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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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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반만년 역사 만들기, 무조건 일본 깎아내리기, 끔찍한 현대사 모른 체하기로 우리 역사를 포장 기술(記述)하고 교육하는 문제에 대한 비판!!
아무 근거 없이 반만년 단일민족의 역사를 자랑하고, 연나라 사람 위만을 조선인으로 둔갑시키고, 중국 식민지 낙랑군의 존재를 은폐하고, 일본에 문화를 전한 백제인을 자원봉사자로 만들고, 애국 상무정신에 빛나는 화랑의 역사를 창작하고, 일본 천황이 백제인이면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인인데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의 존재는 무시하고, 백성들의 생존투쟁을 외세에 대한 저항으로 포장하고, 권력의 하수인 삼별초를 호국영웅으로 만들고, 외세를 이용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판하면서도 미국과 중국의 개입을 초래한 6·25는 모른 체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중국에 대한 비난! 그러면 한국은 그들과 달리 역사 왜곡에서 자유로운가?
일본의 역사 왜곡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킨다. 고구려를 중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한 동북공정도 한국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다. 이같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면 한국은 주변 나라들과 달리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가.
한국 역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은 책이 출간돼 논란이 예상된다. 최근 나온 『역사를 왜곡하는 한국인』은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국정 국사교과서와 신문 방송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역사인식이 상식에 벗어난 ‘왜곡된 역사’를 담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왜곡의 경향은 ▲ 일본 깎아내리기, ▲ 위대한 단일민족의 역사 만들기, ▲ 비극적인 현대사 모른 체하기라는 성격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우리 국사교과서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에서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해 준 일을 마치 아무 대가없이 은혜를 베푼 것처럼 비상식적으로 서술했다고 지적한다. 정치, 외교관계에서 비롯됐고 특히 가야와 백제가 그 대가로 건네진 일본의 군사지원에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광개토왕비, 일본서기 등 역사 책과 유적에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 군사의 활약상이 명확히 기록된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려 3만 2천여 명의 일본 군사가 백제부흥운동을 도우러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당나라 수군과 대 해전을 벌였다. 또 19~20세기 우리가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배운 것이 모두 일본을 통해서였으며 지금도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1천년 넘게 독자적인 문화를 일궈온 일본이 아직도 한국문화의 영향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최근 하인즈 워드의 방한을 맞아 도마에 오른 ‘단일민족론’도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반론을 내놓는다. 중국의 망명인이 왕이었던 위만조선에서 보듯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건너와 우리 민족을 구성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국제화가 두드러진 고려 때 중국 송나라, 거란, 위구르, 아랍 사람들이 한민족의 일원이 됐고 조선시대에는 여진족과 함께 일본인, 심지어 네덜란드인 박연까지 한국인이 됐음을 지적한다. 2001년 인구조사에서 조상이 외국 출신이라고 밝힌 성씨들과 귀화 역사기록을 감안하면 우리 국민의 26%가 귀화혈통이라는 자료를 인용했다. 한 핏줄이어서 한 민족이 된 게 아니라 여러 핏줄이 오래 함께 살다보니 한 민족이 됐다는 것이다.
국사교과서가 제시하는 ‘반만년 역사’의 근거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비판한다. 교과서는 ‘단군과 고조선’(32쪽)과 연표 등에서 청동기 문화의 발전→ 족장사회 권력 강화→ 국가로 발전의 과정을 통해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이 건국됐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5쪽 앞에서는 청동기 시대가 빨라야 기원전 15세기에 전개됐음을 밝혔다. 기원전 15세기에 시작된 발전의 결과가 기원전 24세기에 나타난다. 최소 900년이 뒤집힌 역사다. 반만년 역사의 근거가 이렇게 황당하냐는 질문이다.
교과서에 없지만 신문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일본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인’이라고 반박한다. 백제 혈통임이 유력하다는 일본 천황들이 모두 6세기 이전 인물인데 반해, 노대통령의 선조는 877년 한국에 건너온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또 교과서가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를 이용’이라는 한계성을 비판하면서도 철저히 외세가 좌지우지한 6·25 전쟁의 한계는 왜 지적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교과서의 ‘삼국통일의 한계’ 주장이 민족문제에 외세가 개입했다는 강정구 교수의 논리와 같다는 점도 꼬집는다. 이밖에 위만 조선인으로 만들기, 완전히 창작된 화랑의 허상, 외세에 대한 저항으로 포장된 고려시대 민중과 삼별초의 항쟁 등이 비판의 표적이 됐다.
