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同行)이란 “같이 길을 감” 또는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실 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 때 그는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갔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일러 주실 그 산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질 예정이다.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22:6),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22:8). 동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분위기이지만 창세기 저자는 두 사람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같은 목적을 위해, 동일한 마음으로 품고 길을 떠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은 칼을 들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칼을 든 아버지는 나이 많은 늙은이였던 반면, 희생제물이 되어야 할 아들은 건장한 청년이다. 늙은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달아날 수도, 자신의 힘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삭은 아버지께 순종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거나 외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사라는 이 장면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인 23장에서 사라는 숨을 거둔다. 사라의 침묵과 죽음에서 죽기까지 순종했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잔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겟세마네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요한은 십자가 위에 매달려서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아를 언급하면서 사랑하는 예수께서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시는 반면, 정작 마리아는 침묵 속에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샤갈은 이삭의 희생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같은 맥락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Marc Chagall, <이삭의 희생>(Le sacrifice d’Isaac: 1960-66)
이 그림에서 샤갈은 이삭을 평온한 상태에서 번제단 위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자발적 순종, 또는 자발적 희생을 말하려는 것이다. 노랑색은 평온을 상징한다. 반면 아브라함은 붉은색이다. 하나님게 순종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왼쪽 상단의 여인은 사라인데, 그녀 역시 절규하는 표정이지만 입을 다문 채 멀찍이서 바라만 볼 뿐이다. 우측 상단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어머니 마리아도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지 않고 멀찍이서 바라보며 슬퍼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과 하나님이 같은 마음을 품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순례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동행’이다. 순례는 낯선 길을 외롭게, 때로는 힘겹게 걸어가야 한다. 이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동행이다.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여정, 골고다로 향하는 순례의 길에 같은 마음을 품고 3일 길을 걸어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행복한 자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멀찍이 서 있어도 괜찮다.
첫댓글 이 땅에서의 순례길을 기쁘게, 기꺼이 '동행'하는 우리 공동체❣️
참 좋다~같은 마음을 품은 동행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