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셀마>를 보며
마틴 루터 킹과 힙합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다
김봉현
힙합이 품은 꿈
<셀마>
<셀마>는 미국의 목사이자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전기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마틴 루터 킹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를 순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1965년, 흑인 투표권 투쟁을 위해 벌어진 ‘셀마-몽고메리 행진’에 집중한다. 미국 인권운동사에서도, 마틴 루터 킹 개인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영화는 자극적이지 않다. 차분하되 밀도 있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의 새로운 표적이 된다. 또 <셀마>는 비슷한 영화 몇몇을 떠올리게 한다. 흑인 인권을 다뤘다는 점에서 일단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나 <노예 12년>(2013)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와 주제를 보다 정교하게 제한한다면 <미시시피 버닝>(1988)이 생각난다(이 영화는 1964년, 미시시피주의 흑인 투표권 등록을 돕기 위해 남부로 향하던 청년 민권운동가 세명이 살해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편 주인공을 크게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2004년작 <레이>(레이 찰스)와 2014년작 <겟 온 업>(제임스 브라운)을 소환한다. <셀마>에서 마틴 루터 킹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좌절도 하고 포기도 하고 싶었던 평범한 인간처럼 그려진다. 또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 마틴 루터 킹의 여성 편력에 관해 감독은 ‘굳이’ 짚고 넘어간다. 도덕성이라는 맥락에서 요즘 상황에 빗대면 명망 있는 진보 운동가가 실은 비싼 집에 산다거나 이혼 경력이 있다는 정도가 될까.
현실에 대한 저항정신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갈구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더욱 완전해진다. <셀마>는 뛰어난 영웅 한명이 혼자 마법을 부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틴 루터 킹과 그의 조력자들, 더 나아가 모든 용기 있는 시민이 힘을 합쳐 세상을 한 걸음 더 내딛게 하는 이야기다. 이 시절보다 영웅적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저히 줄었지만 여전히 영웅의 출현을 갈구하는 지금, <셀마>는 묘한 울림을 안긴다.
앞 문단과 이어지는 맥락에서, <셀마>는 한국에서 주로 정치적 상황과 연관된다. ‘작은 승리를 지속하는 것의 중요성’이라든가 ‘역사는 더디게 보여도 반드시 진보한다’는 명제를 다시 꺼내보게 되는 것이다. ‘Selma Is Now’라는 슬로건은 사실 한국의 지금 상황과도 꼭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 글의 나머지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마저 똑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단 이 영화의 주제가 <Glory>는 래퍼 커먼과 알앤비 싱어 존 레전드가 불렀다(커먼은 영화에 조연으로도 출연한다). 이 노래는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받았다. 영화의 예고편 영상에도 음악이 흐른다. 이 음악은 퍼블릭 에너미의 <Say It Like It Really Is>다. 힙합을 가리켜 ‘Black CNN’이라고 명명했던 왕년의 힙합 그룹 말이다.
