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눈 앞에 펼쳐져있는 광경에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자
내 귓속을 따갑게 찔러오는 송예린의 목소리.
날 부르는 송예린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연기 하나 끝내주는구나. 연기자 해도 되겠어.
"김민율..니가 여길 왜온거야."
진월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검은 정장을 멋지게 빼입은 진월이..
진월이의 얼굴에는 내가 달갑지 않은 표정이 가득한데..
난 그런 진월이가 마냥 좋다. 멋지다는 생각밖에 안들어.
"..빨리 나와."
"진월아 잠깐만, 나.."
"엄마,아빠.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예린이랑 얘기좀 나누세요."
진월이는 문앞에 서있던 내 팔을 잡곤,
호텔 복도쪽으로 무작정 끌어냈다.
나는 팔을 꽉 잡고있는 그 엄청난 힘때문에 찍소리도 못하고 나와버렸다.
"아파..!! 이것좀 놔!!"
호텔 복도의 창문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
그 찬바람을 맞으며 진월이에게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아무리 아프다고 소리쳐도..눈하나 꿈뻑 안하는 진월이.
진월이는 그런 나를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와버렸다.
이젠..찬바람이 너무 따갑다..
"아씨..팔아프게 왜이래!!!"
"너..도대체 왜이러는거야. 우리 헤어졌잖아!!"
타악.
우리 헤어졌잖아.
이 말 한마디에 진월이에게 잡혀있던 팔을 당장에 빼버렸다.
진월이는 뿌리쳐진 자신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는다. 들릴 듯 말듯하게.
"헤어져?!! 누가 헤어졌대? 송예린이?"
"..내가 헤어지자고 했잖아."
"넌 헤어지자고 했을지 몰라도 난 아냐!! 난 니말에 동의한적 없어!!!"
"김민율 너.."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진월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문다.
그런 진월이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그 애도 데리고 들어와."
..
언제 따라 나오셨는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진월이네 아버지.
짧지만 굵은 그 한마디를 던지고 다시 호텔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위엄있는 목소리에 꼼짝없이 굳어버린 진월이는..
아무런 초점도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구걸하는 사랑같은거..하고 싶냐?"
..
난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웃음 말고는 대신할 수 있는게 없었으니까.
정말 비겁한놈 강진월..
내 성격, 세상을 바라보는 눈, 마음..모든걸 변화시킨건 너잖아.
"구걸이라고 생각하세요..? 강진월씨는 그렇게 생각해요?"
"괜한 시비 걸지마.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진월이는 다음 말을 삼켜버렸다.
무슨 말일지 짐작은 대충 갔지만..그냥 모른척 해버렸다.
진월이는 나를 짜증스럽게 내려다보곤..
주머니에 두손을 넣은채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서
호텔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난 호텔 안으로 사라져가는 진월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릴까 하고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지만,
여기서 돌아가면 지는것만 같아 녀석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달라질건 없으니까.
내가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송예린.
악마같은 눈빛으로 날 훑어보다가, 다시 선량한 눈으로 돌아온다.
"언니..아까는 좀 놀랐는데. 그래도 반갑네요."
싱긋.
그래. 넌 계속 싱긋 웃어.
난 전혀 기죽지 않아. 화 내지도 않을거야.
니가 좋아할 반응 따윈 나타내지 않을거야.
"응. 나도 반갑네."
난 송예린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송예린은 잠시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예쁘게 미소짓는다.
그리고..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송예린의 옆에 앉는 진월이.
앉을 자리를 고민하느라 머뭇거리던 난..
무표정으로 옆자리를 손짓하시는 진월이의 어머니 옆에 앉아버렸다.
"낯이익는 아가씬데..이름이 뭐지?"
"김민율이라고 합니다. 먼저 인사 못드려서 죄송해요.."
"이름이..김민율이야?"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시며 묻는 진월이네 어머니.
진월이는 어머니를 닮았나보다..
매서운 눈빛이나, 차가운 말투나.
진월이네 어머니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곤 나를 바라봤다.
그러자..물을 마시고있던 진월이네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당신이 생각하는애가 맞아. 김회장님 손녀야."
..
순간. 난 하마터면 물컵을 놓칠 뻔했다.
너무도 태연한 말투로 말씀하시는 진월이네 아버지..
그리고..이제야 알겠다는듯 씩 웃어보이시는 진월이네 어머니.
진월이네 부모님이 우리 할아버지는 어떻게 아신걸까..
내가 할아버지의 손녀라는것도..어떻게..
"어쩐지 낯이 익더라구. 니가 민율이였구나.."
"..저.."
"회장님은 잘 계시니?"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하는 진월이네 어머니.
난 그저 물만 들이키며 말없이 진월이를 바라봤다.
진월이조차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눈치..
"민율이 넌 어렸을때 얼굴이 꽤 많이 남아있구나."
"저..어떻게 저희 할아버지를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기억 안나니? 너희 부모님 교통사고 나셨을때, 우리 그이 병원에 입원하셨었잖아."
..
맞다. 진월이네 아버지는 대학병원 의사지..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진월이네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때 일이 생각난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다.
하지만 난..병원에 가지 않았었는데.
"참 끔찍했지..잔인한 사고였어. 그렇죠 여보?"
"..이제 그만해."
"참, 그러고보니 그 여자 아들은 김회장님이 데려가셨었는.."
