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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신목사님 22주기 추모식
e춘섭(좋은아침) 추천 0 조회 168 10.03.01 18:18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신형욱 목사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22년이 되었습니다. 실로암교회에서 해마다 신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에 감사 드립니다. 22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아주 짧은 시간인데, 요즘같이 망각이 빠른 시대에는 그냥 잊어버기 쉬운 게 현실입니다. 이세상에 남겨둔 자식, 가족 친지 하나 없는 목회자를 기억하는 것 자체가 매우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어찌보면, 기억하는 일, 기념하는 일입니다. 옛날 교회 모든 성찬상에는 <나를 기념하라>는 성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성찬은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입 

니다. 2000년전 우리를 위해서 사시다가 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신앙공동체의 맥을 이어가는 일이고, 신앙전통을 풍요롭게 하는 일입니다.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뿌리를 확인할 때, 우리는 더욱 튼튼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신목사님에 대한 기억과 추억할 이야기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나는 3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가난했던 저희에게 고등학교 등록금을 만들어주셔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지인들과 교회지도자들을 통해서 장학금을 마련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입학장학금을 전해주셨습니다. 두고두고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저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섬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둘째는 1972년 겨울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을 앞두고 실습을 나가있을 때 쯤입니다. 어머님이 부인병계통의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어려운 형편에 처했었습니다. 어머니 수술을 기다리면서 병원에서 간병중인 저희에게 심방오셔서,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대수술을 앞두고 있던 어머니, 여러가지 어려움 병원비 등 어려운 문제로 앞이 캄캄하던 저에게 얼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을 평생 요절 말씀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목사님은 해방되던 해, 평양신학교를 수료하시고, 월남하셔서 시흥에 있는 군자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1952년 한신(학부3회)을 졸업하시고, 1953년에 보광동교회에 부임하셔서 우리들과 인연을 맺으시고, 1986년에 실로암교회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과 반목의 시절, 오롯하게 교회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으시고, 애오라지 목회일념으로 교인들을 양육하고, 교회공동체를 가꾸셨습니다.

 

1. 그분은 복음주의자이셨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교인들과 교회공동체 양육에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틈나면 남산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찾으셔서 공부하시며 기도하시면서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실때는 뜨거운 열정의 웅변가셨고, 일상에서는 다소 과묵하시고, 어려운 목회자가 아니셨나 생각합니다. 교인들에게 딱딱하고 어렵게 여겨지기도 했었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반듯하고 깔끔하신 단아하신 목사님... 우리 교인들의 역할 모델이셨습니다.

 

2. 그분은 열린교회, 선교하는 교회를 강조하셨습니다. 보광동에 부임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1955년 성실회(학생회)를 만드셔서 청소년들의 모임을 만드셨습니다.  유신치하 암울했던 시절에 청년들의 활동을 이해해 주시고, 그 당시로는 어려웠던 시국강연회와 같은 집회를 허락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보광동교회에 시무하시던 시절에는 교회를 개방하여 지역청소년들을 위한 독서실, 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초기에 간사로 활동하였습니다만, 항상 교회를 지역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미래구원 뿐만 아니라 현세구원의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곤 했었습니다.

 

3.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셔서, 보광동에서 청춘을 바쳐 목회하시고, 1980년 미국이주를 결정했다고 하실 때, 찾아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왜 미국에 가시려는가? 여쭈었더니, 인생은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뜻 를 말씀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1985년에 다시 오셔서 실로암못가의 병자들을 떠올리시면서, 실로암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자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시기에 신목사님을 만났고, 그 의 영향을 받아 청소년기를 살았고,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그 분을 기억하며 기립니다. 그분은 단지 실로암 교회를 개척하신 목회자 한 분이 아니라,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고, 자라게 하시고, 이제껏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한알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생명의 진리를 몸으로 사신 고 신형욱목사님을 기리면서, 우리도 그 생명의 씨앗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갑시다. 살롬! 주님의 평안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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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3.01 18:18

    첫댓글 2월28일 오후 4시 실로암교회에서 신목사님 22주기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준비해주신 실로암 가족들과 참여하신 동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10.03.01 20:53

    말씀 증거해 주신 이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오늘이 3.1절이네요 오늘날 중학생들의 40%가 3.1절이 무슨날인지 모른다네요 ???? 누구의 잘못인지 우리 모두 깊게 생각해봐야 할것 같아요.......

  • 10.03.02 06:04

    영국에서도 지지난핸가 그곳 중고생들도 대다수가 처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요즘 젊은 세대의 문제인 것 같읍니다. 오늘이 3월1일인줄 이제야 알았읍니다. 그러고보니 이날이 제가 22년전에 한국에서 결혼하고 네덜란드에 입국한 날입니다. 그리고 신목사님께서 같은 해에 돌아가신 것 지금에서야 알았읍니다. 이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숙연해집니다.

  • 10.03.02 10:35

    이리 그 뜻을 기리는 훌륭한 분들로 인해
    천국에서 미소지으시리라 여겨집니다

  • 10.03.03 00:43

    항상 인자하게 웃으시던 속 깊은 목사님을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던 가스펠 공연을 흔쾌히 허락하시고 지원해 주셨던 일도 기억납니다. (그런데...세 번째 에피소드는 뭐죠? ㅋㅋ)

  • 작성자 10.03.04 13:31

    그러게 세번째 에피소드는 미국에 가시면서 성서주석(IB)을 선물로 주시면서 격려하셨던 일과 내가 경기노회 수원교회에서 목사안수받을 때 (86.11.11)에 축복하시면서 격려해주셨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누락되었구먼.

  • 10.03.05 08:58

    잠시나마 신목사님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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