하셨지요. 왜 아니겠어요?
선배는 이제 ‘인생 3막’이 펼쳐집니다.
얼마 전 ‘인생 2막’이었던 아파트 경비원생활 9년을 정리하고,
이른바 내년 팔순八旬을 앞두고 있는 지금.
앞으로도 지금처럼 여전히 건강하여 약주를 즐기며
10여개의 모임에서 여전히‘명총무’역할을 톡톡히 하며
인기를 독차지하겠지요.
저는 14년이나 선배를 언제나 ‘님’자조차 붙이지 않고 ‘선배’라 부르며 한손으로 술을 권해도 개의치 않는,
무람 없는 선배가 애초부터 좋았습니다. 존경까지 하게 되었구요.
제가 어느 글에서 “김정일같이 난쟁이 똥자루만 하고, 이주일같이 못생긴 이 시대 마지막 꼰대선배”라고 썼는데도
야단은커녕 껄껄 웃으셨지요.
그렇게 웃으시면서 형수님과 알콩달콩 백년해로하시길 빌면서 줄입니다.
거듭 출판기념회를 감축드립니다.
내내 강건하소서.
6월 10일
고향 임실에서 후배 절합니다
*추기: 기력이 떨어지기 전에 어제 행사에 애를 쓴 SW후배(저보다 8년 위인데 “평소 충냄이형을 우습게 알았는데, 책을 보고 납작 엎드리며 깨깽했다. 보성고가 양정고보다 명문인 것같다”는 선배의 행사장 멘트가 재밌어 모두 웃었습니다)와 KTX로 제 고향 함 다녀가시길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