"거 그만 하래도."
"아 알았어요. 애들 앞에서 핀잔이나 주고 싶어요?"
진월이네 어머니는 남편의 다그침에 말을 멈추고...
자존심이 상한듯한 얼굴을 한채 머리를 쓸어 넘기셨다.
난 진월이네 어머니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뭐였을지가 궁금해
뚫어져라 바라봤지만..그저 조용한 침묵이 흐를 뿐.
하지만 곧..뾰루퉁해져있던 진월이네 어머니가 송예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이름이 송예린이라구?"
"네?..아 네."
"..뭐 이쁘장하게 생겼네.
아참, 진월이랑 민율이랑 무슨 사이인지를 안물어봤네!"
갑작스레..관심대상이 나로 바뀌어버린 진월이네 어머니.
순간, 난 볼 수 있었다. 송예린의 똥씹은듯 구겨지는 인상을.
진월이는 한숨을 내쉬며 자기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진월이네 어머니는 아들의 시선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듯,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나를 하나하나 뜯어보신다.
"목걸이가 순금같네..할아버지가 해주셨나보지?"
"..엄마 유품인데요."
"어머..그래?"
진월이네 어머니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레드와인을 따르며
곁눈질로 내 목걸이를 바라보신다.
도대체..처음 봤던 그 카리스마 이미지는 어디로 간거야.
진월이는 어머니를 닮은게 아니었어.
"그나저나..진월이랑은 도대체 무슨사이야? 보통사이는 아닌것 같은데."
"예?..진월이랑은..그러니까.."
"사귀는 사이니?"
..
뭐라고 대답해야돼.
사귀는것도 아니고..안사귄다고 하면 여길 왜왔냐 할테고.
난 손끝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때..
"..엄마. 앞에 예린이 있는거 안보여요?"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은 진월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놀란 난 의자를 살짝 뒤로 뺀채 진월이를 바라봤다.
"김민율 너..언제까지 여기있을거야?"
"..뭐?"
"이제 가봐도 될거같은데. 호텔 음식이 맛있어서 계속 있고싶냐?"
..
꾸욱..
아랫 입술을 세게 깨물어버렸다.
강진월한테 이런 대접 받는건 한두번이 아니니까 다 참을수 있지만.
정말 못참겠는건..얼굴에 웃음을 띄고있는 송예린.
"얘가 손님으로 온애한테 뭐라고 하는거야?!"
"엄마도 가만히 계세요. 난 김민율 초대한적 없거든요."
"아니..너 정말.."
"김민율 돈때문에 그런거라면 더더욱 가만히 계시구요.
내가 결혼할 사람은 예린이지 김민율이 아니니까요."
드륵..
난 의자를 뒤로 끌어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화장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미친듯이 씻어냈다.
씻어내고 씻어내고 씻어내고..또 씻어내고.
하지만..
"..강진월은 왜 안씻기는거야."
..
그녀석 마음에 새겨버릴순 없을까?
한번 새기면..지워지지 않는 독한걸로.
'김민율은 강진월을 사랑한다.'
이렇게..새겨버릴순 없을까?
송예린에게 가고 싶어도..그 글때문에 가지 못하게.
..
멍하니 화장실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바라봤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얼굴.
씨. 못생긴것도 아닌데 뭐가 모잘라서 강진월한테 매달리냐?
바보 똥개 말미잘 멍청...
"혹시나 했는데..정말 왔네요 언니."
..
뒤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목소리에 두 눈을 감아버렸다.
제발 부탁이니까..내 눈앞에만 보이지 말아다오.
이게 내 작은 바램이란다.
"언니는 좋겠어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접받구.."
"..나가줄래?"
"저도 손씻으려고 온거에요. 언니만 화장실 쓰라는법 없잖아요?"
"..한가지만 묻자..왜 거짓말했어? 왜 나한테 대신 나가달라고 했니?!"
..
엿 먹이기 위해서겠지. 나 엿먹이려고.
아주 제대로 골탕먹이려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송예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
"재밌잖아요. 언니가 남자때문에 허탈해하는 모습."
..
하..기대 이상의 대답이구나..
송예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하얀 얼굴을 더 하얗게 화장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오히려 언니한테 좋게만 됬네요. 오빠 부모님이 아주 좋아하시는 눈치던데."
"...싸가지.."
"싸가지는 언니겠죠. 따지고보면 언니는 양다리 아닌가요?"
"..뭐?..무슨 소리야 그게?"
"결이라는 경호원은 뭐에요? 그냥 심심해서 씹는 껌이에요?"
..
싫어.
니 입에서 결이 이름 나오는거.. 싫어.
"함부로 결이이름 입에 올리지마!!!"
"그러고보면 그 경호원도 불쌍해요. 언니는 진월이오빠한테 매달리는데.."
"입다물어.."
"그거 알아요? 언니는 아주아주 교활한 여우야. 꼬리 아홉개 달린 여우."
..
툭..
송예린은 내 어깨를 치고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송예린이 나가고 한참 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도 비틀대며 호텔을 나섰다.
그 날. 어두워 질 때까지 집에도 가지 않고 술만 마셔댔다.
그냥..빨리 어두워져서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할때까지.
어떻게 집까지 도착했는지는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앞을 바라보니 캄캄한 집이었다.
"..한 결..안녕?"
..
그리고..
난 결이의 방에 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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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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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1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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