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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04
12월14일[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대림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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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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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Sjg-8QvmjzA
[서울대교구 나충열 요셉 신부님 집전(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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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충만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오늘 우리 교회는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성인, 십자가의 성 요한 학자(1542~1591) 기념일을 경축합니다. 그가 평생토록 추구했던 한 가지 삶의 노선이 있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요한의 생애 전체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는 생애 내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꼭 끌어안고,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은 십자가의 연속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그의 가문은 아버지 때에 이르러 몰락하여, 어린 시절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요한이 아직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활고에 쪼들린 어머니와 요한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어린 요한 역시 목수 보조, 양복점 점원, 조각가 조수,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다가오는 큰 십자가 앞에서 요한은 우리처럼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와중에도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일하면서 기도했고, 시간을 쪼개어 신학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요한의 착복식 때, 수도명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십자가의 요한!을 선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자신에게도 지워지기를, 그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짐을 통해 한없이 기울어져 가는 수도회와 교회와 세상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거룩한 결심을 합니다.
당시 가르멜 수도회는 퇴폐한 시대사조의 영향을 받아 많이 기강이 많이 느슨해져 있었습니다. 완덕에 대한 열정도 찾아볼 수 없었고, 수도원을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도피처로 여겼습니다. 수도자들은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호의호식하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요한은 또 다른 개혁 동지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의기투합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수도자들과 결별하고 극단적 청빈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다리도 쭉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천장이 낮은 공동 침실에서 단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열악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요한과 동료들의 얼굴을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극단적 청빈과 고행을 즐겼습니다.
시기 질투심으로 가득한 동료 수도자들은 요한의 극단적 청빈생활과 원리 원칙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그를 독살시키려는 계획까지 세워 실행했지만, 마지막 순간 하느님의 은총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때로 동료 수도자들은 그를 독방에 감금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혹독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요한은 항상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으며, 십자가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고 신비스러운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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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멸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인간 측의 교만입니다!>
바깥 일을 하다보면 틈만 나면 만나게 되는 것이 벌레요, 구더기요 지렁이입니다. 처음에는 섬뜩했지만 습관이 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려니 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뱀이나 두더지, 고라니 정도 되면 호기심을 갖고 유심히 들여다보곤 하지만, 벌레나 구더기나 지렁이는 하찮은 미물로 여기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정녕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갈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이사야서 41장 13~14절)
하느님께서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눈여겨보시겠답니다. 하느님께서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오늘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 친히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아주시겠답니다. 만사 제쳐놓고 우리를 도와주시겠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며 황홀한 말씀인가요?
아마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작고 미천한 존재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특별한 분이 틀림없습니다. 나름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존재들은 사정없이 내리치십니다. 대신 벌레나 구더기같은 미물인 존재들, 가련하고 안쓰러운 존재들을 눈여겨보시며 알뜰살뜰 챙기십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 병고나 죽음, 실패나 좌절은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며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시고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심연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들, 한꺼번에 불행이란 불행이 들이닥쳐 주저않아 있는 사람들을 각별히 눈여겨보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 친히 십자가를 나눠 짊어지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과 자리를 듬뿍듬뿍 받고 싶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큰 존재, 엄청난 존재,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존재, 도움이 필요한 존재,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신학에 따르면, 유다 왕국의 멸망,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인간 측의 교만’이었습니다.
주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오만, 주님을 향한 신뢰의 심각한 결핍이 결국 유다 왕국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신탁’을 강조합니다. ‘언제나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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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N8qj2VA3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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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것을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죄라고 해서 독성죄라고 합니다. 독성죄는 세례자 요한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취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것이 피조물인 인간에게까지 폭력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있을까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있을법한 한 부부의 이이기입니다. 어떤 남자는 직장 일을 열심히 하며 아내를 굳게 믿는 순정파 남편입니다. 둘에게는 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능력이 없는 남편을 무시하며 남편을 만나기 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아내가 있습니다. 길면 꼬리가 밟히는 법. 남자는 조금씩 아내의 불륜 사실을 눈치챕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아내가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점점 더 대범해져서 남편이 잠깐 집을 비워도 남자를 들입니다. 급기야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기의 분유에 수면제까지 탑니다. 이런 아내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남자를 보며 남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더는 아내가 아기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들면 아내를 떠나고 어쩌면 둘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를 떠나야 하는 남편도 슬프겠지만, 더 고통스러운 복수는 불륜을 저지른 둘의 몫이 될 것입니다.
