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급휴가/ 사가독서제
예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세종은 신하들을 엄청 굴려댔습니다. 능력이 검증된 신하라면 맘대로 은퇴도 안 시켰죠. 심지어 황희 같은 경우는 모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러야 함에도 복직 시킨 바 있습니다.
참고로 상 중에는 고기를 안 먹는 게 관례였는데 세종은 환갑이 다된 황희의 건강이 걱정되어 (아프면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직접 고기반찬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황희는 울면서 고기를 먹었다고 하지요.
여하튼 황희는 18년 간 퇴직요청을 한 끝에 87세가 되어서야 은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4개월 뒤에 세종이 승하했기에 망정이지 세종이 더 오래 살았다면 복직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일화를 본다면 세종 시대의 재능 있는 신하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본인의 능력을 한탄하며 평생을 워커홀릭으로 지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시대에 장기간의 유급휴가가 시작된 바도 있습니다. 물론 직원들 노는 꼴을 못 보는 세종께서 근로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거나 그런 목적이 있던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대의를 위해서, 그러니까 신하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부려먹기 위한 목적이 크기는 했습니다. 바로 ‘사가독서제’지요.
독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사가독서제는 신하들한테 책 좀 읽으라고 휴가를 주는 제도였습니다. 실록 기록을 참고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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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부교리(副校理) 권채와 저작랑(著作郞) 신석견, 정자(正字) 남수문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 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 세종 8년(1426), 12월 11일
이처럼 집현전의 젊고 유능한 신하들을 책을 읽게 하는 것이지요. 누구보다 책을 사랑한 세종다운 발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집에 있으면 공부가 잘 안됐던 듯 합니다. 집안일도 있고 친구들도 방문하고 그러다가 가끔 술도 마시고... 그래서 사가독서 2기로 선정된 성삼문, 신숙주, 서거정 등의 신하들은 집이 아닌 절에서 공부를 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유학자들이 절에서 공부를 하려니까 또 모양새가 이상합니다. 물론 과거 응시생들이 절에서 공부를 하던 예는 간간이 있었지만 나라의 녹을 받는 신료들까지 절에 박혀 있는 게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어째든 조선은 불교를 탄압하던 국가니까요.
그래서 성종 대에 이르면 아예 ‘독서당’이라고 해서 사가독서 문신들을 위한 연구기관까지 세워버립니다. 이게 연산군 때 없어졌다가 중종이 현재의 옥수동 근처에다가 다시 세웠는데, 이 동네의 독서당로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이후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은 쭉 유지되며 조선의 엘리트 관료를 육성하게 됩니다. 이황과 이이, 주세붕, 신숙주, 이산해, 류성룡 등의 유명한 신료가 사가독서제를 거친 인물들이지요.
실질적인 대우도 상당해서 사가독서에 선정된 젊은 문신들은 직급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조선의 학문을 총괄하는 홍문관 대제학 같은 경우는 독서당 출신이 아니면 임용될 수도 없었지요.
또한 흉년이 찾아오거나 했을 때 재정상의 문제로 독서당을 없애자는 의견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이때 대다수의 임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시키곤 했습니다. 중종 같은 경우는 “독서당에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 강습 토론하게 하는 것은 학문의 성취를 기다려서 크게 쓰자는 것이니, 경솔하게 혁파하여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지요.
즉 조선이 오랫동안 사가독서제를 운영했던 이유는 젊고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고 이들을 잘 육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장의 곤란함 때문에 이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것은 나라의 앞날에 더 큰 해악을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인재를 키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 독서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한 독서능력이야말로 나라를 이끌 인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글/ 박문국
첫댓글 조선이 오랫동안 사가독서제를 운영했던 이유는
젊고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고
이들을 잘 육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글 감사합니다 !
운용의 묘미만 잘 살리면
지금도 좋은 제도 일텐데
그러면 또 금수저 논리가
튀어나오겠지요 !.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