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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속세 김훈
공이 울렸다. 관중석에서 함성이 일었다. 빈 몸 속을 바람이 쓸어가는 듯 했다. 강력 조명이 쏟아져들어왔다. 링 바닥에 대각선으로 써놓은 니르바나(NIRVANA)의 광고 문구가 나트륨 불빛에 드러났다. NIRVANA의 N 쪽이 챔피언인 홍코너였고 A 쪽이 도전자인 내 쪽의 청코너였다. 세컨드가 내 등을 밀었다. 나는 나아갔다. 갑자기 시야가 좁아졌다. 홍코너 쪽에서 일어서는 챔피언 김득수의 머리와 상체만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관중의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링 가운데로 스텝을 밟아들어갔다. 나는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겨누는 자세로 오른쪽 어깨를 안쪽으로 당겼다. 왼주먹과 왼팔로 상체를 막았다. 챔피언 김득수는 오른편 주먹으로 얼굴을 가리고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앞세웠다. 김득수는 왼쪽으로 돌면서 두 팔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가 레프트 스트레이트로 들어올는지 라이트 훅으로 들어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두 팔의 위치를 바꿀 때마다 내 방어의 포즈는 바뀌었다. 나는 그를 따라 왼쪽으로 돌면서 라이트에서 레프트 쪽으로 공격의 방향을 옮겼다. 그가 나를 물고 돌았고, 내가 그를 물고 돌았다. 그의 두 팔이 수공(守攻)을 바꾸면 내 팔의 위치가 바뀌었다. 내가 두 팔의 위치를 바꾸면 그의 팔이 바뀌었다.NIRVANA 광고 문구의 R자 위에서, 고개를 돌려서 김득수의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피했다. 그의 왼팔이 뻗어나오는 순간, 어떻게 고개를 돌렸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의 왼팔이 다시 공격 위치로 돌아가려는 순간 나는 상체를 숙이면서 어퍼컷을 내질렀다. 김득수가 가벼운 스텝으로 반 보 옆으로 돌면서 내 어퍼컷을 피했다. 김득수는 빠른 스텝으로 반 걸음씩 물러서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나는 코너 쪽으로 밀려났다. 함성이 일었다. 함성은 먼 우레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잽으로 맞받아치면서 왼쪽으로 돌아 코너를 빠져나왔다. 코너를 빠져나오자 NIRVANA의 N이 시작되고 있었다. 적의 코너였다. 거기서부터 광고 문구가 끝나는 내 청코너 쪽은 아득해서 보이지 않았다. 김득수가 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피하며 레프트 훅을 내질렀다. 허공을 가르는 내 오른팔에서 땀방울이 부챗살처럼 퍼졌다. 나는 물러서면서 김득수의 레프트 훅을 피했다. 김득수의 스트레이트를 잽으로 막아칠 때, 땀에 젖은 글러브가 부딪치면서 안개가 뿜어져나왔다. 나트륨 불빛 아래서 안개 저쪽은 몽롱했고 김득수의 상반신이 안개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김득수는 리치가 길었고, 키가 컸다. 내가 어퍼컷이나 훅으로 김득수를 치려면 나는 김득수의 리치 안으로 파고들어가야 했지만, 내가 김득수의 스트레이트를 피하려면 나는 김득수의 리치 밖에 머물러야 했다. 나의 스텝은 갈팡질팡하면서 그의 리치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1라운드의 끝판에, 링 바닥 광고 문구의 R자 위에서 나는 레프트 잽으로 김득수의 턱을 돌렸다. 위력은 없었으나 그의 자세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다시 왼쪽 스트레이트로 몰아붙이려는 순간 공이 울렸다. 1라운드가 끝났다. 먼 것들이 겨우 보였다. 나는 코너를 돌아왔다.
-개 밥 줘라.
내 큰스님은 하루 종일 말씀이 없으시거나, 그 한 마디만 하셨다. 내가 포구마을 선착장으로 내려가서 낚시꾼들을 따라서 섬으로 들어오는 젊은 여자들을 한나절씩 바라보고 오는 날에는 큰스님께서 손수 개 밥을 주셨는데, 그런 날에 스님은 개 밥 주라는 그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절은 남해 한려수도 서쪽 풍도(風島)라는 섬 안에 있는 해망사(海望寺)였다. 섬은 육지에서 멀지 않았지만, 주민이 십여 가구 정도여서 정기 여객선은 닿지 않았다. 이따금씩 군청의 행정선이나 외지에서 오는 낚싯배가 드나들 뿐 선착장은 늘 비어 있었고 섬을 빙 둘러맞은 해안단애 밑으로 파도가 파먹은 동굴이 뚫려있었다. 섬 한가운데 왕버들이 자라는 연못이 박혀 있었고, 해망사는 그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남향으로 들어앉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내력에 따르면 육백 년 전에 이 터에 절이 처음으로 들어섰다는데, 옛 건물은 홍수에 무너져 주춧돌 하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상륜이 부러진 오층석탑이 절 마당에 서 있었다. 큰스님이 운수(雲水)로 떠돌던 젊은 시절에 이 버려진 절터로 흘러들어와 스무 평짜리 법당과 방 세 칸짜리 요사채 한 동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십오 년 전의 일을 내가 본 것은 아니다.
