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대제(Karl der Grosse, 742-814, 샤를마뉴 대제, 또는 카롤루스 대제)
카를 대제는 성격이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었다. 관대하고 인자하면서도 때로는 폭군처럼 잔인하고 포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또 재물에 본능적인 욕망이 있으면서도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주는 포상과 교황청에 바치는 헌금에는 절대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굉장히 신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도 이슬람교의 아랍왕조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그리스도교 윤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여색을 즐기며 자기 딸을 결혼시키지 않았다. 때로는 장사꾼처럼 잇속 차리기에 굉장히 능하면서도, 또 때로는 시인처럼 환상이 가득한 이상을 꿈꾸기도 했다.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그는 후대의 독일인들이 보여주었던 모순들을 모두 지니고 있는 왕이었다.
800년 성탄절 저녁 시계가 자정을 알리자, 로마 교황 레오3세는 베드로 대성당에서 게르만인이요 프랑크 왕국의 국왕인 카를 대제에게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 기름 부으며 십자가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는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그 신화는 피로 써내려 간 신화다. 실상 그 신화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이 신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서유럽은 온통 피바다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카를 대제는 작센인을 정복하겠다는 속셈을 감추고 회의를 개최한다며 작센 귀족을 불러 모아 4,500명이나 체포했고, 하루 아침에 그들을 남김없이 처형했다.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서도 카를 대제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성탄절과 부활절을 즐길 정도였다. 이 베르덩 대학살 역시 교황청에서는 “하나님이 카를 대제의 손을 빌려 내리는 정의의 형벌”로 풀이했다. 카를 대제는 자기가 이끄는 병사들을 행해 외쳤다. “프랑크의 병사들이여! 순결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고상한 기마 용사들의 영예를 위해, 저 오만하고 사악한 야만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도록 하자! 실패는 우리와 인연이 없다! 우리는 항상 승리만을 차지할 뿐이다!” 이렇게 종교와 전쟁이 결합되면서 학살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773년 카를 대제는 신임 교황 하드리아누스에게서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해 달라는 서신을 받았다.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러 나섰지만 알프스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산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는 데다 기온마저 낮아 대군을 이끌고 전진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어떤 길목은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정도로 좁았다. 행군 중 말과 사람이 깊고 어두운 계곡으로 떨어지면서 처량한 비명을 질렀다. 얼어 죽는 병사들이 수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를 대제는 힘주어 말했다. “나는 숭고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쟁에서 승리해 교황청을 보호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의지와 능력에 대한 시험이요, 고난이다. 프랑크 왕국의 병사들이여! 용맹무쌍했던 우리 선조들처럼 다시금 힘을 내자! 다시 일어서자! 가장 참기 힘든 고난의 시간이 올 때 승리는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대군을 힘을 입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랑고바르드 왕국에 들어섰다.
카를 대제는 정력이 넘치는 데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하면서도 병사들에게 진영 옆에 성당을 짓게 했다. 랑고바르드 국왕은 하루아침에 모습을 드러낸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성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랑고바르드 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작품이라고 여겼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장기간의 포위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랑고바르드 국왕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774년 부활절 카를 대제가 로마에 도착하자 그의 눈앞에는 10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긴 환영 대열이 펼쳐졌다. 로마 시민들은 종려나무 가지와 감람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찬양하는 노래로써 열렬한 환영의 마음을 표현했다. 전도자들은 카를 대제 앞에서 십자가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집정관을 환영할 때만 행하는 의식이었다.
카를 대제는 말에서 내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카를 대제는 계단을 하나 오를 때마다 무릎을 꿇고 돌계단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계단 맨 위에 이르러서는 굉장히 오만한 태도로 하드리아누스 교황의 오른손을 잡고 함께 성당에 들어갔다. 칼르 대제는 이렇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는 더없이 낮은 자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땅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가 누구든 절대 무릎 꿇는 일이 없었다.
778년 8월 15일 에스파냐를 정벌하려던 그는 피레네 산 속 롱스포에서 철수를 결심한다. 그때 바스크인들이 기습했다. 지형에 익숙지 않았던 2만 명의 롤랑의 후위 부대가 전멸했는데도 그는 구하러 가지 않았다. 이 전투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참패 가운데 하나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후 20년 동안 여섯 차례 더 전쟁을 강행하여 마침내 에스파냐 영토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게 되었다. 카를 대제는 롤랑을 잃은 그 전투에서 전사자 명단을 일일이 조사해 유가족에게 넉넉하게 보상했고, 전사자들을 위한 기도를 할 때에는 눈물마저 맺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롤랑의 이름이 언급될 때면 소리 내어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카를 대제는 800년 서로마 황제로 등극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자기보다 더 정통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금은보석을 앞세워 중신과 대규모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해 혼인을 청했다. 당시 58세였던 카를 대제가 마음에 두었던 상대는 50세이긴 하나 고상하고 우아한 동로마 제국의 여제 이레네였다. 그는 이렇게 하여 꿈으로만 그려온 통일된 로마 제국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곧이어 정변이 일어나 이레네는 유배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동로마제국은 장군이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카를 대제는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814년 1월 28일 여명이 밝아올 때 그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는 죽기 전 가슴에 성호를 긋고 말했다. “당신 품으로 갑니다. 오! 하나님, 저의 영혼을 당신께 드립니다.” 29년 뒤 카를 대제의 손자 셋은 베드덩 조약을 체결했고 나라는 셋으로 나누어졌다.
본디 문맹이었던 카를 대제는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학자들을 모아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고 일정 수준에 이른 대학자들에게는 최고위 관직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는 “질문할 줄 아는 것조차도 이미 학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울 때 카를 대제는 이미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그는 종이와 펜을 베개 밑에 두고서 틈날 때마다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러 외국어를 읽고 쓸 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문학 작품까지 창작했다.
카를 대제는 궁전 안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오히려 빈곤하지만 우수한 학생들을 뽑았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대단히 영광스럽다네.” 반면 노력을 게을리 하는 귀족 신분의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냉담했다.
또 그는 로마의 예술과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시저의 <갈리아 전기>와 타키투스의 <연대기>, 그 밖의 로마의 저명한 작품들은 모두 카를 대제 시대의 학자들이 보존하여 후대에 전해준 것이다. 또 그는 성서를 수정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모아 카를 소문자를 창안했다. 오늘날의 활자체는 상당 부분 카를 소문자의 기본 형식을 띠고 있다. 교육과 문화를 중시했던 카를 대제의 정신은 독일 문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카를 대제의 시기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