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 고문으로 죽을 고비 밥 한톨 백 번 씹어 넘기며 감옥에서 8·15 광복 맞아
1960년 시국선언 앞장 동아일보 사장 땐 5·16 군정 거부 유신체제 때도 독재와 맞서 별명 ‘대추씨’… 正道 지킨 일생
▲ 조선일보 ‘원로와의 대담’당시(1985년 8월) 90세의 일석.
자그마한 체구, 온화한 표정, 단아한 선비의 전형으로 생전의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이 떠오른다. 아호 일석이나 별명 ‘대추씨’에 담긴 대로 그분의 삶은 지조 그 자체였다.
일제가 날조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온갖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일석은 우리 국어를 지켜냈다. 1960년 4·26 교수단 시위 때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5·16 군사정변 뒤 동아일보 사장 때는 군정을 거부했고, 유신체제 아래서는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고문으로 독재와 결연히 맞섰다. 또 1980년대 5공화국 때도 시국선언에 앞장서는 등 일석의 생애는 정도(正道) 그 자체였다.
필자가 ‘광복 40주년 원로와의 대담’ 때(조선일보 1985년 8월 17일자) 일석이 90대 고령에도 쩡쩡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특유의 고담준론을 토해냈던 바로 그때 그 집 안뜰, 아마도 일석이 가장 오래 몸담고 살았을 호젓하고 그윽한 느낌마저 주던 서울 동숭동 교수 사택 동네는 번화한 대학로의 한 축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나마 일석의 자택이 있던 자리에는 6층 높이의 일석 학술재단 건물이 들어서 후예와 제자들이 그분의 유지(遺志)를 기리고 있었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정리하고 남은 재산이 있으면 국어학 연구에 힘쓴 후진들을 돕는 데에 써달라고 저와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지요. 그래서 함께 모여서 사시던 집터에 건물을 짓고 학술재단도 만들었습니다. 6층에 자료실, 회의실 등을 마련해 저서·일기장·원고 등 유품들을 전시·보관하고 있고, 제가 5층에서 기거하고 있지요. 그동안 재단도 자리를 잡아가 작년에 8번째 일석국어학상 시상(연구비 3000만원)을 했고, 또 작년부터는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일석국어학위논문상(500만원)도 신설했습니다.”(아들 교웅씨)
일석은 1896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지금의 의왕시 포일1동) 양지편 마을에서 전의(全義) 이씨 종식(宗植)과 박원양(朴元陽) 사이에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석은 다섯 살부터 천자문에 이어 동몽선습을 배우고 경서(經書)까지 마쳤다. 13살 때 경주 이씨 정옥(貞玉)과 결혼하고, 곧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여 신익희(초대 국회의장), 정구영(변호사, 공화당의장 역임)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이어 경성고보(현 경기고) 2학년에 편입하였다가 일어를 모르는 학생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심하자 3학년 1학기 때 자퇴한다. 이듬해(1912년) 양정의숙에 입학하였으나, 그후 가세가 기울어 전 가족이 낙향하였다. 당시 겨울방학에 친척 학생의 교과서들을 빌려 보게 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교재용 프린트물인 주시경의 ‘국어문법’이었다.
“처음 호기심에서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이런 학문도 있었구나’하는 경이를 맛보았다. 재독, 삼독을 하고 5, 6회를 거듭 읽는 동안 ‘나도 국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내 인생의 길은 이렇게 시작이 됐으니 참으로 기연이라 할 것이다.”
1916년 일석은 다시 상경하여 중앙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당시 인촌 김성수가 학교를 경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은 일석보다 한 학년 위였고, 동급생인 정문기·서항석·최순주는 후에 각 분야에서 크게 활동했던 분들이다.
