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이기기
2017. 8. 금계
7월 21일 금요일, 일산에 사는 윤 선생이 여름방학을 했다면서 나한테 놀러왔다. 그는 십여 년 이상 거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방학 때면 내가 보고 싶다고 목포로 내려온다.
이번에는 임자도 대광리 해수욕장을 가보고 싶다 했다. 그는 사람이 너무 점잖아서 삼복더위에도 점잖은 옷을 입고 왔다. 하는 수 없이 내 셔츠를 입히고 내 모자를 씌우고 내 슬리퍼를 신도록 했다.
그를 만난 것은 1994년 해남중학교에서였다. 그 해 3월, 나는 전교조 문제로 해직 당했다가 복직했다. 열두 살 아래 띠 동갑, 나는 목포에서 해남까지 그의 승용차를 많이 얻어 타고 다녔다.
어쩌다가 그의 작품을 읽어본 나는,
“이제 다 되었네. 투고해도 되겄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평화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당선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얼마 후에는 시인으로도 등단하였다.
그는 내 인생행로에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장인정신이 투철하고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또한 가장 부드럽고 온화하고 화기애애하고 다정다감하고 관후 인자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부부 금슬이 너무도 좋은 사람이다. 집안일에 나 몰라라 하는 나와는 달리 일터에 나다니는 아내를 돕기 위하여 집안일을 기꺼이 거든다. 아내는 남편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주 헌신적이다. 그 부부는 식탁에 앉아 한두 시간씩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반사란다.
대광리 해수욕장 가까운 ‘편안한 횟집’ 밖에서 한 장 찰칵.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 윤 선생은 전화로 나와 아내의 옷 치수를 물었다.
“옷은 무슨, 그냥 내려오시게.”
아무리 뻗대도 소용이 없었다. 줄기차고 집요한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끝내 나는 100이고 아내는 77이라고 자백하고 말았다. 나와 아내의 셔츠를 선물로 사가지고 왔다. 입어보니 몸에 딱 맞고 마음에 딱 들었다. 그 길로 끼어 입고 대광리 해수욕장 가는 길에 나섰다.
그 동안 윤 선생은 도리우찌를 자주 사다주었다. 그러고 보니 저 도리우찌(헌팅캡, 납작모자)는 윤 선생이 사온 게 아니라 전번에 조창익 선생 아드님 주례를 서고 선물로 받은 모자로구나.
그러고 보니 나는 평생 동안 내 주위의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너무나 많이 받고 살았다. 하해와 같이 크나큰 은혜를 입으면서 조금도 보답을 하지 못했다. 고맙고 죄송할 따름이다.
대광리 해수욕장, 모래밭은 십 리가 넘게 뻗쳐 있고, 아직은 수영객이 드물었다. 해수욕장을 통째로 전세 낸 기분이었다. 물은 알맞게 따뜻하고 시원했으며 개펄로 온몸을 문지르는 느낌이 훌륭했다. 소금기 많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언젠가는 윤 선생이 5월에 놀러왔다. 둘이서 압해도 송공항에서 차를 배에다 싣고 암태도로 건너가서 자은도 분계 해수욕장으로 놀러갔다. 아직 봄철이라 백사장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자은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동창회를 마치고 정자에 앉아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50대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었는데 우리더러 술 한 잔 하고 가라고 했다. 얼음에 채워 온 병치와 갑오징어가 그렇게 맛날 수 없었다.
또 한 번은 둘이서 함평 시장을 구경하고 거기에서 순대를 조금 샀다. 귀로에 무안 학마을에 들렀더니 왜가리 백로들이 솔밭을 하얗게 덮은 채 까옥거리고 있었다.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순대에다 소주를 마시려는 참인데 동네 할아버지들이 지나갔다. 결국 모르는 동네 할아버지 여남은 분과 어울려 소주를 마시던 일도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았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윤 선생과 놀러갔던 곳을 헤아려본다. 무안 사창의 짚불구이, 임실 옥정호, 구림 도갑사, 관매도, 청산도, 보길도, 우수영, 삼천포.......