해망사에서,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개밥을 주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이십오 년 전에 큰스님이 이 섬의 폐사지로 들어올 때 육지의 어느 기찻길 가에 버려진 나를 포대기로 업고 들어와 절에서 길렀다는 말을 포구마을의 늙은 어부에게 잠깐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 어부도 오래 전에 죽고 없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난데없이 중옷을 걸치고 이 섬 속의 절에서 난데없이 늙은 중을 위해 행자 노릇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해망사 법당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이었다.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했고, 골기와는 맑고 고요했다. 용마루 선은 부드러웠고, 치켜올려진 처마 끝이 삼엄한 시선으로 바다 쪽 허공을 찔렀다.
절 아래쪽 호수에서 늙은 왕버들 한 그루가 물 밑에 뿌리를 박고 솟아올랐다. 왕버들은 뭍의 모든 나무들부터 홀로 떨어져 물 위에서 신록을 피우고 낙엽을 떨구었다. 가을의 끝으로 스러져가는 왕버들은 그 잎 속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시간의 색깔을 밖으로 뿜어내다가 그 색이 다하는 순간에 물 위로 나뭇잎을 떨구었다. 왕버들은 스스로 일어서고 또 사위는 왕국처럼 보였다. 큰스님은 저녁 공양을 하고 직전에 법당 마당을 쓸도록 일과를 정해놓으셨다. 법당 마당을 나뭇잎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을 때도 나는 저녁마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었다. 큰스님의 법도는 마당에 비질 자국을 선명히 그려놓고 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법당 마당을 쓰는 저녁에 절 마당 아래쪽 연못에서는 노을에 젖은 왕버들이 물 위로 떨구고 있었다. 그 나무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아닌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별 대수로울 것도 없는 잠시의 인연을 풀어헤치기 위해 이 산 속의 연못에 잠시 불시착해 있는 듯싶었다. 나무는 불타오르듯이 스러져갔다. 나는 난데없이 내 앞에 펼쳐진 세상과 맞닥뜨렸다. 이 어인 일인가. 이 어찌 된 일인가. 큰스님은 법당에 앉아서 오랫동안 왕버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무가 마지막 잎을 떨구어가던 어느 날 저녁에 나는 비질을 멈추고 큰스님께 다가가서 물었다.
-스님, 오래 전에 저를 포대기에 업고서 이 절로 들어오셨습니까?
스님은 시선을 왕버들 쪽으로 향한 채 고요히 웃으셨다. 스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눈빛이 빛났다. 스님은 나를 찌를 듯 바라보셨다.
-너 요즘 한가한 모양이구나.
요사채 마루 밑에서 개가 기어나왔다. 늙고 게으른 잡종견이었다. 개는 삼 년인가 사 년 전 가을에 제 발로 이 절에 들어왔다. 포구마을 어민이 도시로 나갈 때 버리고 간 개일 터인데, 어느 집 개였는지는 알 수 없었고,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개는 이름이 없었다. 스님이 작명을 금하셨다. 늙은 개는 겨울바람을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나 밤부엉이 우는 소리를 따라 짖지 않았다. 개는 요사채 마루 밑에 길게 누워서 앞발을 핥거나, 이따금씩 비질 자욱이 선명한 절 마당에 제 발자국을 찍으며 천천히 어슬렁거렸다. 개가 다가왔다. 스님은 턱을 들어 개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밥 줘라.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누룽지를 꺼내 개 밥그릇에 담아주었다. 개는 먹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입도(入島) 경위와 포대기에 관하여 스님께 묻지 않았다.
내 큰스님의 법명은 어려울 난(難), 깨달을 각(覺), 난각이었다. 사미계를 받으실 때 조실이 내려준 법명이었다.
-좋은 이름이다. 안 그러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큰스님은 히히히 웃으셨지만, 그 법명이 너무도 사치스럽다고 해서 일절 입에 담지 못하게 하셨다.
해망사 주지 난각은 왕버들 잎이 다 떨어지도록 법당에 앉아서 연못 쪽을 내려다보며 가을을 보냈다. 스님은 불상을 향해 세 번 절하고 나서 돌아앉곤 했다. 연못 위에 붉은 잎들이 깔리고, 잎을 거의 다 떨군 나무의 검은 뼈대가 저녁 햇살에 빛났다. 저녁에 마당을 쓸면서 법당 안을 들여다보면 노을에 비친 스님의 얼굴은 떨어져내리는 왕버들 잎처럼 감추어졌던 모든 색깔이 일시에 드러나 보였다. 그때 나는 문득 이 절 마당이 날아다니는 담요처럼 스님과 왕버들과 법당을 싣고 이 섬을 떠나 제 본래 갈 길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조바심을 느꼈다. 법당 안이 완전히 캄캄해진 뒤에야 스님은 요사채로 건너오셨다. 내가 허리를 주물러드리면 스님은 이내 잠드셨다. 스님의 잠은 깊고도 달았다.