1918년 일석은 평균 98점으로 수석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 희망란에 ‘언어학’이라고 써 넣었으나, 선생님도 잘 모르는 분야라 ‘문학’으로 바꿔 적었다고 한다. 진학할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석은 인촌이 인수한 경성방직에 취직하였다. 월급은 15원(당시 하숙비 6원)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일석은 대학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면서 저축하였다. 이즈음 겪은 3월 1일을 일석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급히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학생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공원문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정신 없이 만세를 외쳐댔다. … 2일 밤, 중동(中東) 때부터의 친구인 이병직군의 집에서 태극기를 그렸다. 3일이 되자 밤새워 만든 태극기 50여개를 가슴에 품고 아침 일찍 서울역 앞으로 나갔다. 우리는 품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우리는 숙의를 거듭한 끝에 지하신문을 만들자는 뜻을 모았다. … 우리는 밤새도록 수천 장을 프린트해서는 다음날 저녁 두루마기에 감추어 집집마다 배달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일석은 지하신문을 만들기 위해 등사기를 회사에서 훔쳐오고, 4개월 동안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밤에만 지하신문을 만들어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과 국제정세를 국민에게 알려주었다. 1925년 일석은 30세의 나이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2년 후 일석은 조선어문학과에 진학한다.
“일석은 그 무렵 다섯 자가 될까말까하는 작은 키에 사각모자를 눌러쓰고 무거운 책가방을 든 채 동숭동학부를 분주하게 들락날락했다. 그 무렵 문과 B의 학생 총수 50명 중 한국인은 많아야 1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여러 학과로 분산되다보니 어떤 과에는 한국인 학생이 한 사람도 없는 과도 있었다. 일석이 속한 조선어문학과도 1회에 조윤제 한 사람뿐이고 2회에도 이희승 한 사람…. ”(경성제대 후배 조용만의 ‘한국언론인물사화’)
일석은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이듬해 조선어문학회를 창립하고, 1932년에 이화여전 교수가 되었다. 조선어문학회는 조선어학회로 개칭하여 사전편찬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선정한다. 그 선행 작업으로 맞춤법 통일안 제정을 위한 수정작업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정보가 새어 간사장인 일석이 시말서를 쓰기도 한다.
외래어 표기법도 1931년 정인섭, 이극로, 이희승 세 명의 책임위원이 기초작업에 착수하여 1938년에 최종안을 확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우리말 다듬기 업적들은 우리말을 지키겠다는 투철한 민족의식과 강한 의욕이 뒷받침된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의 일석은 살림 형편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는 서대문 밖 금화산 밑 동네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자주 늦게 들어오셨지요. 약주도 안 드시는 분이 아마도 요즘식으로 하면 ‘과외선생’을 하셨던 듯해요. 저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뵙기 힘들었으니까요. 월급쟁이 평범한 가정이었지요. 근검절약하셔서 출판사에서 원고청탁서를 보내오면 그 뒷면에 원고 구상을 깨알같이 쓰시기도 하고…아마 나름대로 금전출납부도 작성하신 것 같아요.”(아들 교웅씨)
▲ 일석의 장남 교웅씨. photo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1942년 10월 일석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되어, 함남 홍원 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한다. 일제는 온갖 고문과 협박을 통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고, 어학회 간부 회원 사전편찬 지원자까지도 검거하였다. 당시 고문에는 육전(陸戰), 해전(海戰), 공전(空戰)이 있었다고 한다.