이번 방학에도 윤 선생은 꽤 오랫동안 함안 용타스님 밑에서 지낼 예정이라 한다. 1980년부터 시작된 용타스님의 동사섭(同事攝)은 중생과 희로애락을 함께한다는 뜻인데 불제자보다 일반인들의 참가율이 도드라지는 수행명상 프로그램이란다. 내가 보기에는 윤 선생이 용타스님의 수제자쯤으로 여겨지는데 또 윤 선생은 날더러 일부러 동사섭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이미 몸으로 동사섭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치켜세워준다.
그는 이 세계에 펼쳐진 삼라만상이 죄다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엮여 있음을 역설한다. 그대여, 너와 나는 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거나.
대광리 해수욕장 아주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편안한 횟집’ - 이름 그대로 참 편안하고도 푸짐하고도 싱싱하고 맛난 횟집이었다. 뭐 한 접시 먹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농어 회 먹으라고, 한 접시 얼마냐고 물었더니 8만 원이라고, 조금 비싼 편이지만 피서철 해수욕장 부근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들어갔는데, 웬걸 스끼다시(밑안주, 기본안주)를 보면서 느낌이 홱 달라졌다. 개불에다 멍게는 그야말로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요, 민어회 몇 점에다 민어 부레 두 점. 꿈틀거리는 낙지 반 접시, 감성돔 회 몇 점, 광어 회 몇 점 - 이것만으로도 소주 몇 병은 거뜬히 해치울 만큼 푸짐했다.
나는 먹음직스러운 안주만 보면 사진 찍을 생각조차 까맣게 잊은 채 허겁지겁 상 앞으로 다가서기 일쑤다. 이번에도 싱싱하고 맛난 안주 몇 점에 부지런히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퍼뜩 사진이 생각나서 부랴부랴 카메라를 찾아 먹다 남은 안주를 찍었다.
혹시라도 다음에 임자도 가시는 분들은 꼭 ‘편안한 횟집’에 들러보시기 바란다. 그 식당에서 거창하고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만찬을 마치고 남은 농어회를 싸주라고 해서 펜션에 가지고 와서 야구 중계를 보면서 또 한 잔.
기아가 비실비실한 롯데한테 또 졌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싹쓸이 당했다. 싱거운 친구들 같으니라고.......
7월 22일 토요일, 목포로 나오는 길에 윤 선생이 ‘엘도라도’를 구경하고 싶다 해서 지도에서 슬로시티 증도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황금의 땅’이라는 ‘엘도라도’에는 눈을 씻고 봐도 황금이 없었지만 그 대신 멋진 모래사장이 큰 호를 그리며 누워 있었다. 그대들은 황금을 좋아하는가. 나는 맨발에 밟히는 모래의 촉감이 황금보다 더 좋을 것 같다.
조금 숙박료가 비싸기는 하겠지만 ‘엘도라도’는 가족 단위로 피서 와서 하루 이틀 쉬어가기 딱 좋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자도 대광해수욕장은 손님이 거의 없었지만 ‘엘도라도’는 벌써 숙소마다 차가 빽빽이 들어섰고 수영객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또 슬로시티 증도는 짱뚱짱뚱 짱뚱이들이 뛰어다니고 염전 체험도 할 수 있어 여러 가지로 자연과 더불어 거닐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1986년인가 87년인가 목포제일중학교에서 전교조의 전신인 교사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그 회원들이 여태까지 모임을 함께 하고 있다. 이름하여 ‘코끼리떼’ - 제일중학교 뒷산 이름이 코끼리산이었다.
7월 27일 목요일, 코끼리떼는 12인승 승용차를 빌려 타고 목포에서 광주를 거쳐 세종 시에 도착하였다. 오 선생이 교과서 자문위원이라던가. 그 인연으로 교과서 박물관을 구경하게 되었다.