부부는 일단 혼인했다면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결혼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결하지 못한 배우자와 혼인했다면 아무리 그녀와 헤어져 살 능력이 되더라도 한 번은 물려야 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한순간에 모든 인간을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셔도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한 번은 폭행당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독성죄까지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설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면 결국 어떻게 할까요? 관계를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5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이 아들 벨사차르 왕은 큰 잔치를 벌이고 그와 그의 손님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신성한 그릇으로 포도주를 마십니다. 잔치 도중 신비한 손이 나타나 벽에 메시지를 씁니다.
벨사차르는 매우 놀라 그 글을 해석해 달라고 박사들과 마술사들을 불러왔지만, 그들은 글을 해석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비의 제안으로 다니엘을 데려옵니다. 지혜와 꿈과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유명한 다니엘은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다니엘은 ‘므네 므네 트켈’, 그리고 ‘파르신’이라는 메시지를 해석하여 하느님께서 벨사차르의 통치를 심판하시어 그의 나라를 메디아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에게 주시겠다는 뜻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벨사차르는 살해됩니다. 이 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 5,25-28)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분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지.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내가 죽고 내가 그분의 것이 되어 그분께 이용당하는 것이 내가 살아서 그분을 나의 금송아지로 이용하는 것보다 더 행복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처음에 그들에게 폭행당하십니다. 그러니 먼저 회개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파라오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파라오로부터 이스라엘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이때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홍해를 건넌 뒤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목자, 곧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파라오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파라오는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 그와 대치되는 ‘나’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뱀과 같습니다. 뱀을 긍정하면서 하느님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독성죄가 벌어집니다. 하느님을 폭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아가 강하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독성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감사의 봉헌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감사하게 봉헌하는 이들은 결코 성체를 영하며 독성죄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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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139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목하는 사제는 151명입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는 111명이고, 미주지역 소속 사제는 40명입니다. 제가 신문홍보로 한인성당을 다녀보면 성당의 규모와 공동체의 모습이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숫자가 100명 이내인 본당도 많습니다. 보좌신부가 있는 본당도 있습니다. 미주 지역에서 한인 성당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성당을 소유한 곳도 있지만 미주 지역에 있는 성당에 더부살이 하는 공동체도 많습니다. 제가 미사를 다니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도 부르클린 교구에 있는 성당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미사는 3개 공동체가 하고 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미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당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령화’입니다. 고령화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에서 오는 이민자의 수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민 2세들이 한인 공동체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오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미국 성당으로 가거나, 아예 성당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교구에 본당이 200개가 넘습니다. 본당을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식당에서 보았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생의 날 수는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깊이와 넓이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을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결정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기도 바쁜데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걱정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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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1-15: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신다.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에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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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일부 사람들은 상대를 비하하거나 업신여길 때, 벌레 같다거나 벌레만도 못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심한 표현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니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당신께서 몸소 선택하신 백성인데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하여 봅니다.
어제 독서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이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길’과 ‘권리’는 이스라엘의 생각과 기대로 가득 찬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외세의 침략과 유배 생활에서 겪었듯이 그들의 예상과 바람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게 되자, 자기들이 걷고 싶은 길과 누리고 싶은 권리를 하느님께서 철저히 외면하셨다며 불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그들과 논쟁하듯 당신 자신을 항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의 모든 계획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일이 그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하느님 백성의 길과 권리를 결정하는 이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당신이심을 일깨우십니다(어제 제1독서 참조).