“육전이란 각목이나 목총이나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 아무데나 마구 후려치는 것이었다.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났고, 머리가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처음 몇 대를 맞을 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나중에는 별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들은 해전이나 공전으로 들어간다. 기다란 나무 판때기 걸상에 반듯하게 뉘고 묶은 뒤에 커다란 주전자로 콧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 이른바 해전인 것이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은 기관을 따라 폐부에 스며들고, 입으로 들어간 물은 위로 들어가 삽시간에 만삭의 여자처럼 배가 불러지면 누구든 기절하고 만다. 그러면 감방에다 처넣고 주사를 주고 약을 먹여 정신이 들면 공전에 내보낸다. 두 팔을 뒤로 묶어 팔 사이에 작대기를 지르고는 양쪽 끝을 밧줄로 묶어 천장에 달아 맨다. 처음에는 짚단을 발 밑에 괴어 주지만 저들이 지어낸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짚단을 빼 버린다. 그리고는 달아맨 두 줄을 마치 그네줄 꼬듯 한참 꼬았다간 풀어 놓는다.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과 심한 어지러움으로 누구든 10분도 못 되어 혀를 빼물고 기절을 하고야 만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예심은 1944년 9월 30일에 종결되어 장지영과 정영소는 면소가 됐고, 이윤재·한징 등은 옥중 원혼이 됐다. 당시 함흥형무소에서는 270여명의 동사자가 났다. 일석의 옥중기는 이어진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게다가 전황이 날로 급박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난 등 각종 물자난도 심해 갔다. 귀리·옥수수· 감자·수수·피 기장 등 잡곡을 쪄서 뭉친 주먹밥만으로, 혹은 썩은 콩깻묵 한 덩이씩으로 연명해야 하는 우리는 극도의 영양 실조와 운동 부족으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많은 수인들이 죽어 나갔다. 한밤중 나막신 소리가 저벅저벅 울려 오고 옆 감방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 다시 나막신 소리가 멀어져 가는 소리는 예외없이 기한(飢寒)으로 죽은 시체를 실어 내는 것이었는데….”
이때 일석은 콩깻묵 주먹밥 한 덩이를, 밥풀 한 톨씩 백 번을 씹어, 허기와 설사로 희생된 동료와는 달리 생존이 가능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약골이어서 늘 오래 씹는 습관이 그를 살린 셈이다. 당장의 허기만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밥풀 한 알씩을 몰래 모아 작은 성냥갑 크기로 뭉쳐 장차 탈옥하게 될 때의 비상식량으로 만들기도 했다니 ‘빠삐용 작전’도 세웠던 셈이다.
1945년 1월 18일 함흥 지방법원은 어학회 사건으로 기소된 12명에 모두 유죄판결을 내려 이극로 징역 12년, 최현배 4년, 이희승 3년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들은 경성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었다. 이해 4월 중학 3학년인 아들 교웅씨는 함흥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그때 초췌한 모습에 허름한 수의(囚衣)를 입고 계신 부친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8·15광복을 맞아 일석은 8월 17일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한다. 일석은 우선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우리말사전 편찬을 서두르는 한편, 교과서 편찬에도 힘써 ‘한글 첫걸음’ ‘초등 국어 교본’ ‘중등 국어 교본’ 등 7종의 교과서와 공민교과서를 낸다. 백낙준·이상백·이병도 등 제씨와 서울대 설립 작업도 벌여 1946년 10월에 서울대 문리대 교수에 취임한다.
6·25전쟁 때 미처 피란을 못 떠난 일석은 치질이 심해 겨우 납북을 면하였고, 인민군 징집 신체검사에서 연령(55)과 신체 허약으로 불합격되기도 하였다. 생계를 위해 한때 단팥죽 장사도 해야 했다. 부인과 며느리가 단팥죽을 만들었고 일석은 떡집에서 찹쌀떡을 받아 왔다. 10원을 주면 두 개씩을 더 주었고 10원어치를 팔면 2원 남는 장사였다고 한다.
1960년 4월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한창이던 때 일석은 교수단 데모에 참가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많은 피가 뿌려지고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25일 상오 10시에 구내 교수회관에서 모이자’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 50, 60명 정도의 교수들이 모였다. 좌중의 의견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쪽으로 쉽게 모아졌다. 의사표시 방법은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선언문 기초위원을 뽑았는데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의대 정문을 나서 가두 행진을 시작한 것은 하오 늦게였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1961년 일석은 서울대 문리대학장직에서 정년으로 퇴임하나 2년 후, 1963년 8월 1일 동아일보 사장직을 맡는다. 전공과 관계가 없는 외도의 길이어서 계속 사양했으나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와 수락하게 됐다는 것이다. 일석의 대학 제자로 사장 비서 일을 했던 이종석씨(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의 회고다.
