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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宋史)』<곽정열전(郭靖列傳)>
郭靖者, 梁山義士郭盛之後也, 慶歷六年生. 곽정(郭靖)은 양산박(梁山泊)의 호걸인 곽성(郭盛)의 후예다. (경력6년(慶歷六年)은 북송 인종(仁宗)이 6번째로 쓴 연호(慶歷 1041~1048)로 1046년을 말하는 것 같은데, 곽정이 태어나지는 않았겠고, 곽성(郭盛)이 그 해에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곽정이 주어인 문장에서 1046년이 어떻게 걸리는지 모르겠군요.^^)
父早逝, 與母避亂大漠. 生而沉慤, 不妄笑語.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전란을 피해 고비사막(大漠)에서 살았으며. 성품이 신중하여, 망령되이 농담을 하지않았다.
以義助哲別故, 鐵木眞器之. 及長, 平亂有功, 授千夫長. 제베(哲別 Jebe ?~1225)를 의리로 도우니, 테무진(鐵木眞 成吉思汗 Genghis Khan 1162~1227)이 그의 그릇됨을 알고, 수령으로 삼았으며, 전란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어 천부장(千夫長)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年十八, 南下張家口, 遇黃蓉, 雙生情愫. 18살에 남쪽으로 내려와서 허베이성 장지아커우(張家口)에 이르러 황용(黃蓉)을 만나고 서로에 대한 감정(情愫)을 싹 틔웠다.
靖之言行, 頗顯俠義之風, 全眞敎丘處機折服. 곽정의 언행에 자못 협의(俠義)의 풍모를 지녀, 전진교의 구처기(丘處機 1148~1227)를 감복시켰다.
蒙古拖雷出使宋返, 靖路遇之, 因携蓉與之同歸. 송나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툴루이(拖雷 Tolui 1190~1232)를 우연히 만나 황용을 데리고 함께 몽골로 돌아갔다.
旣返大漠, 鐵木眞問以長生之道,
對曰:“中原長春眞人丘處機, 頗具仙骨, 世人多景仰之, 或有長生之法.” 고비사막(大漠)으로 돌아오니, 테무진(鐵木眞)이 오래사는 법(長生之道)을 물었다. 곽정이 대답하기를 "중원의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丘處機)는 신선의 골격을 갖춘 인물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니, 장생의 도리도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일렀다.
遂遣使赴召及見, 處機拳拳以愛民爲本勸之. 이에 사신을 보내어 구처기를 초청하여 배알케하니 구처기는 공손히 '백성을 아낌(愛民)을 근본으로 할 것'을 권했다.
鐵木眞欲立太子, 朮赤、察合台不合, 兵戎相争, 靖領兵平之. 테무진이 태자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큰아들 주치(朮赤 Zhuchi 1177~1225)와 둘째아들 차카타이(察合台 Chahetai ?~1242)가 화합하지 못하여, 서로 군대를 일으켜 다툴 때, 곽정이 이를 평정하였다.
徵撒馬爾罕城, 多靖、蓉之功也. 사마르칸트(撒馬爾罕 Samarqand)를 정벌할 때 곽정과 황용의 공이 컸다.
城破, 鐵木眞欲盡屠之, 靖以止殺爲勸. 사마르칸트를 함락한 후, 테무진이 (성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도륙하려하자, 곽정이 살육을 그칠 것을 권유하였다.
西方初定, 鐵木眞遂萌滅中原意. 서방정벌이후, 테무진이 중원을 멸절(萌滅)시킬 생각을 품자,
靖深患之, 携蓉與母亡歸宋, 不成, 爲俘, 靖母勉子以家國之義, 靖康之恥, 遂自刎. 곽정은 이를 근심하여, 황용과 어머니를 모시고, 송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신세가 되었다. 곽정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가정과 국가의 의미와 정강지치(靖康之恥)를 일깨우고는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
哲別素善靖, 縱之. 제베(哲別)는 본시 곽정을 좋아하여 그를 풀어주었다.
蒙古拖雷領兵圍我襄陽, 靖以襄陽安撫使呂文煥素怯, 往助之. 툴루이(拖雷)가 군대를 이끌고 양양(襄陽)을 포위하자, 곽정은 양양의 안무사 여문환(呂文煥)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가서 도움을 주었다.
慮及敵衆我寡, 陰圖刺殺拖雷以解圍, 適逢鐵木眞病篤, 急召拖雷北返,
靖思及鐵木眞于/於己之恩, 與還. 적의 병력은 대군인데, 아군의 병력이 소수라는 생각이 미치자, 몰래 툴루이(拖雷)를 살해할 음모를 꾸며 위기를 헤쳐나가려 하였다. 때마침 테무진의 병환이 위중해져서 툴루이가 소환되었으며, 곽정도 테무진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해서 함께 돌아갔다.
鐵木眞談及英雄之謂, 靖以其殺人無數, 非大英雄可比相對. 테무진과의 대화가 영웅(英雄)이라는 주제에 이르자, 곽정은 테무진이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였으니, 대영웅에 비할 수는 없다 하였다.
靖助守襄陽數十載, 克己愛民, 善撫士兵, 每遇大戰, 必親臨指揮, 日夕守戰尤力. 곽정은 수십년동안 양양(襄陽)을 방어하는데 힘을 보탰으며, 극기애민(克己愛民)하고, 병사를 격려하여, 매번 전투를 치를 때에는 몸소 지휘에 임하니 단시간내에 방어전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時人呼爲大俠, 天下皆慕其名. 당시 사람들은 곽정을 대협(大俠)이라 부르고, 천하가 모두 그의 이름을 흠모하였다.
