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6일 천안함 침몰 사고가 난 이후 우리나라의 이슈 시계는 멈췄다. 모든 시선과 논쟁이 천안함 침몰 의혹과 선박 인양 과정으로 쏠린 것이다. 이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사안들이 천안함과 함께 묻히고 있다는 안타까운 목소리도 불거지고 있다. 일각에선 수면 위로 올라와 국민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야 할 민감한 사안들을 묻기 위해 천안함 사태를 확대하고 있다는 의혹도 흘러나오는 실정이다. 천안함 사고로 인해 감춰진 각종 사안들을 되짚었다.
의혹과 미스터리 난무하는 사이 슬금슬금 꽁무니 감춰
교육비리, 강력범죄사건 등 논쟁거리도 관심 밖으로
국민들에게 슬픔과 분노, 안타까움을 전해준 천안함 침몰 사고가 여전히 안개 속에 감춰져있다. 지난 15일 천안함의 함미가 군과 민간인양팀에 의해 인양돼 실종 장병들의 시신이 수습됐지만 여전히 사고원인은 오리무중이다.
이렇다보니 의혹과 미스터리만 난무하고 있다. 오락가락한 정부의 발표와 언론보도에 의지해 천안함 사태를 관망할 수 밖에 없는 답답한 처지에 놓인 국민들 사이에 의혹과 불신이 싹트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천안함 사태에 묻힌 많은 사안들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천안함 사고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때문에 다른 현안들이 묻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3월26일 멈춘 각종 논쟁
정부와 여당엔 호재?
그 중 하나는 정부와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했던 사안들이 자연스럽게 묻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안함 사고 이전 여당은 여러 악재에 부딪히고 있었다. 먼저 여당의 발목을 잡았던 사안은 천주교의 4대강 사업 반대 선언이다. 이용훈 주교(천주교 수원교구장)와 김운회 주교(춘천교구장)등 천주교 사제 1100여 명은 지난 3월8일 이명박 정부에 ‘4대강 사업’의 중단을 촉구하는 사제선언문을 내놨다.
사제들은 선언문에서 “대부분의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음에도 거침없이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자 젖줄인 4대강을 파헤치는 죄에 무심했던 사제들의 죄를 고백한다”며 “죄의 굴레를 끊기 위해 전국 사제들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4대강의 죽어감이 우리 모두의 무관심에서 비롯됐고, 그만두지 않는다면 강의 죽음은 우리에게 대재앙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며 “당장 ‘4대강 죽이기 사업’을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같은 천주교의 움직임은 불교계 등 타종교계는 물론 국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4대강 사업의 당위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이는 곧 MB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다가 올 선거판에도 악재로 작용할 위기였다.
이에 이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4대강 반대 세력’에 대한 설득 부족을 질책했고 여권 지도부는 4대강 사업 홍보에 힘을 쏟으며 타개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천안함 사고는 정부와 여당에 호재로 작용한 부분이 없지 않다. 4대강 사업에 쏠려있던 시선이 분산되면서 파장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다시 논란이 됐던 이 대통령의 ‘독도 발언’ 파문 역시 천안함에 묻혔다. 이는 이 대통령이 2008년 7월 당시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한 발언을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하면서 시작된 파문이다.
<요미우리>신문은 당시 “후쿠다 총리가 ‘일본 중학교 교과서 학습지도 요령서에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사실을 기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야당은 이에 대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 대통령의 발언은 탄핵감이다”, “헌법 상 영토 보호의 의무를 대통령이 위반했다”고 맹비난했다.
네티즌과 시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난해 8월 <요미우리>신문을 상대로 “근거없는 보도로 한국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 그리고 이 재판의 선고공판이 지난 4월7일로 예정되면서 이 대통령의 독도 발언은 다시 논쟁거리로 도마에 올랐다. 이는 물론 이 대통령과 정부에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 역시 천안함 사태에 밀려 뇌리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리고 지난 7일 이 대통령이 관련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역시 이슈거리가 되지 못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 김인겸)은 판결문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7월9일 한일 정상회담 자리에서 일본 중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서의 독도 표시 문제에 대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문제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원고들은 <요미우리>신문에서 직접 지명, 지목된 사람들이 아니고, 보도내용과 개별적 연관성이 없어 침해된 법적 이익이 없다”며 사건을 기각했다. <요미우리>신문의 오보는 인정되지만, 원고들은 민법이 규정한 명예훼손 피해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오보로 인정한 이유로 청와대 대통령 실장에 대한 사실조회 결과와, 일본 외무성 공보관 성명을 제시했으나 구체적 판단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국민소송단 변호를 맡은 이재명 변호사는 “민감한 부분에 대해 판단하지 않은 회피적 판시”라며 항소할 뜻을 밝혔다. 이 같은 논쟁이 벌어졌지만 사건이 재점화 됐을 당시 만큼 화제가 되지는 못했다.