“그때 고교 선생으로 있다가 갑자기 부르셔서 모시게 됐지요. 대학 스승인 데다 원로시고 깐깐하신 분이라 실수할까봐 늘 조심스러웠지요. 교수하시던 분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문사를 어떻게 운영하실지… 솔직히 걱정도 됐고요. 하지만 선생은 매일 아침 논설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등 예상을 뒤엎고 취임 벽두부터 친정체제를 펴기 시작했지요. 경리부에서 올리는 주요 재무 관계 서류도 일일이 점검하셨는데, 젊은 시절 경성방직 경리과에 근무하신 실력도 발휘하신 셈이지요. 선생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군사정부는 정통성이 없는 정부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를 위해 동아일보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1965년 한·일회담 반대로 정부와 맞섰을 때 선생께서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조선호텔에서 만나서는, 동아방송 출력 증강 건을 부탁해야 하는 자리였는데도… 김 부장이 동아일보 보도에 대해 항의하자 물러서지 않으셔요. 고성이 밖에까지 들려오고, 그렇게 신문을 지켜냈지요.”
일석은 1971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한한(漢韓)대사전을 편찬하며 ‘현정회(顯正會) 이사장, 광복회 고문 등으로 활약하다 1989년 11월 27일 94세로 별세,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문봉리 선영에 안장된다.
“선친께서 생전에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묻히는 것을 사양하셔 조촐히 가족장으로 모셨지요. ‘공것을 바라지 말며, 남에게 억울한 짓을 하지 말라. 아무리 걱정을 하여도 애당초부터 아무 효과도 없을 걱정은 하지 말라. 성실하라. 정직하라. 그리고 겸손하여라.’ 이런 가훈을 적어 남겨 주셨지요.”(아들 교웅씨)
일석은 남매를 두었다. 아들 교웅(84·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서울 명륜동에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오채희씨(작고)와 결혼하여 4남매를 낳았다. 맏딸 옥경(60·미 워싱턴대 심리학 박사)씨는 성신여대 심리학과 교수, 맏사위는 민경환(61·워싱턴대 심리학 박사)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둘째 딸 은경(57·이화여대 졸업)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 둘째 사위는 최병인(60) 서울대 의대 교수이다. 맏아들 동호(56·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경희대 의대 교수로 정혜영(51·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둘째 아들 경호(54·미 브라운대 경제학 박사)씨는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 둘째 며느리는 박경화(54·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씨다.
일석의 딸 교순(82·배화여고 졸업)씨는 김민수(84)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와 결혼하여 아들 용철(의사·작고)씨와 소담(56·이화여대 화학과 졸업), 소영(52·단국대 미술과 졸업) 두 딸을 낳았다. 증손녀 경은(25)씨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 중이어서 일석의 뒤를 잇고 있는 셈이다.
내가 본 일석
전광현 (73·단국대 명예교수)
대학 다닐 때부터 나는 일석 선생을 거인 같은 분으로 한결같이 존경해 왔고, 그 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으로 오셔서 또 10년을 모시게 되었다. 동아일보 사장으로 가셨을 때도 임기가 1년 더 남았는데도 처음 약속하신 대로 2년 만에 어김없이 물러나시더니, 단국대에서도 더 모시고자 했으나 역시 10년 만에 퇴임하셨다.
이처럼 매사에 분명하고 특히 공사(公私)에 철저하셔서 아마도 사모님이 힘드셨을 것 같다. 주례를 맡거나 친구분들을 만날 때는 절대로 학장차를 타지 않았다. 선생은 월급을 더 드린다고 해도 꼭 규정대로만 받아가셨고, 그러면서도 저축해서 사 모으신 은행주를 만년에 거액의 장학기금으로 내놓아 후진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인내심도 대단하셔서 서울대 병원에서 탈장수술을 받으실 때 마취를 하지 않아 의사들이 당혹해 했던 일도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경우는 있었어도 실제로는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 고문으로 죽을 고비 밥 한톨 백 번 씹어 넘기며 감옥에서 8·15 광복 맞아
1960년 시국선언 앞장 동아일보 사장 땐 5·16 군정 거부 유신체제 때도 독재와 맞서 별명 ‘대추씨’… 正道 지킨 일생
▲ 조선일보 ‘원로와의 대담’당시(1985년 8월) 90세의 일석.
