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은 ‘사도들의 사도’라고 불린다. 두려워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던 열한 사도에게 주님의 부활과 그분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다시 하느님 자리로 되돌아가신 주님, 이 두 분을 다 뵈었고, 그 신비로운 과정을 겪은 사람이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이 선택하고 양성했다면, 이 성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새로운 사람,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만난 덕에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갔다고 증언한다(루카 8,2).
유명한 연예인이나 가수의 공연을 보거나 드라마나 영화 촬영 장소에 가보기 위해 한국까지 오는 외국인들의 열정이 놀랍다. 그들을 얼마나 좋아하면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이 예수님에게 가진 지극한 존경심과 애정이 그런 것과 비슷했을 거 같다. 성인은 일정 거리 이상 걸어 다니면 안 되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그 새벽에 예수님 무덤을 찾아왔다. 황망하게 장례를 치르느라 예수님 시신에 염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이었을 거다. 빈 무덤에 놀라고, 다시 돌아가 이 가슴 아픈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고, 다시 또 빈 무덤에 와서 그 앞에서 울었다. 제발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그 정원 지기에게 간청했다.
성인의 그런 애정과 열정은 영화나 뮤지컬로 만들어질만하다. 세속 사람들은 신적인 사랑과 이성 간의 애정을 교묘히 섞어 흥미를 유발하지만, 이는 성인에 대한 모독 또는 불경스러운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 덕에 일곱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이 됐는데 그분을 남자로 사랑하게 됐을 수는 없을 거 같다. 이성 간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에 비교될 수 없듯이, 성인의 예수님 사랑도 인간의 단순한 애정에 비교될 수 없다. 성인의 그런 존경과 사랑은 더 고양된다.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게 된 성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20,17).” 성인이 그때까지 예수님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 정도로 존경하고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이제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전례력으로 오늘을 기념일에서 축일도 격상시킨 이유가 이것일 거 같다. 한 인간이, 일곱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을 정도로 비참했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새로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다시 영원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 존경하는 스승 안에서 구세주 메시아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 그리고 한 사람이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 즉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일곱 놈은 아니지만 한두 마리 마귀가 나를 늘 괴롭힌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고 거룩해지기를 바라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예수님이 말씀 한마디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아니 그전에 그것들이 예수님을 뵙자마자 덜덜 떨었던 거처럼 주님이 아니면 이것들을 내게서 쫓아낼 수 없다. 다른 건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지만 그건 못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인은 단지 공경과 추앙의 대상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하느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희망의 표지다. 일곱 마귀에서 새 사람으로, 존경과 애정에서 신적인 사랑으로,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과정, 성인은 이 모든 과정을 겪어 그 모범을 우리에게 남겨줬다. 내가 주님께 청하기만 하면 그 즉시 천상 은총이 내게로 들이닥쳐 내 안의 마귀 새끼를 다 쫓아낼 거다.
예수님, 의인의 불의한 죽음과 희생이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한계입니다. 부활은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저는 그것을 깨달으려는 노력 대신 성경이 전하는 모든 걸 사실로 믿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상상도 되지 않는 부활과 하느님을 온 힘을 다해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성모님은 정말이지 하느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나마 성모님은 알아들을 수 있고, 성모님을 통해 뿌옇지만 그래도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거 같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