특히 강조하는 것은 국사교과서가 1945년 해방 후 1백만 명 이상이 희생된 양민학살과 같은 현대사의 비극을 모른 체한다는 점이다. 일제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은 자세히 열거하면서 그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이 학살된 끔찍한 역사는 왜 교과서에 담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일본만 비난하고 일본 때문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것도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호기심에 시작한 독서를 통해 우리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비판적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고 한다.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 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여러 곳에서 지적한 사실들을 모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국사교과서에 왜곡된 역사가 버젓이 수록되어 가르쳐지고 한국 사람들이 일본과 중국만 역사를 왜곡한다고 알고 있는 게 진짜 큰 문제라고 비판한다. 또 자국 위주의 편협한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중국, 일본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해 온 한국 역사를 객관적인 안목으로 이해하도록 올바른 국사교과서를 만들고 가르쳐야 진정한 국제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일본에 문화를 전한 백제인은 자원봉사자였나? [교과서 내용]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267쪽) 삼국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 문화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아직기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뒤이어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쳤다.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5경 박사, 의박사, 역박사와 천문박사, 채약사, 그리고 화가와 공예 기술자들도 건너갔는데….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신라는 배 만드는 기술과 제방 쌓는 기술을 전해 주어 … 삼국의 음악도 전해져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비판 : 마치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푼 것처럼 서술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 없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삼국 사람들은 왜 목숨 걸고 일본에 문화를 전했을까. 이유가 설명이 없다. 당시 항해기술로 일본을 간다는 일은 매우 위험했다. - 약 1천년 후인 1459년(세조 5) 조선통신사 일행이 탄 배가 조난당해 정사 송처검 이하 100여 명이 몰살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가없이 일본에 문화를 전했을까. - 백제 고구려 신라는 서로 경쟁하면서 주변국과 외교관계를 맺어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가야와 백제는 일본의 군수물자와 군사력에 크게 의존했다. 일본의 군사가 한반도에서 활약한 내용이 삼국사기 광개토왕비 일본서기 등에 명확하게 기록돼 있으며 백제가 망한 후 일본이 662~663년 무려 3만2천의 군사를 보내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내용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제목)라고 했으나 그 내용이 한자, 천자문, 논어, 불경, 불상, 5경, 종이와 먹의 제조법 등이니 모두 삼국을 통한‘중국문화’의 일본전파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 삼국에서 나름대로 발전도 있었겠지만 과장된 표현이며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해진 것은 소홀히 취급하고,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만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일본을 통해 서양문명을 배웠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일본은 방대한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모든 개념과 새 어휘들을 한자를 사용해서 번역했고 한국과 중국은 이 번역어를 통해 서양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도 서양과학과 기술이 거의 일본을 통해 전해졌으며 자동차 등 거의 모든 공업발전도 일본 기술 도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 반만년 역사는 허구인가! [교과서 내용] 단군과 고조선(32쪽)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 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 2333).
주요 연표(14쪽)에 ‘B.C. 2333 고조선(단군 조선)의 시작’이라고 적었고, 374쪽의 연표에는 ‘기원전 2333 고조선(단군 조선)의 시작’과 함께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 문명 시작, 기원전 2500년경 황허 문명 시작 인더스 문명 시작, 기원전 1800년경 함무라비 왕 메소포타미아 통일 법전 편찬’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섯 쪽을 거슬러 올라가면 [교과서 내용] 청동기의 보급(27쪽) 신석기 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기원전 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 비판 : 고조선 건국 시기가 말이 되지 않는다. 교과서에 따르면 기원전 15~13세기 청동기 시대 전개 → 족장 지배사회 출현 → 권력 강화 → 국가로 발전의 과정을 거쳐 기원전 24세기에 고조선 건국이라는 해괴한 역사가 성립하고 있다. 여기에는 최소 900년 이상의 역사가 뒤집혀지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 위만을 조선인으로 둔갑시켰다. [교과서 내용] (도움글) 위만조선의 의미(34쪽)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위만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 나오는데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사이트에서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千餘人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滿亡命, 聚黨千餘人, ?結蠻夷服而東走出塞) - 사기 조선열전
滿도 亡命하였다. 무리 千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 - 한서 조선전
교과서가 ‘조선인의 옷’이라고 표현한 것을 국사편찬위원회는 ‘오랑캐의 복장’(蠻夷服)이라고 번역했다. ‘만이복(蠻夷服)’은 중국식 옷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볼 때 만주 등에 여러 오랑캐가 있었는데 조선인은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조선인의 옷’이라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 비판 : 과거 일본이 ‘위만은 중국인이며 한국 역사는 처음부터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고 가르친 식민사관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식민사관이 극복되는 것일까.