咸淳四年, 蒙古復以重兵相圍, 八年, 筑鹿頭山寨于/於襄樊之南, 圍益緊. 송의 마지막 황제 도종(度宗 1265~1274)때인 1268년 몽고가 다시 대군을 이끌고 포위하니, 1272년에는 양번(襄樊)남쪽 축록두산(筑鹿頭山)의 요새에 대한 포위망이 한층 긴박하게 되었다.
襄陽大飢, 人竟相食. 이에 양양(襄陽)은 대기근이 들고, 사람들이 마침내는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九年正月, 樊城破. 二月, 復攻襄陽, 靖蓉夫婦領兵迎戰, 皆死. 呂文煥以襄陽降. 1273년 정월 번성(樊城)이 먼저 함락당하고, 2월에 양양(襄陽)을 공격해오니 곽정과 황용부부는 군대를 이끌어 항전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고, 여문환(呂文煥)은 항복하였다.
靖之長女郭芙, 嫁與耶律楚材長子齊;二女郭襄, 後爲峨嵋派始祖. 子破虜, 城降之日殉國.
곽정의 장녀 곽부(郭芙)는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3)의 장남 야율제(耶律齊)에게 시집을 갔으며, 차녀 곽양(郭襄)은 후에 아미파(峨嵋派)의 시조가 되었다. 곽정의 아들 곽파로(郭破虜)는 성이 항복하는 날 순국하였다.
靖卒年七十有三, 追諡忠武侯. 곽정(郭靖)은 73세로 세상을 떠나니, 충무후(忠武侯)로 추증되었다.
그러면 곽정(郭靖)은 실존인물일까요? 중국사이트에『송사(宋史)』<곽정열전(郭靖列傳)>이라는 제목으로 열전(列傳)의 문투를 흉내내며 쓴 글들이 여럿 보이길래 재미있어 보이기도 해서 한번 해석을 달아봤습니다. 위의 내용은 사조영웅전의 줄거리와 너무 유사하고, 이렇게 소설과 같은 활약을 한 곽정이라는 인물이 실재했을 것으로 믿는 독자는 없겠죠.^^ 중국독자들이 이렇게 소설을 쫓아가며 추정하고 있던데, 곽정의 생몰연대을 1200년 10월경에 출생해서 1273년 1월31일에 자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더군요. 그러면 김용선생은 작품에서 인물들의 성격에 부합하는 이름을 지어내는데, 탁월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시는데, 곽정이라는 인물을 설정하기 위해 참고한 인물은 없었을까요.『송사(宋史)』의 <충의열전(忠義列傳)>에는 양진중(楊震仲)이라는 인물의 열전이 실려있는데, 이 양진중열전의 부록정도로 보면 될듯한 분량으로 부가된 부분에서는 실제 곽정(郭靖)이라는 인물의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상의 곽정과는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김용선생이 인물을 구상하고 설정하는데 충분히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동방망(東方網 http://news.eastday.com/) 2006년 6월17일자 "史上的郭靖死於宋金戰爭"라는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더군요.^^ 분명 엉터리로 해석된 부분이 있을테니, 참고만 하시기를...
『송사(宋史)』<충의열전(忠義列傳)> 양진중열전(楊震仲列傳) 中 곽정전(郭靖傳)
有郭靖者, 高橋土豪巡檢也 곽정(郭靖)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시 가오차오(高橋)의 지방토호 호위대수령(巡檢)이었다.
吳曦叛, 四州之民不願臣金, 棄田宅, 推老稚, 順嘉陵而下, 過大安軍, 楊震仲計口給粟, 境內無餒死者. (1207년 쓰촨(四川)과 산시(陝西)일대를 관할하던 오희(吳曦)라는 장수가 금(金)에 투항하여 촉왕(蜀王)을 자처했다.) 쓰촨(四川)의 백성들은 금(金)의 신하가 되는 것을 원치않아서, 집과 논을 버리고, 노인과 아이를 앞세우며, 자링강(嘉陵江)를 건넜다. 지금의 산시(陝西) 닝챵(寧强)현의 대안진(大安鎭)를 지날때 양진중(楊震仲)이 곡식을 내어 급식케하니, 경내에는 아사자가 없었다.
曦盡驅驚移之民使還, 皆不肯行. 오희(吳曦)가 이주하는 백성들이 돌아오게 다그쳤으나, 모두 이에 응하지 않았다.
靖時亦在遣中, 至白關, 告其弟端曰: 곽정 역시 파견(?)중에 있었는데, 백관(白關)에 이르러 동생 단(端)에게 이르기를,
吾家世爲王民, 自金人犯邊, 吾兄弟不能以死報國, 避難入關, 今爲曦所逐, 吾不忍棄漢衣冠, 願死於此, 爲趙氏鬼.
"우리가문은 대대로 임금의 백성이다, 금나라사람들로부터 변경이 침략당했어도, 우리형제는 죽음으로서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고, 난을 피해 입관(入關)하고 있으니, 지금 오희(吳曦)가 내몬 까닭이다. 나는 한족의 의관을 버리는 것을 참지 못하겠으니, 이 곳에서 죽어 조씨(趙氏)왕조 송나라의 귀신이 되겠다."
遂赴江而死. 그리고는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
첫댓글 김용 대단하다 정말...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