-난 잠이 좋아서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못 해. 그러니 난각이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스님은 소리내어 웃었다. 맑고 편안한 웃음소리였다. 노을이 비친 스님의 얼굴과 스님의 웃음소리는 잎 지는 왕버들나무처럼 나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난데없이 중옷을 걸치고 난데없이 절 마당을 쓸고 살았지만 그 절에 편입될 수 있는 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스님과 왕버들과 개는 본래 그러한 것처럼 내 편은 아니었다. 이 어인 일인가. 대체 이 어찌 된 인가······ 스님이 잠들면 나는 절 밖으로 나와 캄캄한 산속을 몇 시간이고 달렸다. 모래를 담은 군용 배낭을 숲속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주먹으로 때렸다. 그것이 복싱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몸이 기진해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 요사채로 돌아오면 옆방에서 스님은 고른 숨소리로 잠들어 있었다. 낮에 선착장에서 본 젊은 여자들의 나신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검은 안경을 쓴 여자들은 햇빛 속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따라서 갓바위 뒤로 숨었고, 낚싯배는 돌아갔다. 나와 관련이 없는 것들이 나를 밀쳐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여러 여자들의 깔깔대는 나신들이 뒤엉켰다. 수음으로 잠을 설치고 다시 툇마루로 나오면 잎을 모두 떨군 왕버들 가지에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연못과 달 사이에서, 벌거벗은 나무 한 그루가 홀로 우뚝했다. 그때 하산(下山)의 충동은 먼 치통처럼 막막하고도 확실했다. 다시 마을로 내려간 늙은 개는 주민들에게 먹혔는지 열흘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일 년 뒤, 내가 절을 떠나던 날까지 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공이 울렸다. 장내 아나운서가 2라운드를 알렸다. 다시 시야가 좁아졌다. 김득수는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앞세우고 다가왔다. 그의 리치의 권역은 바다처럼 넓었다. 그의 몸통 전체를 돌리면서 뻗어내는 스트레이트를 쉴새없이 내질렀다. 그 스트레이트 한 방이면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었다. 그는 5차 방어에 성공한 챔피언답게 자신의 체급에서 안정되어 있었고, 떨어져서 길게 치고 다가가면 물러서는 아웃복서였다. 칠 개월 전, 나는 라이트급에서 체중 조절에 실패했다. 며칠씩 굶어가며 섀도복싱으로 땀을 빼도 체중은 이내 육십 킬로그램을 넘어왔다. 어려서부터 해망사 뒷산을 뛰어다닌 뼈의 무게가 대부분이었다. 뼈는 감량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은 라이트웰터급으로 계량되었다. 낯선 체급에서 내 몸은 나에게 서먹서먹했고, 나는 내가 맞아본 적이 없는 낯선 위력의 힘들이 날뛰는 링 위로 올라섰다.
나는 상체르 흔들어 김득수의 잦은 스트레이트를 피했다. 그의 주먹이 허공을 칠 때마다 나는 한 스텝씩 다가가서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어퍼, 잽을 내질렀다. 김득수는 빠르고 정확한 스텝으로 물러서면서 긴 리치를 뻗어 나를 밀어냈다. 김득수는 빠르고 정확한 스텝으로 물러서면서 긴 리치를 뻗어 나를 밀어냈다. 그는 한 스텝 물러서면서 원투 스트레이트를 빠르게 연결시키는 스매싱 블로 한 방을 탐색했다. 나는 바싹 나가가서 허리를 돌리며 몸통 전체로 치고들어가는 어퍼, 어퍼, 훅, 라이트, 레프트를 노렸다. 내가 다가가면 그는 돌면서 물러났다. 그의 리치의 경계에서 내 스텝은 디딜 곳이 없이 공중에 떠 있었다.
NIRVANA 광고 문구의 I자 위에서 나는 김득수와 클린칭되었다. 누가 먼저 감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클린칭되는 순간, 내 몸에 닿는 그의 살은 뜨거웠고 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숨에서는 수캐의 비린내가 끼쳐왔다. 그의 몸에 닿는 내 살의 촉감도 그러했으리라. 아마추어 시절에 내 코치는 늘 말했다.
-복싱은 투지의 싸움이다. 투지는 적개심이다. 적개심은 맹렬하게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시선이 중요하다. 적개심은 눈으로 집중돼야 한다. 상대의 동작을 순간적으로 읽어야 하고, 몸이 거기에 반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상대의 다음 순간의 동작까지도 미리 읽어야 한다. 시선이 일 초라도 옆으로 돌아가면 죽는다. 공이 울리면 상대의 대갈통과 몸통만이 보여야 한다.