교육비리 색출도 시들시들
MBC 파업에도 시큰둥
정부가 비리와 전쟁을 선포하면서 칼을 댔던 ‘교육 비리’ 역시 천안함 사태에 묻혀 흐지부지될 처지에 놓였다. 특히 교육비리의 몸통으로 불렸던 공정택 전 서울시 교육감이 끝내 구속이 됐지만 역시 뉴스거리에서 멀어졌다.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부장 이성윤)는 지난 14일 인사 청탁을 대가로 돈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 등으로 공 전 교육감을 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공 전 교육감은 재직 시절인 2008∼2009년 교육청 인사를 총괄하던 최측근 간부 2명에게 ‘좋은 보직’ 발령에 대한 사례금으로 5900만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공 전 교육감은 현직 서울시 지역교육청 교육장 등 다른 시교육청 관계자 10여명에게 ‘선거자금 반환비용’ 명목으로 9000여 만원을 받은 혐의도 추가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공 전 교육감은 혐의 대부분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MBC 파업 역시 천안함 침몰에 밀려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본부장 이근행)는 지난 5일 오전 6시를 기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김재철 MBC 사장이 지난 2일 ‘낙하산 논란’이 있었던 황희만 특임이사를 부사장으로 임명한데 대한 반발로 시작된 파업이다. MBC 노조는 “김 사장이 ‘낙하산’ 논란을 몰고 온 황희만 특임이사를 보도촵제작 총괄 부사장으로 임명해 스스로 ‘MBC 내 좌빨 척결을 위한 정권의 말 잘 듣는 청소부’임을 시인했다”며 “‘청소부’ 발언을 한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대해서도 고소하겠다고 해놓고 순간 위기만을 넘기는 기만적 작태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큰 사회적 파장과 후폭풍을 몰고 왔을 강력범죄나 안타까운 사고도 여지없이 잊혀져갔다. 그 중 하나는 여중생 살인범 김길태에 버금가는 ‘연쇄살인 택시기사’ 사건이다. 사건의 장본인 안모(41)씨는 천안함 침몰 이틀 후 덜미를 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안씨는 지난 3월26일 오후 11시쯤 자신의 택시에 탄 송모(24·여)씨를 성폭행한 뒤 차 트렁크에 감금했다.
그 후 안씨는 송씨의 지갑에 있던 신용카드를 빼 현금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는 사이 송씨는 질식해 숨졌다. 이 후 안씨는 송씨의 시신을 차에 실은 채 택시영업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경찰에 덜미를 잡힌 안씨. 그런데 안씨의 범행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과거에도 여성승객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르고 연쇄살인을 저지른 정황이 포착된 것. 안씨는 경찰 조사를 받으며 지난해 9월26일 오후 5시30분쯤 청주 무심천 장평교 아래 하천가에서 숨진 채 발견된 김모(당시 41세)씨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이뿐만 아니다. 안씨는 지난 1월20일 한 여성승객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실을 자백했다. 또 경찰은 2004년 벌어졌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안씨라는 것도 밝혔다. 2004년 10월6일 충남 연기군 송성리 조천변 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된 전모(당시 23세·여)씨에게서 채취한 유전자가 안씨의 유전자와 일치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경찰은 안씨를 집중 추궁해 자백을 받아냈다. 이처럼 안씨는 이름과 사진이 공개될 만한 흉악한 범인이었지만 천안함은 안씨를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했다.
천안함에 집중된 시선
다른 사건은 관심 밖
그런가하면 충남 태안 농촌 방문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한 농림부 직원들의 사연도 묻혔다. 공교롭게도 이 사고는 천안함 사고가 벌어진 3월26일 발생했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이날 충남 태안군 남면 소재 별주부 마을 인근에서 농촌정책국 지역개발과 직원 7명과 태안군청 직원 등 8명이 탄 승합차가 바위에 충돌해 전원이 사망했다. 이처럼 휴일도 반납하고 현장을 방문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 역시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의혹을 품고 있는 사건이 집중 조명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올라 논의되어야 할 사안들이 감춰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특히 천안함 사건을 악용해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는 세력들은 없는지 단속과 감시의 눈길이 필요할 때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