■ 한군현이 있었나, 없었나? [교과서 내용] 위만의 집권(34쪽)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 비판 : 한군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게 서술했다.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무슨 말일까. 군현을 설치했다는 말인가, 설치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아주 모호하게 표현했다. 교과서는 낙랑군 등 과거 한반도에 존재했던 한군현을 부정하고 싶어서 이렇게 애매모호한 서술행태를 보였다. 그러나 교과서를 보고 헷갈리는 사람은 우리 학생들뿐이다. 위만조선에 이어 중국의 식민지인 한군현이 이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서인가. 평양일대에 400년 이상 낙랑군이 존재한 것은 유적과 유물로 확인된 사실인데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 화랑도가 세속 5계를 배운 용맹한 청소년 집단인가? [교과서 내용] 신라의 골품제도와 화랑도(198쪽)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다. …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다고 설명한다.
▶ 비판 : 화랑도가 세속 5계를 배웠는지 아닌지 분명치 않게 서술하며 화랑도와 세속 5계를 어물쩍 연결시키고 있다. 또 ‘사냥과 전쟁에 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도 전혀 근거가 없다. 화랑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쳤다는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어디에도 없다고 비판받아왔다. 교과서는 비판을 의식해 화랑도가 세속 5계를 배웠다는 말만 피하고 내용은 그대로 두어 애매하게 서술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 기록에 화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교과서가 말한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의 근거가 전혀 없다. 미모의 남자를 화랑으로 삼았다. 애국심, 상무정신과 거리가 멀다. * 왜 이렇게 됐나 1920년대 단재 신채호가 민족 고유의 ‘낭가(郎家)사상’을 강조하면서 화랑을 부각시켰고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청년의 애국심이 필요하다며 당시 육군본부 정훈감이던 역사학자 이선근에게 한국사에서 청년문화의 유산을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이선근은 1954년 『화랑도연구』를 펴내면서 애국심이 넘치는 화랑의 역사를 창조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이순신, 독립협회, 동학혁명, 3·1운동이 모두 ‘화랑정신’을 빛낸 사람이나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정희 군사정권은 분단 조국과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하면서 청소년들에게 애국심과 상무정신을 갖춘 ‘화랑이 되라’고 하면서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부각하는 재료로 창조된 화랑의 역사를 활용했다.
■ 외세를 이용한 신라의 삼국통일의 한계 [교과서 내용] 신라의 삼국통일(55쪽)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이용하였다는 점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 비판 : 외세에 의해 좌지우지된 6·25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한계를 지적하지 않았다. 교과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를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6·25 때 소련을 등에 없고 남침한 북한, 대구까지 밀렸다가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군에 의해 기사회생한 남한, 다시 압록강까지 밀렸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북한에 대해 ‘외세를 이용했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고 민족의식도 없던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외세 이용’을 비판하는데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갖고 있던 남한과 북한이 외세에 의존한 것은 왜 비판하지 않을까. 교과서의 논리는 6·25라는 집안싸움에 외세가 개입해 비극을 일으켰다고 주장해 논란을 부른 강정구 교수의 발언과 같다. 교과서는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가. [6.25 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 … 집안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제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강정구]
■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인이다 교과서에는 없지만 ‘일본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도 많이 나와 있고 ‘역사스페셜’ 같은 TV프로에도 자주 등장한다.
▶ 비판 : 노무현 대통령은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 천황보다 훨씬 늦게 877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의 후손이다.