교과서 박물관이 있는 ‘미래엔’은 대한교과서와 국정교과서가 합친 회사란다. 교과서 박물관에는 광복 이후의 각종 교과서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노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1955년에 나는 나주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이 글씨본으로 붓글씨 연습을 하였다. ‘고기’를 얼마나 많이 썼던지, 습자지를 얼마나 구겨 버렸던지 손에서 생선 비린내가 날 정도였다. 나는 ‘고기’를 교과서처럼 멋지게 쓰지 못했다. 선생님이 대충 가르쳐주었던지, 아니면 선생님은 잘 가르쳐주었는데 내가 서투르게 썼던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교과서 박물관에서 62년 만에 4학년짜리의 애를 먹였던 교과서를 들여다보노라니 어디선가 먹 향기가 풀풀 풍기는 듯하였다.
교과서 박물관에서 이 사진을 보니 옛날의 운동회가 생각났다. 그 시절에는 아슬아슬한 텀블링 곡예가 운동회의 꽃이었다.
내가 노안국민학교 5학년을 맡았을 때의 일이었다. 운동회를 준비하려고 운동장에서 5,6학년들이 텀블링 연습을 하는데 4단도 아니고 아주 쉬운 2단으로 한 학생 등 위에 올라가 ‘타이타닉’처럼 양팔을 벌리는 동작이었는데 어떤 학생이 재미가 있었던지 쑥스러웠던지 히죽히죽 웃다가 그만 등 뒤에서 미끄러져 떨어져버렸다. 손목이 부러져 금방 부어올랐다. 당황한 김에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시골 구석지 할아버지가 부목을 대고 붕대로 감아주었는데 솜씨가 서툴렀던지 손목이 반듯하게 붙지 못하고 뼈가 살짝 엇물려 붙었다. 그 학생의 불거진 손목을 어루만질 때마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7월 28일 금요일, 부여에서 자고 궁남지(宮南池) 연꽃 구경. 백제 무왕 때 궁궐의 남쪽에 만든 연못. 지금의 넓이보다는 훨씬 넓었을 것으로 추정. 분홍빛 흰빛 연꽃들이 만발하여 무안 백련지 연꽃보다 더 화려하고 연못도 더 아기자기 짜임새 있다는 느낌.
삼국유사 무왕조.
-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전북 완주군 대둔산.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기이하고 특출하고 멋졌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자 산바람이 시원하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산들이 겹겹이 포개져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산악국가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 백제 무왕 때 세운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큰 석탑. 국보 11호. 현재 복원 공사 시행 중.
찜통더위를 이기는 확실한 방법 -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어슬렁어슬렁 좋은 곳 구경하고 맛난 것 먹기.
7월 29일. 바야흐로 제주도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서객으로 득시글득시글.
초록 구명복을 입고 등을 돌린 두 녀석이 나의 손자 손녀
7월 29일 토요일 새벽, 나와 아내는 무안 공항에서, 며느리와 두 손자 손녀는 광주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비행기 표는 아들이 미리 끊어놓았다.
지난 3월에 둘째아들이 법원에 취직이 되어 제주도로 발령받았다. 한 번 다녀가시라 했다. 기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도 한림면 협재리에 있는 우리 넷째동생의 처가.
우리 동생은 은행 제주지점에 근무하다가 제주 아가씨와 눈이 맞아서 결혼했다. 이제는 장모님마저 돌아가셔서 리모델링한 집은 텅텅 비었다.
동생네 처가에서 하룻밤을 잤다. 제수씨의 친척 되시는 분이 저녁에 성찬을 베풀어주셔서 맛나게 먹었다. 집이 넓고 시원하였지만 폭염에 에어컨이 없어서 조금 힘들었다.
동생이 결혼하기 전에 우리 부부가 협재에 들렸던 적이 있는데 그 시절에는 동생 처가가 이 사진 비슷하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다.
이 조각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아시겠는가. 위에서는 사람이 똥을 누고 아래에서는 돼지가 그걸 받아먹는 광경이다.
그게 지금 제주 명물이 된 흑돼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뱀을 무서워했던가 보다.
제주도에도 뱀을 무찌른 용사의 용맹한 이야기가 전해오는가 보다.
제주의 섬들은 다정했으며 손자 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각별했다.
7월 30일, 산방산
7월 30일, 상어지느러미 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