주님께서는 ‘벌레’와 같은 당신 백성의 처지를 제대로 보게 하시지만, 또한 그 처량한 사정에 놓인 그들을 몸소 도우시겠다는 약속도 함께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이는 하느님의 교육법이기도 합니다. 강한 어조의 훈계로 그들의 처지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시며, 그렇게 당신께 온전히 의존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예상에서 벗어난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 ‘과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잘 아시고 늘 우리 손을 붙잡아 주심을 기억하여야겠습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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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구약성경 말라키서에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여기서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심판의 날’을 뜻하고,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다.”는 죄인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죄인들의 멸망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날’이 되기 전에 먼저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심판 전에 오는 엘리야 예언자가 할 일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다.”는 표현으로는 ‘가족 공동체의 회복’인데, 뜻으로는 “회개와 신앙생활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바로 그 엘리야 예언자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엘리야 예언자가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환생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 예언자의 일’을 세례자 요한이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그냥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구약시대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그렇게 위대한 것은, 메시아의 일을 준비함으로써 신약시대를 준비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는,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한 시대인 신약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였기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였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은총의 시대이고, 메시아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진행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는 말씀은, 신약시대를 거부하는 자들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 사도들과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는, “구약시대는 끝났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신약시대의 첫 번째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은,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라.”라는 뜻입니다. 신약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과 심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말씀은,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의 시간은, 즉 ‘지금’이라는 시간은,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있고, 또 예전에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날을 정하셨습니다.”(히브 4,6-7ㄱ)
회개를 미루거나 거부해서 이 기회를 놓치면, 심판관으로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회개할 시간이 없고, 곧바로 심판대에 서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날은, 말라키서의 예언대로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고, 주님께서 내리치는 파멸을 당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 뜻에 합당하게 회개하고 잘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완성되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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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오 11,12)
정말로 좋은 것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늘, 공기, 물, 땅, 산과 들, 비와 햇빛 등 하늘이 주는 선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오 5,45)
그런데 요즘은 그런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남에게는 안 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니꺼내꺼 따지고 서로 안 빼앗끼고 더 많이 가질려고 전쟁과 폭력도 불사합니다. 결국 힘있는 자가 더 많이 차지하고 힘없는 자들은 그들이 남기는 부스러기로 연명하기도 합니다.
원래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모두가 잘 나누어 쓰라고 주신 선물인데, 그것을 마치 내 것인 양 주장하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폭력을 당하고 있고 무참하게 짓밟힙니다. 폭력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전쟁, 생명경시, 자연파괴, 인권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 땅은 원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풍요로운 하늘 나라였는데, 우리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하늘 나라를 폭행하여 이 모양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하늘나라의 폭행은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사제들을 겨냥한 예수님의 한서린 고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열쇠를 치워버린 사람들"(루카 11,52 참조)입니다.
출애급 때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납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하느님의 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축제를 지냈었지요. 대사제인 아론도 일조하였구요.(탈출기 32,1-6 참조)
애초 하느님 산에 오르려 출발한 이들을 산 밑동에 잡아 앉히고 거기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제공하면서 산에 오르면 생길 위험과 해악을 누차 강조합니다. 이에 타협한 대부분 사람은 열정 가득했던 첫 목적, 첫 마음을 설익은 이상주의라고 치부해 버리고 적당한 안정과 평온에 주저앉습니다.
이제 하느님 향한 열정과 사랑은 빛바랜 옛 추억이 되어 낡은 일기장에 갇혀버리고, 왜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지 묻지도 못하며 그저 우울과 회한의 어두움에 가라앉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공동체 안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아닐까요? 내 안에서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합리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음은 그것이 하늘 나라가 서서히 폭행당하고 있음을 증멩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하늘 나라가 끊임없이 공격받는다는 걸 아십니다. 무작정 하늘 나라를 탄압하려는 폭력은 오히려 식별이 쉬워 피하기도 쉽습니다. 더 무서운 건 선과 진리를 가장하고 들어와 절충과 타협으로 하느님의 뜻과 멀어진 다른 하늘 나라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폭력입니다.
벗님이여,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하느님이 주신 무상의 선물들을 잘 누리고 살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원래 내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잘 쓰고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드려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하늘 나라를 강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이라 우기니 도둑이고 강도며 사기꾼입니다. 하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마태오 22,21)일입니다.
오늘 벗님이 하는 일이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일이 아니라 건설하는 일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벗님은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나라는 내려놓음과 나눔으로 확장되는 그런 나라임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바로 성탄절의 숨은 의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기도의 한부분을 이렇게 좀 바꾸어서 바쳐봅니다.