자그마한 체구, 온화한 표정, 단아한 선비의 전형으로 생전의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이 떠오른다. 아호 일석이나 별명 ‘대추씨’에 담긴 대로 그분의 삶은 지조 그 자체였다.
일제가 날조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온갖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일석은 우리 국어를 지켜냈다. 1960년 4·26 교수단 시위 때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5·16 군사정변 뒤 동아일보 사장 때는 군정을 거부했고, 유신체제 아래서는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고문으로 독재와 결연히 맞섰다. 또 1980년대 5공화국 때도 시국선언에 앞장서는 등 일석의 생애는 정도(正道) 그 자체였다.
필자가 ‘광복 40주년 원로와의 대담’ 때(조선일보 1985년 8월 17일자) 일석이 90대 고령에도 쩡쩡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특유의 고담준론을 토해냈던 바로 그때 그 집 안뜰, 아마도 일석이 가장 오래 몸담고 살았을 호젓하고 그윽한 느낌마저 주던 서울 동숭동 교수 사택 동네는 번화한 대학로의 한 축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나마 일석의 자택이 있던 자리에는 6층 높이의 일석 학술재단 건물이 들어서 후예와 제자들이 그분의 유지(遺志)를 기리고 있었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정리하고 남은 재산이 있으면 국어학 연구에 힘쓴 후진들을 돕는 데에 써달라고 저와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지요. 그래서 함께 모여서 사시던 집터에 건물을 짓고 학술재단도 만들었습니다. 6층에 자료실, 회의실 등을 마련해 저서·일기장·원고 등 유품들을 전시·보관하고 있고, 제가 5층에서 기거하고 있지요. 그동안 재단도 자리를 잡아가 작년에 8번째 일석국어학상 시상(연구비 3000만원)을 했고, 또 작년부터는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일석국어학위논문상(500만원)도 신설했습니다.”(아들 교웅씨)
일석은 1896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지금의 의왕시 포일1동) 양지편 마을에서 전의(全義) 이씨 종식(宗植)과 박원양(朴元陽) 사이에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석은 다섯 살부터 천자문에 이어 동몽선습을 배우고 경서(經書)까지 마쳤다. 13살 때 경주 이씨 정옥(貞玉)과 결혼하고, 곧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여 신익희(초대 국회의장), 정구영(변호사, 공화당의장 역임)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이어 경성고보(현 경기고) 2학년에 편입하였다가 일어를 모르는 학생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심하자 3학년 1학기 때 자퇴한다. 이듬해(1912년) 양정의숙에 입학하였으나, 그후 가세가 기울어 전 가족이 낙향하였다. 당시 겨울방학에 친척 학생의 교과서들을 빌려 보게 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교재용 프린트물인 주시경의 ‘국어문법’이었다.
“처음 호기심에서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이런 학문도 있었구나’하는 경이를 맛보았다. 재독, 삼독을 하고 5, 6회를 거듭 읽는 동안 ‘나도 국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내 인생의 길은 이렇게 시작이 됐으니 참으로 기연이라 할 것이다.”
1916년 일석은 다시 상경하여 중앙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당시 인촌 김성수가 학교를 경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은 일석보다 한 학년 위였고, 동급생인 정문기·서항석·최순주는 후에 각 분야에서 크게 활동했던 분들이다.