김득수가 5차 방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나는 코치한테 들었다. 그때 코치는 비디오를 분석해가면서 김득수의 긴 리치를 피해가는 요령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김득수를 링 위에서나 링 밖에서나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챔피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막연한 적개심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집중되지 못한 적개심은 내 코치가 원하는 수준의 투지는 되지 못했다. 1라운드의 공이 울리고 갑자기 좁아지는 시야 안으로 챔피언 김득수의 상체가 보였을 때 먼 적개심은 송곳처럼 명료해졌다. 그의 가벼운 잽이 내 턱을 치고 지나가자 실체를 감춘 적개심은 내 두 눈에 타올랐고 팔다리에 팽팽히 차올랐다. 그는 다른 많은 복서들을 때려누인 챔피언이었을 뿐 나와는 무관한 자였으나 내 팔다리는 그를 향한 적의로 경련이 일었다. 그의 어퍼, 어퍼, 레프트, 라이트를 피해 돌아서는 순간이었던가, 누가 먼저 감았는지 알 수도 없이 클린칭되는 순간 내 몸에 와 닿는 그의 살은 땀에 미끈거릴 뿐 아무런 적의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땀은 그의 살갗을 적셨고 나의 땀은 나의 살갗을 적셨다. 그의 땀과 나의 땀이 비벼질 때, 나는 스텝을 물려서 적의가 빠져나가려는 뒷다리를 겨우 수습했다.
레프리가 다가와서 브레이크!를 외쳤다. 그와 나는 한 스텝씩 뒤로 물러섰다. 나는 잽, 잽, 어퍼로 파고들었다. 김득수는 물러섰다. 나는 링 바닥 NIRVANA의 V자 꼭짓점을 돌아나갔다. 리치가 닿지 않는 먼 곳에서 김득수의 왼쪽 옆구리가 허해 보였다. 김득수의 주먹에 쓰러지더라도 V자 언저리에서는 다운되지 않기로 나는 작정하고 있었다.
NIRVANA는 울서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진들이 개발한 발기부전치료제였다. 알약을 넘기는 순간에 발기 효과가 나타났고 발기 시속시간과 정액 분출력에서 NIRVANA는 유럽산 치료제들을 압도했다. NIRVANA는 시판 일 년 만에 국내시장의 육십 퍼센트를 점유했다. 울서대학 연구진들은 생명의 날 기념식장에서 포훈되었고 제약회사 사장은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NIRVANA 회사는 순간 반사력과 순간 폭발력, 지구력을 브랜드 이미지로 정했다. NIRVANA는 모든 복싱 체급의 챔피언 쟁탈전을 파이트머니로 후원했고 링 바닥에는 홍코너에서 청코너 쪽으로 가는 대각선 방향으로 NIRVANA의 영문 알파벳 일곱 글자가 깔렸다. 제약회사측은 다운에 다운을 거듭하며 12라운드까지 진행되는 게임을 원하고 있었다. 또 복서가 다운되거나 KO될 때 NIRVANA의 한가운데, 말하자면 V자 위에 고꾸라져서 TV 카메라들이 일시에 광고 문구 위에 집중되기를 바랐다. 제약회사 광고담당 상무가 다운과 KO의 위치를 유도하기 위해 코치들에게 로비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는 V자 꼭짓점을 돌아나와서 R자 앞다리 쪽으로 김득수를 몰아붙였다. 허리를 돌리면서 들어가는 짧은 훅이 김득수의 복부에 명중했다. 김득수는 스텝의 리듬을 잃고 뒤로 물러섰다. 그가 물러서자 나는 그의 가격 거리 안이었다. 다시 잽, 푹, 잽으로 다가서는 순간, 눈앞에 캄캄한 절벽이 일어섰다. 김득수는 보이지 않았다. 절벽이 깨어져나가면서 태양이 폭발하듯 섬광이 일었다. 섬광이 걷히면서 다시 절벽이 일어섰다. 김득수, 김득수가 보이지 않았다. 죽여자 죽여, 암흑 속에서 함성이 일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김득수를 향해 어둠 속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내 주먹은 허공을 쳤고, 김득수는 보이지 않았다. 두 다리가 체중을 받치지 못하고 흔들렸다. 다시 섬광이 일면서 절벽에 절벽이 포개졌다. 죽여라 죽여, 함성이 일었다. 스텝 위치를 더듬거리는 왼쪽 다리는 이 세상이 아닌 곳을 디디고 있었다. 링 바닥을 더듬는 발바닥이 몸통에서 너무 멀었다.
다시 김득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레프리는 카운트 파이브를 헤아리고 있었다. 나는 다운되었었고 카운트 파이브가 흘렀고, 다시 일어선 나는 다운되었던 오 초 동안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스텝을 수습했다. 레프트, 라이트, 잽, 잽으로 다가갔다. 공이 울렸다. 2라운드가 끝났다. 나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NIRVANA의 대각선을 따라 청코너를 돌아갔다.
바다에서 빛들은 부서지면서 태어났다. 바람이 잠든 날에 물결은 시간에 실려 출렁거렸고 바람이 물결을 흔드는 날에도 물결 위에서 부서지는 빛들은 바람에 불려가지 않았다. 빛들은 가득히 부서지고 태어났다. 이따금씩 해류를 거스르는 고래 떼가 솟구치고 잠기면서 빛의 바다를 가로질러 원양으로 나아갔다.
풍도 선착장은 빛이 자글거리는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콘크리트 뚝방 이십 미터였다. 어민 가구가 줄어들자 선착장 주변 포구마을의 어업무선국 분소와 출입항 신고초소는 철수했고 선착장 끝 무인 등대에 전원이 끊겼다. 등대 꼭대기에 매달린 풍향계가 몰려오는 바람의 저쪽을 가리키며 이리저리 돌아갔다. 인기척 없는 콘크리트 뚝방에서 놓아먹이는 염소들이 흘레붙었고 갈매기들이 그물 더미를 헤집으며 퍼덕거렸다.