"하늘과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서 이 땅에 만들어주신 당신의 그 아름다운 나라를 우리가 파괴하지 말고 원래 모습대로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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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구세사를 보면 이 시공간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시기 위해 세상의 점보다도 작은 나라와 고을에 오셨고 한 가정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수많은 나라 중에 약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율법과 땅, 그리고 후손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 후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만 구원을 펴시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온 세상을 향하십니다.그리고 세기와 세기의 역사가 지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과 같아지는 모습으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야 예언서 41,13-14)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에게는 많은 시련과 고통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에는 행여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악 때문에 돌아서시지나 않을까 염려도 하지만 예언자는 변함없이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그들에게 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나라에서 더불살이를 하기에 그들은 가난한 처지가 되고 사막과 같은 그곳에서 갈증으로 혀가 탈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당장은 제국들의 세도가 커서 어찌보면 이스라엘은 기도 펴지 못할 처지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고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오아시스와 같은 약속의 땅을 마련하시고 그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야 에언서 41,18)
주님께서는 그곳에 향백나무, 향백나무, 아카시아, 도금양나무, 소나무, 방백나무, 사철가막살 나무, 젓나무를 함께 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예언자의 이 말은 현실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닌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종말적인 예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11,11)
그리고 이어서 약자들이 폭행을 당하고 폭력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하는 현실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11,13-15)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에 변함없이 충실한데, 이스라엘 백성은 걸핏하면 하느님을 떠나 이방신들에게 넘어가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보지만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할 때가 허다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바빌론 유배까지 가야하는 수모를 겪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벌레같고 구더기 같은 원망스런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위로하며 메시아 시대에 다가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비유적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날카로운 타작기로 만드셔서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부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드실 것이라는 뜻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정치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불전차를 타고 하늘에 올랐던 엘리야가 올라갔던 모습대로 다시 재림하게 되면 그때에는 메시아시대가 되고 그때에는 온 민족이 머리를 수그리고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례자 요한은 눈에 차지도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휘두르는 폭력에 희생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온 엘리야를 몰라보듯, 이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까지 몰라봅니다.
주님을 따라온 군중을 향하여 주님께서 설명하십니다. 비록 세상은 세례자 요한은 몰라보지만 예언서와 율법에 이르는 가르침을 그들이 새겨들을 수 있으면 세례자 요한이 마지막 예언자이며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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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하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늘 나라가 폭행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하셨다고 전합니다. 헤로데 임금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율법 해석으로 하느님의 통치에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려 그들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마태오 23,13 참조)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 나라를 거절하였음을 증언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하늘 나라 때문에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한다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의 불순종과, 하늘 나라의 온전한 도래의 방해를 나타냅니다.(박영식, 『마태오 복음 해설』, 95면 참조)
하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어떤 힘 있는 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이신, 올바름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영토나 체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아픔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옵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힘과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직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다른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고, 구원이 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하느님의 사랑과 올바름을 가슴에 품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거기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홍승의, 『푸른 물고기』, 4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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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11)
예전 남도 여행을 할 때, 강진 다산초당에 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때 다산초당과 함께 오솔길을 통해 백련사도 찾아갔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진으로 유배당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게 됩니다. 어느 날 다산은 우연히 백련사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대흥사의 혜정 선사는 다산의 운명을 바꾼 스승이었습니다. 그들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습니다. 다산의 깊은 인품과 학식을 알아본 혜정 선사 그리고 혜정 스님의 불심과 차도를 알아본 다산,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고,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는 것은 아마도 이 두 사람을 두고 하는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다산은 혜정 선사를 만나면서 차茶에 대해 눈뜨게 되었고, 혜정 스님은 다산을 만나면서부터 그의 학식과 인품에 매료되어 스스로 주역周易 배우기를 청하였습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과는 열 살이나 연하였던 혜정 스님이 단지 차나 마실 요량으로 친분을 쌓았던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생의 스승처럼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삶의 풍요로움과 은혜로움을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다산은 외가인 ‘해남 윤씨’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게 된 뒤, 오솔길을 따라 백련사를 오가며 혜정 스님과의 친분을 나눈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서로가, 서로의 인물됨을 알아 보고 나이나 신분 그리고 성에 상관없이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도반이나 知己를 만나고 서로를 통해 인생의 진면목을 함께 나누면서 함께 성장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저는 ‘인물은 인물을 알아 본다.’는 관점에서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고 접근하고 싶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두 분은 특별한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두 분은 세상에 태어난 과정에서 남다른 특은(?)을 받고 태어나셨으며, 그리고 비록 나이 차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세기世紀를 구분 짓는 인생을 사시다가 떠나신 분들이잖아요. 