1918년 일석은 평균 98점으로 수석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 희망란에 ‘언어학’이라고 써 넣었으나, 선생님도 잘 모르는 분야라 ‘문학’으로 바꿔 적었다고 한다. 진학할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일석은 인촌이 인수한 경성방직에 취직하였다. 월급은 15원(당시 하숙비 6원)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일석은 대학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면서 저축하였다. 이즈음 겪은 3월 1일을 일석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급히 탑골공원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학생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공원문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정신 없이 만세를 외쳐댔다. … 2일 밤, 중동(中東) 때부터의 친구인 이병직군의 집에서 태극기를 그렸다. 3일이 되자 밤새워 만든 태극기 50여개를 가슴에 품고 아침 일찍 서울역 앞으로 나갔다. 우리는 품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우리는 숙의를 거듭한 끝에 지하신문을 만들자는 뜻을 모았다. … 우리는 밤새도록 수천 장을 프린트해서는 다음날 저녁 두루마기에 감추어 집집마다 배달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일석은 지하신문을 만들기 위해 등사기를 회사에서 훔쳐오고, 4개월 동안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밤에만 지하신문을 만들어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과 국제정세를 국민에게 알려주었다. 1925년 일석은 30세의 나이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2년 후 일석은 조선어문학과에 진학한다.
“일석은 그 무렵 다섯 자가 될까말까하는 작은 키에 사각모자를 눌러쓰고 무거운 책가방을 든 채 동숭동학부를 분주하게 들락날락했다. 그 무렵 문과 B의 학생 총수 50명 중 한국인은 많아야 15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여러 학과로 분산되다보니 어떤 과에는 한국인 학생이 한 사람도 없는 과도 있었다. 일석이 속한 조선어문학과도 1회에 조윤제 한 사람뿐이고 2회에도 이희승 한 사람…. ”(경성제대 후배 조용만의 ‘한국언론인물사화’)
일석은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이듬해 조선어문학회를 창립하고, 1932년에 이화여전 교수가 되었다. 조선어문학회는 조선어학회로 개칭하여 사전편찬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선정한다. 그 선행 작업으로 맞춤법 통일안 제정을 위한 수정작업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정보가 새어 간사장인 일석이 시말서를 쓰기도 한다.
외래어 표기법도 1931년 정인섭, 이극로, 이희승 세 명의 책임위원이 기초작업에 착수하여 1938년에 최종안을 확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우리말 다듬기 업적들은 우리말을 지키겠다는 투철한 민족의식과 강한 의욕이 뒷받침된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의 일석은 살림 형편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때 우리는 서대문 밖 금화산 밑 동네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자주 늦게 들어오셨지요. 약주도 안 드시는 분이 아마도 요즘식으로 하면 ‘과외선생’을 하셨던 듯해요. 저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뵙기 힘들었으니까요. 월급쟁이 평범한 가정이었지요. 근검절약하셔서 출판사에서 원고청탁서를 보내오면 그 뒷면에 원고 구상을 깨알같이 쓰시기도 하고…아마 나름대로 금전출납부도 작성하신 것 같아요.”(아들 교웅씨)
▲ 일석의 장남 교웅씨. photo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1942년 10월 일석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되어, 함남 홍원 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한다. 일제는 온갖 고문과 협박을 통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고, 어학회 간부 회원 사전편찬 지원자까지도 검거하였다. 당시 고문에는 육전(陸戰), 해전(海戰), 공전(空戰)이 있었다고 한다.