<셀마>와 힙합의 이런 관계. 우연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지금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음악이 되었지만 힙합은 원래 특정한 인종과 지역에 기반해 시작됐다. 또한 힙합은 음악이자 문화이고 더 나아가 삶의 방식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미국 흑인의 역사•사회•정치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힙합 매거진으로 불리는 <소스>에서는 1965년에서 1984년 사이에 태어난 미국 흑인을 가리켜 ‘힙합 제너레이션’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이 바로 ‘미국 흑인 시민권 평등 운동’(1955~68)의 끝자락, 그리고 ‘블랙파워 운동’ 중 • 후반기에 피어나기 시작한 힙합과 함께 성장하거나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자란 ‘힙합 세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힙합과 무관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힙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로널드 레이건이 그렇고 무하마드 알리가 그렇다. 1980년대 미국을 강타했던 ‘크랙에피데믹’이 그렇고 1990년대 초반의 ‘LA폭동’이 그렇다. 마틴 루터 킹 역시 힙합과의 연결고리를 도저히 끊어낼 수가 없다. 아니, 마틴 루터 킹은 힙합 커뮤니티가 현재 가장 숭배하는 아이콘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틴 루터 킹과 힙합의 연결고리를 지금 여기서 논할 수 있는 까닭은 힙합이 ‘흑인음악’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요즘 들어 가장 득세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흑인음악을 대할 때 남다른 그루브나 흥을 떠올린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스티비 원더의 ‘솔’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음악이었지만 동시에 흑인의 현실을 드러내는 사회고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힙합을 포함한 모든 흑인음악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을 의무는 없지만 힙합을 포함한 모든 흑인음악의 근본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정신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갈구가 들어 있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 극우 세력의 보스였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마틴 루터 킹 데이’ 제정 법안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마틴 루터 킹을 기리는 스티비 원더의 노래 <Happy Birthday>가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힙합 제너레이션이 성장하면서, 힙합은 자신의 선배 음악, 즉 블루스나 솔이 담당하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Yes, We Can”과 호응하는 “I Have A Dream”
재미있는 것은 힙합의 초창기에는 마틴 루터 킹보다는 말콤 엑스가 래퍼들에게 환영받았다는 사실이다. 비폭력과 평화를 논하는 마틴 루터 킹보다는 흑인 우월주의와 무장 투쟁을 외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항을 주장하는 말콤 엑스가 아무래도 힙합의 공격성, 저항성에 부합했기 때문일까. 초창기 힙합 명작으로 회자되는 부기다운프로덕션의 앨범 타이틀이 《By All Means Necessary》인 이유도, 퍼블릭 에너미의 노래 <Bring the Noise>의 인트로가 “Too Black, Too Strong”인 이유도, 이게 다 말콤 엑스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래퍼들은 마틴 루터 킹의 정신 역시 가사에 새겨넣기 시작했다. 의도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힙합은 대중화와 상업화의 길을 밟으면서 팝과 유행의 옷도 껴입게 되었다. 몸집도 더욱 거대해졌다. 변질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생각해보자. 메이저 레이블과의 계약을 위해 래퍼들이 비속어가 포함된 자신의 예명도 바꾸는 상황에서 과연 말콤 엑스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은 극단적이고 지엽적인 비유다. 마틴 루터 킹과 힙합의 연결고리는 무엇보다 변화해온 시대의 요청에 미국 흑인과 힙합 문화가 조화롭게 응답하는 광경이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똑바로 살아라>(1989)와 <보이즈 앤 후드>(1991)가 투쟁심을 자극하고 갱스터랩이 득세하던 시대’를 지나 ‘<프리덤 라이터스>(2007)와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가 제작되고 힙합이 팝을 장악한 시대’가 온 순간, 말콤 엑스는 지고 마틴 루터 킹은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군데군데 샘플링해 만든 윌.아이.엠과 커먼의 <A Dream>은, 실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제이지의 이 가사는 더없이 상징적이다. “로자 파크스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마틴 루터 킹이 걸을 수 있었지/ 마틴 루터 킹이 걸었기 때문에 버락 오바마가 달릴 수 있었어.” 누군가는 이 가사에서 마틴 루터 킹 대신 말콤 엑스를 집어넣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흑인이 대통령이 된 시대에 오바마의 “Yes, We Can”과 호응하는 건, “Too Black, Too Strong”이었을까, 아니면 “I Have A Dream”이었을까.
그러나 2015년이 왔음에도 흑인은 여전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죽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잇단 흑인 살해 사건에 가장 앞장서서 분노하는 건 바로 래퍼들이다. 셀마가 현재진행형임을 알리고, 마틴 루터 킹의 꿈을 이어갈 수 있는 음악은 역시, 아무래도 힙합이다. “이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혼자선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 필요한 건 노인의 지혜와 젊은이의 에너지/ 우리가 부르는 승리의 이야기.”(<Glory>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