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들어서는 사람은 당연히 환자이다.
사주를 묻는 사람 역시 마음의 환자이다.
어머니가 딸아이의 생일을 대면서 사주를 봐달라면 어머니와 딸이 환자이다.
아직 고등학생일 때는 내 자식의 학교 진로를 어떻고 하여야하나 답답한 마음 탓이다.
그 말을 듣는 나도 답답하다. 이런 일은 사주쟁이에게 물어볼 일 아니라 학교에서 진학상담을 해줄 일이다.
학생 진로 상담에 한계를 느끼는 엄마들이 얼마나 답답하면 사주쟁이를 찾으랴.
그래도 그런 일은 희망적이다.
거의 삭은 목소리로 엄마가 22살 딸의 사주를 대고 기다릴 때는 나도 긴장이다.
무슨 깊은 사정이 있다.
속사정이 사주를 푼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마디는
" 따님을 일찍 결혼 시키면 한 번은 실패를 하겠어요. 남자 조심을 시키세요."
했지만, 그 엄마의 말을 들으니 사후 약방문이다.
" 아이가 집을 나갔어요. 연락도 안 되고. 사내아이와 사겨 야단을 쳤더니. 혼인 신고까지 해버렸으니. 그 아이가 언제쯤 집에 들어올까요."
" 아이고. 어머니. 만날 때 이야기를 들어주고 하시니 닦달을 하니 집을 나가고 일을 저지르지요."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나는 어지럽다.
함께 걱정을 해달라고 내게 전화를 건 것이 아니다.
대책을 세워달라는 것이니, 내가 이 집 딸의 사내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니 잡아들일 수 없다.
" 학교도 안나가고 어디서 사는지. 아버지는 펄펄뛰고 딸 하나를 애써 대학을 보냈더니 이 꼴이 되었으니 어쩝니까?"
사주를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신세한탄이다.
집도 절도 없는 이 젊음들이 가있는 방은 어디란 말인가.
사주로 풀지만 마치 뜬구름 가는 방향 같다.
내가 동쪽이라 한들 동쪽 어디며, 서쪽이라 한들 해지는 어디란 말인가.
돌아올 날은 라면 하나 살 돈이 없고, 죽지 못해 살아야 할 그때가 돌아올 때이다.
그때가 되어도 아버지의 노여움이 있는 한, 딸아이는 오갈 데가 없다.
이러기에 팔자는 못 속인다는 말은 남자가 주위에 감싼 사주는 이리도 고통이다.
사랑은 올가니즘 같다. 즐거움은 순간이고 괴로움은 길어 청춘을 망치고 허무하게 중년으로 접어들게 되니 이 팔자를 너는 어찌 알았겠냐.
22살 꽃 다운 나이에 벚꽃아래 청춘의 함박웃음이나 웃고 말지.
딸아이가 언제쯤 들어 올 것이냐.
엄마의 하소연은 그쯤 머물고, 딸의 사주가 올데갈데없이 가로 막히는 어느 날에 집으로 오리라 말하면서 자식은 부모가 죽어서 부모 마음을 알기에 엄마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딸아이가 남자를 사귀는 것은 아주 정상이다.
남자 집안이 볼 것이 전혀 없다고 부모가 반대했다하나 젊음 자체가 얼마나 귀하냐.
부모가 가진 것을 가지고 딸의 남자를 판단할 때, 딸은 좌절하고 탈출을 궁리했으니.
딸을 사랑하듯 딸의 애인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주어야한다.
이미 혼인 신고를 해버렸으니 딸의 사랑은 완성인가, 시작인가.
아직 한참 공부를 할 나이에 사랑은 정말 병이 되었구나. 어찌 남의 딸 이야기로만 흘릴 것이냐.
제 운명을 제가 만들었다가 보다 어른이 만들었다.
이런 사랑, 이런 괴로움이 어찌 이 집 뿐이랴.
부모의 업이며, 자식의 업이로구나.
마음은 열고, 가슴을 열고 가슴에 끌어안아야 할 어린 것을 세상에다 내다 버린 듯 부모는 울고 있는데.
너는 지금 옥탑방 어느 구석, 지하실 어느 방에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