절에서 포구마을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이 걸렸다. 나는 푸성귀, 컵라면, 소주, 모기향 따위를 구하기 위해 닷새에 한 번꼴로 포구에 내려왔다. 마을에는 가게가 없었고, 주민들이 물건을 팔았다. 포구마을에 내려올 때마다 나는 빛이 들끓는 바다와 알 수 없는 곳을 가리키며 돌아가는 무인 등대의 풍향계와 뚝방 끝에 주저앉아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새카만 염소에 주눅들곤 했다. 세상은 발 디딜 곳 없어 보였고 나는 염소처럼 몽매하고 갑갑했다. 링 위에서 상대방의 스트레이트 펀치에 머리를 맞았을 때처럼 난데없는 절벽이 눈앞에서 일어서는 것 같았으나, 그렇게 말해도 그 포구와 풍경이 나를 때리는 강도와 질감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저물어서 사위어가는 바다를 뒤로하고 나는 서둘러 절로 돌가가곤 했다. 해안단애 꼭대기에 올라앉은 새들이 내 등 뒤에서 끼룩끼룩 울었다. 몸이 맹렬하게 작동되고 있을 때 나는 겨우 그 풍경의 압박을 잊을 수가 있었다. 나는 포구에서 절까지의 삼 킬로미터 산길을 늘 뛰어서 다녔다.
현상수배 장일식은 흑염소가 교미하는 그 선착장에 내려서 절로 들어왔다. 그는 낚시꾼 차림으로 낚싯배에서 내린 뒤 육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착장에는 검문 경찰이 없었다. 그가 절도 숨어들기 전에 큰스님 난각과 미리 교신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늘 큰스님의 일을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그는 절 마당을 쓸고 있던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챙이 긴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큰 키가 구부정했고 하관이 빨았고 턱수염이 가운데로 밀집되어 있었다. 그가 다가오는 느낌은 파충류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주지스님은 어디에 계시오?
-왠일로 큰스님을 찾으시오?
-낚시하러 왔다가 배를 놓쳤는데 절에서 묵어갈 수 있겠소? 난간 스님께 여쭤봐주시오.
그는 큰스님의 법명을 알고 있었다.
-보다시피 손님을 모실 만한 절이 못 되오. 마을로 내려가보시오.
-마을에 여인숙이 없더이다.
-큰스님께는 미리 통지를 하시었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큰스님이 요사채에서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는 나와의 대거리를 끊어버리고 큰스님에게 다가갔다. 큰스님이 그를 맞는 태도는 생면부지의 객을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큰스님은 그를 데리고 법당 뒤쪽 산신각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개 밥을 주고 나서 저녁 예불을 준비하느라고 법당 마루를 걸레로 닦았다. 그날 큰스님은 저녁 예불을 거르셨다. 큰스님은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요사채로 건너오셨다.
그날부터 장일식은 절에서 묵었다. 나는 큰스님의 분부로 요사채 아랫방을 도배하고 걸레질 쳐서 그를 들여앉혔고, 저녁마다 그의 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땠다. 그가 풀어놓은 소지품은 낚시도구뿐이었는데, 손때가 묻지 않은 새것이었다. 그가 절에 온 다음날 큰스님은 그를 데리고 법당에 꿇어앉아 오랫동안 독경하셨다. 독경이 끝나자 큰스님은 삭도를 갈아서 그의 긴 머리카락을 밀었고 승복을 내려주셨다. 나는 큰스님과 장일식의 일들을 묻지 않았고, 스님도 말씀이 없으셨다. 큰스님은 다만 나에게 수좌(首座)의 예로써 그를 모시라고 분부하셨다. 선방이 따로 없는 궁벽한 절에서 수좌의 예라고 해봐야 공양 올리고 군불 때주는 것 이외에는 별것이 없었다. 그가 심한 요통을 앓고 있었으므로 새벽에도 그의 방 아궁이에 군불을 넣어야 하는 일이 좀 성가시기는 했다. 그는 휴대전화가 없었고, 그에게 오는 우편물도 없었다. 승복을 걸치기는 했지만 그는 아침 저녁 예불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어기죽거리는 걸음으로 산 속을 어슬렁거리거나 포구 선착장으로 내려가 낚시질을 했다. 그는 잡은 물고기를 절에 가져와 회쳐 먹었다. 그가 요통을 앓고 있어서 그랬는지, 큰스님은 그의 낚시질과 육식을ㄹ 나무라지 않으셨다.
날라리 땡초 장일식이 내란예비음모, 반국가단체구성, 현주건물방화, 특수공무집행방해, 특수도주의 혐의로 수배된 1급 시국사법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의 한약을 지으러 육지로 나왔다가 알았다. 큰스님은 나에게 약값으로 오십 만원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입시치성 때도 아무런 시주가 없는 절에서 큰스님이 어떻게 그런 돈을 지니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장일식의 걸음걸이가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기동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큰스님은 말씀하셨다.