두 분의 관계는 마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는”(19,6) 부부 관계처럼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시고 마련하신 삶을 사셨던 분이십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예언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어떤 누구도 자신의 사명과 신분을 뚜렷하게 밝힌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 이외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셨던 하느님의 위대한 전령이며 예언자이셨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1,23) 라고 자기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도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11)고 증언해 주십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이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에서도,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이 잘 드러납니다. 큰 인물은 큰 인물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요1,10)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합니다.”(요1,29~30.34) 이렇게 요한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았으며, 자기 제자들이 그분을 따르도록 기꺼이 빗겨 물러서실 정도로 큰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요한이 소인배였다면 결코 자기 제자들에게 이를 알려 주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가는 길을 막아섰을지 모릅니다. 예수를 깎아내리려 하지 스스로가 자신을,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말하였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3,30)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겸손한 인물이며 그러기에 더욱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또한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구약의 사람이었지 신약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분명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시고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신 예언자이셨지만, 구세주의 강생으로 시작하여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된 구원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계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으며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를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10,24)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누구도 세례자 요한과 비교될 수 없지만, 하늘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11)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등불을 켜는 장님’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행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등불을 켰지만, 정작 자신은 그 빛을 보지 못한 장님과 같다는 표현이라고 봅니다.(15,26 참조) 이런 관점에서 비록 세상을 살아가는 ‘작은 이’ 곧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적 사랑이 얼마나 크신 은총인지 알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이토록 크신 주님의 구원 섭리에 감사하면서 그 크신 은총에 상응한 삶을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을 실행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때론 우리가 나약하여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지 못하고 주저하고 멈칫, 거릴 때도 주님은 저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이41,17), “도와주시는”(41,13.14)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절대로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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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에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서와 신학을 두루 섭렵한 석학이었고, 그래서 하느님에 관한 강의를 많이 했으며 신학교에서도 강의 활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춘 신학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이제 사제로서의 직분을 떠나겠다는 충격적인 말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지요.
“나는 하느님의 지식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뒤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은 하느님이란 말밖에 모르는 어떤 할머니보다도 못했습니다.”
지식과 신앙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을 통해 신앙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만 채우는 하느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는 신부들을 바라봅니다. 많은 신학적 지식을 갖춘 신부보다 사랑의 마음을 갖춘 신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신부보다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하며 신앙적 열심을 보여주는 사랑 있는 신부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과연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합니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을까요? 지식을 채우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하느님에 대해 충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식만 있을 뿐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낙타털 옷과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충분히 사람들 위에 설 수도 있었겠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 대한 참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에 반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도 마치 그 삶이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폭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요? 주님께 대한 신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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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권력의 힘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며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혼탁한 이 세상의 빛입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 하고 보여줘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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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
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늘나라>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오 11,12)
힘쓰는 사람에게
결코 무르지 않고
여린 사람에게
끝없이 부드러운
하늘나라
가지려는 사람에게
결코 넘어가지 않고
나누려는 사람을
오롯이 품에 안는
하늘나라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결코 빼앗기지 않고
내어주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곁을 주는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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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 나라”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하늘나라를 살라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내야 할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못살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저 밖 어디엔가 있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소원이, 평생 화두가 하늘나라였고 실제 하늘나라 꿈을 사셨습니다. 하늘나라 꿈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하나 소망하는 것은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꿈을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그러합니다. 얼마전 참 많이 나눴던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함께 계시기에”-2023.10.21
바로 선물처럼 찾아온 하늘나라 삶의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 시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모든 날이 다 좋은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 행복을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이어 떠오르는 두편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입니다.”-2018.10.16.
