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편지] 대원산업 서산공장과 기아차 모닝공장...정규직 0명 공장
지난 15일 오후 한 선배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친구의 조카가 기아차 모닝과 레이를 만드는 동희오토에 다니는데, 엽총에 맞아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동희오토에 다니는 노동자들에게 전화를 돌려봤지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서산의 D공장에서 한 노동자가 엽총을 난사해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달아나던 범인은 농약을 마시고 중태에 빠졌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전화를 돌린 후에야 경찰이 발표한 서산의 ‘D공장’이 동희오토가 아니라 자동차 시트를 만들어 동희오토에 납품하는 대원산업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금속노조 소속인 대원산업은 안산, 평택, 시화공장이 있는데, 서산공장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서산의 ‘D’공장은 대원산업
선배와 함께 급히 인천 길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공장에 다니던 시절 직원들이 나를 괴롭혀서 보복하기 위해 총을 쐈다”는 기사를 보며 문득 일본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이 떠올랐습니다.
2010년 6월 일본 히로시마 마쓰다 자동차 본사 공장에서 해고된 파견노동자가 승용차를 몰고 공장 안으로 돌진해 출근하던 공장 직원 11명을 치어 이 중 1명을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8년 6월에는 도쿄의 번화가 아키하바라에서 한 파견노동자가 7명의 목숨을 빼앗고 10명을 다치게 ‘무차별 살인’ 사건을 벌여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는 “파견으로 어딘가의 다른 공장에 간다고 해도 반 년 만 지나면 또 이런 처지가 될 것은 뻔하다”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엽총을 쏘았을까, 3년 전에 다닌 회사였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는 왜 농약을 마셨을까, 그가 다닌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다니던 대원산업 서산공장은 어떤 공장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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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료사진] |
그는 왜 총을 쏘았을까?
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선배의 친구는 다행히 수술이 잘 됐다고 했습니다. 총알이 오른쪽 갈비뼈를 관통해 허파에 박혀 4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는데, 가족들은 후유증이 걱정되지만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병원에 다녀간 회사 사람들은 대원산업이 아니었습니다. ‘세진’이라는 회사의 사장과 부장이 병문안을 와서, 엽총을 쏜 성씨가 2009년 3개월 동안 수습으로 일을 했는데, 일을 잘 못해서 그만 두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범행을 저지른 성씨는 3년 전 이 회사에 생산관리로 들어왔는데, 업무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당시 관리자에게 앙심을 품어 총을 쏘았고, 선배 친구의 조카는 마주친 적도 없는데 옆에 있다가 중상을 입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원산업과 세진이라는 회사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이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곳저곳 전화를 돌렸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서야 몇 가지 정보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종이회사 유령회사
대원산업은 서산공장에 ‘세진’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사장, 차장 등 10여명이 생산관리를 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라인에서 생산된 시트를 기아차 모닝공장이 요청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시트를 제작하는 생산라인은 10개로 쪼개서 10명의 ‘소사장’에게 도급을 주고 있었습니다. 소사장들은 10~20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시트를 만들었고, 월간 생산물량에 따라 세진이라는 회사에서 돈을 받아 월급을 줬습니다.
즉, 생산관리를 하는 노동자들은 대원산업 소속이 아니라 ‘세진’이라는 종이 회사의 소속이고, 시트를 만드는 150명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회사’라고 부를 수도 없고, 소속도 알 수 없는 유령회사에 속해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시트를 대원산업에서 기아차 모닝공장으로 실어 나르는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이 대원산업 소속도, 세진 소속도 아닌 개인사업자입니다. 총기사건의 피해자들은 대원산업의 ‘종업원’이 아니기 때문에 금속노조 대원산업지회의 단체협약도 적용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원산업 사장님은 서산공장 안에서 대형사건이 벌어졌지만 병문안조차 갈 필요가 없고, 아무런 책임도 질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사고를 당했다면 ‘세진’의 사장님도 면회를 가지 않았을 겁니다.
기아차 모닝공장의 판박이
대원산업 서산공장은 기아차 모닝공장의 판박이입니다. 모닝공장은 기아차 서산공장이 아닙니다. 자동차 부품업체인 동희산업과 공동 출자해 ‘동희오토’라는 회사를 만들어 150여명의 노동자들이 생산과 품질관리를 합니다. 생산라인은 17개 사내하청업체 950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기아차 본사에서는 모닝공장을 서산공장이라고 부르고,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모닝으로 기아가 떼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의 생산직 직원은 기아차 정규직도, 기아차 비정규직도, 동희오토 정규직도 아닌, 이름도 알 수 없는 17개 사내하청업체 노동자들입니다.
기아차는 ‘정규직 0명 공장’의 대명사입니다. 정규직은 없고, 종이 회사와 가짜 사장이 득실대는 야만적인 공장은 현대중공업 군산공장,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STX중공업 등 재벌들부터 중소기업까지 전국에 독버섯처럼 노동자들의 피땀을 쥐어짜고 있습니다.
대원산업 서산공장에서 엽총을 난사해 3명의 사상자를 낸 성 모 씨가 18일 치료도중 숨졌습니다. 그가 왜 총을 쏘았는지, 그가 일했던 3개월 동안 공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제 영구미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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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료사진] |
비정규직 보호하겠다는 정치인들에게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숨과 절망이 가득하고, 탐욕의 재벌에 대한 울분이 끓어오르는 2012년. 너도나도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고 하고, 개나 소나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하는 선거철입니다.
“기아차 모닝공장에 납품하려면 비정규직 공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회사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대원산업 서산공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금속노조 한 간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래서 ‘높으신’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여야 대표님들, 안희정 충남도지사님,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님들에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서산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대원산업을 찾아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곳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기아차 모닝공장 노동자들이 지금 어떻게 일하고 있고, 이 공장에 납품하고 있는 부품사 노동자들이 오늘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조사해 알려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절망의 ‘비정규직 공장’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고유가 때문에 자동차 내수시장이 얼어붙었지만, 대원산업 서산공장에서 시트를 납품받아 기아차 서산공장에서 만들기 시작한 ‘레이’는 계약 후 2개월을 기다려야 차를 인도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 절정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모닝’을 만들고, ‘레이’를 조립하고 있는 노동자들, 레이의 시트와 부품을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의 하루는 견디기 힘든 날들입니다.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서산 D공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