-의사한테, 환자가 기동할 수 없어서 대신 왔다고 말하고 증세를 소상히 일러라.
나는 낚싯배를 얻어타고 육지로 건너왔다. 육지 쪽 포구는 제법 벅적거리는 어항이었다. 포수는 생선 비린내와 고기 굽는 누린내와 쓰레기 썩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장일식을 수배하는 포스터는 어업무선국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반국가단체구성 수괴 장일식’ 이라는 제목 아래 장일식의 얼굴 정면 사진이 컬러로 인쇄되어 있었다. 수괴급 지명수배자답게 포스터는 장일식 한 명만을 찾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도 장일식의 얼굴은 하관이 빨았고 눈빛이 날카로웠고 턱수염이 가운데로 밀집되어 있었다. 포스터는 그의 인상의 특징을 “턱이 뾰족하고 턱수염이 자라면 염소 수염처럼 가운데로 몰린다. 허리가 아파서 걷는 자세가 구부정하다”라고 적어놓았다. 사진 아래로 그의 인적사항과 혐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장일식은 스물아홉 살로 나보다 세 살이 많았고, 울서대학교 법학부를 중퇴했다. 유무전환론(有無轉換論)이라는 혁명이론을 소책자로 발행해서 전국 학교와 교회와 야학에 돌렸다. 인간은 무(無)에서 유(有)로 나아갈 수 있고 무와 유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 혁명이론의 골자였다. 전환의 실천전력은 돌멩이로 파출소를 부수어 권총을 탈취하고 그 권총으로 지역예비군 무기고를 부수어 소총을 확보하고 다시 그 소총으로 경찰서와 소규모 군부대의 무기고를 부수고 중화기를 끌어내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다중은 혁명의 전위가 아니며 다만 토양일 뿐이고 순정한 혁명의 종자들만이 전위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이성론이었다. 그는 점조직으로 하부를 동원해서 전국 4개소의 파출소를 화염병으로 습격했고 그중 2개소를 하루 이상 점거했었다고 포스터에는 적혀 있었다. 사찰 주지들에게 큰스님의 편지를 전하거나 교구 본사에서 행정사항으로 호출이 왔을 때 이외에는 내가 육지 쪽 항구로 넘어올 일은 없었다. 육지의 냄새는 언제나 비린내와 누린내였다. 술집 여자들이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오줌을 누었고 고깃배들은 분주히 방파제를 넘어 흉어의 파다를 드나들었는데, 그 너머의 바다는 태어나고 부서지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일식을 수배하는 포스터를 읽을 때 나는 웬일인지 섬과 바다와 육지가 하얗게 증발해버리는 듯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화장 짙은 술집 여자들이 저무는 선착장에 나와서 입항하는 어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약은 몸 속의 삿된 기운을 쓰다듬어 재우고, 들뜬 열기를 사(赦)하여 주는 약이오. 대추를 넣어서 달여 먹이시고, 늘 방을 뜨겁게 해주시오.
늙은 한의사는 두 달치 첩약을 지어주며 그렇게 말했다.
여름에, 왕버들은 기름진 잎으로 피어나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이 빛을 튕겨냈고 버들은 그 안쪽의 빛을 뿜어내는 발광체처럼 보였다. 잎들이 흔들리며 물 위의 빛들이 흔들렸다.
그해 여름에 온 산에 매미가 들끓었다. 매미의 종족 전체가 울음의 꼬리를 회전시켜가며 맹렬히 울어댔다.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 그 소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어떠한 여백도 허용하지 않았다. 봄부터 절에 얹혀 있던 떠돌이 학승 한 명은
-저 육시랄 놈의 매미······
라고 중얼거리며 절을 떠났다. 가을에, 매미들은 모조리 죽었고 절의 적막은 매미 소리처럼 맹렬했다. 여름이 다 가도록 큰스님은 법당 마루에 앉아서 푸르게 빛나는 왕버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것이 스님의 묵언수행이었다.
-나무에는 길이 있되, 그 길이 세상에 닿지 않는구나.
매미가 다 죽어버린 어느 날 큰스님은 겨우 그 한 마디를 하셨는데, 나 들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 장일식은 날마다 포구마을 선착장에 내려가서 낚싯대를 드리우거나, 돌멩이에서 중화기에 이르는 유무(有無)의 먼 길을 더듬는지 고래 뛰는 먼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하루 종일 절에 돌아오지 않는 날 나는 보온병에 탕약을 담아서 가져다주었다. 그가 탕약을 삼킬 때 비쩍 말라 핏줄이 드러난 목이 흔들렸고 턱수염이 약물에 젖었다. 나는 늘 절에서 선착장까지를 뛰어서 오갔고, 저물면 산으로 올라가 샌드백을 쳤다. 몸이 기진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
공이 울렸다. 시야가 좁아졌다. 나는 NIRVANA의 동선을 따라 링의 안쪽으로 스텝을 밟았다. 김득수는 사나운 공세로 몰아쳐왔다. 내가 2라운드에서 한 번 다운되었으므로 그는 3라운드쯤에서 게임을 끝내버릴 셈인 모양이었다. 그는 멀리서 곧게 들어오는 레프트,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쉴새없이 내질렀다. 나는 잽, 잽, 어퍼, 어퍼로 파고들었다.
