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은 예전부터 거무네미
검은 탄덩어리가 발견되는
지명이라 검은천이 금천으로 불리 정도로 탄광과 연관있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전략물자
수탈로 탄광의 개발이 값싼
조선인의 노동력이 대부분 충당되었다
우리가 어린시절 광산작업 현장은 열악했다
방진마스크 하나없는
지하 막장
안전등 하나없이 간드레불
카바이트를 통에 담아
거기서 새어나오는 가스에
불을 붙여서 그 불빛으로
지하막장에서 작업해야 했으니
오즉했으랴
태백은 유난히 겨울이 길고
눈 또한 많이 내린다
겨울철 처마밑에 고드름은
긴 창검같이 햇살에 번쩍이며
위용을 더하기만 했다
광산촌 사택이 판자집에 지붕은
루빙을 입힌 허름한 목조 건물이라 겨울에 찬바람은 방안에 누워있어도 코가 얼어버릴 정도였다
어린시절 교통도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행여 대설이라도
내리면 요즘이야 재설작업
장비도 많다지만 당시는
미터씩 내린눈을 개미굴 파듯이
삽으로 눈을 치운고 보행했어야 하니
그 불편함이 여간 아니다
어린시절 그나마 아궁이 연탄이 춥고 배고픈 시절을 달래주던
유일한 따뜻함이였을것이다
학교다닐때 태백은 난방용으로 화목도 사용했지만 괴탄을 사용한 학교도 더러있었다
괴탄은 연탄을 가공하기전 상태인지라 난로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면 화력이 좋고 난로 주변으로 도시락을 올려놓으면
수업시간 도시락 타는 냄새에
수업시간 온통 신경은
도시락으로 가곤했었다
70년대 초반 생활상태가 여유롭지 못한 가정이 대부분이라 간혹 계란 후라이 하나 해오면 그 아이 주변으로 학생들이 모이곤했었다
어린시절 냇가에는 광산이 수백개가 산재해있어서 미술시간 자연을 배경으로 그림 그리는 시간에 냇가의 냇물을
새까맣게 그려서 선생님을 당황하게 했던 기억이 빛바랜
사진처럼 생각난다
선생님의 의도는 맑은 하천을
학생들이 그려주길 바랐겠지만
동심의 세계는 보는 그대로를
도화지에 올려서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였고 전국뉴스에도
나올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태백은 침엽수 나무가 많아서
잣나무가 많은데
딱이 먹을게 없었던 유년시절
잣나무 올라 잣따다가 청원경찰
아저씨한데 걸려서 고생해서 땃던 잣 뺏기고 무릅끓고 벌서던게 엊그제 일같은데
벌써 50년 세월이 지나갔다
광산촌은 광부들의 힘든 삶의
휴식처인 선술집도 많아서
갑방 을방 근무교대시
선술집에는 고기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고 광산경기 좋을때는 강아지도 만원짜리
한장씩 물고 다닌다는 속설도
만들어지곤했었다
태백은 광부들의 허기지고
출출한 배를 소주한잔 식사 대용으로 먹게된게 태백 물닭갈비의 시초인것이다
태백은 수많은 직업병 환자들
진폐 규폐 환자가 생겨나게 되었고 광산작업중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은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그들의 넋을 위로 하기위해 태백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통리가는쪽 산업전사 위령탑
만이 우뜩서있다
광산은 어려운 50년 60년대
우리나라 경제의 견인차였으며
추운방을 따뜻히 덥히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8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라는 정부정책에 의해 인구 13만의
도시가 4만으로 축소되며 지역경제 또한 공동화 상태에 이른것이다
이제 태백은 스포츠 관광을
기점으로한 고원관광 레져로
시정방향을 설정하고
매년 대학축구 선수단유치
전국 태권도 선수단 유치
낙동강과 한강발원지 황지연못과 검용소에 다체로운
관광객 유치등
낙동강 옛물길 복원사업등
변화하는 태백의 모습을 보여주고자한다
이제는 태백시민 누구나 시민의식을 가지고 동참하여
지역발전에 이바지해야 할것이다
시간의 바늘을 저벽에 걸어놓을수 있다면
나는 어린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때 광산이라는
산업전사라는
우리들 아버지들의
외침이 있었으니깐
이제 글을 마무리 하고자한다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의
경제발전이 있는것이고
그들의 피땀의 댓가로
대한민국이 있는겁니다
이것을 감히 말씀드릴수있다
프로필
태백시청근무
태백문인협회회원
2019년 한밝백일장 시부분
최우수상 수상
한맥문학 시부분 등단
행정안전부장관 표창장 수상
카페 게시글
문학작품방
탄광촌 이야기
이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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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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