“육전이란 각목이나 목총이나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 아무데나 마구 후려치는 것이었다.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났고, 머리가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처음 몇 대를 맞을 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나중에는 별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들은 해전이나 공전으로 들어간다. 기다란 나무 판때기 걸상에 반듯하게 뉘고 묶은 뒤에 커다란 주전자로 콧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 이른바 해전인 것이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은 기관을 따라 폐부에 스며들고, 입으로 들어간 물은 위로 들어가 삽시간에 만삭의 여자처럼 배가 불러지면 누구든 기절하고 만다. 그러면 감방에다 처넣고 주사를 주고 약을 먹여 정신이 들면 공전에 내보낸다. 두 팔을 뒤로 묶어 팔 사이에 작대기를 지르고는 양쪽 끝을 밧줄로 묶어 천장에 달아 맨다. 처음에는 짚단을 발 밑에 괴어 주지만 저들이 지어낸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짚단을 빼 버린다. 그리고는 달아맨 두 줄을 마치 그네줄 꼬듯 한참 꼬았다간 풀어 놓는다.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과 심한 어지러움으로 누구든 10분도 못 되어 혀를 빼물고 기절을 하고야 만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예심은 1944년 9월 30일에 종결되어 장지영과 정영소는 면소가 됐고, 이윤재·한징 등은 옥중 원혼이 됐다. 당시 함흥형무소에서는 270여명의 동사자가 났다. 일석의 옥중기는 이어진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게다가 전황이 날로 급박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난 등 각종 물자난도 심해 갔다. 귀리·옥수수· 감자·수수·피 기장 등 잡곡을 쪄서 뭉친 주먹밥만으로, 혹은 썩은 콩깻묵 한 덩이씩으로 연명해야 하는 우리는 극도의 영양 실조와 운동 부족으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많은 수인들이 죽어 나갔다. 한밤중 나막신 소리가 저벅저벅 울려 오고 옆 감방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 다시 나막신 소리가 멀어져 가는 소리는 예외없이 기한(飢寒)으로 죽은 시체를 실어 내는 것이었는데….”
이때 일석은 콩깻묵 주먹밥 한 덩이를, 밥풀 한 톨씩 백 번을 씹어, 허기와 설사로 희생된 동료와는 달리 생존이 가능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약골이어서 늘 오래 씹는 습관이 그를 살린 셈이다. 당장의 허기만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밥풀 한 알씩을 몰래 모아 작은 성냥갑 크기로 뭉쳐 장차 탈옥하게 될 때의 비상식량으로 만들기도 했다니 ‘빠삐용 작전’도 세웠던 셈이다.
1945년 1월 18일 함흥 지방법원은 어학회 사건으로 기소된 12명에 모두 유죄판결을 내려 이극로 징역 12년, 최현배 4년, 이희승 3년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들은 경성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었다. 이해 4월 중학 3학년인 아들 교웅씨는 함흥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그때 초췌한 모습에 허름한 수의(囚衣)를 입고 계신 부친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8·15광복을 맞아 일석은 8월 17일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한다. 일석은 우선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우리말사전 편찬을 서두르는 한편, 교과서 편찬에도 힘써 ‘한글 첫걸음’ ‘초등 국어 교본’ ‘중등 국어 교본’ 등 7종의 교과서와 공민교과서를 낸다. 백낙준·이상백·이병도 등 제씨와 서울대 설립 작업도 벌여 1946년 10월에 서울대 문리대 교수에 취임한다.
6·25전쟁 때 미처 피란을 못 떠난 일석은 치질이 심해 겨우 납북을 면하였고, 인민군 징집 신체검사에서 연령(55)과 신체 허약으로 불합격되기도 하였다. 생계를 위해 한때 단팥죽 장사도 해야 했다. 부인과 며느리가 단팥죽을 만들었고 일석은 떡집에서 찹쌀떡을 받아 왔다. 10원을 주면 두 개씩을 더 주었고 10원어치를 팔면 2원 남는 장사였다고 한다.
1960년 4월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한창이던 때 일석은 교수단 데모에 참가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많은 피가 뿌려지고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25일 상오 10시에 구내 교수회관에서 모이자’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 50, 60명 정도의 교수들이 모였다. 좌중의 의견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쪽으로 쉽게 모아졌다. 의사표시 방법은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선언문 기초위원을 뽑았는데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의대 정문을 나서 가두 행진을 시작한 것은 하오 늦게였다.”(‘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1961년 일석은 서울대 문리대학장직에서 정년으로 퇴임하나 2년 후, 1963년 8월 1일 동아일보 사장직을 맡는다. 전공과 관계가 없는 외도의 길이어서 계속 사양했으나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와 수락하게 됐다는 것이다. 일석의 대학 제자로 사장 비서 일을 했던 이종석씨(전 동아일보 논설주간)의 회고다.