-바짝 붙어라. 저 자는 리치가 길다. 떨어지면 죽는다. 큰 걸 노리지 마라. 파고들어서 짧게 끊어쳐라. 짧아도 클 수가 있다.
2,3라운드 막간에 내 마우스피스를 뽑아내고 입 속으로 물을 부으면서 세컨드는 그렇게 말했다. 김득수는 긴 리치를 나를 가장 위력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위치를 탐색하기 위해 짧은 스텝으로 계속 물러섰다. 나는 파고들었다. 내가 바짝 다가서면 그는 허리를 돌리며 긴 리치를 옆으로 휘둘러 뻗어왔다. 그의 팔이 옆으로 돌아갈 때 나는 어퍼, 어퍼, 훅, 훅으로 들려들었다. 그의 가격 거리 안이 나의 가격 거리였고, 그의 리치가 다해서 팔이 곧게 펴지는 허공의 한 점이 나의 사지(死地)였다. 사지는 쉴새없이 허공에서 명멸했다. 글러브끼리 부딪칠 때마다 땀의 안개가 뿜어졌다. 나트륨 강력 조명 아래서 안개는 무지개로 펼쳐졌다. 나는 무지개를 헤치며 전진 스텝을 밟았다. 링에서는 시간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한 라운드가 삼 분이라는 규정은 관중석의 시간일 뿐, 링 안에서 시간은 무의미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바다보다 넓어서 헤어날 수 없었고, 느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김득수의 팔이 뻗어올 때마다 무수한 사지들이 번뜩였고 또 사라졌다.
-삼십 초, 아그레, 아그레.
내 세컨드가 등 뒤에서 고함쳤다. 라운드가 삼십 초 남았으니 어그레시브하게 밀고 들어가라는 사인이었다. 그 고함 소리에 나는 다시 현실의 시간 속으로 돌아오는 듯했지만, 시간은 다시 바다로 펼쳐졌다. 시간은 그 바다의 아득한 저쪽 대안으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김득수의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피해 돌아서는 순간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허당이 드러났다. 나는 옆구리에 꽂히는 내 주먹의 질감은 묵직했다. 순간 김득수의 스텝이 무너졌다. 김득수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한 스텝 다가서면서 짧은 어퍼 어퍼로 그의 턱을 쳐돌렸다. 원투 원투! 으깨라 으깨라 으깨! 함성이 일었다. 김득수가 다시 공세의 포즈를 수습하고 다가섰다. 그는 스텝의 리듬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내 짧은 훅의 사정거리 안으로 다가왔다. 나는 짧게 올려치는 훅으로 그의 복부를 타격했다. 예쁘다 예뻐! 다시 함성이 일었다. 김득수는 NIRVANA의 N자 위에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몸통은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오그라들면서 버르적거렸다. 버르적대는 그의 몸통을 바라보면서, 적개심이 빠져나가는 내 두 다리는 링 바닥에 주저앉을 듯이 허허로웠다. 김득수는 카운트 세븐 만에 일어섰다. 다시 파고드는 순간 공이 울렸다. 3라운드가 끝났다. 나는 코너로 돌아왔다.
장일식의 병은 악화되었다. 나는 두 달에 한 번씩 육지 쪽 포구로 건너가 그의 한약을 지어 날랐다. 어업무선국 게시판에 붙은 수배 포스터가 해풍에 찢겨 너덜거렸다. 장일식이 육지로 건너가서 치료를 받을 수는 없었고 육지의 의사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 춥거나 비 오는 날 장일식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요강으로 그의 똥오줌을 받아냈다. 나는 그를 부축해서 요강에 앉혔고, 요강을 비워주었다. 그의 마른 몸은 가벼웠고 위태로웠다. 그의 물똥은 소화되지 않은 탕약을 쏟아냈다. 똥은 새카맸고 악취를 풍겼다. 그 똥의 악취는 지난 여름의 매미 울음소리처럼 다급하고 맹렬했다.
-생로병사로구나.
큰스님은 요강에 올라앉은 장일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한 말씀을 하셨다.
그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 밤마다 눈이 쌓여 아침에 장지문을 열면 새롭게 빛나는 흰 숲에 눈이 부셨다. 길이 끊어졌고 낚싯대는 오지 않았다. 나는 아침마다 마당의 눈을 치웠고 눈이 마르면 흙마당을 쓸어 비질 자국을 그렸다. 장일식은 구들에 누워 그 겨울을 지냈다. 큰스님이 가끔씩 장일식의 방에 다녀가셨다.
-네 병은 견딜 만하냐?
-그저 겨우······ 봄에는 육지로 건너가려 합니다.
-여기서 견디어라. 돌멩이를 던져서 어찌 세상을 바꾸겠느냐. 저절로 바뀌는 것이 전환이다. 저 나무를 봐라.
-세상이 어찌 나무와 같겠습니까.
큰스님은 장일식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따위였다. 나무와 돌멩이.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창 밖으로는 간밤에 쌓인 눈이 숨막히는 빛을 뿜어냈고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왕버들은 눈 쌓인 우듬지 위로 움을 틔우고 있었다. 나는 버들에 새잎이 돋기 전에 하산하기로 작정했다.