주몽은 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고 주몽의 아들 온조는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웠다. 그러면 온조는 부여인인가, 고구려인인가, 백제인인가. 백제의 혈통이 일본에 건너가서 천황가를 세웠다고 가정할 때(가능성은 높지만 명백한 증거는 없다) 천황은 부여인인가, 고구려인인가, 백제인인가, 일본인인가. 주몽은 고구려인이고, 온조는 백제인이다. 일본 천황은 당연히 일본인이다. 또, 일본 천황이 백제인이라면 1910년 한일합방은 백제의 멸망으로 잃었던 조상의 땅을 되찾은 역사의 쾌거로 기록해야 한다.
백제 혈통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일본의 제 15대 오진천황, 제 26대 게이타이천황(재위 507~531)은 아무리 늦어도 5세기까지는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씨는 이보다 약 4백년 늦게 한국에 온 중국인이다.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등 서적과 ‘노씨 인터넷 종친회’에 따르면 노씨의 시조는 중국 범양현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노수(盧穗)다. 877년(신라 헌강왕 3) 황소의 난을 피해 아들 아홉 형제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이주했다. 광주 노 씨인 노무현 대통령은 노수의 맏아들 노해(盧垓)의 자손이다.
‘일본 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주장은 1500년 역사의 두께를 무시하고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 몽고와의 전쟁에서 민중들의 활약 과장 교과서(73쪽)는 몽고와의 전쟁에서 ‘일반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 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가지도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설명했다.
▶ 비판 : 민중의 반란, 투몽은 모른 체하며 민중이 몽고에 대항했다고 과장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몽고 침입 초기부터 하층민의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몽고 침입이 장기화하면서 백성들이 관리나 군인들을 죽이고 몽고에 항복하는 ‘투몽(投蒙)’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교과서는 반란과 투몽은 쏙 빼놓고 민중과 노비들이 몽고에 대항했다고 과장하고 있다.
■ 삼별초를 대몽항쟁의 상징으로 포장했다 교과서(73쪽)는 고려 정보의 개경 환도에도 불구하고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고 설명했다.
▶ 비판 : 삼별초는 대몽 항쟁을 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싸웠다.
『고려사』 열전(배중손)과 『고려사』 志 제35兵을 읽어보면 삼별초가 정적을 살해하는 등 무신정권의 권력싸움에서 최씨 등 권신의 하수인으로 활약했고 조정이 몽고에 항복한 후 자신들의 명부가 몽고에 알려지게 되자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킨 정황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무신정권은 몽고의 발굽에 유린당한 전국의 백성들을 내팽개치고 강화에 숨어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한 파렴치한 정권이고 삼별초는 그 하수인이었다. 권력 투쟁에 실패한 잔당들의 반란을 대몽항쟁으로 포장한 것이다.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책은 일제 식민지였던 1930년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삼별초가 부각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삼별초를 ‘호국의 화신’으로 만든 것은 박정희 군사정권이며 쿠데타의 명분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왜곡, 강조했다고 지적한다.
■ 교과서의 현대사 왜곡 교과서는 징용, 징병, 종군위안부 등 일제의 식민지배에 의해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최근 역사로는 남북의 화해를 말하면서 2000년 6월 15일의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을 사진과 함께 게재했다.
▶ 비판 : 해방 후 정부 수립과 6·25전쟁을 거치며 1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역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거창 양민학살을 비롯해 국민보도연행 학살 등 해방 후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제 36년 보다 훨씬 많은 1백만 명 이상이 동족에 의해 학살됐다. 전투 행위와 전혀 관계없이 어린이, 여성, 노약자가 다수 포함됐다. 북한은 ‘반동분자’라며, 남한은 ‘통비분자’, ‘부역혐의자’라며 마구잡이로 양민을 학살했다. 왜 이 역사는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았을까. 일제에 의한 피해만을 강조하고 동족에 의한 학살은 외면하는 것이 바른 교과서일까. 최근의 역사를 따지면 ‘인혁당재건위사건’(1975) ‘부천서 성고문사건’(1986) 등 끔찍한 사건을 교과서가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이 사건들이 교과서에 실릴 가치가 없는 사소한 일인가.
양민학살과 5·18 민주화 운동의 끔찍한 비극에 대해 현재의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까. 자기가 한 일이 아니니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60여 년이 흘러 전후세대가 대부분인 일본 사람들이 과거사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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