“그때 고교 선생으로 있다가 갑자기 부르셔서 모시게 됐지요. 대학 스승인 데다 원로시고 깐깐하신 분이라 실수할까봐 늘 조심스러웠지요. 교수하시던 분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문사를 어떻게 운영하실지… 솔직히 걱정도 됐고요. 하지만 선생은 매일 아침 논설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등 예상을 뒤엎고 취임 벽두부터 친정체제를 펴기 시작했지요. 경리부에서 올리는 주요 재무 관계 서류도 일일이 점검하셨는데, 젊은 시절 경성방직 경리과에 근무하신 실력도 발휘하신 셈이지요. 선생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군사정부는 정통성이 없는 정부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를 위해 동아일보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1965년 한·일회담 반대로 정부와 맞섰을 때 선생께서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조선호텔에서 만나서는, 동아방송 출력 증강 건을 부탁해야 하는 자리였는데도… 김 부장이 동아일보 보도에 대해 항의하자 물러서지 않으셔요. 고성이 밖에까지 들려오고, 그렇게 신문을 지켜냈지요.”
일석은 1971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한한(漢韓)대사전을 편찬하며 ‘현정회(顯正會) 이사장, 광복회 고문 등으로 활약하다 1989년 11월 27일 94세로 별세,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문봉리 선영에 안장된다.
“선친께서 생전에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묻히는 것을 사양하셔 조촐히 가족장으로 모셨지요. ‘공것을 바라지 말며, 남에게 억울한 짓을 하지 말라. 아무리 걱정을 하여도 애당초부터 아무 효과도 없을 걱정은 하지 말라. 성실하라. 정직하라. 그리고 겸손하여라.’ 이런 가훈을 적어 남겨 주셨지요.”(아들 교웅씨)
일석은 남매를 두었다. 아들 교웅(84·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서울 명륜동에 산부인과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오채희씨(작고)와 결혼하여 4남매를 낳았다. 맏딸 옥경(60·미 워싱턴대 심리학 박사)씨는 성신여대 심리학과 교수, 맏사위는 민경환(61·워싱턴대 심리학 박사)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둘째 딸 은경(57·이화여대 졸업)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 둘째 사위는 최병인(60) 서울대 의대 교수이다. 맏아들 동호(56·서울대 의대 졸업)씨는 경희대 의대 교수로 정혜영(51·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둘째 아들 경호(54·미 브라운대 경제학 박사)씨는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 둘째 며느리는 박경화(54·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씨다.
일석의 딸 교순(82·배화여고 졸업)씨는 김민수(84)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와 결혼하여 아들 용철(의사·작고)씨와 소담(56·이화여대 화학과 졸업), 소영(52·단국대 미술과 졸업) 두 딸을 낳았다. 증손녀 경은(25)씨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 중이어서 일석의 뒤를 잇고 있는 셈이다.
내가 본 일석
전광현 (73·단국대 명예교수)
대학 다닐 때부터 나는 일석 선생을 거인 같은 분으로 한결같이 존경해 왔고, 그 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으로 오셔서 또 10년을 모시게 되었다. 동아일보 사장으로 가셨을 때도 임기가 1년 더 남았는데도 처음 약속하신 대로 2년 만에 어김없이 물러나시더니, 단국대에서도 더 모시고자 했으나 역시 10년 만에 퇴임하셨다.
이처럼 매사에 분명하고 특히 공사(公私)에 철저하셔서 아마도 사모님이 힘드셨을 것 같다. 주례를 맡거나 친구분들을 만날 때는 절대로 학장차를 타지 않았다. 선생은 월급을 더 드린다고 해도 꼭 규정대로만 받아가셨고, 그러면서도 저축해서 사 모으신 은행주를 만년에 거액의 장학기금으로 내놓아 후진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인내심도 대단하셔서 서울대 병원에서 탈장수술을 받으실 때 마취를 하지 않아 의사들이 당혹해 했던 일도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경우는 있었어도 실제로는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