다시 육지 쪽 한의원에 약을 받으러 가던 날, 나는 장일식을 신고했다. 그를 그의 자리로 보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절과 왕버들과 들끓는 바다의 빛들이 애초부터 나와는 무관했으므로 내가 그것들로부터 돌아선다는 것 또한 그것들과 무관한 일인 듯싶었다. 파출소는 어업무선국 옆 건물이었다. 슬리퍼를 신고 허리띠를 풀어놓은 소내 근무자 두 명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나는 길을 묻는 척 멈칫거리다가 파출소를 나왔다. 나는 마을버스를 타고 읍내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정보과에서 나는 장일식의 입도 경위와 염소 수염과 척추질환을 설명했다. 나는 한의원에서 받은 첩약을 형사에게 보여주었다. 정보과 형사는 아연 긴장했다. 서장에게 보고했고, 서장은 도 경찰국에 보고했다. 형사는 나의 애국심을 치하했고 나를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신고자의 신원을 철저히 감추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스님은 빨리 절로 돌아가 계시오. 스님이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저쪽에서 의심할 수가 있소. 가서 평상시처럼 약을 달여 먹이시오.
나는 서둘러 절로 돌아왔다. 나는 숯불을 피워 탕약을 달였다. 장일식은 그날 따라 허리가 덜 아팠는지 지팡이를 짚고 법당 마당을 어슬렁거렸고, 큰스님은 채마밭에서 배추씨를 뿌리셨다. 형사대는 저녁 무렵에 들이닥쳤다. 여섯 명 모두들 낚시꾼 차림이었다. 네 명은 일주문과 법당 뒤쪽 산길을 막았고 두 명은 법당 안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녁 예불을 준비하느라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절 구경 좀 하고 가렵니다.
형사대들은 법당 댓돌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장일식에게 접근했다.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고생바다 어서 건너가고 싶어라, 장일식의 뒤쪽으로 법당 기둥의 주련은 그렇게 신음하고 있었다. 형사는 바싹 다가갔다. 장일식은 승복을 걸치고 있었다.
-스님, 면도를 하셔야겠군요.
장일식의 시선이 흔들렸다.
-스님, 허리는 좀 어떠신지요?
장일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장일식이지.
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형사가 발길로 복부를 걷어찼다. 장일식은 낮에 마신 탕약을 토해내면서 법당 댓돌 위로 고꾸라졌다. 형사들은 장일식의 승복을 벗기고 준비해온 경찰 전투복으로 갈아입혔다. 형사들은 승복을 찢어서 장일식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큰스님은 채마밭에서 붙잡혔다. 형사들은 큰스님을 마구 대하지는 않았으나 동행을 요구했다.
-서울까지 가야 하니 옷을 갈아입으시오. 승복 차림으로는 모시기가 곤란하오.
1급 지명수배자의 은닉과 도피방조도 처벌된다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형사들은 큰스님과 장일식을 낚싯배에 싣고 섬을 떠났다. 배가 떠날 때 선착장까지 따라간 나에게 큰스님은 말씀하셨다.
-성불하여라.
그 다음날 새벽에 나는 하산했다. 복서가 되려는 작정은 없었지만 절에서 자라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짓은 주먹질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절 뒷산을 뛰어내려서 폐활량이 컸고 기초체력이 월등했다. 나는 하산한 지 이 년 만에 프로에 데뷔했다.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타이틀 매치가 열리는 날 아침에, 계체량을 마치고 휴게실에서 허벅지 마사지를 받고 있을 때 우연히 눈에 띈 조간신문에 장일식의 사건이 실려 있었다. 장일식은 최종심에서 무기형을, 해망사 주지 난각은 이 년형을 언도받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장일식의 눈빛은 찌를 듯이 날카로웠는데,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공이 울렸다. 시야가 좁아졌다. 나는 전진 스텝을 밟아서 4라운드의 링 안쪽으로 나아갔다. 나는 김득수의 레프트 라이트, 레프트 라이트를 피해 나갔다. 그의 가격 거리 안이 나의 가격 거리였고, 나의 가격 거리 밖이 그의 가격 거리였다. NIRVANA의 R자를 돌아나오면서 나는 레프트 잽을 내질렀다. 잽은 허공을 찔렀다. 왼팔을 다시 방어 위치로 수습하는 순간 눈앞에서 절벽이 일어섰다. 절벽과 섬광이 포개졌고 다시 절벽이 일어섰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 함성은 먼 우레처럼 들렸다. 두 다리가 몸통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졌다. 나는 암흑을 향해, 보이지 않는 김득수 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다시 벼락 같은 섬광이 일었다. 링 바닥의 마루는 흔들리지 않아서 편안했다. 어둠 속에서, 잡초에 파묻혀 폐허로 변한 해망사 법당과 기름진 여름 잎으로 빛나는 왕버들의 환영이 떠올랐다. 레프리가 카운트 텐을 다 헤아린 후에도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내가 쓰러진 자리는 NIRVANA의 한복판, V자의 계곡 사이였다. (문학동네 2004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