또 한편의 “하늘나라”란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사랑으로 꽃피어 내어
하늘 담으면
거기 그 자리 제자리 꽃자리가 하늘나라이다.”-2023.6.8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우리의 복된 신원을 상기시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당신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우리 하나하나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비록 가장 작은 우리들이라도 이미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살고 있기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는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처럼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정말 엄청난 자부심을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있는 사람을 들어라.”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이가 바로 우리들이며, 요한에 이어 하늘나라를 사는 우리 모두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끝날까지 이런 폭행과 폭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늘나라를 지켜낸 하늘나라의 전사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무수한 순교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인성녀들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하늘나라를 사셨던 성인들이었고 끊임없이 하늘나라를 지켜냈으며, 아마도 세상 끝날까지 하늘나라에 대한 세상의 온갖 폭행과 폭력, 박해는 과거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새삼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서 즉 하늘나라의 전사로서 우리의 전의를 날마다 새로이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전사로서 그 빛나는 모범중 한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입니다.
에스파냐 아빌라의 폰티베로스 출신의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에 태어난후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1591년에 만 49세로 선종하기까지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와 영적도반이 되어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던 분입니다. 교회학자이면서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였던 성인은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등 영성신학의 고전을 남겼습니다. 성인의 마지막 유언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 저는 천국에서 아침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Hoy estaré en el cielo diciendo maitines)-
아빌라에서 있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적 체험도 인상적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기도하고 있을 때 십자고상의 예수님과의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요한아, 너의 이 모든 수고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Ioannes quid vis pro laboribus)”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고 경멸을 받는 것입니다(Domine pati et condemni pro te)”-
주님을 위해서라면 온갖 고통과 모욕도 달게 받겠다는, 얼마나 십자가의 주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던 신비가 십자가 성 요한인지 깨닫게 됩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영적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으로서 하늘나라의 전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하늘나라 수호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따랐던 모든 성인성녀들이 그 모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겨놓고 싸우는 영적승리가 보장된 영적싸움이요, 다음 주님의 복음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이사야서의 주님 말씀도 평생 하늘나라의 전사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그대로 하늘나라의 영적전사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격려말씀입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이런 주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입니까? 하루하루가 하늘나라를 살라고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나라의 전사가, 하늘나라의 수호자가 되어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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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진정 큰 사람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기에 요한이 큰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요?
제 생각에 목전의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닙니다. 비난을 들을 수 없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안 될 때 조급해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질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며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신발 끈을 풀어드릴 수조차 없는 큰 분으로 받들고 그런 요한을 주님은 사람 중의 큰 사람이라고 치켜세우십니다.
소인배는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도토리 키 재기 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고 남을 작게 만들며 자기가 커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니고
낮출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면 이런 것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큰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요한은 주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즉시 그분이 오시기로 된 분임을 알아봅니다.
하늘에서 땅만큼 낮추어 오신 크신 분을
땅에서 하늘 님으로 알아보는 요한은 진정 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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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마태11,11-15)은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 이 사자(使者)의 역할에 충실했던 예언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을 두고, '그 어떠한 예언자보다 큰 인물'이라고 평가하시면서도, 하늘 나라에서는 그가 '가장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11,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요 '깨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나의 구원과 너의 구원을 위해 애써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거의 모든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보고 있습니다. 판공성사는 '지금까지의 나의 시간들을 잘 성찰하고, 영육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또 하나의 구유'인 '마음의 구유를 만드는 것'입니다.
판공성사를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판공성사를 잘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의 시간을 묻지 않으시면서 조건 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인도합시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마음의 구유를 잘 만들어 놓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화답송 후렴)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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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fJrvtkC8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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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 11)
만남이
하늘 나라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이
아름다운
하늘 나라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까?
사람이 기쁨이고
기쁨이 사람입니다.
이렇듯
인물이
인물을
키웁니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더 큰 사람이며
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람을 잃으면
길도 잃게 됩니다.
사람이
곧 길입니다.
사람다운 사람
세례자 요한은
사람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으로
길을 마련합니다.
그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길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기쁨의 이유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고통 끝에 얻은
참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줍니다.
담백한 복음의
기쁨입니다.
복음으로
살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음을 돌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대림의 길은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은
폭행을 멈추고
하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하늘 나라 안에
아름다워야 할
사람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며
어떠한 길을
가고 있는 지를
복음 안에서
묻고 살피는
회개의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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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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